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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김필곤목사/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히 10:19-25)
지난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친 후 한 성도님의 어머님 병원심방을 갔습니다. 연세가 많이 드신 분이십니다. 진찰 결과는 암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수술하시면 6개월 수술하지 않으시면 2개월 사신다고 의사가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정정하였습니다. 일도 잘 하셨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몸무게가 줄어들어 자식들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자고 해서 시골에서 올라오셔서 진찰을 받은 결과 이 땅에서 얼마 사실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손바닥 뒤집듯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지막이 다가옵니다. 아무리 젊은 사람도,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아무리 물질이 풍부한 사람도,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도, 아무리 권력이 있는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정들었던 모든 것, 떠나고 싶지 않은 애착이 있던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 할 때가 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 영원히 대통령 자리에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면 영원히 아름다움이 있고, 인기가 있으면 영원히 인기가 있고 부가 있으면 영원히 부가 있고, 지식이 있으면 영원히 지식이 있을 것으로 착각하면 사는 경우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그러나 창조된 것 중 영원히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때가 되면 건강도, 아름다움도, 지식도, 부도, 권력도 우리의 생명도 우리에게서 떠나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현명한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성경 25절은 말합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날은 인류 종말의 날, 예수님 재림의 날, 인생 종말의 날입니다. 변할 수 없는 날입니다. 확실히 다가오는 날입니다. 누구나 겪어야 하는 날입니다. 심판의 날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겪어야 할 날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날입니다(살전 4:16). 불신자에게 맹렬한 진노를 발하시는 날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영광의 혼인잔치를 베푸는 날입니다. 그 날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는 날, 다시는 사망이 없느 날, 애통이 없는 날, 곡하는 것이 없는 날, 질병이 없는 날이 있음을 믿습니까? 저는 이 사실을 확실히 믿고 살고 있습니다. "그날 밤 그날 밤에 주님 맞을 등불 준비됐느냐? 신랑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때 밝은 등불 들고 나갈 준비 됐느냐 그날밤 그날밤에 주님 맞을 등불이 준비 됐느냐 예배하고 예비하라 우리 신랑 예수 오실때 밝은등불 손에 들고 기쁨으로 주를 맞겠네 (162장 1절)" 그 날이 있습니다. 그날이 있음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일관의 관계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하나님을 예배한 일에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5).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모여서 예배하는 일에 힘쓸 것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고귀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앞으로 한 달 살 수 있다면 가장 중점을 두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모이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당시 모이기를 패하는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따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당시도 영적인 나태 때문에, 지적 교만 때문에, 종교적 허무주의 때문에, 지나친 기독교에 대한 비판 의식 때문에, 세상 쾌락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을 등한히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경건한 행위이며 가장 가치 있는 의식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찾는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예배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찾으시겠습니까? 부자를 찾으시겠습니까? 권력자를 찾으시겠습니까? 아름다운 미스 코리아를 찾겠습니까? 성경 요4: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성도를 찾으십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고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서 그렇게 징계를 받았습니까? 예배입니다. 마땅히 섬겨야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바알 신과 아세라 신께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잘못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것이 틀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려봤던 솔로몬 왕의 노년의 고백을 보십시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교훈을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참 안식을 누립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회복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미래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교훈을 받고 책망을 받고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치유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집니다. 예배는 믿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아무나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라는 말은 "참 대 제사장 되신 예수님께서 단번에 속죄 제사를 드렸으므로"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짐승의 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을 받았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의 존 전 즉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지고한 특권입니다. 그 길은 어떤 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이루어집니까? 20절 보십시오. 새로운 길입니다. 구약의 피의 제사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단번에 속죄 재물이 되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신 은혜의 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휘장이 되어 십자가에서 찢기심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그 길은 죽는 길이 아닙니다. 산 길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길입니다. (요14:6)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용기를 잃은 자가 용기를 얻는 길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자가 소망을 얻는 길입니다. 상처받은 자가 상처를 치유받은 길입니다. 예배 속에 임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용기를 얻고 희망을 간직하게 되고 죽음의 길에서 삶의 길로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살아나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용서받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치유받아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회개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 새로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내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22) 죄사함받고 심령이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이미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거룩해 졌으니 이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예배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대예배, 오후 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마을 교회 예배, 구역 예배, 가정예배 모이는데 힘써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2.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23).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과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이 소망입니다. "이제 끝났구나, 이제 죽는 구나, 이제 모든 것이 소용없구나"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이 오면 돈을 붙잡도, 쾌락을 붙잡도, 명예를 붙잡도, 권력을 붙잡도 쓸데없습니다. 더욱 견고하게 붙잡아야 할 것이 소망입니다. 오늘 성경 23절을 보십시오.
