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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금서 신응모공의 춘유일기 – 도봉·북한산·마포·용산 유람기
□ 한양의 경산유산기(京山遊山記)를 돌아보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금을 막론하고 참으로 풍류가무(風流歌舞)를 좋아했다. 한양성 주변에는 삼각산, 도봉산 같은 명산이 있어,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대부라면 누구나 산에 올라 경승을 유람하고 시문을 남겼다. 숙종 조에 북한산성을 축조 정비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가장 많은 시인묵객화가들이 찾고 기행문을 남긴 산은 금강산이겠지만, 한양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의 유산지(遊山地)는 단연코 근교의 경산(京山)이다.
1849년 3월 금서(錦西) 신응모(申應模)공은 보은군수 재직 중에 휴가를 내어, 낙두제우(洛杜諸友) 즉 현직에서 물러나 있는 집안 가족, 친지들과 오랜 계획을 실천에 옮겨, 도봉산, 북한산, 서북대로변, 마포, 용산을 거치는 열흘 남짓의 여행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대부들의 한양 근교 유산은 당일 또는 1박 2일 또는 3박4일이다. 예외적으로 기간도 길고 거리도 길었다.
신응모공의 경산춘유(京山春遊)는 경유지에 대한 그때그때의 작시(作詩)를 기록했는데, 때로는 여러 명이 다른 각도로 읊어 색다른 감흥을 보이고 있다. 말미에는 ‘춘유일기(春遊日記)’라는 소제목으로 지나온 경로와 역사, 소회를 간단한 일기형식으로 후술하고 있다.
금서공은 크게 알려진 선비는 아니지만, 집안 대대로 문인이 많이 배출되어 문집과 시문을 접할 수 있었고 또한 후대로 계승되었다. 금서공의 저술한 저서도 많고 지으신 시문도 수천 수인데, 화재 등으로 모두 산질(散帙)되고 보존된 기록이 많지 않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광주정씨 집안에 「금서축(錦西車丑」이라는 시문집이 발견되어 요즈음 순차적으로 번역하고 있다. 고조부 되시는 난석(蘭石) 정수현(鄭秀鉉) 공이 스승처럼 대하며 교류하신 분이시고, 금서공도 자식처럼 동호의 문인처럼 대해주셨으니 더욱 애정이 가는 책자이다.
이 책자는 금서공이 1849년 8월 까지 보은군수 재직중의 경산 유산기를 비롯하여, 이후 다시 보은에서의 짧은 여행과, 1849년 9월 함경도 두만강가의 경성판관으로 부임하는 경로의 기행 시문 등 1853년까지의 회포를 담아낸 시문집이다. 이 책을 통하여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과 사상관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고 배움을 향유하는 과정 또한 신비롭다.
금서공의 생각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같이 산에 오르고 승경을 같이 느끼고 그 기분을 재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번역하였다. 다행히 지금 도봉산 아래 지역에 거주하고 매일 산에 오르고, 공이 유람하신 경로는 익숙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건재하였던 건물과 정자와 원형의 자취가 많이 사라졌지만 산천은 그 모습이 아직도 변한바 없어 다행이다. 7월 장마기간 중 천변만화(千變萬化)한 도봉산을 보노라면, 황룡(黃龍)과 흑룡(黑龍)이 자운봉 만장봉을 휘돌아 선회하고, 풍우가 몰아치고 운무가 비산하는 모습을 느끼고 있다. 진달래 산벚꽃의 천자만홍은 상상에 맡기고, 청산녹수의 산봉과 은빛 옥계(玉溪)를 눈앞에 바라보며, 금서공과 같이 개나리 봇짐지고 짚신 메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험준한 천장단애(千仗斷崖)를 지금도 오르고 있다.
이 책의 첫 단락인 ‘경산에 오르다’를 우선 게재하고, 번역이 되는대로 제2장, 제3장으로 이어 소개하고자 한다.
1장. 춘유일기(春遊日記) - 경산에 오르다(遊京山)
歲在己酉春 余與樵隱族兄惠模(주1)吏郎直模(주2)屛西冕求(주3)南大雅鍾文 將遊京山始自道峯止僧伽(주4) 而歸諸經歷處遇景輒和故因以記實云爾
기유년(1849년) 봄, 나는 족형 초은 혜모와 이랑 직모 병서 면구 대아 남종문과 함께 한양 근교의 산에 올랐다. 도봉산에서 시작하여 승가사를 거쳐 지나온 곳과 내력, 조우한 경승, 연고를 기록한다.
1. 상계사(常溪寺)(주5) 금서(錦西) 신응모
전도고암숙모운(轉到孤菴宿暮雲)
의의효성몽중문(依依曉聲夢中聞)
공교시채명산부(恐敎詩債名山負)
고파승심속태분(故把僧心俗態分)
쌍립유정정회수(雙立有情庭檜樹)
제비득의간금군(齊飛得意澗禽群)
황여친월제삼회(怳如親月題三會)
인적창태세전문(印跡蒼苔細篆文)
이리저리 돌고 돌아 외떨어진 암자에 오르니 저녁에 구름은 잠들고
새벽소리 귀 기울이니 꿈속이었네
시를 빚졌다는 두려움이 명산에 짐이 되지 않을까
스님 마음으로 속된 세상 잊으려 하네
뜨락의 노간주나무 쌍둥이처럼 정답게 살고
윤기 나는 새무리 자신만만 가지런히 나네
잠시 달을 가까이 두고 시제를 세 번 모아
오래된 도장 흔적처럼 가는 전서체 비문이 푸른 이끼에 덮여있네
주1) 신혜모(申惠模, 1787~1850), 호 초은(樵殷), 조부 택권(宅權), 부 이록(頤祿), 금서공의 사촌, 족보상 출생년도는 아래이다. 족형(族兄)은 오류인 듯하다.
주2) 신직모(申直模, 1804~1864), 자 성중(聲仲), 호 병산(屛山), 헌종(憲宗) 6년(1840년) 문과(文科), 헌종 13년(1847년) 이조좌랑(吏曹佐郞), 철종 14년(1863년) 우승지(右承旨), 고종 1년(1864년) 대사간(大司諫), 1889년 증동지(贈同知).
주3) 신면구(申冕求, 1809~1874) 호 병서(屛西), 부 신응모(申應模), 철종(哲宗) 1년(1850) 진사, 고종 6년(1869년) 증산현령(甑山縣令), 고종 10년(1873년) 문천군수(文川郡守)
주4) 승가사(僧伽寺) : 북한산 구기동 대성문 근처에 있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하였다.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지칭되었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
주5) 상계사(常溪寺) : 현재 절의 이름이 검색되지 않는다. 망월사 가는 길의 계곡에서 능선 쪽으로 올라간 암자로 이름이 바뀌었는지? 폐사(廢寺)되었는지?
2. 상계사(常溪寺) 병서(屛西) 신면구(申冕求)
곡곡유혜전입운(曲曲幽蹊轉入雲)
연공도사석종문(聯笻到寺夕鍾聞)
빈도노화여향신(頻挑爐火餘香燼)
선작출포담미분(旋嚼出蒲淡味分)
색상천반아발계(色相千般阿鉢界)
윤회백겁달마군(輪回百劫達摩羣)
공재사미혼무사(供齋沙彌渾無事)
야구훤전법전문(夜久喧傳(주6)法篆文)
구비 구비 그윽한 좁은 길에 구름이 흘러들고
지팡이 잡고 절에 오르니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부지런히 불 지피니 나무향기 그윽하고
산나물 씹어 음미하니 풍겨오는 담담한 맛
보이는 수천 바위 형상은 아발계인데
백겁을 윤회하여 달마 되어 모여 있네
어린 사미는 경건히 공양하며 어리석게도 무사를 빌고
밤 깊도록 훤전하며 불법을 새기네
주6) 훤전(喧傳) = 훤자(喧藉) : (어떤 소문(所聞)이) 뭇사람의 입으로 퍼져서 왁자하게 됨. 염불을 함.
