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침묵이 있다.
아이가 잠든 방의 침묵과, 누군가 비밀을 삼킨 뒤의 침묵.
형사 강도윤은 오랫동안 그 두 가지 침묵을 구별하는 법을 익혀왔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 처음부터 끝까지 — 두 번째 종류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사건의 이름은 공식 문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사 메모] 사건번호 2026-CR-0311 / 피의자 미상 / 혐의: 국제 군사기밀 유출 및 금융시장 교란. 관련 키워드: 호르무즈 해협, 이란 선박 격침, 다우지수 이상 급락, 신원 불명의 영아.
마지막 항목이 강도윤의 눈을 붙잡았다.
신원 불명의 영아.
그 두 단어가 그를 이 미로 속으로 끌어당겼다.
12월 11일 오전 9시 22분. 서울 마포구 염리동 소재 아파트 3층 복도.
강도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복도는 이미 감식반 요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폴리스라인도, 하얀 장갑을 낀 수사관들도 아닌 — 복도 끝에 세워진 낡은 유모차에게로 쏠렸다.
유모차 안에 아이가 있었다.
생후 여섯 달쯤 되어 보이는, 까만 눈이 유난히 맑은 아이. 아이는 복도의 소란 속에서도 태연하게 손을 들어 허공을 잡았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 모든 어른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 아이는 뭔가요?"
강도윤이 부하 형사 이선호에게 물었다.
"피해자 최진배 씨 아랫집에 사는 아이입니다. 어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엘리베이터가 저절로 열리면서 유모차가 복도로 밀려 나왔다고 하더군요. 사건과 직접 연관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 이선호
강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동그란 눈과 눈을 마주쳤다. 아이가 웃었다. 작은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어떤 두려움도 없는 웃음이었다. 어떤 의도도 없는 웃음.
강도윤은 오랫동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잠깐 멈추는 느낌. 이 건물 안에서 한 사람이 죽고, 지구 반대편 바다에서 또 다른 무언가가 불타고 있는 지금, 이 아이만이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웃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이 아이를 목격자 명단에 올려두세요." — 강도윤
"예? 하지만 이 아이는 아직……" — 이선호
"말 못 하는 증인이 제일 정직한 법입니다." — 강도윤
피해자 최진배. 57세. 前 국가정보원 중동 담당 분석관. 퇴직 후 민간 군사 컨설팅 회사 '알파 스트래티지' 대표.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추정. 그러나 강도윤의 눈에 걸린 것은 사인이 아니었다.
최진배의 서재 책상 위에는 노트북이 열려 있었고, 화면에는 뉴욕증시 시세 창이 떠 있었다. 다우존스 -0.37%. S&P500 -0.52%. 나스닥 +0.08%.
그리고 그 옆에 손으로 급히 휘갈겨 쓴 메모지 한 장.
[수사 메모] HMZ-0311 / 기뢰 / 24h 이내 / 나스닥만 살아남는다.
강도윤은 메모지를 증거봉투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HMZ. 호르무즈(Hormuz)의 약자군요." — 강도윤
국가정보원 합동수사팀이 개입해 들어온 것은 오후 늦게였다. 검은 차 두 대가 아파트 앞에 조용히 섰고, 정장 차림의 남자 셋이 내렸다.
팀장은 손민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40대 초반, 표정이 없는 얼굴.
"강 형사님, 이 사건은 저희 쪽 관할로 넘어갈 겁니다." — 손민혁
"시체가 서울 아파트에서 나왔는데요." — 강도윤
"시체가 품고 있던 정보는 국제적 사안입니다. 오늘 새벽 미국이 호르무즈에서 이란 선박을 격침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발표했고요. 최진배 씨는 그 작전의 사전 정보를 최소 72시간 전에 입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손민혁
강도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 정보를 팔려 했나요? 아니면 막으려 했나요?" — 강도윤
손민혁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강도윤은 다시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창 너머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보였다. 저 도시 어딘가에서 오늘도 사람들이 주식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다우가 얼마 떨어졌다, 나스닥이 얼마 올랐다. 그 숫자들의 배후에 이런 방, 이런 시체, 이런 메모지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날 밤, 강도윤은 혼자 남아 최진배의 서재를 다시 훑었다.
책장에는 중동 관련 서적들이 빼곡했다. 그 사이에서 그는 낡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배경은 항구였다. 남자 셋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최진배, 나머지 두 명은 낯선 얼굴이었다. 사진 뒷면에 연필로 쓰인 글씨.
[수사 메모] '우리가 막지 못하면 파도는 여기까지 온다.' — 2019, 아부다비.