1)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흔들릴 만한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11장 36절 이하를 보십시오. 희롱과 책찔질, 결박과, 옥에 갇힘, 돌로 맞음, 톱으로 켬, 칼에 죽음,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 궁핍, 환난, 학대, 집을 잃고 방황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도 천국에 대한 소망,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대한 소망을 잃지 말라고 했습니다. 10장 34-37절을 보십시오. 영구한 산업이 있습니다. 큰상이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이기 오십니다.
2)그러므로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믿는 도리는 진리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말은 금방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잘 안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신문에 나왔다면 금방 믿어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한다고 하면 잘 안믿는 경향이 있어요. 마지막이 오면 휴지 조각처럼 아무 쓸데가 없는 것들 붙들지 말고 영원한 진리의 말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안된다하여도 우리 하나님이 된다고 하면 그 말씀 믿으십시오. 세상은 죽는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이 산다고 하면 그 말씀 붙드는 것입니다. 세상은 포기하라고 해도 우리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 절망합니까? 나이가 들었다고 없다고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소망을 품으십시오. " 우리 가정 신앙의 명문 가정 만들어 보아야 하겠다. 우리 아이 정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만한 아이 만들어 보아야 하겠다. 우리 공장, 우리 회사, 우리 교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로 만들어 보아야 하겠다. 나 정말 하나님이 칭찬하고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로 멋진 신앙인이 되어보아야 하겠다." 말씀 붙들고 소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나이 들었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모세 80에 시작하였습니다. 아브라함 75세에 약속받고 100세에 그 약속 성취받았습니다. 갈렙 80대 노인이 저 산지를 달라고 소망을 갔습니다. 가정 형편, 자녀의 능력 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어느 전도사님 간증 들었습니다. 집안이 너무 가난했데요. 다섯 식구가 한 방에서 자고 살았데요. 어머니가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아버지 무능합니다. 새벽 기도하고 와서 아이들 앞에서 기도합니다. 큰 딸 위대한 하나님이 쓰시는 음악가가 되게 해 주십시오. 큰아들 영혼을 고치는 하나님의 종이 되게해 주십시오. 작은 아들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이들 공부하라 하지 않고 밥먹기 전에 기도하라, 공부하기 전에 성경 보라를 교훈으로 삼았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기도가 그대로 응답되어 누이는 유학 갔다와서 유능한 음악가가 되었고 자신은 서울 대 나와 신학 대학원에 다니고 동생은 의대에 나와 군의관으로 있다고 합니다.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를 보십시오. 한나를 보십시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보십시오. 말씀 붙들고 소망을 가지면 그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3)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약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십니다. 약속을 번복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으면서까지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스데반 죽으면서 바울을 변화시키지 않았습니까?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바울의 마음에 얼마나 진한 감동이 남아있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 델리마쿠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에는 검투가 유행했습니다. 그는 검투사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잔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검투를 끝장내야하겠다고 그는 소원을 갔습니다. 그는 검투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악 무도한 검투는 끝낼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찔려 죽으면서 외칩니다.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잔악 무도한 검투는 끝낼지어다." 그의 죽어가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에 흥분이 사라졌습니다. 한 사람 두사람 떠나갔습니다. 그 후 로마에서 검투 경기 살아졌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한 시대의 난제를 끝냈던 것입니다. 오래 전 영국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선생님들이 한마디했답니다. 그 때 "이 아이들 중에는 후에 이 대영제국을 이끌고 갈 지도자도 나오고, 경제인도 나오고 예술인도 나오고 건강한 시민도 나올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학생 중에 윈스턴 처칠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처칠은 그 선생님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믿음을 보여주셨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커서 우리는 알았다. 믿음이 위대한 보배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주신는 소망과 믿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끝이라고 생각될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폴 마이어라는 성공 원인의 75%가 바로 목표설정에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탁월한 지도자 John Maxwell 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은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이 있고 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템플대학교를 창설한 러셀 콘웰 박사는 적어도 백만불 이상을 모은 사람들 4,043명의 생애를 조사한 결과 그들이 첫째로 가진 특징이 그들은 삶을 출발할 때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뛰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열화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의 과학자 에코노미 박사에 의하면 사람의 뇌세포가 136억 5천 3백만 개나 되는데 괴테가 0.4% 활용했고 아인슈타인이 0.6% 활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큰 꿈과 목표를 가지고 분투 노력하면서 1%만 활용하면 이들 보다 더 큰 업적을 남길 수 있고, 역사 위에 등장하는 인물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중학교 때 3년이나 영어 낙제로 진급을 못했고, 발명왕 에디슨은 어릴 적에는 "열등아"였고, `전쟁와 평화'의 저자인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계속 낙제점수를 받았고,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의 계기를 만든 J 와트도 "얼간이"로 낙인 찍혀지만 소망을 가지고 나갈 때 그것들이 이루어졌습니다.
3.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야 합니다(24).
