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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잠언(50)/게으름
제목 : ‘성실’과 ‘정직’은 신앙인의 이름표
성경 : 잠 26:13~28
찬송 : 459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10203 낙양교회 수요예배
잠 26: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 26: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잠 26: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잠 26:16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잠 26:17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잠 26:18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잠 26:19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잠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잠 26:21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잠 26:22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잠 26: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잠 26:24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잠 26: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잠 26:26 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잠 26:27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잠 26:28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신앙인의 대표 이미지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본문 1~12절까지는 미련한 자에 대한 잠언이라면, 13~이하는 게으른 자와 잘못된 언행에 대한 잠언입니다. 보통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조차 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조차 하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자기가 태어난 몫은 해야 합니다. 사람이 최소한도의 자신의 몫을 해내지 못할 때 그것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몫이 되기에, 다른 사람은 자기 일도 해야 할 뿐 아니라 게으른 자의 일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몇 배의 부담을 지게 됩니다. 성경적으로 게으른 자라고 할 때는 반드시 가시적으로 게으른 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게으른 자가 세상적으로는 부지런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으로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은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보이는 복만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이름표는 무엇이야 할까요?
게으름은 미련함의 맨 얼굴(13~16절)
잠 26:13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13절과 비슷한 잠언이 22장에 나옵니다.
잠 22:13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두절에 ‘사자’가 등장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자는 ‘사할’이라고 하는데 장성한 수사자를 말하고 22:13절에 등장하는 ‘사자’는 ‘아리’로서 어린 사자를 의미합니다. 게으른 자의 변명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위험을 뚫고 나가서 일을 해야 먹고 사는 것이지 모든 위험 가능성을 다 미리 생각해서 머뭇거리기만 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하면 사자가 길에서 물 수도 있고 미친 사람이 운전해서 차에 치일 수도 있지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자에게서 사람을 피하도록 하셨고 또 믿는 자를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일하기 싫어서 집 밖에도 나가지도 않고 변명만 늘어놓는 것입니다. 핑계와 합리화가 게으른 자가 주로 사용하는 방어기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잠 26:1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게으른 자의 행동을 비유를 통해서 묘사하는 잠언입니다. 문짝은 돌쩌귀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침대나 소파에서 맴돌기도 합니다. 다른 잠언을 보면 게으른 자는 “좀 더 졸자, 좀 더 자자”가 삶의 모토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은 자아의 힘이 여전히 약한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게으른 자라고 진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나 청소년처럼 늦잠을 잔다면 그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저는 생체리듬이 비슷합니다. 제 시간이 되면 반드시 일어납니다. 전날 정말로 피곤한 일이 있었다면 혹 몰라도 대부분 같은 시간에 움직입니다.
잠 26: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게으른 자의 미련함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식욕까지 억누를 만큼 파괴적임을 보여 줍니다.
잠 19:24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이것은 게으름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으름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면 게을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부들의 경우에 밥하며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워 샤워도 안하고 심지어 양치질까지도 하지 않게 됩니다. 성도들의 경우에는 찬송할 힘이 없고, 기도할 힘도 없어집니다. 성경을 읽어도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이런 우울증과 게으름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잠 26:16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됩니다. 게으른 것만 해도 참으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거기에다가 자기가 다른 지혜로운 사람 일곱 명 보다 더 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이 통하겠습니까?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일곱 명보다 더 자신을 지혜롭게 여긴다는 것은 자기애성 성격 장애가 심하다는 의미입니다.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객관적으로 지혜롭고 명철한 모든 사람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망상 수준일 것입니다. 자기애성 성격 장애가 심한 사람은 부푼 풍선처럼 자기 과대성이 큽니다. 자기애성 성격 장애자와 게으른 자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떨어지지만 게으른 자들 중에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를 가진 자들이 일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게으름이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교만으로 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는 미련함의 극치인 게으름을 버리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과 환경을 탓하며 자신의 게으름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삶을 점검해 봅시다. 믿음 생활하는 성도와 게으름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허무는 언행(言行), 세우는 언행(言行)(17~22절)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싸움에 간섭하려 들고 험담과 거짓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잠 26:17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
자신과 무관한 다툼에 끼어들어 해를 당하는 자에 대한 잠언입니다. 동네에서도 다른 사람이 싸움할 때 꼭 끼어들어 간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 싸움이 간섭하는 사람의 싸움이 되고 맙니다. ‘간섭하다’(아바르)라는 말은 ‘화를 내다’, ‘분노하다’라는 뜻입니다. 다툼의 원인과 배경도 모른 채 성급하게 끼어들어 화를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나운 개의 귀를 잡은 것과 같아서 결국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장려하는 내용이 아니고 성급하고 부주의하게 다툼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잠 26:18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잠 26:19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이 잠언의 교훈은 남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속이는 것이 미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NIV 성경은 이웃을 속인 후에 들통 나면 “농담으로 한 말이야”라고 말하는 자는 마치 횃불을 던지거나 치명적인 화살을 쏘는 미친 사람과 같다는 의미로 번역한 것입니다. 근거 없는 루머를 퍼뜨린 후에 일이 드러나면 “그냥 해본 소리인데!”라고 의미를 축소시키는 반사회적인 성격 장애자의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정신 지체가 있는 사람이 살인하면 살인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더욱이 미친 사람의 행동은 책임을 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조현병자가 곁에 있다면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의도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악인이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놓고 악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적발되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축소하는 말을 합니다. 소위 ‘심신미약’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마음대로 거짓말하고 그 거짓말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습니다. 어차피 지옥의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잠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잠 26:21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말쟁이’로 번역된 ‘니르간’은 말로 친구나 이웃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잠 16:28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말쟁이는 ‘말을 많이 하는 자’, ‘말을 옮기는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웃의 비밀을 말하고 다니고 말을 가감하여 전달함으로 진의를 왜곡시키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없으면 다툼이 사라지는 것을 나무가 없으면 불이 꺼지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1절은 20절과 연관된 비유로, 다툼을 좋아하는 자를 숯불 위에 숯을 더하고, 불에 나무를 더하는 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말쟁이는 다툼을 일으키고, 그 다툼은 분쟁을 일으켜 공동체를 분열시킨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잠 26:22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같은 잠언이 18장에도 나옵니다.