3. 만장봉(萬丈峯) 금서(錦西) 신응모
시각부생겁(始覺浮生劫) 덧없는 인생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할 때
부림만장산(俯臨萬丈山) 엎드려 대하는 만장산
휴운천지착(休云天地窄) 쉬기에는 하늘과 땅이 좁은데
용아좌중간(容我坐中間) 어찌 나는 사이에 앉아 있나
4. 망월사(望月寺) 금서(錦西) 신응모
우야금화사(雨夜金華寺)(주7) 비오는 밤 금화사에
고등만한념(孤燈萬閒念) 외로운 등불 켜고 있노라니 온갖 상념에 빠지네
운하명발근(雲霞溟渤近) 구름에 노을 물들고 어두운 안개 다가와
목석화도원(木石畵圖園) 나무와 기암은 동산에 그림 그렸네
시야의무지(始也疑無地) 처음에는 땅 없음을 의심하였는데
종언신유산(終焉信有山) 마지막엔 여기 산이 있음을 믿게 되었네
앙간천불원(仰看天不遠) 머리 들어 보니 하늘이 머지않아
참정가능마(參井可能摩) 우물에 이르러 만져질 듯 다가서 있네
주7) 금화사몽유록(金華寺夢遊錄) : 조선 후기에 쓰여 진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소설. 청나라 강희(康熙) 말에 능주(凌州)의 유사(儒士) 성허(成虛)가 꿈속에서 금화사(金華寺)라는 현판이 붙은 선계(仙界)에 들어가 한(漢)나라 고조(高祖)를 비롯한 중국 역대의 시조들과 제갈량(諸葛亮)이 한 자리에 모여 노는 광경을 보고 돌아온다는 내용인데 주목할 것은 창업한 제왕들을 모두 제왕연에 참석시키면서도 원태조만은 초청하지 않은 점이다. 이에 반발한 원태조가 원한을 품고 공격해왔고 진시황과 한무제가 그 도전을 격퇴한 것을 통하여 이 작품은 한민족(漢民族) 중심의, 중국인의 정통적인 역사관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 망월사(望月寺) 이랑(吏郎) 신직모(申直模)
백두반울기(白頭盤欝氣) 백두에 서린 무성한 기운이
낙하도봉산(落下道峯山) 도봉산으로 떨어지고
중유일고사(中有一孤寺) 그 중 하나 외딴 절 있어
형림해독간(逈臨海瀆間) 구름바다 한가운데 아름답게 빛나네
6. 만장봉(萬丈峰) 이랑(吏郎) 신직모(申直模)
마운만장석(摩雲萬丈石) 구름이 손닿을 듯 만장의 바위
천고독진용(千古獨眞容) 천고에 홀로 참다운 모습
숙초응유초(宿草(주8)𤁒幽草) 산국화는 그윽한 풀 향기 맺고
비천격노용(飛泉激老龍) 황천을 날아 노룡과 부딪치네
명류전대왕(名流前代徃) 명사가 전생에서 재림하듯
원기기시종(元氣幾時鍾) 원기가 어느 때인가 모여 뭉쳤네
열겁산유재(閱劫(주9)山猶在) 겁을 본다는 것은 오로지 산에만 있는지
정옹상부도(靜翁徜復徒) 고요한 기운이 올라 노닐며 다시 무리 되었네
주8) 숙초(宿草) : 한 번 심으면 여러 해 계속(繼續) 돋아나는 풀. 국화(菊花), 나리 따위
주9) 겁(劫) : 「하늘과 땅이 한번 개벽(開闢)한 때부터 다음 개벽(開闢)할 때까지의 동안」이란 뜻으로, 지극(至極)히 길고 오랜 시간(時間)을 이르는 말
7. 만장봉(萬丈峰) 학산(鶴山) 남종문
입운봉만장(入雲峯萬仗) 구름이 만장봉에 들어
언어미형용(言語未形容) 말로서 형용을 그릴 수 없네
출몰반시일(出沒盤旋日) 나타났다 사라지고 하루 종일 휘감고 돌아
비등면화조(飛騰變化鳥(주10)) 날아오름은 변화무쌍한 새가 되네
종산소앙괴(祖宗山所仰) 조종이 되어 우러러보는 산
괴걸기응종(魁傑氣應鍾) 뛰어난 호걸의 기세일세
진욕반원상(眞欲攀援上) 진정 단애를 잡고 당겨서 오르려 하니
개난이용도(盖難二客徒) 참으로 어렵구나! 두 무리 산객이여!
주10) 필사 중 한 자가 빠진듯한데 ‘조(鳥)’로 보충하였다
< 만장봉(718m)과 자운대(739.5m) >
8. 천축사(天竺寺) 금서(錦西) 신응모
지필명구가아유(地袐名區假我遊)
우여물색총심휴(雨餘物色摠堪休)
고축원객반위석(孤筑遠客攀危石)
심원고승수독두(深院高僧睡禿頭)
금협정신운잔홀(錦峽精神雲棧屹)
무릉소식간화류(武陵消息澗花流)
산동전도귀천축(山童前導歸天竺)
잉득풍연포수수(剩得風煙蒲袖收)
땅을 찌르는 이름난 곳으로 내가 유람한다는 것은 거짓 같아
비온 뒤 물색은 모두 쉬는 듯 고요하고
외진 돌길 멀리 온 객은 위험한 바위잡고 오르는데
깊은 절 고승은 쏟아지는 잠에 머리 떨구네
비단옥수 골짜기 신령스런 기운과 사다리인양 높이 솟은 구름
무릉도원 소식이 시내 따라 꽃잎을 흘려보내네
산동 앞세워 천축사로 돌아오는 길에
안개바람 거세게 불어오니 옷소매 잡아당기네
9. 천축사(天竺寺) 이랑(吏郎) 신직모(申直模)
청산경호우여유(靑山更好雨餘遊)
고처등림승처휴(高處登臨勝處休)
야색창망귀한북(野色蒼茫歸漢北)
송초은영낙조두(松梢隱暎落潮頭)
영각사운월좌석(欞却似雲月坐石)
잔번의설폭수류(棧翻疑雪瀑水(주11)流)
아욕단청모부득(我欲丹靑模不得)
신종종파오연수(晨鍾終罷午烟收)
청산은 더욱 아름다운데 비 잦아드니 구경가세
높은 곳 올라 경치 좋은 곳에 몸 맡기니
산 빛 푸르고 아득한데 한강 북쪽 땅에 돌아왔구나
소나무 가지 끝에 숨은 햇살이 썰물의 머리처럼 떨어지네
난간에서 물러난 구름 닮아 달빛은 바위에 앉아있구나
벼랑에 날려 백설과 같이 폭포수 되어 흐르네
단청 했으면 좋으련만 도울 방법은 없고
새벽종 그치니 낮 안개도 걷히네
주11) 한자가 빠진듯한데, 시의 흐름에 맞추어 ‘수(水)’로 보충하였다.
10. 원통암(圓通菴) 금서(錦西) 신응모
우사찰휴우결행(遇寺輒休遇景行)
십혜의사칠분청(十分意思七分淸)
상지원각유진성(倘知圓覺由眞性)
야시연정승유정(也是然情勝有情)(주12)
우연히 절에 들러 잠시 쉬려는데 뜻밖에 승경 즐기고
열 번 생각하면 일곱은 맑고 고요하네
별안간 깨우침 얻으니 참된 까닭이요
이것이 그러한 뜻이면 모두 참뜻이 있네
주12) 당나라 임제선사(臨濟禪師)의 ‘수처작주 입체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것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나는 시이다.
11. 원통암(圓通菴) 학산(鶴山) 남종문
석등영회행복행(石燈濚洄行復行)
입산점각경우청(入山漸覺境尤淸)
원통암탈귀장촉(圓通菴脫歸裝促)
강한오제시세정(强恨吾儕是世情)
석등 빙빙 돌아 오가기를 반복하니
산에 들어 깨달음 얻어 이곳이 더욱 맑아지네
원통암에 해 저물어 짐 꾸려 길을 재촉하니
아쉬워하는 친구들아 이게 세속의 마음일세
12. 도선암(道詵庵) 금서(錦西) 신응모
단책아평지(短策俄平地) 짧은 생각으로 잠깐 평지였는데
홀언만장산(忽焉萬丈山) 홀연 만장산이 치솟아 있고
운무정여차(雲霧正如此) 안개구름 가지런함이
건곤통일원(乾坤統一園) 하늘땅 하나의 정원되었네
암명지금재(庵名至今在) 암자에 이름 지금도 남아
도선경안귀(道詵竟安歸)(주13) 도선이 편안히 돌아와 있네
박락암형고(剝落巖形古) 돌조각 벗겨지고 바위 형상 오래되었는데
표요석장비(飄颻錫杖飛) 바람 불어 지팡이도 날릴듯하오
춘풍생객몌(春風生客袂) 봄바람에 객의 소매 자락 너울거리고
운기적승의(運氣滴僧衣) 우주의 기운이 스님의 옷자락 적시네
휴설렴간훼(休說簾欄毁) 설법 끝나고 염발 걷으니
무방속도희(無妨俗到稀) 세속 얽매임이 하나도 없구나
주13)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 도선사 마애불입상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4호>
13. 백운대(白雲臺) 금서(錦西) 신응모
시가일등부재등(試可一登不再登)
세인조진경하능(世人躁進竟何能)
단천지만팔년주(旦天地萬八年(주14)柱)
적수운천백척빙(積水雲千百尺氷)
기상태산고처견(氣像泰山高處見)
정수혼돈벽시응(精搜混沌闢時凝)
유수도차담객이(有誰到此談客易)
왕겁창망문노승(徃劫滄茫問老僧)
한 번은 올라도 두 번 다시 못 오르오
세상 사람들이 급히 나간들 어찌 오르겠는가
천지에 만 팔년을 빚어 기둥이 솟았는데
물 쌓이고 천 겹 구름 모여 백 척 얼음 되었나
기상은 태산이요 상봉에서 바라보니
정신 아득하고 하늘을 열은 시간도 굳어버렸네
여기 오르기 쉽다고 말하는 이 누구인가
내려가기 겁나고 창망하여 노승에게 방법을 묻고있네
주14) 만팔년(萬八年) : 하늘의 이치, 즉 우주의 운행경로(天道)로서 수행(修行)할 때 나오는 말이다. 만팔년은 사실 일만팔백년을 지칭한다. 우주는 순환주기로서 12회(會)를 1차(次)로 하는데 이를 ’일원회(一元會)‘ 라고 한다. 일원(一元)은 다시 시작되는데 삼라만상을 새롭게 시작한다. 일원은 12개 회(會)로 이루어지는데 일회(一會)가 일만팔백년이다. 몸을 뒤집기가 어렵듯 깨달음을 얻는 것이 어렵다. 즉 만팔년이 다시 시작되어야 다른 삼라만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순환이 1차로 크게 열리고 삼조중생에 퍼지게 되는데, 하늘의 무리(天曹)가 신선이요!, 인조(人曹)의 기운이 선남선녀요! 땅의 기운(地曹)이 그윽한 어둠의 귀신과 혼의 세계이다.
