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석 용 / 성결대 실천신학
목 차
Ⅰ. 서 론 1. 문제의 제기 2. 연구의 필요성 3. 연구의 방법 4. 연구의 제한점 5. 용어 정의 Ⅱ. 사이버 세계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 1. 사이버세계에 대한 구약적 이해 1) 속도의 증가 2) 사이버 세계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 2. 사이버세계에 대한 신약적 이해 1) 도구의 가치 2) 선한 도구 3) 선한 목적 3. 사이버 세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 1) 정보혁명 2) 국경 없는 시대 3) 정보 홍수 4) 정보 충격 5) 정보 인식 6) 정보 자본 7) 가상세계와 의사소통 문제 Ⅲ. 교회의 도전 1. 성서적 정보 인식의 구축 1) 이 땅에 있는 교회 2) 불순종에 따른 문제 2. 가상세계에 대한 교회적 도전 3. 사이버 세계의 긍정적 사용 1) 부정적 사용의 거부 2) 인터넷 세례 3) 인터넷 성만찬 Ⅳ. 연구방법 1. 조사방법 2. 연구도구 3. 자료분석 및 분석체계 4. 연구의 가설 5. 연구의 제한점 Ⅴ. 결과 및 해석 Ⅵ. 요약 및 결론 1. 요약 2. 제언
참고 문헌
Ⅰ. 서 론
1. 문제의 제기
새 천년 21세기는 하나님의 카이로스(kairos)가 인간시대에 열려있다. 전자메일, 파일전송, 원격로그인, 파일검색, 주제토론, 실시간 원격대화, 목회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러한 단어들이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성경보다 더 가까운 말이 되고 있다. 인터넷은 지리적인 경계, 시간적인 경계, 그리고 연령적인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인간의 속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정보고속도로가 경쟁적으로 진행되면서 세계는 한마디로 지구촌이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다. 사고에 생활양식까지 변모시키고 있다. 교회에도 가상교회와 가상교인이 등장할 만큼 복잡해진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교회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고, 특히 목회자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결코 이르거나 낯설지 않다. 한국교회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시대적 과제에 대하여 복음적 영성으로 응답을 해야한다. 특히 인터넷과 대중미디어의 영향으로 낮은 접촉문화(low touch culture)에서 높은 접촉문화(high touch culture) 사회로 바뀌고 있다. 대중문화의 홍수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정신적 공허와 삶의 무기력 한 상태에 빠져있다. 또한 한국교회는 젊은 청소년들의 욕구를 복음적으로 충족하는 복음적 영성에 기초한 고감도의 복음문화를 젊은이들과 신자들에게 제시하는 문화적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다행히도 젊은 문화사역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독교 사이트를 사이버 바다에 띄우고 있다. 이들은 X세대와 N세대들을 예수세대로 바꾸겠다고 한다. 온라인(Online)에서 이들과 의견을 나누고 오프라인(Offline)에서 재교육을 실시해서 진정한 문화리더를 생산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작은 공간에서 여러 명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세상에 소금과 빛의 참 맛을 내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터넷으로 만나는 네티즌을 먼저 바르게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양창삼은 라이시의 5법칙을 목회자에게 연결시켜 적용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법칙을 보면 거미줄, 네트워크, 팀워크, 이를 연결하는 컴퓨터가 정보화시대에 목회자가 갖춰야 할 기본도구라는 것이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컴퓨터를 중심으로 발신과 수신이 거미줄처럼 연결된다. 이 거미줄의 중심부에 현대에 목회하는 목회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터넷의 보편화로 앞으로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인터넷을 활용하는 교인들도 확산되고 잇다. 그 결과 인터넷속의 가상교회만이 왔다갔다하며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가상교인들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가상교회에 대한 선호가 늘어감으로 인해 교회에 대한 개념이 점차 바뀌고 건물교회의 교인수가 줄어들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현대 교인들이 사이버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하고 있으며, 또한 컴퓨터와 인터넷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으며, 어떠한 정보를 가장 많이 얻고 있는지, 그리고 사이버교회(syber church)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미래목회를 대응하는데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2. 연구의 필요성 21세기는 인터넷 시대이다. 각 가정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가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의 '2000년 정보통신부문 사회통계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정보통신 혁명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다. 컴퓨터를 1대 가진 집이 42.9%, 2대 이상 가진 집이 3.6%로 1가구 당 평균 0.5대를 갖고 있다고 했다. 1997년에는 1가구 당 0.3대 였다. 또한 컴퓨터를 어디에 쓰느냐 하는 질문에 10명중 4명(40.4%)이 'PC통신 및 인터넷'이라고 답했다. 3년전 조사에서는 7.9%에 그쳤다. 또 6세 이상 인구 중 절반 이상(51.6%)이 컴퓨터를 다룰 줄 안다고 답을 하였다. 또한 20대는 1주일에 평균 22시간 컴퓨터를 사용한다고 답했다. KBS 뉴스에서 보도한바에는 '1주일에 인터넷을 사용하는 시간이 1997년도에는 1가구 당 4시간 하던 것이 200년도에는 10시간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조사를 한 바에 의하면 10명중 1명만이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고 응답을 하였다. 현대교인들은 얼마나 컴퓨터를 다룰 수 있으며, PC 또는 인터넷을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가? 각 교회마다 '뒤쳐지면 죽는다'고 말한다. 네티즌 교인들이 탄생하고 현대교인들은 인터넷을 통해 유명 목회자들의 설교를 듣고 사이버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런 상황에서 뒤쳐지는 교회는 당연히 도태되고 만다. 교인들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현대교인들의 사이버인식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것은 최근 나타나는 유형 중 하나가 부흥하는 교회는 대부분이 인터넷을 적절히 이용한다는 것이다. 교회 홈페이지나 인터넷방송이 흥보와 전도를 대신할 만큼 그 비중이 커졌고, 또 가장 확실한 선교대안이라고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 현재의 추세이다. 이 같은 추세에 따라 교계에서도 교회 인터넷방송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들 기관들은 교회의 예배를 포함한 각종 활동들을 인터넷을 통해 보급함으로써 멀기만한 선교의 길을 한발 당겨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형체없는' 교회가 인터넷에 세워지고 있다. 본 연구자가 사이버교회들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으며, 유즈넷(Usnet)모임의 하나인 종교그룹에 메시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땅위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사이버교회는 얼마나 될까? 그들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또 사탄의 교회는 어떠한 방법으로 네티즌들에게 접근하고 있을까? 21세기 이후의 영적 전쟁은 인터넷에서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이 땅에 존재하던 기존의 교회들은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 사이버교회들과 영적 전쟁에 직면해있으며, 싫든 좋든 이기기 위한 투사의 열정으로 사이버공간의 영적 전쟁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형식과 격식을 갖춘 전쟁이 아니라 타협과 협상, 휴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싸움일 것이며, 아무도 중재할 수 없는 종말적인 전쟁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1998년에 인터넷에는 1만개의 기독교 웹사이트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제 사이버와 관련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서 목회자는 그 대책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사이버는 실천신학의 각 분야에 들어와서 신학을 긴장시키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가장 민감한 거부의 반응을 나타내는 분야는 예배학과 설교학으로써 교회를 해체시킬 우려를 안고있다는 이유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제 이것에 대한 복음주의적 입장규명을 요구받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전도학, 교회행정학, 기독교교육학과 목회상담학에서는 사이버 자체의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익명성과 편리성 등의 긍정적인 요소로 인해서 그 응용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다. 목회자와 신자가 현실세계의 몇 가지 장를 해소하고 사이버공간이라는 새로운 장(field)에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연구자는 현대 신자들의 사이버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그 대응책을 실천신학분야에서 연구하므로 목회자에게 사이버에 대한 교인들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며 대응할 수 있는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 사료되어 연구하게 되었다.
