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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40 5 (고전 15회)
십자가로 세워지는 교회 (고전 4:6-13)
2009년 9월 13일 (일, 좋은 교회)
오늘 본문은 참 아름답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 영적인 선물로서 자기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이 주신 자기의 부르심의 자리를 지키면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며 섬기신 예수님 처럼 교회를 섬깁니다. 우리도 사도 처럼, 주님이 불러 주신 자리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교회를 섬기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주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서로의 영역을존중한다.
6절. 형제들아, 사도가 좀 부담스런 말을 할 때, 이런 편한 말로서 시작합니다. “내가 이 일에 본을 보였다” 사도가 본을 보인 이 일이란 무엇일까요? 4:1절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 맡은 자로 여길 지어다” 2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충성하는 것, 5절,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 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면서, 다른 성도들이 하는 일을 판단하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3장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람의 지혜를 섞지 않고 오직 복음으로만 세워 가는 일, 3장 마지막에, 바울과 아볼로, 모든 것이 너희, 즉 교회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 말씀대로, 교회의 종으로서 힘껏 섬긴 것입니다.
“본을 보였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나와 아볼로를 향해 형상으로이루어 지게 했다” 이것은 상당히 설명이 필요합니다. 빌 3:11,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변케하신다.” 그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영광의 몸으로 이루어 지듯이, 교회를 섬기는 이상적인 모습이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에서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게 이루어 졌습니다.
“본을 보였다, 혹은 형상으로 이루어 지게 한다”는 메사-스키마조인데, “스키마조”는 모양, 모습이라는 단어가 고전 12:23-25 에 나옵니다. “23이 뿐 아니라,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 (a-스키마조) 는 더욱 아름다운 것 (유-스키마조)을 얻고 24 우리의 아름다운 (유-스키마조)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 하나니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본을 보였다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의 임무에 충성되어 서로를 돌아보고 “아름답지 못한 지체”형제와 자매는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성숙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과 아볼로에게 배워서 서로를 세워 주는 교회 공동체로 성숙시킵니다. 어떻게 서로 세울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realm,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진 그 자리를 잘 지킴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웁니다. 1절,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 배워서..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글자 그대로 읽으면 “기록된 것을 너머서 추구/생각하지 않는 것”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가 너머서는 안 될 그 자리를 하나님은 말씀으로 정해 주셨습니다.
하와에게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제가 마음껏 먹지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그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 곳에서 일해라” 하면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정해 주셨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각 사람에게 이것은 너희 테두리다” 하고 기록하듯이 정해 주신 그 사명의 자리, 임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비슷한 내용이 롬 12:3에 나옵니다.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우리 본문에 “넘어가지 말고, 혹은 너머서 추구하는 것”을 로마서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롬 12:3은 계속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나님이 믿음의 분량대로, 분량이란, 자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여러 가정에 자로 재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해야 할 사명을 그렇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믿음의 자대로 정해 주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과 아폴로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자신의 한계 안에서 머무는 모습을 잘 보여 주었다고 간증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말씀의 씨를 뿌렸고, 그 일에 충실했습니다. 아볼로는 계속 말씀을 전해서 교회가 자라도록 했습니다. 그 분들은 자기의 한계를 너머서, 자기가 해야할 일에 충실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과 아볼로에게서 배워서 각자가 자신의 사명의 자리를 지키는 마음을 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6절,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직역하면 “한 사람도 하나님을 너머서 교만해 져서, 다른 사람을 대항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영역을 너머서, 자기 이상의 것을 추구해서 교만해 지지 말라. 그 교만해 져서 자기 한계를 너머 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갈등이 일어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도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신 나의 자리, 내게 맡겨 주신 일에 충실하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다른 사람의 자리를 향해 너머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2. 고린도교인들이 고쳐야 할 것 두 가지
1) 가진 좋은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이해하여 겸손하기 (Resource)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겸손하지 못한 것을 모습을 두가지로책망합니다.
