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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포 : 김재일 목사(기쁨주는교회)
제목 : 예수 부활의 3대 승리
본문 : 요한복음 11 : 25~2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 중의 기적은 부활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셨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감격으로 가득찬 이 시간 예수 부활의 3대 승리를 살펴볼 때 맘 문을 열고, 열린 귀로 들으면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첫째 승리는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본문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을 거꾸로 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살아도 죽겠고, 살아서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죽으리니”이렇게 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죽어도 살겠고’의 사람과 ‘살아도 죽겠고’의 사람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한 사람일까요?
‘죽어도 살겠고’의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우리도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 다시는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그 후에는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권세를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에 예수님과 생명 공동체인 우리 믿는 자도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 이하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석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우리를 죽이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와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한 죽음은 우리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코브라는 맹독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동물들은 코브라를 무서워하는데 유독 몽구스라고 하는 동물은 코브라와 맞서 싸우고 심지어 코브라를 잡아먹기도 합니다. 몽구스가 코브라를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는 몸놀림이 코브라보다 빠르기도 하지만 코브라에 물려도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몽구스 몸 안에는 ‘알파뉴로톡신’이라는 해독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코브라처럼 맹독을 품고 우리를 물고, 찢고, 흔들고, 쏘고, 공격한다 해도 절대 우리를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의 해독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하나 되어 우리도 사망을 이기고 생명의 부활로 일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살겠고’의 사람들은 죽음의 한계를 뛰어 넘은 자요,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살아도 죽겠고’의 사람들은 좀 더 오래 살아보겠다고 불로초도 찾고, 불사약을 구하러 백방으로 다니지만 결국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는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자랑은 죽은 것들 뿐 입니다.
누구의 묘가 있고, 뼈가 있고, 사리가 있고, 유물이 있다고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떠들썩하게 전시하면서 자랑하지만 결국은 죽은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메카에 가면 마호멧의 무덤이 있고, 관을 열면 시체가 있어서 그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너희는 예수의 무덤도 시체도 없다고 조롱합니다. 시체가 있는 것이 자랑인지, 없는 것이 자랑인지 도무지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인도에 가면 부처도 있고, 사리도 있다고 자랑합니다. 사리가 몇 십 개, 몇 백 개 나왔다고 떠들썩하게 자랑하지만 사리는 꼭 불자들이나 수행을 많이 한 고승들에게서만 나오는 건 아닙니다.
1994년에 75세 된 어느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화장을 했는데 무려 400개의 사리가 나와서 화재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철스님의 200개가 최다 기록이었는데 수행과는 전혀 상관없는 할머니가 가뿐히 그 기록을 깬 것입니다. 그것도 청색, 황색, 회색, 흑색 등 총 천연색으로 세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사리가 있네, 없네 이런 건 무의미한 자랑이요, 결국 죽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면 공자도 있고, 유교도 있고, 그의 무덤도 있다고 합니다. 공자의 묘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라고 합니다. 결국 죽은 종교는 죽은 것을 자랑합니다. 그들에게 자랑거리라고는 죽은 유물들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자랑은 무덤이나 관이나 시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랑할 만한 무덤과 뼈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겨야 진짜 진리입니다. 석가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훌륭한 성인이지만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한계 안에 갇힌 것입니다. 죽음 아래 갇혀 있는 피조물은 신이 될 자격이 없으며 구원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과 사망을 초월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모르는 길을 가는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누구에게 길을 묻겠습니까? 당연히 산 사람에게 물을 것입니다. 석가도 공자도 죽었습니다. 왜 죽은 사람에게 길을 묻나요? 오직 예수님만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될 자격을 갖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죽어도 다시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복, 구원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이 ‘살아도 죽겠고’의 사람이 아니라 ‘죽어도 살겠고’의 사람이 되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승리는 사단을 이기셨습니다.
장차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벌이게 될 영적 전쟁은 창세기 3장 15절에 이미 예견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뱀은 사단이고 뱀의 후손은 사단의 세력입니다. 여자는 마리아이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입니다. 사단의 악과 예수님의 선은 영원한 앙숙이 되어 끝장 승부를 볼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사단은 치명상을 입을 것이고, 사단은 예수님의 발꿈치 정도만 상하게 할 것입니다. 머리를 상한 자는 죽을 것이지만 발꿈치 정도만 상한 자는 크게 생명에 지장이 없습니다.
사단이 먼저 선제 공격을 함으로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던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사단은 기고만장하여 이겼노라고 승리를 선포했지만 삼일 만에 승부는 뒤집혔습니다. 갑신정변의 3일 천하처럼 사단은 잠시 3일 동안만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겨우 발뒤꿈치를 상하게 한 정도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부활은 극적인 역전승이요, 극적인 뒤집기 한 판 승입니다.