* 백팔(百八) : ①인간(人間)의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에 걸친 108가지 번뇌의 수 ②1년의 12개월, 24기(氣), 72후(候)를 합하여 이르는 말
天道修行路:萬八年載難身翻 悟見寫
萬八年,在我們天道道埸的說法,是指一萬零八百年,在我們天道宇宙觀耒說,宇宙每經過十二會,就要循環一次,這一循環就稱為一元會,所謂一元復始,萬像更新,即是此意。一元有十二個會,一個會有一萬零八百年,我們現在來談【萬八年載難身翻】,也就是指在這個元會,只有一次大開普渡,而這個普渡普及於三曹眾生,三曹眾生所指的就是天曹氣天大仙,人曹指人間善男信女,地曹指的是地府幽冥鬼魂。 < 2015/1/7 悟見老兄寫於台北北投悟見書齋, 悟見天道文化網 > |
14. 백운대(白雲臺) 병서(屛西) 신면구(申冕求)
지척경루가축등(咫尺瓊樓可蹴登)
참천송악적하능(參天松嶽敵何能)
완안입극상오골(頑顔立極霜鰲骨)
숙기충소옥정수(淑氣冲霄玉井水)
별이종모여족섭(瞥爾縱眸如足躡)
탑연무어약수응(㗳然無語若神凝)
화신천억여래계(化身千億如來界)
대차응다돈오승(對此應多頓悟僧)
지척 앞에 옥석 누각에 오를 수 있다니
하늘과 송악에 섞여 같이 함이 어찌 가능한가
욕심내 산꼭대기 서니 거북 등갑에 서리 내리고
고요한 기운은 하늘을 감싸 옥 같은 샘물되었네
잠깐 눈길 따라 여기저기 둘러보니 마치 발 디뎌 걷는 듯
탑처럼 말없이 신의 곁에 머물러있네
천겁이 몸체 되어 여래의 세상이요!
마주하고 감응하니 깨달음 얻은 스님이 되네
백운대(白雲臺)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지수구섬경시애(地水俱纖境是涯) 땅과 물이 모두 가늘어져 지경은 이곳에 끝을 맺고 원창소복계여사(圓蒼所覆界如絲) 푸른 하늘 둥글게 덮은 곳 마치 경계가 실같이 가느네 부생부시미여속(浮生不翅微如粟) 뜬세상 날개 없고 작은 것이 좁쌀 같은데 좌념산고석란시(坐念山枯石爛時) 앉아 생각하니 산도 마르고 바위도 오랜 세월 깍여있구나 |
15. 진관(津寬) 금서(錦西) 신응모
낙일진관사(落日津寬寺) 진관사에 황혼 드니
포의금수인(布衣錦水人) 삼베옷은 비단옷 입은 사람 되고
괴암운의비(恠巖雲意飛) 괴암엔 구름 날고
폭포옥정신(瀑布(주14-1)玉精神) 폭포는 옥수 되어 빛나네
주14-1) 한 글자가 빠져 있는데, 폭포의 ‘포(布)’를 넣었다.
16. 김판서로정자(金判書鏴(주15)亭子)
김공정자간지빈(金公亭子澗之濱)
성훼거연물리요(成毁居然物理㘬)
심쇄류하장별독(深鎻流霞藏別界(주16))
독유제조관잔춘(獨留啼鳥管殘春)
창태노석미침경(蒼苔老石迷侵徑)
세우청산담세진(細雨靑山淡洗塵)
사아불능용이거(使我不能容易去)
한수태반속시인(閒愁太半屬詩人)
김공의 정자는 시냇가에 자리 잡았는데
평상시 훼손이 심하여 움푹 팽겨있네
깊은 곳 자리 잡고 저녁노을 흘러드니 별천지를 갖추었소
홀로 남은 새 지저귀며 늦봄을 연주하네
푸른 이끼 낀 오래된 돌이 어지럽게 길을 막아서는데
청산에 내리는 보슬비는 세상 풍진 씻는구나
나를 떠나가지 못하게 하여
잠깐 걱정의 절반은 시인의 몫이구나
주15) 김로(金鏴) : 1783 ~ 1838. 본관 연안. 자 경유(景由). 호 설암(雪喦). 시호 문헌(文獻). 영의정 익(熤)의 손자. 음보로 배천(白川)군수가 되고, 1823년(순조 2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24년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이듬해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1826년 병조판서 ·의금부판사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35년(헌종 1)에는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36년 대사헌에 이르렀다. 익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평소에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벼슬이 판서에까지 이르렀는데도 검소와 근면으로써 자제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16) 한 글자가 빠져 있는데, 계(界)’을 넣어 ‘별천지’의 뜻을 살렸다.
在三泉洞(주17)而今已古墟而以感吟白坡族從獻求(주18)追次
삼천동에 있는데 이제 옛터가 되었다. 이에 감흥이 일어 한 수 읊고 백파 헌구가 다음 차례로 읊었다.
주17) 삼천사를 경유한 삼천(三川) 계곡과 진관사 계곡이 만나는 초입의 마을로 생각된다.
주18) 출발지 일행명단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북한산 등산 일정부터 백파(금서공 3남)가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17. 김판서로정자(金判書鏴亭子) 백파(白坡) 신헌구(申獻求)
일방공정적이진(一訪空亭跡已陳)
오년간사속전진(五年間事屬前塵)
계두쇄초황전지(溪頭碎礎荒田地)
동이잔조과객춘(洞裏殘桃過客春)
철인완태봉호겁(轍印頑苔封浩劫)
경매류조입미진(經媒流鳥入迷津)
성시복축원비소(盛時卜築元非訴)
허로심암피세인(虛老深巖避世人)
텅 빈 정자를 한번 찾았는데 공의 자취 배어있네
오년간의 일인데 옛 풍진이 되었구나
시내머리 초석은 깨어져 거친 밭이 되고
마을 남아있는 복숭아나무만 나그네에 봄을 알리네
정자의 흔적은 이끼 무성하여 크게 위협하고
길 지나는 새무리만 이 곳으로 날아오네
이 집 짓고 성할 때는 사람들이 홀대하지 않았는데
쇄락한 오랜 바위를 세상 사람이 피하고 있네
18. 해수관음(海水觀音)(주19) 금서(錦西) 신응모
보리배성수(菩提(주20)培性樹) 부처님 보리수 키우시고
명경조심대(明鏡照心臺) 맑은 거울은 심대 비추듯
십분승팔구(十分僧八九) 스님 열중 여덟아홉은
당수세부애(塘水洗浮埃) 연못물로 세속의 띠끌을 씻네
승가사석면(僧伽寺石面) 승가사 석불이
분장방불성(粉粧彷佛成) 마치 단장을 마친 듯
윤회백겁전(輪回百劫轉) 백겁의 윤회가 바뀌고
환가생의반(還袈生衣半) 돌아와 다시 가사를 걸쳐 입었네
엄창태골화(掩蒼苔骨畵) 푸른 이끼가 바위그림 덮어버리니
채전응벽해(彩全凝碧海) 색조가 모두 푸른 바다
정혼혼심통(精混混心通) 정신 아득하고 아득한 마음이 통해
천계활의의(千界(주21)濶依依) 큰 세상 열리네
미소육근청(眉掃六根(주22)淸) 교태를 떨쳐 육근의 탐욕 정화하니
임기응열열(臨岐應閱閱(주23)) 인생기로에 순응하리라
인간사독유(人間事獨幽) 인간사 홀로 그윽한데
번화숙중경(繁華孰重輕) 빛나고 번창함은 무엇이 무겁고 가벼운 것이오
주19)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홍제천변 옥천암 내의 보도각에 모신 보살상. 해수관음(海水觀音)보살은 강원도 동해안의 낙산사 홍련암(紅蓮庵), 경상도 남해 금산 보리암(菩提庵), 서해 강화군 삼산면 보문사(普門寺)의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 이곳은 바다는 아니지만 개천가인 까닭으로 멀리 바다에 가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인연을 맺으라고 새겨놓은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한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호인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은 양식적 특징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조성된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명칭은 '홍은동 보도각 마애보살 좌상(弘恩洞普渡閣磨崖菩薩坐像)'이다. 흰색의 호분이 전체적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어 백불(白佛) 또는 해수관음이라고도 한다.