첫째,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7절, 우리말에 없지만,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누가 너를 다르게 했느냐? 고전 12: 4에서 우리의 은사, 직무, 역사는 여러가지 이지만 주신 분은 삼위 일체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여러가지”와 “구별되다”와 비슷한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어떤 좋은 영적인 은사 그것이 있다면, 누가 너를 다르게 했느냐? 답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는 것이지요.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뇨?” 네것은 하나님께 다 받은 것입니다.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하나님께 받았는데 왜 자랑하느냐?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사람들을 향해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돈이 많다면, 돈 벌수 있는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남이 못하는 공부를 했고 재능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게게 주신 것이므로,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맙시다.
2) 하나님이 주실 보상을 기다리기 (Reward)
고린도 교인들의 두 번 째 문제는, 하나님 나라가 벌써 온 것 처럼, 이 세상의 것들을 너무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기 보다 자기가 먼저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8절, 풀어서 번역한 내용을 읽습니다.
너희는 이미 계속 배불러 왔고,
이미 부자되었고,
우리 없이 왕노릇했다.
실로 너희가 왕노릇하였기를!
우리도 또한 너희와 함께-왕노릇하게 되도록.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님이 이미 재림해서 천국에 들어 온 것 처럼, “이미 계속 배불러 왔습니다.” 우선 이 세상에서 배불리 먹고,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에 푹 빠져 있습니다. “우리 없이 왕노릇했다. 실로 너희가 왕노릇하였기를, 우리도 또한 너희와 함께-왕노릇하게 되도록” ” 우리는 사도 바울과 아볼로를 말합니다. 사도들은 하지 않는데, 그들은 이미 왕노릇 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20절에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이라” 나라가 동사가 되면 왕노릇 한다는 것이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이 왕노릇하는 데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함께 하지 않는” 왕노릇이 문제였습니다. 이제 곧 보겠지만 사도들은 굶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데, 자기들만 배불리 먹고 부유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은 가난하고 힘들고, 특히 복음 위해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데 그들만, 마치 이미 예수님 재림하여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온 것 처럼 그렇게 먹고 지내고 있습니다.
둘째,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온 것 처럼 누렸습니다. 계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라” 예수님 재림 하신 이후도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 앞에서 왕노릇할 것입니다. 온 만물을 다스리고 배부르고 부유한 삶을 살면서, 왕노릇할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왕노릇할 그 때가 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이미 부유하게, 이미 배불리 먹는 왕노릇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도들이 함께 하지 않고,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왕노릇을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가 지금 이시대에 온다면 아마 우리에게도 이런 똑 같은 꾸중을 할 것입니다. 이미 천국이 온 것 처럼, 풍요롭게 살고, 이미 천국이 온 것 처럼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좋은 것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것 만큼 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실 텐데, 그 때 까지는 인내하며, 우리가 당해야 할 힘든 것을 견디며 나갑시다.
3. 바울과 아볼로의 모범: 십자가를 지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기
이제 사도는 자신과 아볼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의 모범을 본받으면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에서, 주신 것을 자랑하지 않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입니다.
1 )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능력 주시는 것을 경험함
첫째로, 사도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려고 주신 자리고 믿고 갑니다.
9절,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꼴찌로
나타나게 하셨다, 사형수 로서 .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게, 그리고 천사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아볼로와 자신을 포함해서 사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미말에, 즉 꼴찌로 두셨다. “죽이기로 작정한 자”, 사형선고 받은 자 처럼 취급하셨다. 여기 꼴찌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 사자밥이 되거나, 혹은 사자와 싸울 검투사가 되어, 인생의 꼴찌 밑 바닥으로 떨어지게 했고,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꼴찌란 전쟁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을 염두에 두고 말합니다. 로마 군대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싸워서 이긴 장군은 원형극장에 행진해서 들어옵니다. 포로로 잡힌 자들은 줄의 맨 뒤에 꼴찌로 끌려 들어 와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이 사형수처럼 아무렇게나 취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사도인 우리를 “미말에 두셨다는” “나타나게 하셨다”고 합니다. “나타나게 하셨다”는 단어는 2:4에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이렇게 이 세상의 꼴찌로 나타나게 하신 것은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9절에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단어는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거한다와 같은 말입니다.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 하며 심히 떨었노라”
2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처음 고린도 지역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있을 동안에, 아주 약함 가운데 있었지만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간증했습니다. 4장에서는, 고린도를 떠나서 있는 그 후에도, 바울은 그 연약함 속에 하나님이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며 수치를 당하게 하셨지만, 그것이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로 설명합니다. 12절에서 “비방당하면서 격려하고 있고”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 교회 일꾼을 아주 힘든 자리에 두셨습니다.