3. 연구의 방법 본 연구는 서론에서는 문제의 제기와 연구의 필요성 및 연구의 방법은
4. 연구의 제한점
본 연구는 현대 교인들이 사이버에 대한 인식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로서 다음과 같은 제한점을 둔다. 본 연구의 대상은 현재 대한민국 경인지역에 위치한 교회에 속해 있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조사 연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전체 한국 기독교 신자들의 의식으로 확대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음을 밝혀둔다. 또한 본 연구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이버인식 즉 사이버 세계, 사이버 목회, 사이버 상담 등에 관한 조사 연구이므로 대상자들에 따른 편차가 많을 것임을 밝혀둔다.
5. 용어의 정의
인터넷(Internet) - 인터넷은 처음에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미국은 1960년대 소련의 핵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고, 세계 도처에 흩어진 미군들에게 만약 핵 공격을 받은 후에도 명령을 내릴 수 있을 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중앙의 통제를 받는 통신망에서, 만약 중앙 통제소가 파괴된다면, 더 이상 해외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전체적인 망을 관리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관리되고, 어느 한 곳이 파괴되어도 자료는 원하는 곳으로 전달되는 통신망이 필요하게 되었다. 미국 국방부에서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통신망을 연구하여 하나의 네트워크(ARPA. net)를 만들었고, 그후 군사망에서 분리되어 학술, 연구 정보망으로 공개되었는데, 이것이 오늘의 인터넷이 되었다. 인터넷(Internet)이란 말 그대로 네트워크(Network)의 네트워크, 즉 여러 네트워크들이 묶여 이루어진 네트워크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 있다. 어떤 단체나 기관도 인터넷을 총괄적으로 관리하지 않는다. 단지, 작은 네트워크은 자체적으로 관리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인터넷이 관리되고 있지는 않다.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 인터넷을 이해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인터넷 도구가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월드 와이드 웹(WWW)이라는 하이퍼텍스트(hyper text)를 통해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도구이다. 화면에 나오는 단어를 선택하면 그 단어에 해당하는 정보가 다시 출력되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 도구가 바로 웹이다. 즉 문서가 다른 문서로서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하이퍼텍스트이다. 이것은 백과사전과 비슷하다. 백과사전에서 어떤 단어를 찾으면 설명이 나오는데 설명 중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를 다시 사전에서 찾으면 설명이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즉 웹은 관련된 자료들을 서로 거미줄처럼 연결시켜 놓은 형태이다. 하이퍼텍스트(hyper text)는 문자는 물론, 음성, 정지화상 및 동화상까지 지원함으로 하이퍼미디어(hyper media)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 가상 현실이란 "컴퓨터를 이용하여 가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그 환경 내에서 3차원의 의사체험(擬似體驗)을 가능하게 하는 첨단 기술"로 정의될 수 있다. 즉 가상 현실은 실제 물체는 없지만 이를 시뮬레이션(simulation) 해 인간의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느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사이버세계(Cyber space) - 컴퓨터와 인터넷이 연결 해놓은 네트워크 상에서 이루어지는 인간대 인간의 만남, 인간대 정보의 만남, 인간대 가상현실과의 만남 등을 총칭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장을 말한다.
멀티미디어(Multimedia) - 사전적인 뜻은 여러 가지 매체 또는 다중매체이다. Multimedia란 multi(복합, 다양함)와 media(매체, 미디어의 복수)의 합성어로써, 다중매체, 혹은 복합매체란 뜻이다.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미디어의 시대적 역사발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60년대 이전의 활자미디어시대에는 신문이나 잡지, 서적 등에 활자로 정보를 기록하고 저장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전화나 라디오 등이 전파미디어를 통하여 음성정보를 시간과 거리의 개념을 초월하여 전달하는 전파미디어시대였다. 1980년대는 T.V나 영화 등과 같은 음성정보와 영상정보를 동시에 전달하는 영상미디어 시대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기존의 미디어 형태를 개조하거나 복합하여 새로운 기능을 하는 CATV등의 뉴미디어(new media)가 등장하였다. 현대는 인간의 의사소통의 여러 수단들, 즉 음성, 영상, 그림, 문자 등을 통합시켜주는 시스템으로 여러 가지 미디어를 모아서 하나로 통합한 것이 멀티미디어이다. 좁은 의미로 멀티미디어란 음성, 영상, 문자 등의 다양한 미디어들을 컴퓨터라는 하나의 매체로 통합하여 상호 작용성 즉 대화성 등의 총체적인 기능을 제공하는 컴퓨터시스템으로 정의한다.
Ⅱ. 사이버 인식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인터넷, 멀티 미디어, 하이퍼 미디어(hyper media) 등 이러한 언어의 사용으로 인해서 마음이 바빠지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에 익숙지 못하면 무엇인가 뒤진 것 같고 과거의 한 부분으로 떠밀려 가는 듯한 불안함에 우리도 언젠지 모르게 무엇인가 준비를 해야한다고 고집스럽게 생각되고 있고 또한 준비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관심은 역사 이래로 지속되어 왔지만 근래처럼 미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증거이다. 더구나 새로운 '밀레니움(Millennium)'을 이제 막 시작한 역사 지평 속에서 21세기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니라 새로운 현실이다. 특히 1960년대의 벨(Daniel Bell)과 칸(Herman Khan)을 중심으로 한 낙관론적 미래론자들이 미래 과학과 기술에 미래 사회를 위존 하여 미래 사회를 미화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세계의 인구 식량, 전쟁 등의 갈등을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이 가능하리라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인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예측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급진전하였다. 옛 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은 탈냉전은 세계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변화시켰고, 이에 따라 베를린 장벽의 붕괴, 남북 예멘의 통일과 재분열 등은 마치 전쟁의 종식과 세계 평화의 실현이 현실화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원심분리적 민족국가의 출현과 자국 이기주의는 또 다른 갈등을 야기했고 세계가 하나가 되는 듯한 중심 지향적 구심 운동과 변경 지향적 원심 운동이 동시적으로 일어나 새로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과 궁극적 목적에 의구심을 품게 하며 이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오히려 미래 세계에 대한 열린 마음을 지니기보다는 오히려 폐쇄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며, 특히 교통 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세계가 하나가 되는 지구촌의 형성이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견해에 반하여 오히려 타문화에 흡수 동화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문화적, 종교적 영역을 더욱 강화하고 이것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이 사용하는 미디어와 국가 기반시설을 이용하여 전파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고도의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고속도로를 다니면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정보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국가의 중요한 기반 사업으로 인정하고 국책사업으로 삼고 그것의 건설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인터넷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 사이버 세계에 대한 구약적 이해
사이버라는 단어는 헬라어 큐베르네테스( )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뜻은 :조정"과 "제어"의 의미를 내포한 "조타수(steerman, helmsman)" 또는"선장(captain)" "항해사(navigator)"를 뜻한다. 구약성경에는 이 단어가 "선장( )" 이라는 뜻으로 에스겔 27장 8, 27, 28, 29절에 걸쳐 4회사용 되었다. "시돈과 아르왓 거민들아 네 사공이 되었음이여 두로야 네 가운데 있는 박사가 네 선장이 되었도다(겔 27 : 8)" "네 재물과 상품과 무역한 물건과 네 사공과 선장과 네 배의 틈을 막는 자와 네 장사와 네 가운데 있는 모든 용사와 네 가운데 있는 모든 무리가 네 패망하는 날에 다 바다중심에 빠질 것임이여(겔 27 : 27)" "네 선장의 부르짖는 소리에 물결이 흔들리리로다(겔 27 : 28)" "무릇 노를 잡은 자와 사공과 바다의 선장들이 다 배에 내려 언덕에 서서(겔 27 : 29)" 이와 같이 넓은 의미의 사이버 스페이스의 형성은 문자의 사용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은 사이버스페이스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동일한 축의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언어를 허락하셨다. 노아 홍수사건이 있은 후 인간이 사용하던 구음(口音)이나 언어(言語)가 한가지였다. 언어만을 사용할 때의 의사소통은 시공의 제약을 엄격히 받았다. 한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이 널리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의 대화를 거쳐야 했다. 그 의사전달의 매체는 오직 하나, 인간의 내부기억이었으며, 따라서 전달되는 정보는 불가피하게 인격적이었다. 