주20) 보리(菩提) : ①불교(佛敎)에서 최상(最上)의 이상(理想)인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智慧ㆍ知慧) ②불타(佛陀) 정각의 지혜(智慧ㆍ知慧)를 얻기 위(爲)해 수행(修行)해야 할 길 ③불과(佛果)에 도달(到達)하는 길
주21) 대천계(大千界) :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의 셋째, 곧 중천세계(中千世界)의 천 갑절이 되는 세계(世界)
주22)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낳는 여섯 가지 뿌리. 곧,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총칭(總稱)
* 육근청정(六根淸淨) : 진리를 깨달아 육근(六根)의 탐욕(貪慾)을 깨끗이 없애는 일
주23) 한 글자가 빠져 있는데, ‘열(閱)’을 넣어 운을 맞추었다.
19. 매혜정(邁惠亭)
잔춘원객석양정(殘春遠客夕陽亭)
소회영회설장병(小會寧湏設帳屛)
산열명류수절승(山閱名流輸絶勝)
화지가절석허령(花知佳節惜虛零)
포의조모인동락(布衣鳥帽憐同樂)
맹반향료괴독성(孟飯香醪愧獨醒)
보보귀정빈고면(步步歸程頻顧眄)
동천물색송인청(洞天物色送人靑)
늦봄에 나그네 멀리서 왔는데 정자에 석양이 드네
작은 모임 편안히 주변을 둘러보니 장막처럼 병풍을 세웠구나
산을 바라보면 명사가 절경을 담아 왔는지
꽃은 가절을 아는데 헛되이 비만 내리네
삼베옷 입고 조모 쓰고 이웃이 같이 즐기는데
소박한 식사 향기로운 막걸리에 부끄럽게 나 홀로 술 깨이네
걷고 걸어 돌아오는 여행길을 자꾸 두리번거리고
아름다운 산천의 물색에도 배웅 온 사람은 말이 없네
우래정상좌(偶來亭上坐) 우래정 위쪽에 자리 잡아
물물담생자(物物淡生姿) 기품은 담백하게 생겼는데
이주성고회(以酒成高會) 술로서 모임이 빛나고
존시대후기(存詩待後期) 지은 시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네
세정유수거(世情流水去) 세상 물정은 유수와 같이 가는데
객의낙화지(客意洛花知) 나그네 마음이야 낙화가 알겠지
불각사양도(不覺斜陽倒) 석양 기우는지도 모르고
귀심출동지(歸心出洞遲) 돌아갈 마음 있어도 발걸음 자꾸만 늦어진다네
즉이판서경재소성취야 차정인념칠오량율(卽李判書景在(주24)所成就也 此亭因拈七五兩律(주25))
판서 이경재는 뜻한 바를 이루었는데 이 정자에서 이로 연유로 ‘칠오양률(七五兩律)’을 남긴다.
주24) 이경재(李景在) 1800년(정조 24년) ~ 1873년(고종 10년) 조선의 문신.
자는 계행(季行), 호는 송서(松西). 소은(紹隱),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한산(韓山). 1822년(순조 22) 문과에 급제, 규장각 직각(直閣)ㆍ예문관 제학(提學)ㆍ이조 참의 등을 역임, 헌종 때 대사간ㆍ이조 참판ㆍ부제학 등을 지내고 대사헌이 되었다.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863년(철종 14) 우의정이 되었다. 1864년(고종 1) 고부청시 겸 승습사(告訃請諡兼承襲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866년 영의정에 오르고 뒤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 1849년(헌종 15년) 3.11 형조판서(刑曹判書)
20. 모악치(慕嶽峙)(주26) 금서(錦西) 신응모
영은문외거(迎恩門(주27)外去) 영은문 밖으로 나가면
대도출양주(大道出楊州) 양주 가는 큰 길
위석당애호(危石當崖護) 위험하게 서있는 바위 언덕 지키고
담운옹수류(淡雲擁峀留) 엷은 구름은 산굴을 끼고 있네
부생개송족(浮生皆送族) 뜬세상 모두 떠날 운명인데
차세숙풍류(此世孰風流) 이승에 무슨 풍류가 있으리오
국소남아안(局小男兒眼) 하찮은 남아의 생각은
년래미장류(年來未壯流) 세월이 가도 젊은 기상이 흘러가지 않았으면
주26) 모악치(慕嶽峙) : 현재의 인왕산과 안산 사이의 고개가 무악재이다. 무악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이 어린 아이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고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안산을 어머니의 산으로 삼아 무악(毋岳)이라 하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하였다. 한편 영조는 부왕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의 역사를 시작하고, 이 고개에 올라서서 명릉을 바라보며 고개의 이름을 추모현(追慕峴)이라고 하였다. 명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주27) 영은문(迎恩門) :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중국사신이 조칙을 가지고 오면 임금이 친히 모화관까지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 1407년(태종 7)에 송도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모화루를 세웠다가 1430년(세종 12)에 모화관으로 개칭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다.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사대사상의 상징물이라 하여 독립관(獨立館)이라 고쳐 부르고, 영은문을 헐고 독립협회 주도로 성금을 모금하여 독립문을 세웠다.
21. 모화관(慕華館) 금서(錦西) 신응모
주래모화관(酒來慕華館) 모화관에 술 나오니
승취돈망노(乘酔頓忘勞) 취해 넘어지고 기억을 잊고 뭔 고생이람
야입양주활(野入楊州濶) 들 입구는 양주 쪽으로 확 트이고
천림한수고(天臨漢水高) 한강에 맞닿은 하늘은 높다
누대하장려(樓坮何壯麗) 누대는 이리도 아름답고 씩씩한데
헌면진영호(軒冕盡英豪) 난간머리는 영웅호걸이 다하였네
시락비홍객(䂠落飛鴻客) 돌 떨어지듯 나는 기러기 나그네는
하시순우모(何時順羽毛) 언제나 편한 깃털을 달까
22. 각정원현(閣亭圓峴)(주28) 금서(錦西) 신응모
환이금성대이하(環以金城帶以河)
찬연문물소중화(燦然文物小中華)
봉만재백천년석(峯巒戴白千年石)
도행함홍이월화(桃杏含紅二月花)
만호루대균처처(萬戶樓臺(주29)均處處)
일조가곡이가가(一朝歌哭異家家)
사천안목궁환우(史遷(주30)眼目窮寰宇)
감석서림일영사(堪惜西林日影斜)
단단한 성이 빙 두르고 강으로 띠를 이루었네
문물이 찬란하니 소중화로다
산봉우리는 바위를 천년동안 하얗게 머리에 이었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모두 붉은 2월의 꽃
만호누대 곳곳이 무너져 평평하게 쇠락(衰落)했듯
하루 아침에도 노랫소리 곡소리 집집마다 다르다네
사마천의 안목은 천하를 아우렀는데
아쉽게도 서쪽수풀에 그림자 지고 해는 기울어가네
주28) 각정원현(閣亭圓峴)은 모화관에서 다음 기착지인 마포로 가는 중간지점의 고개로 각정원이 있던 고개이다. 대동여지도를 보니 돈의문을 지나 유동(鍮洞 : 충정로2가 근처의 조선시대 유기-놋쇠그릇을 파는 마을)과 저동(苧洞 : 모시골)사이를 넘는 고개인데 아현(阿峴)의 북쪽으로 현재 경기대학교 근처의 고개로 추정된다.
주29) 만호루대(萬戶樓臺) : 각정원 고개에 만호루가 있었던 모양인데, 당시에도 무너져 있었다.
주30) 「史記」 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 재여사천(才如史遷) 재주가 뛰어남이 사마천(司馬遷)과 같음
23. 한식(寒食) 금서(錦西) 신응모
처장묘사과청존(處將墓祀棵淸樽)
일맥동강사세존(一脉同崗四世存)
이백년전성구롱(二百年前成舊壠)
반천리외기전손(半千里外寄展孫(주31))
초두로읍회증감(草頭露浥懷增感)
비면태침자몰흔(碑面苔侵字沒痕)
효제분명유훈재(孝悌分明遺訓在)
후생감괴첨고문(後生堪愧忝高門)
곳곳에 장차 묘사가 있어 맑은 술 잔을 올릴 터인데
산 한줄기 같은 언덕에 사대를 같이 모셨네
이백년 전 옛 선영을 조성하였는데
반 천리 밖에서 전손에게 부탁하네
풀잎 가에 눈물이 맺혀 회포만 켜가고
비면에 이끼 끼어 글자가 묻히었네
분명 효제하라 유훈이 있었을 터인데
후손들은 부끄럽게도 고귀한 가문을 욕보이네
계춘한식절(季春寒食節) 늦은 봄 한식절!
청주최황원(淸酒漼荒原) 거친 묘소에 맑은 술 올리고 눈물 흘리네
수호천년택(守護千年宅) 천년을 무덤 지키는
석인승자손(石人勝子孫) 석인들이 자손보다 낫구나
寒食日徃省楊州西山(주32)參公墓所而至承旨公四世同崗也 因雨露之感(주33)拈七律一五一以寫懷耳
한식일에 양주 서산에 가 세 분 묘소를 찾아뵈었는데, 승지공에 이르기 까지 사대가 같은 언덕에 모셔져 있다. 우로지감이 들어 칠언율시 한 수와 오언율시 한 수를 지어 그리움을 달랜다.
