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중환자실의 어머니
이놈의 휴가철이 문제였다.
고속도로는 꽉 막혀있었고, 십수 년이 지난 차는 에어컨이 시원찮았다. 별수 없이 나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당연히 목과 등에 땀이 줄줄 흘렀다.
“저놈 저거! 공부는 뒷전이고 아직도 기타만 메고 다니네. 저거 언제 인간 될끼고! 임자! 점마 저거, 요새 마약 하는거 아이가? 요새 T.V 보니 젊은 놈들 특히 음악 하는 놈들이 약도 하고 그런다던데.”
대학 시절, 술에 취해 늦은 시간 집에 들어올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엌에서 각각 반주와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영감은 무슨 말을 그리 하요! 마약이라니? 우리 성태가 그런 아가 아니란 걸 잘 알면서.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소. 야야. 밥은 먹었나? 응 먹었다고? 그러면 얼른 씻고 자거라. 피곤할 텐데.”
당시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등이 열풍이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나는 공부는 뒷전이었고 늘 동아리방에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며 노래 연습만 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연습이 끝나면 술자리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간혹 음악 하는 동료 중에 금기였던 대마초를 피우는 녀석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그때 나는 지방에서 주최하는 몇몇 가요제에 입상하는 등 가능성을 보였지만, 큰 대회에 수상을 못 하니 가수로서, 작곡자로서 꿈은 요원했다. 게다가 그때 교제하던 여학생도 장래가 불투명한 날 떠났다. 내겐 몹시 힘든 시절이었다.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하여 중환자실로 올라가니 어머니는 산소호흡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엄마! 성태 왔어요. 눈 좀 떠봐요.”
누나가 억지로 어머니의 얼굴을 매만지며 오열했다. 그 모습에 울컥, 하고 눈물이 나왔지만 나는 울음을 삼켰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백 세까지 살 분이 이리 허망하게 가는 것을 나는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숨이 가쁜지 연신 헉헉거렸고 급기야 내 손을 잡으며 호흡기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당신의 손으로 호흡기를 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래서 병원 측에선 어머니의 손에 장갑을 끼워 줄에 매달아 놓았다고 했다.
“이틀, 사흘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겁니다.”
어느새 담당 의사가 옆에 와 있었다.
“그 정도입니까?”
“폐에 물이 많이 찼습니다. 모든 기관이 말을 듣지 않아요. 그 정도 기간이 아쉬우면 알부민 한 대 더 놓을 수도 있습니다만.”
생명 연장 장치로 알부민을 투여하면 더 살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의미한 연장으로 어머니의 고통을 더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중환자실 면회 규정에 따라, 오후 8시에 병원을 나선 우리는 B 시의 바닷가 횟집에 있었다.
그새 서울에서 형과 형수가 왔다. 형수가 내려온 건 의외였다. 십여 년을 시댁과 발을 끊은 그녀였다. 형수는 짧은 시간 어머니와 대면하고 손을 한 번 잡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부간의 오랜 갈등을 끝내려는 것 같았다. 부부간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형과 형수가 멀어진 것은 형이 은행을 그만둔 직후부터였다. 형수는 형을 미워하는 방법을 시댁과 멀리하는 것으로 택했다. 그게 형수로서 남편과는 별도로 시어머니에 대한 유일한 복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