즉 기억을 소유한 사람에 속한 정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자는 전달자에 영향을 받지 않고 원래의 화자와 마지막 청자가 직접 만나게 되는 효과를 가졌다. 비유하자면 인간은 이제 큰 칠판을 하나 가진 셈이 되었다. 누구든 와서 그 칠판에 글을 써놓으면 몇 천 킬로 떨어진 나라의 몇 백년 후의 사람이 와서 보게 되는 것이다. 문자를 통하여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에게서 배우고 아퀴나스(Aquinas)는 성 어거스틴(St. Augustin)에게 배웠다. 결국 책은 우리가 물리적으로 속한 가족과 직장과 동네와는 별도로 개인적이며 정신적인 소속을 만들어준다. 사람의 정신생활이 가질 수 있는 별도의 세계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컴퓨터 통신이 발달하면서 그 안에서의 인간활동이 사회적이며 쌍방적이고 대화적인 성질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비로소 일상세계와 비견할 만큼 사람들을 소속시키는 잠재력을 가진 또 하나의 세계 즉 제2의 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인류 최초의 미디어 역시 구전(Oral)이었다. 유대교는 야훼의 말씀을 음성과 시각적인 효과로써 전달했다. 또한 기억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이야기 해줌으로써 신의 뜻을 깨달았다. 자연히 공동체의 형태는 부족단위를 이루게 되었다. 이 떄에 신은 진노와 열정적 감정을 지닌 한 인격으로서 공동체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분으로 경험되었다. 이러한 단계에서 지금은 기독교의 내용이 인쇄에 의한 문자 매체로부터 전자에 의한 멀티미디어로 전환되어가는 현실은 커다란 도전이다. 교회는 이렇게 예상되는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을 찾게끔 하는 적극적인 도전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창 1 : 10)"는 선언은 우리의 고백이다. 즉 '살아있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적 서술'이다. 이 신앙고백 때문에 세계는 창조론에 입각하여 신과 상관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 신의 세계 창조는 '우발적'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성경은 우발성에 근거한 사이버세계와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전혀 다른 존재임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들 중의 하나의 도구가 바로 통신수단의 발전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창조 멀티미디어는 전통적인 신(神) 이해가 보다 총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전환되기를 촉구한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신은 결코 문자에 의하여 추상화되거나, 희귀한 정보로 처리되어 주고받을 수 있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특정 감각기간을 통해서 전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기관에 의하여 균형 있게 포착이 될 때 하나님은 분석되거나 추상화되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 이를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하는 매체가 멀티미디어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부정적인 대답을 주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만물을 통하여 신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으나, 우리를 사랑하여 그의 아들까지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구원 자 되시는 하나님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선언에 따른 창조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형상'의 인간으로부터 영적 존재로서의 가치를 찾고자 할 때도 인간의 신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육과 영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진술로 볼 때 사이버세계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현실세계와 다른 가치를 둘 것을 경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속도의 증가 미래 사회의 가장 뚜렷한 현상은 속도감의 증가라고 성경은 이미 예언하고 있다. 성경은 미래 현상을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다니엘 12:4)"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가속적 변화는 미래 충격의 가장 큰 요인이다. 엄청나게 빨라지는 가속화 현상은 적응력을 상실한 미래 인간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사물의 발달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1시간이지만 어떤 일에는 10분으로 느껴지고, 또 다른 일에는 10시간으로도 느껴진다. 우리에게는 1시간이라는 객관적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10분 혹은 10시간이라는 주관적, 경험적 시간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을 사는 우리는 성경 속에 나오는 수백 년을 산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 사회 변화의 가속화 현상의 주도적 역할은 '교통수단의 발달'이다. 최초의 장거리 교통수단이었던 낙타는 시속 8마일을 갈 수 있었다. 낙타는 기원전 6.000년 당시에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1960년대에는 시속 4.000마일의 로켓 비행기가 발명되었고, 우주선의 속도는 18.000마일이나 되었다. 그리고 현재 미 공군은 시속 17.000마일의 항공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음속보다 무려 25배나 빠른 이 항공기는 서울에서 뉴욕까지 2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미래형 교통수단이다. 이 여객기가 보급되면 우리는 아침 첫 비행기로 뉴욕에 가서 업무를 본 후 점심을 먹고, 저녁 비행기로 돌아와 한국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는 '지구촌 일일 생활권'의 생활문화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교통의 가속화와 더불어 사회 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기술의 가속화' 현상이다. 1900년에 접어들면서 4행정식 자동차 엔진의 발명은 급속한 속도의 발달을 가져왔고, 더구나 자동차의 생산은 기술의 가속화 현상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하루에 수백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조립라인을 창안한 이후 자동차의 생산이 가속화할 뿐 아니라 자동차를 쉽게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의 생활 속도가 가속화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초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시작된 혁명적 조립생산 라인은 전세계를 지배하는 컨베이어 생산시스템이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컴팩컴퓨터 회사에서 개발한 모듈러 셀 방식이 급속하게 보급되고 있다. 분명히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인간의 역사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하는 현상과 지식이 팽배하여 지식 사회로 변하게 될 현상은 미래 사회의 가장 분명한 2대 현상이다.
(1). 재물의 우상화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결별의 외형적 원인은 서로의 소유가 너무 많게 되어 동거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창 13 : 6). 경제적인 발전은 결국 공동체 파괴를 가져오기 쉽다. 경제 발달은 인간관계의 상실이라는 것과 함께 주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신적 삶의 추구보다는 더욱 물질적인 삶의 추구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성경의 경고처럼 세상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금전 만능주의를 넘어 재물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거대한 표면적 신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가속화 될 것이다.
(2) 성경의 도전 세상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들(창 3 : 6)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며 그렇게 살다가 결국 그들이 갈대로 갈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 사랑을 가지고 세상 사람을 구현하며, 그러한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도전하는 모습을 명령받은 천국에서 파병한 하나님의 영적 군대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좋은 군대이며 신자의 싸움의 무대는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을 살되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매 순간마다 듣고 있다. 참 어려운 것은 세상을 살면서 세상 원리로 살지 말라. 세상이 추구하는 목적은 너희들의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을 여행하는 나그네요 행인이요, 세상을 전복시키기 위해 온 십자가의 군대이다. 이 세상, 이 나라를 위하여 일하지 않고 살지 않는다. 신자에게는 세상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일터인 것이다. 세상 한 복판에서 자기 정체를 분명히 하고 살아가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행세하는 사탄은 교회가 자신의 유일한 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세상의 이면에 검은 손을 의식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기호와 자기 의지로 무엇인가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영적인 악한 세력이 있는 것이다. 오늘도 영적 전쟁은 치열하게 벌여지고 있다. 휴전은 교회의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탄은 인간에게 휴전을 얘기해 오고, 서로 화목하게 잘 지내자고 말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이 교회의 전투적인 모습이며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이다. 성경 곳곳에 세상에 도전한 교회의 모습이 있어 왔다.
