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전두엽’
은혜로운 상상력이여!
사람의 뇌는 뇌간, 변연계, 대뇌피질 세 영역으로 나누어져, 이를 ‘삼위일체의 뇌’라 부른다. 인간의 몸에서 뇌는 매우 복잡한 기관이지만 이해를 위해 조금 단순화시켜보면, 뇌의 세 영역에 인간의 삶이 다 들어있다.
뇌간은 몸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여러 기능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숨을 쉰다든지, 먹으면 소화를 시킨다든지, 심장에 의해 피를 순환시켜준다든지, 때가 되면 잠을 잔다든지 등의 기능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동으로 뇌간에서 통제, 처리한다. 생명의 유지에 기본적인 기능에 해당하는 뇌간은 파충류에게도 있는 기관이다. 변연계는 편도체를 중심으로 정서 기능에 해당하는 기관으로써,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 슬픔을 느끼고, 분노하며, 격한 감정에 빠지게 하고 때로는 두려움에 움츠러들게 한다. 이런 감정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변연계는 동물에게도있는 기관이다. 마지막으로 대뇌피질이 있는데, 이는 인간에게만 있는 기관으로 ‘인간의 뇌’라 불리는 영역이다. 온몸의 신경망을 통제하는 중앙통제시스템에 해당하는데, 특히 ‘전두엽’이 피질 영역에서도 대표적이다.
대뇌피질은 과거의 경험 내용과 새로운 정보와 경험 내용을 조합하여 ‘생각과 평가, 판단’을 끌어낸다면, 전두엽은 ‘상상, 추상, 추리’ 등의 사고영역이다. 만약에 전두엽이 없다면 인간은 단순한 컴퓨터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인간의 뇌에는 ‘전두엽’이라는 기관이 있어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 같다. 최근에는 ‘전전두엽’이라는 부분이 발견됨으로써 인간이란 존재가 새롭게 조명된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은 안정된 수입과 안락한 주거환경 그리고 적절한 교육을 통해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에게 필요한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에게 전두엽이라는 뇌가 있다는 것은, 사람은 그저 살아가는 것만이 아닌 어떤 꿈과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감지하고 느끼고 경험한다. 다른 동물과 달리 이러한 능력을 지닌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상상하고 그것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능력이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현대사회에 이르렀다. 인간에겐 물리적 자연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 있는 것만이 아닌, 있는 것들을 이용하여 없는 것을 창작해낸다. 원리를 파악해내고 그 원리들을 응용하여 새로운 것들을 발명해낸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인류는 자연계에서 최강자로 떠오른다. 그냥 우연히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일까? 오랜 진화의 결과라면 지금도 전두엽이라는 뇌 기관을 갖게 된 새로운 종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진화론도 일부분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충분한 설명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전두엽의 뇌는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임을 말해주는 물리적 기반이다. 인간에게 전두엽은 여타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 삶이란, 영적이며, 자연성을 초월하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한다. 대표적인 것이 꿈이다. 인간만이 꿈을 가진다. 인간만이 소망과 희망을 품고 현실을 극복한다. 그래서 사람은 빵으로만 충족될 수 없는 거다. 비록 우주와 비교해 티끌 같은 존재 같아도, 인간의 사고와 상상은 우주 저 끝자락까지 펼쳐질 수 있다. 비록 언젠가 죽음을 피할 수 없을지라도 인간은 죽음 너머의 저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은 영적이며 정신적인 존재다. 동물적 메커니즘에 제한된 몸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전두엽이라고 하는 뇌의 기관은 인간을 전혀 다른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모두가 전두엽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과거의 경험에 묶여있고, 어떤 이는 알코올과 약물에 묶여있다. 어떤 이는 나르시스에 묶여있고, 어떤 이는 대인 불안에 묶여있다. 전두엽이 몸(뇌간과 변연계)에 봉사하는가? 아니면 몸이 전두엽을 위해 봉사하는가? 전자는 몸의 욕구, 즉 뇌간과 변연계의 욕구를 위해 전두엽의 ‘상상, 추상, 추리’가 동원된다는 것이고, 후자는 전두엽의 ‘상상, 추상, 추리’를 위해 몸이 실천해 간다는 것이다. 몸의 욕구를 위해 전두엽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요령 피우는 ‘잔머리꾼’이라 하고, 전두엽의 욕구를 위해 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사상가’, ‘영성가’ 또는 창의적이고 철학적인 실천가라 할 수 있겠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해방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배불리 먹었던 ‘고기 냄비’(탈출 16,3)를 그리워한다. 그들의 불평에 하는 수 없이 하느님께서는 먹을 것을 내려주시지만 참으로 아쉽다. 어찌 먹는 것에 이리 묶여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군중에게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생명의 빵’은 육신의 빵이 아니다. 여기에서 생명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하신 말씀에서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길의 생명이요, 진리의 생명이다. 어떤 동물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전두엽의 인간에게만 허락된 길의 생명, 진리의 생명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원하신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더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에페 4,17)라고 말하며,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에페 4,21) 하였다. 이러한 진리를 듣고 배울 수 있는 존재가 전두엽을 갖춘 인간이다.
사람은 동물의 삶을 살 수도 있고, 인격을 갖춘 인간의 삶을 살 수도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에페 4,22-24)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에겐 거룩함과 의로움의 옷을 입을 능력이 있다. 한때 길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누구든 자신이 원하면 다시금 길을 되찾을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이유와 까닭이 있겠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나태함’이요, ‘게으름’의 죄가 될 수 있다. 자기 안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죄는 그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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