주31) 무슨 자인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전(展)자에는 ‘살피다’ ‘살펴보다’라는 뜻이 있다. * 전묘(展墓) : 조상(祖上)의 무덤을 둘러 봄
주32) 금서 신응모공이 21세이신데, 13세 신념(申淰)공이 승지공이시니, 10세 공섭(公涉) 안협현감(安峽縣監), 11세 숙(淑) 사과(司果), 12세 언식(彦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공 등 상대(上代)의 묘소를 지칭한다. 200년 전이니 1500년대 졸하신 분들이다.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의 선영이다. 「고령신씨대종회 인터넷족보」 참조
주33) 우로지은(雨露之恩) : 비와 이슬이 만물(萬物)을 기르는 것처럼 은혜(恩惠)가 골고루 미침을 이르는 말
24. 화성관(華城舘) 금서(錦西) 신응모
세모주구감구시(歲暮珠邱(주34)感舊時)
선왕효은상지지(先王孝恩尙遲遲)
장제춘색청요류(長提春色靑堯柳)
고석태흔몰한비(古石苔痕沒漢碑)
거마일주삼도서(車馬日趁三道庶)(주35)
산하천작만년기(山河天作萬年基)
행생무사문명세(幸生無事文明世)
괴핍유신보곤사(愧乏儒臣補衮絲)
노년에 능원은 옛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선왕의 효도가 길게 이어져 왔네
춘색이 길게 이어져 버드나무는 높고 푸른데
오랜 돌에 푸른 이끼 비문을 덮여버렸네
하루 종일 수레와 말이 줄이어 삼도가 가깝고
산하가 저절로 어울려 만년의 터전 닦았네
다행이 삶이 무사하고 문명의 세상 되니
부끄럽고 부족한 선비도 임금을 돕는구나
주34) 주구(珠邱) :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원소(園所)를 가리킴. 능원(陵園)을 말함. 화성(華城)은 수원에 있고, 정조의 능행이 자주 있던 곳인데 마음속으로 선왕을 생각하면서 수원 화성을 연상하지 않았을까?
주35) 마포나루는 옛 적에 한강의 서호(잠두머리, 절두산 근교의 잠잠한 강호수), 용호, 동호(두모포 즉 동호대교 인근의 잠잠한 강호수)의 3개 나루터를 합쳐 마포라 하였는데 ‘석 삼(參)’ 대신 ‘삼 마(麻, 삼베 재료)’를 썼다고 하며,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오는 식량과 해산물의 운송이 붐볐던 곳이다.
25. 마포(麻浦) 금서(錦西) 신응모
사마승주작원유(捨馬乘舟作遠遊)(주36)
낙화시절읍청루(洛花時節挹淸樓)
만조유창오강수(晩潮猶漲五江水(주37))
춘색장함일벽주(春色長㴠一碧洲)
세사한망귀우범(世事閒忙歸雨帆)
인생영췌몽사구(人生榮悴梦沙鷗)
노희선창양관곡(壚姬鮮唱陽關曲(주38))
일번성송객수수(日翻成送客愁愁)
말에서 내려 배를 타고 멀리 유람하려네
읍청루엔 봄꽃이 떨어지고
황혼이 몰려오니 오강수는 오히려 넘실대네
춘색이 길게 물에 잠겨 하나의 푸른 섬
세상사 한가하고 바쁜 것은 비오는 날 돛단배처럼 돌아오고
인생의 흥하고 기우는 것은 꿈속의 모래톱 갈매기 같네
주막집 가희가 노래 부르는 양관곡이 참으로 고와
날 지고 이별하려니 쓸쓸한 객수만 밀려오네
주36) 산행 후 하산지점에 미리 말을 갈아탈 수 있도록 준비하고 마포에 이르러 다시 뱃놀이를 즐긴 것으로 추정된다.
주37) 오강(五江) : 서울 근처(近處)에 중요(重要)한 나루가 있던 다섯 군데의 강대. 한강(漢江), 용산, 마포, 현호, 서강
주38) 양관곡(陽關曲) :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 陽關(양관)은 고대 관문(關門)의 명칭으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돈황현(敦煌縣) 서북쪽이다. 양관곡은 위성곡(渭城曲) 혹은 〈陽關三疊(양관삼첩)〉이라고도 불리며, 소동파는 이 시의 창법을 여러 가지로 정리하였다. 훗날 벗을 송별할 때 불러주는 송별가(送別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사(詞)는 동파전집(東坡全集)에 실려 있으며 송(宋) 신종(神宗) 희녕(熙寧) 10년(1077) 소식(蘇軾)이 42세 되는 서주지주(徐州知州)로 있을 때 중추절 밤에 지은 것이다. 그해 2월 동생 소철(蘇轍)을 만나 4월 서주지주(徐州知州)로 부임하였으며 오랜만에 동생과 함께 중추절을 보내는 기쁨을 노래하면서 동생과 또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이런 즐거움이 계속 되지 않음을 노래한 것이다. 희녕 10년(1077) 소철은 서주지주(徐州知州)로 부임하는 소동파를 따라 서주까지 와서 100여 일 동안 함께 지내다가 중추절이 지난 직후에 자신의 임지로 돌아갔다.
< 양관곡(陽關曲 )> 북송(北宋) 소식(蘇軾)
모운수진일청한(暮雲收盡溢清寒) 저물녘의 구름 모두 걷혀 맑고 찬 기운 넘치고
은한무성전옥반(銀漢無聲轉玉盤) 은하수에 소리 없이 옥쟁반 같은 달이 굴러가네
차생차애부장호(此生此夜不長好) 우리 일생에 이런 밤의 즐거움 계속되지 않으리니
명월명년하처간(明月明年何處看) 밝은 달 내년에는 어디에서 보게 될까?
26. 용산(龍山)(주39) 금서(錦西) 신응모
고주재시주(孤舟載詩酒) 고주에 시와 술을 싣고
걸월범용산(桀月泛龍山) 밝은 달은 용산으로 떠가네
소객임풍수(簫客臨風醉) 퉁소 부는 나그네 바람에 취하고
가희의범한(歌姬倚帆閒) 가희는 뱃머리에 기대어 있네
강성부촉협(江聲浮蜀峽) 강소리가 촉나라 협곡에 떠있는 듯
지세공진관(地勢控秦關) 지세가 진나라 요새를 부수는 듯한데
함벽정전야(㴠碧亭(주40) 前夜) 함벽정 앞의 깜깜한 밤에
아수부수환(阿誰扶醉還(주41)) 강기슭 누가 돌아와 취객을 부축할까
주39) 인왕산(仁王山)의 지맥이 남쪽으로 이어져 마포구와 용산구에 걸쳐 산지를 형성하였는데 그 봉우리의 이름이 용산(龍山)이며 높이가 약 90m이다. 인왕산에서 시작된 구불구불한 능선이 한강 가까이에서 봉우리를 형성하자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용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과 용산구 효창동에 남북으로 걸쳐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주40) 함벽정(㴠碧亭) : 서울시 용산구 청암동의 성심여학교 성당자리에 있었던 정자
주41) 마지막 일정으로 마포나루에서 배를 내어 한강 강상에서 마음껏 술 마시며 회포를 푸는 취흥이 넘쳐난다. 물살 헤치는 뱃머리에 스치는 강물 소리가 마치 촉과 진나라 대군의 함성처럼 크게 들리는 과장감(誇張感)으로 미루어, 크게 취한 모습이다.
□ 춘유일기(春遊日記)(주42)
◾ 도봉산(道峯山)
余與洛杜諸友(주43)要作春遊是月也 卽季春先作山行出惠化門(주44)午投華溪寺(주45)
因宿 翌日四月雨徃望月寺(주46) 以雨未晴連宿二宵 招話永庵聖峯二師 而壁上有三像 一則天峯也 二則映月也 三則無題名 而水觀居士李忠翊(주47)賛其遛也 寺右有小路逶迤 以下則石壁下有一苔碑乃天峯師遺蹟也 仰而觀則山頭有累累然石古恠若羅漢環坐五百樣子也 三日山雨 始晴曉旭方紅山川之勝不可殫記 卽過萬丈峯盖趙靜庵(주48)曾遊處也 轉向天竺景甚絶勝與望月相上下 而山泉決決貫除而流頻彷佛於隱瀑矣 小憩圓通梵宇(주49)荒涼只有數箇僧催進午飯
나와 한양 사는 친구들과 봄놀이를 약속한 것이 이 달이다. 즉 삼월에 산행을 나섰는데, 혜화문에서 출발하여 오후에 화계사에서 유숙하였다.