2) 사이버 세계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 바벨론 포로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당'이라는 새로운 예배 처를 탄생시켰다.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종교는 성전 중심이었으나, 포로기 중 예루살렘의 성전은 그들의 마음의 자리에 고향으로 남았고, 실제로 회당에 그들의 종교생활의 중심에 자리하였다. 회당은 그들의 예배 장소였고, 교육의 장이었으며, 그들 공동체의 한 가운데 자리하였다. 성전에서 회당으로 그들의 종교행위의 중심지가 전위되면서 그들의 신관도 성전에만 계시는 하나님으로 제한되었던 한계를 극복하고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관이 확대되었고, 이는 히브리 종교 자체의 세계화의 계기가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두 부류의 사람을 애써 찾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하나는 그 분의 잃어버린 자요(눅 19 : 10), 다른 하나는 그분을 예배하는 자다(요 4 : 4).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예배자로 인간을 부르신 그분에 부르심에 순종해야 한다. 시편 100 편은 "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배의 참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감사'는 인간의 삶에 오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온 땅에 충만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노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이버세계는 인간의 거룩한 장소가 어느 한 지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미치게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탈 신체성은 사이버공간의 인간에게 불가피한 현상이다. 언제나 실재의 양면성, 즉 육과 영의 통합적인 이해에는 이르지 못하여도 그 가능성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사이버 세계에 대한 신약적 이해
신약성경에는 사이버라는 단어를 두 곳에서 역시 선장이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사도행전 27장 11절과 요한계시록 18장 17절에 사용되었다. " ……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의 ……(행 27 : 11)". "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계18 : 17)". 구약시대의 단일 미디어는 멀티미디어로 성육신하고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음성으로만 존재했다. 인류 최초의 범죄자인 아담을 찾으실 때도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을 찾으실 때도 하나님은 목소리로만 메시지를 전달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하는 스피커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헤브라이즘은 귀라는 단인 미디어에 의존한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상황이 바뀐다. 예수께서 토탈 미디어(Total media)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란 하나님이라는 가장 추상적인 진리가 감각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을 말한다. 천상에만 있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과 똑같은 감각으로 이 땅에 내려 왔다는 것이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의 메시지가 육화(肉化) 되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심지어는 동화상으로까지 보여주는 다각적인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통해 인간과 교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모은 미디어의 총체적인 혼합 곧 멀티미디어로서 예수께서 오셨던 것이다.
1) 멀티미디어로 사역한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행위를 뒷받침해 주는 모든 이적행위가 그의 멀티미디어적 사역을 잘 보여주시는 것이 된다. 바다위로 걸어오심(마 14 : 22-27), 바다를 잠잠케 하심(막 4 : 35-41), 진흙을 침으로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심, 헐몬산에서 변화되신 사건(눅9 : 28-36) 등 그의 모든 이적행위들이 예수님의 멀티미디어적 사역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저주를 받은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사귐 즉 화해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인간들은 이것을 통해서 가장 강하고 효과적인 '치유와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인간이 종교성의 입구로 들어가는 가장 원초적인 동기이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허전함과 외로움 결핍 때문에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내 목을 축여 주고, 나의 주린 허기를 채워 줄 빵과 음료수, 그것을 희구하면서 종교에 의지한다. 그리고 그 빵과 음료수를 조금이나마 맛보게 되면, 즉 예수님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신비스런 경험을 혼자 간직하지 않고서, 교회라는 모임을 통해 나누고(sharing) 싶어한다. 멀티미디어 환경속에 사이버 교회가 생긴다는 것은 이제껏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신앙 체험을 가능케 할 것이다. 성경에 접근하는 것이 보다 쉬워지고, 교파나 지파에 관계없이 전 세계 신자들이 함께 이야기를(chatting)하며, 전자 우편(E-mail)을 주고받고, 목회자와 평신도가 사이버 스페이스 (syber space)상에서 신앙 상담과 신학 토론을 할 것이다. 서울교회와 지방교회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이어지고, A라는 목회자와 B라는 목회자가 서로 설교자료를 주고받는다. 이 모든 일이 허공, 전파 속에서 일어난다. 전 세계를 하나로 이어 주는 월드 와이드 교회(World Wide Church)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교회의 특징이 무엇일까? 폐쇄적인 조직도 아니고, 자신 사이에 높고 낮음도 없으며 한가지 인터넷 정신에 기초한 교회가 될 것이다. 바리새적 교회나 미신으로 가득 찬 종파주의적 교회가 아니라, 열린 교회, 평등한 교회, 누구나 자유롭게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교회 말이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 인터넷의 3대 정신과 꼭 맞아떨어진다. 예수님은 경직된 조직화를 경계하면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자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 스스로 세리와 창녀들과 어울렸으며, 어린이와 과부에게 다가갔다. 이것은 철저한 개방 체제인 인터넷의 첫째 정신과 통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청중을 중시했다. 환자의 입장보다는 청자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인터넷의 평등사상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여러 다양한 계층을 염두에 두고 가르치신다. 성경에 보면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가 있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놓고 잃어버린 그 한 마리를 찾아 헤맨다는 이야기다. 또 잃어버린 동전 비유가 있는데 동전 한 닢을 잃어버린 여인이 온 집안으로 뒤져 동전을 찾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서 돌아온 탕자 비유가 나온다. 모두 다 잃어버린 것에 관계된 비유들이다.
2) 멀티미디어로 사역한 사도 바울 우리는 앞에서 멀티미디어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른 신학적 기초를 더 언급하기보다는 대표적인 목회자로 인정받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목회의 특징을 살펴봄으로 그것을 통한 인터넷을 통한 목회상담의 근거를 찾아 보고자 한다. 표적 특징 중에서 그가 인편을 통한 편지를 사용하여 그가 직접 가지 못한 교회에 대하여 목회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상황에서도 아주 많은 교회를 목회할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감옥 내에 있는 사람들을 전도할 뿐만 아니라 감옥이라는 장소의 제한속에서도 그가 개척한 교회나 성도들을 양육할 수 있었던 것은 편지의 도움이 아주 컸다. 이것이 현대의 모이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보다 개인화 되어버린 교회에서, 가정이 모든 생활의 터전이 되어버린 현대와 미래의 상황에서 인터넷을 통하여 목회상담을 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다. 사도바울의 원격목회(상담) 대표적인 예로서는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48-51년경) 바울은 약 1년반 동안(49-51년까지) 고린도에 머물며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인 고린도교회를 들 수 있다. 초창기 고린도 교회내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서신으로 조언과 문제 해결을 요청하였고, 그밖에 '글로에' 사람들이 와서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내의 여러 문제점들을 자세히 보고하였을 때 바울은 그의 편지인 고린도 서신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내의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그는 빌레몬서에서 볼 수 있듯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오네시모를 통해서 그의 편지를 빌레몬에게 보냄으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도록 권하고 있다.