강도윤은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파도. 호르무즈의 파도. 그 파도는 이미 서울 염리동 3층 아파트까지 밀려와 있었다.
다음 날 오전. 강도윤은 금융감독원 특별조사팀의 박지현을 만났다. 30대 후반,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여자.
"호르무즈 격침 발표 6시간 전부터 특이한 움직임이 있었어요. 누군가 S&P500 풋옵션을 대규모로 매수했습니다. 동시에 방위산업 관련 주식도 집중 매집했고요. 그리고 나스닥 기술주는 건드리지 않았어요." — 박지현
"최진배의 메모에도 나스닥만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 강도윤
"그게 핵심이에요. 이번 사태는 원유 공급에 영향을 주는 지정학적 사건이거든요. 유가가 오르면 항공, 소비재는 타격을 받지만 기술주는 상대적으로 영향이 적죠. 이걸 아는 사람이 사전에 포지션을 짰다는 뜻입니다." — 박지현
강도윤이 천천히 물었다.
"최진배가 직접 거래했나요?" — 강도윤
"아니요. 최진배 명의의 계좌에는 아무 움직임이 없어요. 그 정보를 넘겨받은 제3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제3자는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 박지현
오후, 강도윤은 손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파 스트래티지의 다른 파트너는 누구입니까?" — 강도윤
"그건 저희도 파악 중입니다." — 손민혁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부다비 항구 사진, 보셨죠? 거기 서 있는 세 명 중 한 명이 지금 어디 있는지 당신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 강도윤
전화 너머의 침묵이 길어졌다. 강도윤은 그 침묵을 기다렸다. 두 번째 종류의 침묵. 비밀을 삼킨 뒤의 침묵.
"…… 당신, 더 이상 파고들면 위험합니다." — 손민혁
"최진배도 그런 말을 들었겠죠." — 강도윤
그날 밤 강도윤은 아파트 3층 복도를 다시 찾았다. 혼자였다.
복도는 고요했다. 유모차는 없었다. 아이도 없었다. 낮의 소란이 씻겨나간 자리에, 12월의 찬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복도 창가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생각은 항상 그 아이로 돌아갔다.
그 아이는 이 모든 것을 모른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사일이 날아든 것도, 최진배라는 남자가 죽은 것도, 누군가가 그 죽음으로 수백억 원을 벌어들인 것도. 그 아이의 세계 안에서 오늘은 그냥 손을 흔들고 웃은 하루였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 강도윤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생각했다 —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발소리가 들렸다.
그가 돌아서자,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50대, 창백한 얼굴, 코트 깃을 세운 채. 아부다비 사진 속의 두 번째 남자였다.
"많이 알아냈군요, 강 형사." — 남자
"최진배 씨는 막으려 했군요. 당신이 막지 못하게 했고." — 강도윤
남자가 멈추었다. 그의 손이 코트 주머니로 향했다.
강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복도에서 어젯밤 아이가 웃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이 지금 뭘 하려는지도, 호르무즈가 어디 있는지도, 다우지수가 뭔지도 모른 채로." — 강도윤
남자의 손이 멈추었다.
"그 아이 세대는 당신이 지금 내리려는 선택의 결과를 살아가야 합니다. 파도는 반드시 여기까지 옵니다. 최진배 씨 말이 맞았어요." — 강도윤
긴 침묵이 흘렀다.
남자의 손이 코트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 안에는 총이 아니라, 접힌 문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 최진배가 남긴 거요. 당신한테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자신이 먼저 죽게 된다면." — 남자
강도윤은 문서를 받아 펼쳤다.
호르무즈 해협 기뢰 작전의 사전 정보를 흘린 자들의 이름. 금융거래 내역. 공모 일시와 장소. 그리고 마지막 줄에 적힌 한 문장.
[수사 메모] '나는 이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알아야 한다.'
파도가 닿는 곳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공식 발표는 없었다. 신문에는 작은 기사 하나만 실렸다. '국제 금융사기 연루 혐의자 체포.' 호르무즈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강도윤은 며칠 뒤 다시 그 아파트 앞을 지나쳤다.
복도에 유모차가 있었다.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그를 알아보기라도 하는 듯, 작은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강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오래 그 웃음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늘 두 개의 세계가 있었다. 호르무즈의 파도가 치는 세계와, 아이가 웃는 세계. 숫자들이 오르내리는 세계와, 그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 손을 흔드는 세계.
그리고 그 두 세계 사이 어딘가에서, 강도윤 같은 사람들이 — 그리고 최진배 같은 사람들이 —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나 이곳까지 온다.
문제는, 그 파도를 마주했을 때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