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독도]전독도수비대장 홍순칠씨 미완성 수기내용
발 행 일 : 96/02/29 (동아일보)
52년7월 하순경 울릉도 경찰서 앞마당. 울릉도거주 어민 2백∼3백명이 담벽에 집기둥만한 푯말 한개를 비스듬히 기대어 세워놓고 항의를 하고 있었다. 모두 화가 잔뜩난 얼굴들이었다. 「竹島 日本領」이라고 새긴 푯말이었다. 어민들은 이날 독도에 출어했다가 이 푯말을 발견하고는 뽑아왔다. 이날 어민들이 경찰서앞마당에 모인 것은 일본군이 한국전쟁을 틈타 독도를 다시 점령한 채 우리 어민들의 어로작업을 방해하는 것을 규탄하고 관계당국에 대책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당시 울릉도 도민들에게 독도근해에서의 어로작업은 우리 영토문제에 앞서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당시 유엔측은 울릉도 어민들의 오징어 수출을 금지시켰다.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배낭에서 울릉도산 오징어가 자꾸 발견되자 적의 식량보급차단 차원에서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에 따라 울릉도 어민들은 전복과 소라 우럭등이 많이 잡히는 독도근해에서의 어로작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 경비정이 수시로 접근해 우리들의 어로작업을 방해하곤 했다.
▼ 53년 수비대 결성 ▼
어민들의 이날 항의데모가 있자 을릉군청과 경찰측은 즉시 일본인들이 세운 것과 같은 크기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라고 쓴 푯말을 만들어 독도에 갖다 꽂았다. 이 일에는 5t급 경찰배와 군청직원 경찰들이 동원됐다.
그러나 독도주변에서 맴돌고 있던 일본해상보안청 경비정은 우리측 경찰배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뒤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우리 푯말을 뽑아버리고 다시 자신들의 푯말을 세웠다. 이를 목격한 우리 어민들은 이 사실을 다시 군청에 보고했다.
당시 울릉군수는 나의 육촌형이었다. 육촌형은 『전쟁으로 포항과 울릉도를 내왕하던 정기연락선마저 징발돼 교통이 두절됐고 오징어 금수조치로 생계가 어려운데 일본측이 독도에서 자꾸 말썽을 피우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당시는 동력선이 없어 도지사가 울릉도에 배정한 구호양곡조차 육지에서 제 때 가져오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육촌형은 며칠뒤 육지로 건너가 관계당국에 독도문제를 보고했지만 『현재 군작전 지휘권을 미군이 가지고 있는데 한일간의 영토문제에 군병력을 내줄 리가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그해 8월15일 울릉도 도동국민학교 교정에서 광복절 경축행사가 있었다. 이때 경찰서장이 『상부에서 재향군인들을 중심으로 민병대를 조직, 후방을 지키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내게 민병대조직을 부탁했다. 당시 나는 원산전투에서 부상하고 제3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명예제대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요양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순간 나는 민병대를 조직해 독도를 우리가 지키면 되지 않겠는가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다른 재향군인들과 상의한뒤 할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하시면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3백만원을 내놓으셨고 독도에 지을 막사용으로 강릉에서 씨를 받아다 키운 60년생 해송을 벌채하도록 허락하셨다
나는 무기와 식량등을 구입하기 위해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갔다. 대구에서 「울릉도 민병대장」자격으로 군부대의 申모 중령을 만났다. 申중령은 내게 『독도에 정력에 좋은 물개가 많이 산다는데 잡아다 줄 수 없냐』고 물었다. 나는 『무기만 있으면 잡아다 줄 수 있다』고 답했고 申중령은 내게 즉시 M1소총 2정과 실탄 2백발을주었다.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던 무기구입이 너무 쉽게 이루어진 것이다.
부산에서는 미군부대에서 밀반출된 중기관총 1정과 실탄 5천발, M1소총 20정과 실탄 2만발, 수류탄 1백발을 2백만원을 주고 구했다. 이 과정에서 군대동료였던 M준위의 도움이 컸다. 경성제대의학부를 나온 M준위는 『전쟁이 끝나면 대학에 진학하라』고 권유하다가 내가 사정을 밝히자 『몸도 성치않은 자네가 일본놈들과 싸운다니 자랑스럽다』며 무기구입과정에서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나는 자갈치시장에서 의료품과 의류품 등을 구입, 2주만에 울릉도로 돌아왔다.