(1) 도구의 가치 정보를 생산하고 운반하고 소비하는 도구는 어떤 가치인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그 유한의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창조력을 가지고 만들어 온 많은 문화와 문명은 정말 한낱 도구에 불가한 가치중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창세기에 나타난 수금과 퉁소 잡은 모든 자의 조상인 유발과 동과 철로 각종 기계를 만드는 자의 조상인 두발가인이 모두 하나님과 단절된 계보에서 출생했음은 우연일까? 오늘의 세상에는 바벨문화(창11)와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창13)와 가나안 문화가 주류를 형성하고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도구의 배후에는 그것을 다루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마음의 생각이 모두 악한 그들은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이다. 그 도구를 가지고 비성서적 정보를 만들고 퍼뜨린다. 할례 받지 못한 마음에서 나오는 타락한 지성과 창조성은 인자가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듯이 세상도 세상에 가야 할 곳으로 갈 것이다.(막14:21). 저희는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한다(빌2: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저희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1: 20~32).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다(빌2:30).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전해 주었듯이 우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다(빌1: 30). 우리가 이 땅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늘 있으나 우리가 육신에 거하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다(빌1: 22~24).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며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 19).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빌3:20)고 하였다. "과학도 기술도, 또 문화와 도구도 가치 중립적이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사실 그렇다. 하나님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성서는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도구를 다루는 사람들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곳,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모습들이 애통하게 하고 있다. 인간의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된 창조성은 더욱더 인간의 타락을 부추길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을 스스로 창조주로 자처하면 하늘까지 높아질 것이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인간이 가진 유한한 창조성과 자신도 피조물임을 잊어버렸다.
(2) 선한 도구 멀티피아(multipia), 테크노피아(techonopia), 유토피아(utopia)의 장미 빛 환상이 유혹하고 있다. 다 채널 대중매체가 우리 곁에 있다. 대중매체가 만들어 보여주는 가치체계는 성서적이지 않다. 아톰의 세대가 비트의 세대가 오는 것이 아니다. 아톰과 비트가 손에 손잡은 시대가 오는 것이다. 아톰의 영역 중 비트가 대체하는 것이 분명히 있지만 아톰 고유의 역할은 결코 아톰의 몫이다. 인류는 새로운 가공할 위력의 도구를 앞에 놓고 "이 도구가 가치 중립적인가?"를 따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 이 도구를 선하게, 적절하게, 알맞게 사용하기 위하여 스스로 성서적 가치관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러면서 한편 다음의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용을 담지 못하는 그릇이 있다. 포도주를 금 항아리에 보관하는 사람은 없다. 내용과 그릇이 모두 변질되어 둘 다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내용을 담을 수는 있더라도 보다 더 알맞은 그릇은 있다. 음료수를 접시에 부어 마시지는 않는다.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거의 않는다. 컵에 부어 마신다. 보다 적합하고 적절한 도구는 있는 것이다. 새로운 도구라고 해서 반드시 알맞은 도구는 아니다. 강력한 도구라고 해서 반드시 적합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컴퓨터는 분명히 모든 분야에 사용되어질 것이다. 그것은 21세기의 문화이며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며 스타일이기에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거절할 수도 없다. 담을 쌓는 것도 더더욱 불가능하다. 초기에 사회에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들어 왔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저 놀랍고 신기해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실제의 세상이었다. 즉 가상현실인 것이었다. 그것을 보며 마치 내 일 인양 슬퍼하기도, 기뻐하기도 하였다. 사진기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모두들 사진이 찍히면 영혼을 뺏긴다고 두려워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이유로 사진을 찍지 않고 버티는 사람은 없다. 자동차는 주된 사고의 원인이 되지만 그렇다고 오늘 누가 걸어서 먼길을 다니고 있는가? 일부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미래의 정보화사회는 우리가 선택하거나 거부할 어떤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삶의 자리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르게, 적절하게, 지혜롭게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도적이 든 칼은 흉기이지만, 의사가 든 메스는 환자를 살리는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 마음에 할례의 표식이 없는 사람들은 정보사회에도 지금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아니 더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한 도구가 들려 있는 것이다. 그들의 악한 영의 도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런 자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정보화 시대의 모든 도구들을 사용해야 한다. 정보화 사회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미 살고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음모와 계획이 숨겨진 사회이다. 사탄교회가 몰려온다. 사탄의 전면적, 총체적 공격이 모든 방향,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 닥칠 위기의 시대이다. 죄의 규모는 더 거대해지고 조직화되고 그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세상이 손을 잡고 교회를 대적할 것이다. 과학과 비 과학이 서로 마음을 모아 그리스도를 조롱할 것이다. 죄를 짓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에 비해 용서와 구원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의 첫 조상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맛있게 먹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그리스도는 그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셔야 했다. 정보사회가 만들어내고 주고받는, 도모하고 야합하는 것들은 분명 십자가와는 관계없는 것들이다. 그러한 시대를 교회가 살아야 한다. 사실 더욱더 죄의 관영 함이 극에 달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정보문명은 그렇게 하나님 없는 지상천국을 건설하려고 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을 때 스스로 하나님일 수 있다는 그릇된 환상으로 살 것이다. 그들에게 도전하는 교회는 정보매체를 통하여 그들을 알고 그들에게 전략적으로 도전해야 한다. 적절한 사용이란 보다 효과적인 사용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상호 조화하고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 사용되어져야 한다. '너무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손에 들려 있는 정보도구들은 선한 도구들이다. 교회는 이 선한 도구들을 적절하게, 적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예를들어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상담'은 적극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안면을 마주하고 만나는 '개인 상담'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나누는 상담이 '주'가 되어야 하고 인터넷을 이용하여 하는 상담은 '부가'적 수단이어야 한다.