다음 날은 사월이고 비 오는데 망월사에 갔다. 비가 개이지 않아 연 이틀 밤을 유숙했다. 영암(永庵)과 성봉(聖峯)선사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암벽 위쪽에 세 상(三像)이 있다고 한다. 첫째가 천봉선사이고 둘째가 영월선사이며, 섯째는 제명(題名)이 없는데, 수관거사(水觀居士) 이충익(李忠翊)의 글이 거기에 남아있다. 절의 우측에는 구불구불한 경사진 소로가 있고 그 아래에 한 기의 이끼 낀 비석이 있는데 천봉(天峯)선사의 유적이다. 고개를 들어 보면 산머리에 오래된 괴기한 바위 무리가 겹겹이 있는데 마치 오백 나한이 가부좌를 틀고 빙 둘러 앉아있는 모양이다.
삼일동안 산에 비가 오고 개이니 새벽엔 더욱 (만발한 꽃으로) 붉어져 산천의 경승은 글로 다 형용할 수 없다. 만장봉을 지나가는데 일찍이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유람한 곳이다. 천축사로 방향을 틀었는데 정말 절승이다. 망월사와 서로 상하로 위치해 있고 산의 샘물이 콸콸 넘쳐 흘러내려서 흡사 숨은 폭포가 되었다. 잠깐 숨을 돌리고 원통암에 들렸는데 절간이 단지 몇 채에 불과하여 황량하고 스님들이 점심을 재촉한다.
주42) 서두에서 언급한 ‘경산에 오르다’ 라는 여행의 경로를 다시 기술하였다.
주43) 낙두제우(洛杜諸友) : ‘한양에 사는 여러 친구’ 라는 뜻인데, 두문(杜門)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다.’ 라는 뜻이 있다. 즉, 한양에 사는 관직에서 쉬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선비를 말한다.
주44) 혜화문(惠化門) : 서울 동소문(東小門)의 정식(定式) 이름. 원이름은 홍화문인데 조선(朝鮮) 시대(時代) 9대 성종(成宗) 14년(1483)에 세운 창경궁(昌慶宮)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 명명하였으므로 11대 중종(中宗) 6(1511)년에 혜화문으로 고쳤다. 23대 순조(純祖) 16년(1816)에 중수(重修)하였다가 1930년 서울 시가(市街) 확장(擴張) 때, 헐어 없앴다. 경기도 양주, 포천, 강원도 금강산, 함경도로 가는 한양의 시발점이다.
주45) 화계사(華溪寺)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의 북한산 동쪽자락에 위치한다. 화계사는 조선왕가의 원찰(願刹)이었으며 16세기에 보덕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사찰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1522년(중종 17) 신월(信月)선사가 화계사라 이름 짓고 창건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듬해 도월(道月)선사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건하였고, 1866년(고종 3)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선사가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중수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주46) 망월사(望月寺)와 수관거사 유적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에 위치한 절이다. 신라 때인 639년(선덕여왕 8)에 해호화상(海浩和尙)이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했다. 절의이름은 대웅전 동쪽에 토끼 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문화재로는 혜거국사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122)와 천봉 태흘(泰屹:1710∼1793)의 부도(경기도 문화재자료 66), 1793년에 세운 태흘의 천봉탑(天峰塔)과 1796년 수관거사(水觀居士)가 명(銘)한 망월사천봉선사탑비(경기문화재자료 67)가 있다.
주47) 이충익(李忠翊) 1744년(영조 20)∼1816년(순조 16) :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우신(虞臣), 호는 초원(椒園)‧수관거사(水觀居士)‧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 정후일(鄭厚一), 신대우(申大羽), 이광려(李匡呂), 이긍익(李令翊) 등 강화학파(江華學派)의 주요 인물과 친인척이면서 그들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또 정제두(鄭齊斗)의 양명학(陽明學)을 계승, 연구하였고, 유학 이외에 노장(老莊)‧선불(禪佛)에 해박하였으며,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다. 1755년(영조 31) 생부와 양부가 모두 을해옥사(乙亥獄事)에 연루되어 생부인 이광현(李匡顯)은 영남(嶺南) 기장(機張)으로, 양부 이광명(李匡明)은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남북으로 오가며 유배된 두 부친을 봉양했다. 또 경세(經世)의 뜻을 실현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불교에 심취하여 강화(江華) 마니산(摩尼山) 망경대(望京臺)에 승려 혜운(慧雲)과 함께 암자를 짓고 폭포암주인(瀑布庵主人)으로 자호(自號)하며 지냈다. 1816년(순조 16) 3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강화(江華) 선도포(仙都浦) 길상산(吉祥山)에 장사지냈다.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
주48) 도봉서원 : 1573년(선조 6)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동시에 ‘道峯(도봉)’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96년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하였다. 송시열은 1723년(경종 3) 중앙의 정치세력 변화로 출향(黜享)되었다가 1775년(영조 51)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배향되었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그 뒤 1972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원을 복원하였다. 2012년 도봉서원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중 금강령과 금강저를 비롯한 고려시대 불교용구 79점이 출토됐고, 이를 계기로 그동안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영국사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도봉서원이 영국사 터에 세워졌던 것이다.
주49) 범우(梵宇) : 절. 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敎法)을 펴는 집
* 범우고(梵宇攷) : 정조 3년(1779)에 간행된 편자는 미상의 책, 우리나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절들의 존폐(存廢)ㆍ소재ㆍ연혁(沿革) 등을 기록한 책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ㆍ여지승람(輿地勝覽) 기타 고금(古今)의 문헌(文獻)을 참고(參考)하여 발간되었다.
◾ 삼각산(三角山 : 북한산)
仿向道詵庵(주50)此卽道詵住錫處而石面鏤其形象怳然如見其道師也 日將夕矣 山路崎嶇綠勝以上乃北漢北暗門(주51)也 倚杖須曳勇赴白雲臺(주52)臺之高不可量而卽三角山第一峯也 暮投重興寺(주53) 此寺北漢關防而左有摠攝營卽僧將所居也 黃昏上太古寺 寺上有一碑閣(주54)麗朝李公牧隱所撰也 爲雨所涕 翌午登山映樓(주55)雲林泉石北漢名樓也 因過扞禦門出大西門(주56) 寺之普光龍岩鎭國祥雲圓覺扶旺國寧輔國西岩庵之奉聖元曉臺之東將未能過觀亦足爲遊山者之一欠(주57)
도선암으로 향했는데 이곳은 도선대사가 머물었던 곳으로 바위에 부처를 새겼는데, 형상을 멍하니 바라보니 바로 그 도사와 같다. 날은 곧 저녁이 되었다. 산길은 가파르고 험하고 푸른 숲이 장관인데 그 위쪽에 북한산 북암문(北暗門)이 있다. 지팡이를 끌고 모름지기 용기를 내 힘들게 백운대에 올랐는데, 대는 그 높이를 헤아릴 수 없은즉 삼각산 제일봉이다.
중흥사(重興寺)에 석양이 든다. 이 절은 한강 이북을 지키는 국방요새로서 절의 좌측에는 총섭영(摠攝營)이 있는데 승장이 거주하는 곳이다. 황혼이 들었다. 위에는 태고사(太古寺)가 있고 절위에 한 기의 비각이 있는데 고려조 이공 목은(牧隱 이색 李穡)이 썼다.
비가 내리므로 지체하였는데, 다음 날 오후에 산영루(山映樓)에 올랐다. 운림천석(雲林泉石)이 어우러진 북한산의 이름난 누각이다. 한어문(扞禦門)을 들러 대서문(大西門)을 나섰다. 보광사, 용암사, 진국사, 상운사, 원각사, 부왕사, 국녕사, 보국사, 서암사와 봉선암, 원효암, 동장대를 가보지 못하고 족한 것은 산을 유람하는 사람(유산자 遊山者)으로서 하나의 흠이다.
주50) 도선사(道詵寺) :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신라 말기의 승려 도선(道詵)이 862년(경문왕 2)에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이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 승병들이 도선사에서 방번(防番)을 서기도 하였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도선사 마애불입상(道詵寺 磨崖佛立像)이 있다.
주51) 암문(暗門) : 암문은 성벽에 다락집이 없이 만들어 놓은 문(門)을 말하는데,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에 있는데, 숙종 때 축조되었고 백운봉암문(白雲峰暗門)이라고도 불린다. 일제 강점기 이후 위문(衛門)이라고 불렀다.
주52) 백운대(白雲臺) : 높이 836m. 북동쪽의 인수봉(仁壽峰, 811m), 남쪽의 만경대(萬景臺, 800m)와 함께 북한산 고봉중의 하나이며, 화강암(花崗岩)의 험한 암벽을 노출하고 있다, 산마루는 수백 명 가량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암반(岩盤)으로 되어 있으며 기암절벽(奇岩絶壁)의 조망이 일품이다.
주53) 중흥사(重興寺)와 총섭영(摠攝營) :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말기의 고승 보우(普愚)가 중수하였다. 이 절이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춘 것은 1713년(숙종 39)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이다. 축성 당시 30여 칸에 불과한 사찰이었으나, 성이 완성된 뒤 증축하여 136칸을 만들었다.