그 능력을 말하지 전에 얼마나 약하고 힘든 상황인지를 계속 설명합니다. “세상에게, 천사에게,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사도가 꼴찌되고 사형수처럼 된 것은 몇 사람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심지어 천사에게도,영적인 존재에게도 알려진 큰 사건입니다. 사도는 이 고난이 하나님이 그렇게 고난 받도록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지금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있습니까?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도록 합시다. “이 눈물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고백하면서 기대합시다. 하나님께서 과연 나에게 이 어려움 가운데 두셨으니, 성령님의 크신 능력을 어떻게 나타내실 지 기대합시다.
2) 둘째, 바울과 아볼로가 당한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10절, 우리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들은 약하나 너희들은 강하고,
너희들은 영광스러우나 우리들은 불명예스럽다.
바울과 아볼로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어리석고, 약하고,불명예스럽게 되면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지혜롭다, 강하다, 영광스럽다 이것만을 알고 거기에 머물려고 합니다.
빌 1:29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과 화해되고, 내가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또 말씀 전하는 은사, 위로하는 은사, 돈, 건강 여러 것들을 받습니다. 또 다른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사를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고생하고 고난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1:27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은사들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와 능력,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격려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복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일합니다. 고난받으면서 일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힘들고 고생스런 자리에 들어가서 나약해 집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불명예와 수치스런 일도 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그리스를 믿고 구원받는 은혜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고생하고 고난받는 복이 넘치기 기도합니다.
3) 고난 통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그리스도인
11-13절은 “지금 이 시간까지”로 시작하여 같은 말로, 끝을 맺으면서 사도는 ,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배부르고 이미 부유하고 왕노릇 한 것”과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 계속, 언제까지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계속합니다.
11 지금 시간까지
우리는 굶고 있고, 목마르고 있고, 헐벗고 있고, 매맞고 있고, 집이 없다. (homeless)
12 자기의 손으로 일하면서 수고하고 있다.
이런 고생스러움을 사도는 숙명적으로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고 있지만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 지고,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굶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매 맞으셨습니다. 집이 없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눅 9:58),
“모욕당하면서 축복하고 있고,
핍박당하면서 참고 있고,
13 비방당하고 있으면서 격려해 주고 있다.”
이런 고생스러움을 사도는 숙명적으로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고 있지만 않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모욕당하면서 축복하고” 이 행동은 사실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핍박자들을 위해 위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신 분입니다.
사도도 예수님 처럼, 모욕당하면서도 축복하고 핍박당하면서도 참았습니다. “비방당하면서도 격려해 주고 있다.” 바울을 비방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계속 바른 신앙의 길을 가르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된 사도의 모습을 고린도 교인들은 싫어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사도의 길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목사들은 과거도 지금도,그 삶이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 대로 고난을 받습니다. 예수님 처럼 고난 받으면서, 교회를 세우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난받는 그리스도의 모습, 고난받는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난 받는 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복입니다.
첫째, 이런 고난을 받으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아직 남은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둘째, 고난을 받으면서, 주님의 모습으로 온전히 성장해 갑니다.
셋째,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넷째, 고난을 통해 주님의 교회가 확장됩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 우리는 왕노릇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우리에게는 사도가 받은 이런 큰 고난을 주시는 경우가 좀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만큼 그릇이 되면 그런 고난을 주실 것이지만,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맞게 작은 고난들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갈 때, 우리는 천국의 상을 바라보고 지금 힘든 일을 참고 지낼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인 줄 알고 온전히 섬길 수 있습니다.
고난받는 종들은 교만하여서 다른 성도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에 충성합시다. 다른 성도들의 사명의 자리까기 너머가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힘껏 고난 받으면서, 그 가운데서 성령님의 크신 능력을 나타내면서 주님의 교회와 나라를 세워가는 복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