(3) 선한 목적 똑같이 사용하되 사용하는 목적이 다르고 의도가 다를 뿐이다. 세상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 세상은 다투고 싸운다(약4: 2)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 4). 인간의 몫으로 맡겨진 정보화 사회를 모든 정보매체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확장하는데 사용하여야 한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되라"는 예수님의 단호한 명령에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들고 가야한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복음의 황무지 사이버스페이스(cyber space)에도 복음을 전하라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사이버 스페이스란 인테넷이 만들어낸 가상공간이다. 이곳에는 정부기관도 있고, 백화점과 은행도 있다. 인터넷이 세속적인 정보의 거미줄(웹)이지만 그 영향력을 전세계에 미치고 있으므로 그것을 기독교화하여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거미줄을 만들어야 한다. 가상현실의 문화 속에서는 성령의 사역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한 자들, 그리고 그를 보았던 사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던 초대교회는 어느 때 보다도 성령의 시대였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창조로부터 계속되어지고 있으나 인간에게 생동 있게 나타나심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생생한 증언으로부터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있어진 것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수의 생생한 증언 역할을 할 것이 가상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존이 직접적인 표징들을 통해서 나타날 때에도 이 표징들을 하나님과 동등시하여 형상화 내지는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든다면 신명기 4장 11절에 나타나는 '구름' '연기' 및 '화염'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표징인데, 이것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출애굽기 33장 11절과 3장 20절에서 모세는 너무 밝고 영광에 쌓인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다만 불붙고 있는 숲만 보았다. 그리고 구약에서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 경우에, 이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마3: 16)고 할 때에도 이 비둘기가 하나님의 형상화 내지는 우상화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십자가의 부활을 통해서 성취하신 화해 내지는 구속이 성령에 의하여 어떻게 인간에게 실현되었는가는 인간에게 있어 실로 중요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화해사업이 은혜의 수단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효험을 일으켜 은혜와 신앙으로의 구원이 일어나고, 이렇게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모든 요구하심에 응답하는 성화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성령이 우리의 지성과 의지에 신앙을 불러 일으키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 다고 할 때, 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하면서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한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동일한 성령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녀 된 교회의 지체들로서 연합을 이루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를 통한 가상현실로서의 연합은 어려울 것 같다. 연합이 인격과 인격의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이라면 개별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쌍방의사 소통이기는 하지만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를 따라 이루어진다. 이는 상대방의 의사를 수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사를 수용하게 만들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포기하게 하시는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것이라면 가상현실에서는 자기 주관적인 견해를 표현하려고 함으로서 성령의 사역을 방해할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상현실을 통하여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인식하게 되어 하나님과 하나됨의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배제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와의 연합은 많은 장애물을 가지고 있다. 가상현실을 통한 인간의 인격은 개인주의에 물이 들게될 것이고, 지나치게 이기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Kal Barlt)는 "성경의 증언 안에서 하나님의 로고스를 항상 새롭게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시도함으로서 하나님의 로고스에 응답한다"고 했다. 성령께서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은혜 사건 혹은 복음사건을 주관화 혹은 현실화시킨다. 멀티미디어를 통한 가상현실은 역사적인 사실을 현실화합에는 유용한 도구가 되겠지만 인간이 모든 프로그램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이 배제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성령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데 프로그램을 통한 가상현실에서 만나는 체험만을 참된 경험이라고 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상현실을 통한 생생한 역사적인 예수님을 만남으로 개인에 머물지 말고 성령의 사역에 능동적으로 적극 참여하여 공동체를 통한 연합을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앞으로 멀티미디어의 시대에서는 교회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다양화로 서로 도움으로 신앙의 깊은 경지에 이르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주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공동체가, 나아가서는 사회의 공동체가 함께 그리스도의 연합을 이루어가도록 프로그램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 멀티미디어를 통한 가상현실은 우리의 신앙에 큰 유익을 줄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가상현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며 구원의 근거가 되는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십자가 신학은 중심점에 있다고 보아도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십자가 신학의 정의와 가상현실과의 관계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인식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다고 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바울에 의하여 확립된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로마서 1장 17절 이하에서 바울은 율법으로 인한 의인에 반대하고 신앙으로 인한 의인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업적을 남기도록 하는 강요로부터의 해방은 신앙으로 인한 의인에서부터 형성된다고 보았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에서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이 우주로부터 오는 지혜와 하나님 인식에 반대하여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인식에서 우주의 권세들로부터 해방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화해의 표지이며 나아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화해의 표지일 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모든 장벽이 무력한 것임을 나타내는 암호이다. 즉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심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 분 자신의 몸으로써 그들 모두의 상호관심에 있어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화목하게 하신 것이다.(엡2: 14-16)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리라"(갈6: 14). 다시 말해서 바울은 세상과 매어진 줄이 끊어지는 바로 그곳에 십자가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러한 근원적인 구원 사건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롬6: 1-4).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의 윤리생활 역시 십자가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며, 죄에 대하여 과감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세례를 통하여 자기자신의 신앙적 삶을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과 너무나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사랑 받고, 즐거워하고, 쾌락을 느끼고, 환상의 세계를 여행하고, 나아가 어떤 형태의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매우 만족해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 즉 사랑, 기쁨, 희망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며 "가장 필요 없고 쓸데없는 존재"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점으로, 십자가가 삶의 근원으로 자리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곳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편리한 가상현실의 세계가 차지하고 있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을 의미하며, 또한 고난의 하나님을 나타내며, 화해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어떻게 보면 십자가 신학은 "화해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교회와 세상, 시어머니와 며느리, 지역과 지역, 적과 적, 너와 나, 사람과 자연의 화해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단절이 아닌 "함께와 더불어"가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가상현실의 세계는 어떤가 단절과 자기만의 세상 철저히 혼자만의 존재 방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웃과 함께 하는 정신이 없고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아픔이 아나라 오직 자신이 중심점에 자리하고서 모든 대상을 움직이고 조절하는 세계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정신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가상현실은 영지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영지주의는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가현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완전한 그리스도를 말해주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허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상현실 또한 실재가 아닌 하나의 허상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십자가가 있어야만 부활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고통 없는 세계 환상과 쾌락과 자기만이 있는 공간은 십자가와 그 의를 달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상현실을 통하여 자신이 십자가의 자리에 동참하여 보고 성서의 자리에 참여함으로서 또 다른 신앙의 경험을 가져 볼 수 있는 것도 생각 해 볼 수 있겠다.
4). 히브리서 11장에서의 믿음과 가상현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 1-3). 이 구절은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정의는 신앙의 전 내용을 포괄하는 정의가 아니고 기독교 본질의 그리스도 대속을 믿어 구원 얻는 면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신앙의 지속을 위한 인내와 관련하여 신앙의 본질 중의 일면을 관설하는 것뿐이다. 곧 구원에 관한 신앙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신앙자가 하나님의 계시와 기록에 대하여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정의한다. 동시에 이는 추상적이거나 비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실질적이며 구체적이요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은 논리적 확증이다. 그러면 신앙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또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실상"이란 말은 "기초", "본질", "확신" 등의 뜻을 가진 말로서 어떤 것의 외모에 대하여 그것의 참 성질을 말할 때나 또한 어떤 것이 어떤 확실한 근거 위에 서 있음을 말할 때에 쓰이는 용어이다(G. P. Pierson, Original Words). 우리 성경에서는 "믿던 것"(고후9: 4), "기탄 없이"(고후11: 17), "본체"(1: 3), "확실한 것"(3: 14)등으로도 번역되었다.기초나 본질로 볼 때 신앙이란 소망의 기초가 됨을 뜻한다. 곧 소망은 신앙을 근거로 하고 그 위에 서 있음을 말한다. 소망은 겉으로는 소망이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 곳 실상은 믿음이란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낙담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신앙이 견고해져서 활동한 것을 볼 때 이을 알 수가 있다. 확신으로 볼 때 신앙이란 소망하는 것을 반드시 획득한다고 확신하는 그것을 말한다는 것이 된다. 물론 여기의 소망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소망을 향하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에 관한 약속 곧 하나님의 아들의 기업인 영원한 천국 복락(福樂)을 소망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진실로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가 지난(至難)하다. 또 신자들이라고 해도 날마다 원하는 선은 행해지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만 행하게 되는(롬7: 19) 죄악의 존재이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사죄함을 받았다고 확신하기에는 너무나 의아한 점이 많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구원 약속)은 인간 두뇌로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고 동시에 이것을 받아 누리리라는 것을 믿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이것을 알 수 없다고 믿지 못할 것으로 간주하여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니 반드시 그대로 되리라고 확신하는 그것이 곧 신앙이다. 그럴 수 없는 것 같은데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적 증거이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에서 "증거"는 "증명", "확신"의 뜻으로서 실천과 증명에 의하여 입증된 확신을 뜻하는 말이다(Thayer's Lexicon p. 202). 그러므로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실험과 증명에 의하여 확증된 것으로 확신하는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바라는 것보다 더 광범위한 것이다. 바라는 것은 장래에 관한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전 우주에 있는 볼 수 없는 실재 전부에 관한 것이다. 곧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롬8:24)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고후4:18).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같이 확신하는 그것이 신앙이요 보이는 것보다 또는 그것보다도 더 확실히 성경의 증거에 의하여 실재한 것으로 믿는 그것이 곧 신앙이다. 우리는 하나님도 볼 수 없고 그의 계획과 창조와 섭리와 약속을 다 보지 못했고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다. 우리의 소망하는 천국도 아무도 육안으로는 보지 못했고 현재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신앙은 이곳을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증거에 의하여 확실히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위에서 믿음에 관한 논의들을 해 보았다. 가상현실세계에서의 믿음의 형태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기독교의 신앙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가상현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세계이다. 사람은 보이는 것, 즉 시각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라는 논리가 인정하였다. 가상현실의 세계에서는 보이는 것이 사실이라는 논리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되면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허상을 믿는 것과도 같다. 인간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하고 있으며 인간이 궁극적인 미래의 목표로 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도 확실성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는데 가상현실이 만연된 상황에서는 인간의 인식들이 보이는 것도 믿을 수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믿음은 바라고 소망함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격적 경험이다. 가상현실의 세계에서는 인격적 경험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허상적인 경험의 세계이다. 믿음은 존재와 절대자의 만남이다. 가상현실은 비존재와 존재와의 만남이다. 여기에서는 신앙이 이루어 질 수 없다. 믿음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절대자와 피존재 사이에 본질적 차이를 인식하고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는 구원의 반열에 설 수 없으며, 은혜의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철저히 자기의 부정과 겸손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주체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피조물인 인간이 주체자가 자신의 힘으로 마음껏 상상의 세계에서 활동하며 오직 자신만이 왕적인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착각 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또한 가상의 세계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초월적인 힘과 위로와 소망을 가지려한다는 사실이다. 가상현실은 21세기의 마약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무서운 유혹력과 악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상현실을 통해서 시각적인 인식의 변화는 믿음에 대한 변화와 기독인의 삶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성을 가지고 있다.