야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9회말 투아웃 상황, 이제 한 사람만 아웃시키면 승리를 얻지만 역전 만루 홈런 한 방으로 승부가 뒤집어 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극적이고 짜릿한 승리인데 이것을 역대급 경기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때까지만 해도 그대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마귀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판에 극적인 역전 만루 홈런을 때리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게임이 넘어간 것 같았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승부를 뒤집어 놓으신 것입니다. 보기 좋게 뒤집기 한판으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역전 만루 홈런의 주인공입니다. 예수를 몰랐을 때 우리의 신분은 이미 죄악으로 죽어버렸던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음으로 마귀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지옥의 형벌이 아니라 천국의 영생복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판의 부활이 아닌 생명의 부활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역전 만루 홈런의 주인공이 된 것 입니다.
요한 삼서 2절에 기록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는 말씀처럼 우리의 영혼은 이미 잘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더 이상 잘 될 수 없을 만큼 잘 되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나도 이미 극적인 반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의 기쁨, 구원의 감격, 부활의 확신, 부활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승리자로,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셋째 승리는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끝없이 조롱합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그리스도면 너와 우리를 한 번 구원해 보라’고 했던 한
쪽 편 강도처럼 예수님을 조롱하고,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입을 삐죽이며 ‘저가 건지실 걸, 저가 구원하실 걸’ 하며 비아냥댑니다.
세상은 끝없이 공격하고, 핍박하고, 비난하고, 회유하고, 의심하게 합니다. 신앙에서 떠나게 하고, 믿
음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저들의 목표입니다.
방송과 언론은 끊임없이 악의적인 여론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각종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목사와 교회는 약방의 감초가 된지 오래입니다. 물론 원인을 제공한 문제적 교회와 범죄적 목사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타종교에도 분명 비리는 많이 있을 텐데 유독 교회와 목사에 대해서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매서운 채찍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만약 공익을 가장한 어떤 정치적 또는 이념적 의도를 가지고 교회의 부정적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 하는 무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단의 세력일 것 입니다.
방송과 언론의 맹활약 덕분에 교회의 사회적 이미지와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부정적 여론이 폭 넓게 형성 된 것 등등은 결과적으로 가나안 성도의 양산과 교회의 쇠퇴를 가져오는데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가, 취미, 여행 등 먹고, 놀고, 즐기는 사회적 풍조는 신앙심에 회의를 갖게 합니다. “괜히 믿어서 고생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시간 뺏기고, 돈 들여 헌금하고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차라리 안 믿고 안 다니면, 맘껏 먹고 마시고, 눈치 안보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돈도 절약할 수 있는데” 하면서 이빨이 흔들리 듯 믿음이 흔들릴 때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끊임없이 성도의 믿음을 흔들고 파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설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부활의 확실한 증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세상의 공격에 겁먹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는 단단한 기초요, 반석입니다. 부활의 신앙위에 굳게 설 때만 우리의 믿음은 어떤 공격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로 180도 변한 것은 부활의 확고한 믿음을 가졌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제자들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제 끝났구나’ 하고 종료를 선언하고 예전의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패배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했던 지난 3년의 삶을 단지 좋은 추억으로 간직한 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킨 것이 겨우 한 때의 잊지 못할 좋은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 주시려고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찾아다니시며 회복시켜 주셨고,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들은 예외 없이 부활의 증인으로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베드로의 순교는 요한복음 21장 18절,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과연 그 말대로 베드로는 로마의 미치광이 네로황제 때 십자가에 달려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안드레, 도마, 빌립, 야고보, 맛디아 등등 가룟유다와 사도요한을 제외한 모두는 목 베임을 당하기도 하고, 돌에 맞거나, 창에 찔려 죽기도 하는 등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되어 예수님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건 부활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부터 부활은 없었고 제자들이 시체를 숨겨놓고서 부활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드렸다고 한다면 과연 그들은 부활하지 않은 예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바칠 수 있었을까요?
거짓말인줄 뻔히 알면서 그 거짓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었을까요? 목숨이 아까워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혼비백산해서 벗은 몸으로 도망한 제자들이 사실도 아닌 가짜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자들의 순교적 삶은 예수 부활의 또 다른 확증입니다. 죽음이 두려워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간 자들이 이제는 주를 위해 죽기를 기뻐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제자들의 급변한 태도를 볼 때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고, 그 음성을 들었으며, 못자국난 손과 발을 만져봤던 것이 분명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뚜렷했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 일에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내가 비록 순교의 제물이 될 지라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확고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공격, 핍박, 조롱, 멸시, 두려움, 비난, 후회, 회의, 회유, 의심 등 온갖 종류의 공격으로부터 세상을 이기게 하는 강력한 버팀목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세우는 든든한 반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듯이 우리의 부활도 너무나 분명하고 뚜렷하기 때문에 부활신앙 위에 굳게 서서 예수님처럼, 제자들처럼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가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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