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 언약의 승리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말씀은 <새 언약의 위로(격려)>에 대해서 구약의 격려와 새 언약의 격려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나누었다. 오늘은 <새 언약의 승리>에 대해서 같이 말씀 나누겠다.
고린도후서 2장 14절부터 16절까지를 읽겠다.
[고린도후서 2:12-17]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1).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김
새 언약의 승리,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김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 중심이 성막이다. 동서남북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고 있고 성막이 있다. 성막은 모두 60개의 놋 기둥으로 둘레가 경계가 지어져 있고 밖으로는 세마포로 포장을 하여 멀리서 봐도 특이한 집임을 알 수 있는 것이 성막이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동산에 사람을 살게 하셔서 거기서 하나님과 상호거주하기를 원하셨는데, 사람이 이탈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동산을 모세를 통하여 성막으로 이렇게 만들게 내가 여기에 거하겠다고 성막을 짓게 하셨다.
성막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성막 안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제사장들이라고 한다.
원래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실 때 어떻게 지으셨는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인생을 지으셨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막이라는 이곳에 하나님의 거처를 두시고, 레위인들 가운데 제사장을 뽑아서 그들로 하여금 성막 봉사를 하게 하였다.
성막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가 들어있다. 이 성막을 통해서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성막 밖 세계와 울타리 안의 세계가 전혀 다른 세계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는 원래 어디에 살도록 되어 있는가? 동산 안에 살도록 되어있다. 또 구약으로 말하면 성막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다.
오늘 승리를 이야기했는데, 이 성막 안을 오늘 우리로 표현하면 <그리스도 안>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 안>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왜 우리가 패배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있어야 할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에 패배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모든 것이 승리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담 안에서는 그 모든 것이 패배이다. 왜냐하면 영역을 떠났기 때문에 패배이다. 아담도 좋은 아담이 있고, 좋지 않은 아담이 있고 천차만별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무엇을 보시는가? 내가 정한 영역 안에 있느냐, 쉽게 말하면 십자가 안에 있느냐? 아니면 십자가를 벗어나 있느냐? 성막 안에 있느냐, 성막을 벗어나 있느냐? 이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분보다 훨씬 선하고 훨씬 좋은 분들이 세상에 많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성막 안에 있느냐 없느냐? 내 영역 안에 있느냐, 없느냐? 이것을 보신다.
아담은 그 성막을 벗어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패배이다. 왜냐하면 아담은 원천적으로 사탄에 대하여 패배한 사람이다. 실패한 사람이다.
사탄에 대해 실패한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분이 있다. 실패한 결과는 인간에게 주어진 그 본분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지어졌는데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다. 행위로서는 대단히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그 존재가 있을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를 보시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2).”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무익하게 되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지어진 목적에서 보면 무익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에서 무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이크를 아주 좋은 마이크로 바꾸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마이크로 바꾸면 무엇 하겠는가? 하나님은 좋은 마이크냐 아니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소리가 나느냐 안 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지으셨는데, 그 본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볼 때 무익하다고 보신다. 무엇이 승리이고, 무엇이 패배인지가 분명하다.
내가 어떤 사람을 이겼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이 승리가 아니고, 사탄에 대한 승리가 참 승리이다. 패배는 사탄에 대한 패배가 진짜 패배이다.
가. 그리스도는 승리자
그리스도는 승리자다. 사탄에 대해서는 승리하신 분이다.
사탄에 대하여 무엇으로 승리하셨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사탄에게 승리하기 위하여 아주 큰 목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애를 많이 쓰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를 하면 사탄이 물러간다.
옛날에 목사님을 만나기 전 나는 귀신을 쫓아내는 목사님을 따라 다닌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의 눈을 보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귀신 들린 사람을 향하여 눈을 크게 뜨면서 이 더러운 귀신이라고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면 그 사람이 넘어가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귀신은 쫓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사탄은 물러가지 않는다.
사탄과의 전쟁은 무엇인가?