Ⅲ. 사이버 교회의 도전
멀티미디어시대의 목회는 목회 자체에 대한 도전적 차원과 더불어 멀티미디어가 불러오는 비인간화, 탈종교화, 세속화의 경향에 대한 목회적 대응 방식에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우선 목회의 멀티미디어화의 과정에서 목회적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이른바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인간관계에 기초해있던 전통적인 목회 방식에서 멀티미디어의 기술적 효용성에 바탕을 둔 목회로의 이해에서 생기는 것이다. 즉 인격적 만남에 근거한 목회는 목회자의 인격과 책임성, 그리고 많은 이들의 창의적이며 비판적인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지만, 멀티미디어를 이용하는 목회는 인격적 책임성의 구조보다 대중 조작적인 경향에 쉽게 빠진 수가 있고, 나아가 민주적 참여의 길들이 봉쇄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신학과 목회자의 인격보다는 조직과 설비와 자본이 목회의 성패를 결정짓게 된다 몇 년 전 미국의 텔레비전설교가 짐 베이커와 지미스웨거트등이 일으켰던 성적인 스캔들과 헌금 횡령사건은 목회가 사업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경우를 예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돈과 설비 능력을 가진 교회들이 지 교회들을 형성하고 스크린 예배를 드린다든지, 텔레비전 설교를 통하여 목회자 자신과 교회의 위상을 키워나가는 일은 인격적 관계 구조에서 이루어지던 목회와는 달이 일방적인 목회양식을 이용하고, 나아가 첨단적인 미디어의 기능이 가져오는 효용성의 증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신앙인들에게 인격적인 만남과 대화가 없는 개체화를 촉진시켜 탈종교화시킬 위험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확대되면 인격적인 만남과 갱신의 체험이 없는 기독교인들을 양산하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처럼 부담 없이 익명성을 보장하는 멀티미디어 예배자들이 책임적이며 참여적인 예배자들을 구축하게 될 우려가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 가지 않고 텔레비전 앞에서 예배드리는 문화를 촉진하게 될 것이다. 결국 가장 세속적인 모습을 전달해주는 텔레비전 예배당이 생기게 될 것이며, 교회 생활에 부담을 느끼는 이들은 점차 교회를 떠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된다면 그것은 모교회의 위기까지 몰고 올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목회자체의 위기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시대가 불러오는 탈종교화, 비인간화의 현상이 목회현장을 어렵게 만들 것이 또한 예견되고 있다. 탈종교화란 멀티미디어가 엄청난 정보를 무작위로 공급함으로써 인생과 종교에 대한 단계적인 이해 구조를 무시하는 데에서 일어난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멀티미디어시대의 신앙인들은 신실한 신앙적인 정보와 더불어 가장 비종교적인 정보까지 접하게 되기 때문에 비판적 감각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질 뿐만 아니라 주어진 많은 정보들 앞에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검증적 주관이 강화된다. 따라서 신앙적 인식과 지식을 얻는 과정이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지식과 내용들이 현대사회 속에서 게토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아 이전보다 훨씬 세속화될 것이라고 본다. 결국 종교적인 내용의 중요한 차원인 거룩의 체험은 과학적인 정보들 사이에 가리워지는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諸)현상은 탈종교화의 현상을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생각된다. 멀티미디어시대의 또 다른 현상은 현실과 초현실,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멀티미디어의 기능에 의존하면 할수록 멀티미디어의 논리와 구조를 따라 움직이는 의식과 삶의 양태에 익숙하게 된다는 점이다. 기능적 연장의 개념이 인간다움과 기술의 영역을 애매하게 만들어 놓아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은 미완의 것으로 파악되고, 멀티미디어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을 정신적인 장애자처럼 간주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인간 이해는 기술 인간을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삼게 함으로써 기술적 세계를 잘 알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테크노피아(technopia), 혹은 기술지배(technocracy)구조를 정당화시키는 문제를 불러오게 되고, 결과적으로 인간론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들을 불러올 것임에 틀림이 없다. 앞으로는 기술적 조작과 지배가 또다시 인간을 억압하고 비인간화는 틸리히의 말대로 존재론적 이성을 기술적 이성으로 대체시키는 문화가 야기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1. 성서적 정보 인식의 구축 "주목하자. 교회는 항상 문제에 직면했지만 지혜롭게 해결했다. 변화는 더 큰 변화를 낳을 것이다. 오늘의 세대는 우리의 가치관을 침식하고 있는 것들로 꽉 차 있다. 다양성과 개성의 시대, 하이테크만으로는 안 된다. 하이 터치가 필요하다. 기술만능의 위험수위에 있다.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미래 폭격이 시작되었다. 사실은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이고 진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교환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얻고도 자신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구호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다. 이 급속한 시대 흐름에 교회는 지혜롭게 대처하고 적극적으로 준비하여 이 시대를 새롭게 하는 흐름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서적인 정보마인드의 구축이 시급하다.
1) 이 땅에 있는 교회 교회는 이 땅에 왜 존재하는가?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존재 의미와 이유, 그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교회는 주의 것이로라(롬14:8).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을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설명하였다. 갖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게 되고, 그것을 갖고자 한다. 가진 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니고 또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것이라면 가진 공동체와 갖지 못한 공동체는 차지함과 지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고 '사막의 오아시스'를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 싸움은 두 집단이 존재하는 한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여기 인간이(살았던, 살고 있는) 살아가, 사는 이 땅은 누구의 것이며 이 땅을 사는 사람공동체(사회)와 문화는 누구의 것인가? 그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를 심각하게 물어보고, 그 답을 찾아 행장을 꾸리고 성서 속으로 탐험을 떠나보자. 계시된 진리의 말씀 안에서 인간은 그 해답을 찾기를 기대하며 그 세계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인간은 곧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선포의 말씀을 만나게 된다. 우주를 만드신 분이 계시단다. 그 분이 명령하시매 그대로 되었고 그 된 것이 그 분 보시기에 좋으셨단다{{1)창 1:3~31}}. 하나님이 또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며 축복해 주셨다{{2)창 2:28}}. 만든 사람이 만든 물건의 주인이다.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그리고 사람을 보고 관리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분의 창조 세계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며 보존하는 청지기였다. 그분은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일을 정하사 쉬심으로 휴식 문화를, 남자와 여자가 서로 눈이 맞게 하심으로 결혼 문화와 가족 사회를 구성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해와 달을 만드사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사시와 일자와 연한에 따른 온갖 형태의 문화들은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것이 참 주인이심을 성서는 선포하고 있다.