잠 18:8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다고 솔로몬은 비유합니다. 평소에 먹는 음식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특별한 음식이나 맛있었던 음식은 그 맛과 냄새 심지어 그 정황까지 오래토록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처음 외국에 갔던 때 조기술 선교사님이 사역했던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갔는데 그때 선교사님이 바닷가 식당으로 인도해서 바다 가제 구이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그 바다 가제 구이가 생각이 납니다. 매콤하니 우리 입맛에 딱 맞는 별식이었습니다.
별식처럼 맛있다고 남의 말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의 말은 절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들 때문에 빌립보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상처를 주고 다툼을 일으키며 마음까지 지배하는 잘못된 말의 힘을 보며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는 잘못된 언행으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거나 다툼을 일으키지 말고 평화를 만드는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인터넷상에서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언어로 채워지는 댓글 문화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말할 때마다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만 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중상모략과 험담을 하지 말아야 하며 사소한 농담이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그 말이 큰 상처와 고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속이는 언행, 정직한 언행(言行)(23~28절)
잠 26: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잠 26:24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잠 26: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사람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거짓말하는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면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주면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정인이의 양부모는 어떠했습니까? 방송에 출연해서 정인이를 입양한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에 미움을 품었어도 온유한 겉모습으로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겉모습만 가지고 평가하면 안 됩니다.
악을 품고서도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은을 입힌 토기와 같습니다. 마음에 미움과 증오심이 있는 사람이 온갖 좋은 말로 자신을 꾸밀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속에는 속임수와 가증한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 잠언을 염두에 두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러 온 바벨론 사신들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들뜬 마음에 나라의 핵심적인 비밀들을 그들에게 다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유다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잠 26:26 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감추고 어떤 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앞에서는 속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악한 자를 분별하는 것은 혼자서는 어렵지만 여러 명이 함께 분별하면 거짓과 기만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조언하며 자문해줄 수 있는 멘토나 지도자들이 있는 회중과 관계할 때 영적으로나 관계적으로 속는 일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결혼한 사람의 장점은 덜 속임을 당하도록 피드백을 해주는 배우자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배우자의 분별력을 통해 속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런데 배우자도 한통속이 되면 좋은 피드백을 해 줄 수 없습니다. 도리어 더 큰 잘못에 함께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잠 26:27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자기 꾀에 빠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함정을 파는 자나 돌을 굴리는 자는 둘 다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가진 이들로 남을 해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반사회적인 행동을 해서 단기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그 행동이나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는 자신이 판 함정에 자기가 빠져 순식간에 멸망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모든 유대인들을 학살하려고 함정을 팠습니다. 특히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려고 높은 장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장대에 달리는 결과가 곧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악인의 행동을 보응하십니다.
시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7: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시 7: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잠 26:28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이 구절은 23,24,25,26절과 연결된 잠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첨하는 입은 거짓말하는 입입니다. 속마음과 다르게 말하는 혀는 상대를 미워하고 상처를 입히고 싶은 속마음을 숨기는 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후 반절은 겉으로는 아첨하는 말을 하지만 사실상 상대방을 해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상대방의 마음을 인식하라는 경계의 잠언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첨하는 자를 경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거짓말하는 혀와 아첨하는 입의 마지막이 파멸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줍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타인을 향한 미움을 버리고 정직한 말과 정결한 행동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신의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내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봅시다. 악한 의도는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악한 의도에서 나온 잘못된 행동은 반드시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가며 입술의 정결함을 지키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한 화려한 언변이나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에 현혹되지 말고 그 뒤에 가려진 악한 의도와 마음을 파악할 수 있는 분별력과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성실한 삶과 정직한 언행은 단순히 우리의 삶을 빛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실과 정직은 성도의 이름표이자 하나님의 성품과 지혜를 세상과 이웃에게 드러내는 전광판입니다. 성실과 정직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