사람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위기가 오면 올수록 더욱 대인관의 관계에서는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꼭 어린 아이들처럼 욕심장이가 됩니다. 그러나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격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 하나 신앙 제대로 간수하는데 끙끙거리며 인생 살지말고 나이가 들고 주님 앞에 갈 날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주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사회학자인 동시에 신학자인 토니 캄플로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는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을 때는 바르게 살지 못한 것과, 바르게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죽는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분이 떠난 후에 가장 오래 남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분을 통해 격려받은 사람입니다.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은 사람입니다. 격려하기는 하되
1)서로 돌아 보아 격려하라고 합니다. 돌아 보아라는 말은 깊이 생각하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피상적으로 돌아보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현재시제로 계속해서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한 번만 돌아보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2)사랑으로 격려하라고 합니다.
3)선행으로 격려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로 사랑을 실천함으로 격려하라고 말씀합니다. 입으로 격려합니다. 말로 격려합니다. 미소로 격려합니다. 행동으로 격려합니다. 물질로 격려합니다. 심방으로 격려합니다. 편지로 격려합니다.
성도들 기 팍팍 죽이지 마십시오. 목회자들 힘 완전히 빠지게 하지 마십시오. 봉사자들 용기 꺽지 마십시오. 신앙 생활하면서 참 안타까운 것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여 장로님이 되고 안수집사님이 되었다는 사람 중의 일부는 목회자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어떻게 하면 헐뜯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경계할 것인가? 마치 형사처럼 죄를 찾는 사람같고 라이벌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남의 약점 들추어 내어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남의 실수 도마에 올려 놓고 요리하는 곳이 아닙니다. 드러난 상처는 조그마한 바람에도 아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격려받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선행으로 세워주어야 하는 곳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모여서 서로 나누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보십시오. 배반한 베드로 얼마나 격려해 주십시니까? 믿음없는 도마 얼마나 격려해 주십니까? 하나님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엘리야, 다윗, 모세 하나님의 사람들을 얼마나 격려해 주십니까? 자녀를 기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싻을 잘라버리면 안됩니다.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 싻도 자라지 않았는데 뭉게지 마십시오. 아직 5살도 안되었는데 쓸모없는 존재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성악가 카루소는 나폴리의 한 가난한 집안에서 7명의 아이들 중 세 번재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레슨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선생님은 성악가로서 자질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아들을 향해 어머니는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너는 틀림없이 위대한 성악가가 될 거야. 엄마는 널 믿는다." 카루소는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 계속해서 혼자 성악 연습을 하여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의 학교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소년시절의 앙드레 지드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한 소년이었답니다. 그는 꾀병으로 3주동안이나 학교에 결석한 적도 있고 가련할 정도로 겁이 많고 심약한 학생이었답니다. 그런데 한번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를 낭송하도록 했다니다. 학생들은 그저 평범하게 시를 읽었고 앙드레 지드는 감정을 한껏 실어 멋지게 시를 낭송했답니다. 선생님은 그에게 칭찬해주었답니다. "넌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될 소질이 있다" 이 한마디가 그를 위대한 문학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지휘자의 '격려'와 '칭찬'이 명곡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천재이지만 그는 학창시절 선생님이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성적표에 기록할 정도로 공부를 못했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낙담해 하는 아들을 오히려 달래며 "아들아,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단다. 네가 다른 아이와 같다면 너는 결코 천재가 될 수 없어" 라고 격려하였답니다.
부부 서로 기죽이지 마십시오.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존재야, 당신이 뭐하겠어, 당신이 하는 것 다 그렇고 그렇지." 서로 뭉게서 좋을 것이 뭐 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경상도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이 읍내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놀러 나온 서울 부부가 있었습니다. 부인이 "자기야~나 지갑이 무거워서 들고다니기 힘들어 저기 망사 지갑 사줘" 그랬답니다. 그러자 서울 남자가 그래, 자기가 사달라는 건 다 사줄께.."라며 사주더라는 것입니다. 한 번도 남편으로부터 따뜻한 소리 못들어 본 경상도 부인이 너무 부러워 다른 사람보기 민망할 정도로 아양을 떨며 "지도 예 지갑이 무거워서 예 그러는데. 망사 지갑 하나 사주이소~" 그랬답니다. 그러자 남편이 "와? 돈이 덥다카드나?"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남은 기간이 얼마 안 남으면 안 남을수록 서로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힘을 주시는 용기를 주십니까? 무능한 자에게 피곤에 지친자에게 어려움 당한 자에게 찾아 오셔서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31)"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않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1010장)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 그리스도의 편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대신하여 격려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남은 한 시대 격려자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세워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자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우리는 서로를 사랑으로 선행으로 격려하면서 어려운 한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하나님을 예배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25).
2.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믿는 도리를 굳게 잡고 견고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23).
3.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해야 합니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