성내에는 성문과 수문(水門), 장대(將臺)와 창고 등을 지키기 위한 승군(僧軍)이 주둔하였다. 이 절은 승군이 주둔하였던 북한산성 안의 용암사(龍巖寺)·보국사(輔國寺)·보광사(普光寺)·부왕사(扶旺寺)·원각사(圓覺寺)·국녕사(國寧寺)·상운사(祥雲寺)·서암사(西巖寺)·태고사(太古寺)·진국사(鎭國寺) 등을 관장하였다. 왕실에서는 8도의 사찰에 영을 내려 1년에 6차례에 걸쳐 번갈아 의승(義僧)을 뽑아 올리게 하여 11개 사찰에 주둔시켰다. 승군의 정원은 360명으로 11개 사찰에는 각각 수승(首僧) 1인과 승장(僧將) 1인을 두었으며, 이들을 총지휘하는 본부로 승영(僧營)을 설치하고 승대장(僧大將) 1인을 임명하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 절은 승대장이 머물렀던 북한산성의 승영이었다.
1915년에 홍수로 무너진 뒤 2005년 지홍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불사를 새로 시작하여 2012년 대웅전을 준공하였으며, 이후 불사가 계속 진행되어 2017년에는 만세루(萬歲樓)와 전륜전(轉輪展)이, 2018년에는 도총섭(都摠攝)과 제2 요사채가 완공되어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다. 현재 중흥사는 북한산의 중심 사찰로서 북한산성의 문화를 향유케 하는 본부 역할을 하고 있다.
< 왼쪽이 중흥사, 오른쪽이 총섭영 >
주54) 태고사 원증국사 탑비
주55) 산영루(山映樓) : 북한산성 내에 위치했던 누각으로 조선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인 총융청에서 관리를 담당했던 중요한 건물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 당대 많은 지식인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시문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1925년 대홍수로 유실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2015년 고양시의 역사문화 복원사업을 통해 복원하였다.
< 1896년 산영루 >
주56) 대서문(大西門) : 1711년 조선 숙종(肅宗)때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축성하는 과정에서 설치된 문루이다. 북한산성을 출입하는 16개의 성문 중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위치에 있는 문루로 북한산성의 서북쪽을 출입하는 문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허물어진 것을 195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대서문을 지나는 통로는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중성문을 거쳐 행궁으로 이어지며 대남문(大南門)으로 이어진다.
< 북한산 행궁(行宮) >
주57) 북한산성 유산기(遊山記) : 1793년 8월 26 ~ 8월 29일의 3박 4일간 이옥(李鈺)의 중흥일기(重興日記)에서 보듯, 북한산 유산은 산성내 절과 암자, 비각, 산성과 장대를 두루 유람하는 여행테마가 있었다. 가급적으로 많은 곳을 둘러보고 그 연혁과 경승을 시문으로 남겼다..
◾ 삼천동(三泉洞), 비봉(碑峰)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
事到津寬寺(주55)津寬卽麗成宗之叔父而成宗誕降之地也 故因以名寺焉 翌曉入三泉洞(주56)石上有金公鏴亭子舊墟也 上碑峯此碑新羅眞興王巡狩定界之碑(주57)而苔面剝落手模不能記 左邊有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審定殘字六十八字 又有此折碑眞興王巡狩之碑而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審凡四十五字 而已脫下僧伽寺之後有嵌空 空中有佛 佛後有泉 居僧稱以藥泉 午飯後直下桃花洞過造紙署(주58)登蕩春臺(주59)飮玉泉庵憩洗劍亭
진관사(津寬寺)에 도착하였다. 진관은 고려 성종의 숙부이고 이곳은 성종의 탄생지이다. 이런 연유로 이름을 진 절이다. 다음날 새벽에 삼천동에 들었는데 돌 위에 김공 로(鏴)의 옛 정자 터가 있다.
절 위쪽은 비봉인데, 이 비는 신라 진흥왕이 국경을 순행하며 세운 정계비이다. 비면은 이끼가 끼고 풍화로 떨어지고 마모(박락 剝落)되어 글자를 알아 볼 수가 없다. 좌측에는 정축(1817년) 6월 8일에 김정희(金正喜)와 조인영(趙寅永)이 정계비에 남아있는 68자를 찾아냈다고 새겼다. 또 여기에 진흥왕순수비의 부러진 비가 있는데, 병자(1816년) 7월 김정희(金正喜)와 김경연(金敬淵)이 와서 45자를 찾아냈다.
승가사로 내려왔는데 절 뒤의 동굴이 있다. 동굴에는 불상이 있고 그 뒤에 샘이 있는데, 거처하는 스님이 약천(약물 샘)이라 말했다. 점심 후에 도화동으로 내려와서 조지서(造紙署)를 지나 탕춘대에 오르고 옥천암에서 물을 마시고 세검정에서 휴식하였다.
주55) 진관사(津寬寺) : 북한산 서쪽 기슭에 있는 조계종 소속 고려시대의 고찰로, 불암사, 삼막사, 보개산 심원사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한양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진관사가 창건된 배경은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목종(제7대)이 아들이 없자 태조의 아들 욱(대량원군)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경종(제5대)의 대비였던 천추태후가 욱을 살해하려고 했다. 욱은 진관조사의 도움으로 진관사에 숨어 목숨을 건졌고 욱은 목종에 이어 현종으로 등극하여 1011년에 진관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진관사에서 북한산 정상방향인 동쪽으로 이어진 계곡을 진관사계곡이라고 부르는데 암반이 잘 발달되어 있다. 암반은 경사가 급하고 작은 폭포들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진관사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북한산 사모바위와 비봉에 이르게 되고 이어 향로봉과 승가봉이 가까이 있다.
주56) 삼천동(三泉洞) : 진관사계곡 북쪽에 삼천사(三川寺)와 삼천동계곡이 있다. 진관사 계곡이 만나 북한산 창릉천에 합류한다. 이 합류지역의 마을을 삼천동이라고 부르고 이 일대 계곡 가에 판서 김로(金鏴)공의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57)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 신라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 때, 새롭게 영토로 편입된 지역을 순수(巡狩)하고 이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이곳이 자국의 영토임을 천명하는 비석을 세운다. 해발 556m의 북한산 비봉(碑峯)1)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도 그 일부이다. 언제부턴가 이 비석은 무학대사 혹은 도선국사의 비라고 잘못 전해 내려오기까지 했다. 이것을 바로잡은 것은 추사 김정희였다. 그는 순조 16년(1816)과 그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비봉에 올라 이 비석을 조사하여 이것이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뒷날 김정희는 또 다른 진흥왕 순수비의 하나인 황초령비와 북한산 순수비의 비문을 정치하게 고증한 논문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군 경연(金君敬淵)과 함께 승가사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중략)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자는 약간 민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00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가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군 인영(趙君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隸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하였다.
주58) 조지서(造紙署) : 1415년(태종 15)에 서울의 창의문(彰義門) 밖 장의사동(壯義寺洞: 현재의 세검정 근처)에 조지소(造紙所)라는 명칭으로 설치되어 1466년(세조 12)에 조지서로 바뀌었다. 저화지(楮貨紙)·표(表)·전(箋)과 자문(咨文: 중국과 왕복하던 문서), 그리고 서적에 필요한 여러 가지 종이를 제조, 관리하였다. 사지(司紙)·별제(別提)·제조(提調) 등의 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성 인원은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바뀌다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위치를 이곳으로 선택한 이유는 북한산에서 흘러오는 맑은 시냇물이 있고 반석(盤石)이 많아서 종이를 제조하기에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주59) 탕춘대(蕩春臺) :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조 12년 병인(1506) 1월 27일(정미)에 의하면 “왕이 장의문(藏義門) 밖 조지서(造紙署) 터에 이궁(籬宮)을 지으려다가 시작하지 않고, 먼저 탕춘대(蕩春臺)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또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石柱]을 세워 황각(黃閣)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장랑(長廊)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여러 신하들에게 과시(誇示)하고자 하여 놀고 구경하기를 명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영조 23년 경리청(經理廳 조선시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관리(管理)하던 관청)을 혁파하고 총융청(1624년(인조 2) 서울의 외곽인 경기(京畿) 일대의 경비를 위해 서울 사직동(社稷洞) 북쪽에 설치하였던 조선시대의 군영(軍營)을 탕춘대(蕩春臺)로 옮기고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바꿨다.
◾ 세검정에서 麻浦·龍山(마포·용산)까지
而皈越二日又作麻浦之遊率妓樂 若于輩鎭日中流扶醉入龍山登挹淸樓(주60)樓板有御題(주61)曰 *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는 ‘어제(御製)’이다.