2) 불순종에 따른 문제 하나님의 위대한 예술품인 동시에 하나님의 다른 모든 작품들을 관리하는 자로 부름 받은 청지기가 그 명령하심에 불순종함으로 그 자신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관리하던 다른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 땅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판치는 곳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사는 이 땅은 원칙적으로, 결국에는 하나님의 것이지만 지금은, 실존적으로 사탄이 행세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끝은 아직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방치하시지 않으시고, 버리시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억하셨다. 단지 안타깝게 바라보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회복하시고 그 처음에 인간과 가지셨던 사귐과 인간에게 주셨던 그 직분을 하나님은 친히 역사 속에 실존하신 인물로 인간의 문화 속으로 걸어오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인간이 신앙하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어느 시대고 가진 것들을 지키는 자로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던 그 세상을 위하여 실존하고 있다. 그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시대를 살리는 자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지만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는 간절함으로 그들 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이 땅을 살되 이 세상의 원리와 목적으로 살지 않는다. 이 땅을 사는 교회가 21세기에 정보사회에 살아 남았지만, 그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참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과 야합하는 교회일 수는 없다. 다가올 급변하는 미래사회는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할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교회도 가장 공격적이고 순발력 있는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이 땅을 사는 교회는 맡겨진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세대는 이 세대의 교회의 몫이다. 모이는 교회는 있는데 흩어지는 교회는 없거나 흩어진 교회는 있는데 모이는 교회는 없는 모습이 아닌, 모인 교회는 일하기 위해 흩어지고, 흩어져 일하며 싸우던 교회는 다시 모여 휴식하고 힘을 재충전해야 한다.
2. 가상세계에 대한 교회적 도전 네티즌들이 자신의 고유한 국적(한국, 미국등)을 가지면서 가상공간의 인터넷 주소를 갖고 있듯이, 인터넷 시대의 자칭 교회들 역시 또 하나의 가상공간 세계의 주소를 만들어 네티즌을 만나게 된다. 이른바 가상 교회(Cyber Church)를 교회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에 직면한다. 즉 가상교회도 전통교회가 견지해온 교회의 본질을 지니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성도들의 거룩한 '사귐'이란 꼭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나가서 만나야만 이루어지고, 인터넷의 가상공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문제이다. 이제 가상교회를 교회로서 전적으로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 말은 역으로, 가상 교회만으로는 교회의 본질이 구현되기에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적극적인 차원에서는 '온라인 처치'(On-Line Church), '텔레비젼 교회'(TV Church), '전자교회(Electronic Church)' 등으로 불리는 '가상교회'라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민첩하게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교회라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인류가 전자 정보통신 문명시대에 진입함과 동시에 지나간 세대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적어도 전자교회는 그들이 전통적인 교회를 배격코자 하는 이단적 사상을 갖고 있지 않는 한, 보다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선택한 것으로 이해되기를 바랄 것이다. 전자교회의 출현은 전통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도전을 주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그 도전이란 한마디로 교회 갱신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내용이다. 현재 기독교의 전반적 경향은 제도주의적 교회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 교회론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는 취약성을 보인다.교회의 '방주' 개념, 목사의 축복, 치리, 저주 권한, 하향식 당회의 결정 및 집행권, 일사불란한 군대식 통일성, 강단 위주의 나눠주기식 교회, 평신도들의 제한된 활동영역, 예언적 모델에 대한 거부감, 신학적 창조 능력에 대한 반감, 성장위주의 목회활동, 자유로운 영적 은사에 대한 제한 및 교단적 전통과 교리에 대한 충성심 강요 등에 기독교회가 다시 케톨릭교회 돌아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들이다. 이는 현대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고 있다는 위험 신호로 보인다. 인터넷교회는 최소한 이러한 제도주의적 교회관이 지니는 부정적 측면을 선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 교회론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터넷'이라는 미디어가 형성하는 환경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과 월드 와이드 웹(WWW)이 만남으로써 인터넷의 의미가 훨씬 더 광대해져 가고 있다. 그 주요 변화들이 인터넷교회의 성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몃가지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 단순한 형태의 텍스트 위주로 된 서비스로부터 멀티미디어 서비스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둘째, 웹 브라우저를 통하여 기존 인터넷에서 제공된 모든 서비스를 일관성 있고 또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특정 정보 제공자로부터 데이터를 받기만 하는 수동적 입장에서 홈페이지를 직접 개설하여 자신의 고유한 정보도 제공하는 능동적인 발신자가 될 수 있다. 넷째, 종래의 중앙 집중식 서비스로부터 정보가 분산 처리되는 방식으로 전환됨으로써 원하는 정보가 어느 서버에 있는지 알지 못해도 거미줄처럼 얽혀져 있는 연결망(Hyerlink)을 따라가면 찾을 수다. 인터넷의 이러한 흐름을 타고 형성되는 가상교회가 앞에서 전제한 교회의 본질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은 가상 교회를 만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약식의 제도적 교회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사귐과 선교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데 있다. 여기에 인터넷의 가상 교회가 전통교회와 어떤 상관성을 지닐 것인가에 우리의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전통적 기성교회가 새로이 출현한 전자적 가상 교회에 가하고 비판은 매우 거세다. 그러나 전자 교회의 등장은 여러 면에서 기존의 제도 교회에 교회갱신적 충격을 주고 있음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재로서 가상 교회는 말 그대로 '가상적'인 차원을 못 넘을 수 있겠으나, 고도 정보화 시대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21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가상적인 것에 의해서만 현실을 접할 수 있는 때가 올 가능성이 크다. 전통교회와 가상교회는 서로 한쪽 극에만 서서 대립적 상관성을 갖고 있을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미래에 개방적인 교회로 서기 위하여 양자간의 창조적 긴장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시대에 교회나 목회자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변화하는 목회적 환경 속에서 인터넷을 통해 목회자와 교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별로 없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과거보다 오히려 할 일이 더 많아진다. 인터넷 세대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비트(bit)를 하나님으로 간주하려는 그들에게 참 하나님이 누구시며 오늘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일깨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와 교회는 시대적 변화를 먼저 감지하고 인터넷을 잘 이용하여 교회를 역동적으로 만들고 교인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야 앞으로 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3. 앞으로의 교회: '디지털망' 교회 미래의 고도의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보를 자유자재로 신속히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 유통망이다. 다시 말해서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하나 같이 통할 수 있도록 닦아진 통신망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 소위 '통합 서비스 디지털망'(Intergrated Service Digital Network)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구축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터넷 시대의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될 통합 서비스 디지털 네트워크(ISDN)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의 개념들은 인터넷 시대의 교회를 말할 때 매우 중요한 모티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개념들을 신학적 관점에서 수용함으로써 인터넷 시대의 바른 교회론 수립에 적용해 본다.
1) 통합적 네트워크형의 간(間)교파적 교회 우선 '통합'이라는 말은 종전의 단일화 개념과는 다르다. 중앙집권적 피라미드 구조의 획일적 통합이 아닌 다원적 조화와 협력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간의 연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더 이상 교파간의 신학적, 성례적, 문화적 차별성이 교회간의 연대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따라서 다른 전통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간 유통하는 일이 요구된다. 각 교파마다 내세우는 슬로건이나 교회적 특징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