이것은 행위의 전쟁이 아니다. 어떤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니다. 존재적인 전쟁이다. 존재가 승리하여야 승리가 되지 승리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승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보면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절대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빌라도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입니까? 하고 조롱조로 이야기했다. 예수님이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 당신 신하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 백성이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마저 도망간 상태였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성공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대하여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생의 원수인 사탄을 이긴 것이다. 이것이 가려져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같은 것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너무너무 고통 당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고통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그 십자가에서 인생의 위치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게 한 사탄을 이기신 분이 예수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사탄을 승리하신 분이 주님이다.
A) 아담의 실패: 그 사람 자체가 실패자이기 때문에 실패함
아담은 왜 실패 했는가?
아담은 그 사람 자체가 실패자이기 때문에 실패했다. 내가 감옥에 있으면 감옥이라는 영역 안에 있다. 다른 영역에 있다고 보신다. 제일 중요한 것이 <위치>와 <영역>이다. 우리 교회가 아니면 들어볼 수 없는 말이다.
아담은 그 위치를 떠난 것이다. 그 존재적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아담이 실패한 사람이다.
존재적 위치를 떠난 것이 무엇인가?
아담이 인생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모른다.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말은 하나님이 아무리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도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면 자신을 표현할 수가 없다.
하나님에게는 형상이 무엇인가? 아주 절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형상을 통하여 아는 것이다. 형상이 얼마나 존귀한 가를 아담은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형상이라고 하면 껍데기다. 아담은 자기가 내용이 되고 싶은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 형상의 존귀함을 잃어버렸다.
사람은 무엇으로 지어졌는가?
<산 혼>으로 지어졌다. 산 혼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흙이다. 흙은 참신기하다. 흙에 있는 신기한 비밀을 다 드러낸다. 밭에 씨를 뿌려보라. 그 씨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씨가 흙에 떨어지면 흙은 그 씨를 받아서 씨 속에 있는 생명의 비밀을 다 드러낸다.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다 드러낼 수 있는 산 혼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깊이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높이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넓이를 드러내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누가 드러내는가? 바로 산 혼인 사람이 드러낸다.
그런데 아담은 이 산 혼의 소중함을 간과해버리고 말았다. 이 흙이 하나님께 쓰여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아무 것도 떨어지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아무 것이나 떨어져서 쑥대밭이 되어버린다. 사람은 산 혼이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위임을 하셨다. 너는 <동산을 지키라고 위임>을 하셨다. 사람은 위임을 시시하게 생각했다. 동산을 지키라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을 경작하라는 이야기다.
목사님은 이 하나님의 생명을 경작하셔서 우리를 먹여 살렸다. 한 평도 안 되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얼마나 풍성하게 나오는지를 알았다. 우리 인생도 동산을 경작하면 여기서 무궁무진한 생명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 동산은 누구의 동산인가?
내 동산이 아니고 하나님 동산이다. 아담은 자기 동산을 갖고 싶은 것이다. 자기 기업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기 기업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은 동산에 사는 것이 굴욕적이다. 왜 나는 내 동산이 없고, 왜 나는 누구의 동산을 경작해야 되는가?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소중한 인생의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의 본질 속에는 항상 무엇이 있는가?
자기가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일을 잘 하다가도 누가 시키면 신경질이 나서 하지 않는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대하여 항상 깊이 듣지 못한다. 내 생각에 빠져 있으면 옆 사람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 이것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진짜 소중한 것을 놓쳐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고 아담은 천사를 부러워함으로 실패한 것이다.
천사는 누구인가? 선악지식을 가진 독립적인 존재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 존재가 부러운 것이다.
세상에서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행동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지성인이다. 사람은 이것을 부러워한다. 부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사탄에게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사탄은 어떤 존재인가?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대행하는 존재이다. 구약에서는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한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내 모든 문제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능력만 있다면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었고,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믿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믿는다. ‘능력 주시옵소서.’ 라고 한다. 바로 능력을 부러워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깊이 들어와있다.
그런데 능력을 부러워하면 누구에게 종이 되는가? 바로 천사의 종이 되고 만다. 천사는 육신이 없다. 육신이 없다는 말은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프고 병 들고 죽고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이런 제한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제한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를 생각한다. 특히 불교에서는 눈을 감으면 우주가 내 안에 있고, 눈을 뜨면 내가 우주 안에 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깊이 관념 안으로 들어가서 육신이 없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육신을 벗어난 해탈을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