이후 돌아와 이틀 넘게 또 마포로 가 기생을 데리고 즐겁게 놀았다. 일행 몇 명은 진정하고 낮에 이리 저리 배회하다 술 취해 부축을 받고 용산에 가 읍청루(挹淸樓)에 올랐다. 루의 현판에는 정조임금이 지은 시에
남출청루의활연(南出淸樓意豁然)
행화춘주대강전(杏花春酒大江前)
소간다소미진객(笑看多少迷津客)
진일회황일수변(盡日徊徨一水邊)
고요한 루의 남쪽으론 탁 트여
살구꽃 풍경 봄 술이 한강 앞에 놓여 있소
웃음 머금고 바라보니 다소간 나루터 객들이 어지럽고
하루 다가고 저물도록 배회하는 강가일세
우왈(又曰)
아장금범화도간(牙檣錦帆画圖間)
숙고중류왕왕환(簫鼓中流任往還)
소자천추선획아(蘇子(주62)千秋先獲我)
상봉유미시유한(相逢有味(주63)是偸閒)
대장 돛대에 걸린 비단 돛이 그림속의 모습 같고
퉁소와 북소리 울려 퍼지니 나가고 돌아오고 분주하구나
소자 나물 오랫동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는데
서로 만나 맛봄이 있으니 한가한 휴식을 훔치고 있네
登㖬月亭入大觀亭 主李雅能善三昆李也滯而留宿 翌日徃一碧樓登心遠亭(주64)過涵碧亭(주65)云爾
수월정(㖬月亭)에 오르고 대관정(大觀亭)에 들어오니 주인은 이능선(李能善)과 삼곤(三昆) 이야체(李也滯)인데 여기서 유숙하였다. 다음날 일벽루(一碧樓)에 들르고 심원정(心遠亭)에 오른 후 함벽정(涵碧亭)을 들렀다.
주60) 읍청루(挹淸樓) : 읍청루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암동의 강안(江岸)에 위치하였으며, 한강 일대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왕족이나 사대부들이 여가를 즐기던 정자로 사용되었다. 별영을 세우고 거기에 읍청루를 지어 훈련도감의 군병들 급료를 지급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읍청루는 별영 창고에 딸린 누각으로 강가에 있어 수변경관이 수려한 명승으로 손꼽혔다. 정조대에는 왕이 거둥하여 수군 훈련을 열병(閱兵)하였다[『정조실록』 19년 3월 18일].
< 김석신(金碩臣 1758~?)의 담당정(澹澹亭)과 읍청루 >
*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였으나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별장이 되었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시회(詩會)를 베풀었다. 신숙주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세조는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그 후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麻浦莊)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마포구 마포동 419-13 벽산빌라, 마포대교 북단 동쪽)
주61) 어제시(御製詩) : 1795년 3.18자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御製’로 적혀있다. 수군훈련시 식사를 베풀도록 한 후, 어제(御製) 7언율시 2편을 짓고 우승지(行右承旨) 이만수(李晩秀) 에게 받아 적도록 하였다.
주62) 소자(蘇子) : 여러해살이 풀의 씨 들깨와 닮았는데, 전체에서 자줏빛이 돌고 향이 짙다. 어린잎을 쌈으로 먹고, 송송 썰어 비빔밥에 넣기도 한다. 간장이나 된장에 박아 장아찌를 담가도 맛있다. 튀김이나 부각도 한다. 열매는 익기 전에 꽃차례를 뜯어 장아찌를 담거나 튀김을 한다. * 소자주(蘇子酒) : 술의 일종
주63) 상봉유미(相逢有味) : 1795.3.18.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우승지 이만수가 아뢰기를, ‘상봉유미’ 4자에 대하여 “신은 감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마땅히 친히 수군의 훈련을 참관하시는 때에 어찌 서로 만나 음식 맛을 본다는 ‘상봉유미’가 있다는 말입니까?”하니 상께서 “자구 간에 매끄럽게 하고 고칠 곳이 있으면 도로 환납하도록 하라” 하였다.
晩秀曰, 相逢有味四字, 臣不敢知聖意之所在矣。當此大閱水軍之時, 有何有味之相逢耶? 臣之愚昧, 竊不勝訝惑也。上曰, 字句間, 有潤改處, 姑爲還納, 可也
주64) 이능선(李能善) : 1848 만인소참가, 1865 무과갑과 제1인 사옹서 직장, 1891 부사과
주65) 심원정(心遠亭) : 용산구 산청동 마을, 원효로4가 한강 기슭의 용산문화원 인근 언덕에 심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고종 때 영의정이던 심암(心庵) 조두순(趙斗淳)(1796~1870)의 정자이다.
주66) 함벽정(涵碧亭) : 용산구 성심여학교의 높은 터인 예수성심성당자리에 있던 정자
< 일정 추정 >
1일 혜화문 출발 화계사 유숙
2일~3일 도봉산 상계사, 망월사 유숙(비)
4일 만장봉 경유 천축사, 원통암 유숙
5일 도봉산에서 북한산으로, 북한산 도선사 유숙
6일, 암문, 백운대, 중흥사 유숙, 총섭영, 태고사
7일 오전 비(雨) 산영루, 한어문, 대서문, 삼천동 김로정자, 진관사 유숙
8일 비봉(진흥왕순수비), 승가사, 하산 탕춘대, 세검정, 옥천암
9일 홍제동, 무악치, 영은문, 모화관 유숙
10일 각정원정, 화성관, 마포 읍청루, 수월정, 대관정 유숙
11일 마포 뱃놀이 일벽루, 심원정, 함벽정
ㅇ 숙박은 대부분 절에서 하였고, 절의 산동(山童)이 길을 안내한 듯한데, 조선시대 다른 분의 유산기에도 이것이 관행이다.
ㅇ 일부 일정의 숙박처가 불분명한 곳이 있어 총 소요기간에 추정일과 다를 수도 있다.
◾ 도봉산 산행도 추정(푸른 선을 따라)
◾ 삼각산(북한산) 산행도 추정(푸른 선을 따라)
하단의 탕춘대에서 홍제천을 따라 세검정, 옥천암을 거처 홍제동 무악재, 마포로 이어진다.
< 참 고 >
◾ 정약용의 중흥사 백운대 기행시
ㅇ 원전 서지 :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제1집 제2권 시문집 시(詩)
1794년(정조 18) 9월 18일 정약용은 중형 정약전을 모시고 윤지범, 윤지눌, 그리고 이중련과 함께 북한산성을 유람하였다. 산영루(山映樓)를 거쳐 중흥사(中興寺)에서 하루 묵은 후, 다음 날(9월 19일) 백운대에 올라 이 시를 지었다.
숙중흥사(宿中興寺)
노좌의상랭(露坐衣裳冷) 운유보리경(雲游步履輕)
기림용객려(祇林容客旅) 정사관봉영(精舍慣逢迎)
권취산포석(倦就山蒲席) 기감해채갱(飢甘海菜羹)
노곤진계극(老髠陳棨戟) 고침견부영(高枕見浮榮)
중흥사의 밤
이슬 젖은 풀에 앉아 옷이 차갑더니 구름 속을 노니니 발걸음이 가볍고
사원에선 길손 맞아 재워 주고 절간은 손님 접대 익숙하네
노곤하여 부들자리에 눕고 허기에 미역국도 달게 먹고
늙은 중이 계극을 늘어놓아 높은 베개 베고 영화를 누리네
登白雲臺 卽三角中峯
수착고릉교(誰斲觚稜巧) 초연유차대(超然有此臺)
백운횡해단(白雲橫海斷) 추색만천래(秋色滿天來)
육합단무결(六合團無缺) 천년망불회(千年漭不回)
임풍홀서소(臨風忽舒嘯) 부앙일유재(頫仰一悠哉)
백운대에 오르니 곧 삼각산의 중봉(中峯)
누가 뾰족하게 잘 깎아 다듬어 우뚝하게 이 석대를 세워 두었나
흰 구름바다를 가로지르고 가을빛 온 하늘에 가득하여라
육합은 원만하여 결함 없건만 천년 세월 아득하여 아니 돌아오나니
바람결에 홀연 휘파람 불고 하늘 땅 둘러보며 유유하기만
◾ 이덕무(李德懋)의 기유북한(記遊北漢)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3 영처문고(嬰處文稿) 1에 실려 있다. 체재는,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머릿말이 있고, 이어서 자신이 유람한 북한산의 사찰과 암자·정자·누각 등을 하나하나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내용은 작자가 남복수(南復秀)·남홍래(南鴻來) 등과 더불어 3일 동안 끼니를 걸러 가면서 북한산 행궁지역을 거의 대부분을 답사하였으나, 하나의 암자와 봉성사(奉聖寺)·보국사(輔國寺)는 유람하지 못하였다.
열네 군데의 고적을 유람하면서 작자는 정자나 누(樓) 등의 유래와 특징 등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들이 찾아간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쓴 것이다.
이들의 유람경로는 세검정(洗劍亭)·소림암(小林庵)·문수사(文殊寺)·보광사(普光寺)·태고사(太古寺)·용암사(龍巖寺)·중흥사(重興寺)·산영루(山映樓)·부왕사(扶旺寺)·원각사(圓覺寺)·진국사(鎭國寺)·상운사(祥雲寺)·서암사(西巖寺)·진관사(津寬寺)의 순이다.
즉,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서 산성 서문으로 나온 셈이다. 시기는 1761년(영조 37) 9월 그믐으로 작자의 나이 21세 때이다. 이 글의 특징은 간략한 서술기법에 있다. 또한 작자의 백과전서적인 기록취미가 나타나 있기도 하다.[네이버 지식백과]
첫댓글 금서축 1차 번역은 끝나고 재교 삼교중입니다. 계속 일부 내용이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