독도로 돌아온 나는 민병대이름을 「독도의용수비대」로 정하고 재향군인들과 상이용사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대원들의 과거 군경력을 감안, 2개 전투 부대와 보급대 수송대 후방지원대로 편성, 9월부터 석달간 훈련을 계속했다. 제대로 접안 시설이 돼있지 않은 독도에서 활동하기 위해 필요한 독도에서의 생활훈련과 비상사태발생시 취해야할 행동등을 집중적으로 훈련했다. 부산과 대구에서 구해온 무기에 대해서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우리 군부대에서 지원받았다고만 설명을 했다. 이해 겨울 나는 할아버지의 엄명으로 결혼을 했다.
드디어 D데이를 53년4월20일로 잡았다.
나는 독도로 떠나기 전에 가진 회식에서 대원들에게 『동지들, 우리는 개척민의 후예들입니다. 정부가 전쟁으로 독도에 손을 못쓰는 짬을 타서 일본놈들이 독도를 삼키려 합니다. 비록 성한 몸은 아니지만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지킵시다』고 힘차게 말했다. 대원들은 애국심으로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동감을 표하였다.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다가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역력했다.
내가 한국전쟁에서 부상하고 52년 이른바 「상이군인」이 돼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와 30년이상 독도를 지키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은 울릉도를 처음 개척한 농경민 1진이었던 증조부와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 구한말 개척시작 ▼
일본이 1904년 독도를 엉뚱하게도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며 일방적으로 탈취, 점령한 이후 지금(필자는 86년2월 작고)까지도 독도문제가 마치 계절풍불듯 심심하면 불거져 나오고 있는데는 우리측에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 사실 우리 정부나 국민들은 그동안 독도문제의 의미를 잘 모르고 대처해온 점이 없지않다. 우리의 국력이 약한 탓도 있었지만 우리 정부와 뭍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독도는 오랫동안 육지로부터 버림받아 왔다.
사실 오늘의 독도가 있게 된 데는 울릉도 사람들, 특히 초기 개척농민들의 목숨을 건 투쟁이 숨어있다. 초기 개척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일본인과 목숨을 걸고 싸워온 투쟁의 결과로 오늘의 독도가 있게 된 것이다. 뭍사람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킨것이 이들 초기 개척민이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울릉도와 독도는 신라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우리 땅이 확실했지만 공도(空島)정책에 묶여 무인도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구한말 개화당의 중심인물인 金玉均이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 開拓使)에 임명되면서 울릉도 개척이 본격화됐고 마침내 이 섬에 개척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1883년(고종 20년) 울릉도개척농경민 입주자 1진 54명이 지금의 울릉군 북면 현포동에 상륙하게 된다. 여기에 내 증조부와 가족 7명이 포함돼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자주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초기 개척민들은 육지에서 울릉도에 도착하는데 10여일이 걸렸고 항해도중 풍랑으로 모든 가산을 물속에 집어넣고 겨우 목숨만을 건져 상륙했다. 산에서 칡과 산채, 바다에서는 전복과 소라를 채취했고 그중에서도 「꽉새」(괭이 갈매기)는 중요한 식량이었고 돌섬(당시 독도를 섬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에서 물개가 건너오면 잡기도 했는데 물개를 한마리 잡으면 마을에선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는 것.
마을 사람들은 돌섬에 물개가 많이 살고 있는 것을 알고 10여년을 고생한 끝에 「콩 50섬을 실을만한」 크기의 배를 만들어 돌섬으로 건너가 물개를 잡아오곤 했다. 마치 돌섬은 울릉도 도민들의 「바다목장」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돌섬에 오는 것은 물개를 잡기 위해서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인들도 돌섬이 조선땅인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어린 나에게 울릉도와 독도 개척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셨다. 『이 땅이 뉘 땅인데…』라며 혀를 차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36명의 독도의용수비대 대원들은 독도에서 번갈아 머물며 우리 땅을 지켰다.
▼ 소나무 가짜대포 ▼
독도방위가 틀이 잡혀갈 무렵이던 54년 8월 22일 오전11시. 망원경으로 동쪽바다를 지켜보던 보초로부터 『일본 경비정 접근』이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쌍안경으로 확인해보니 1천t급 흰색 일본 경비정이었다. 경비정이 독도앞 5백m까지 접근하자 나는 『전원 전투태세에 위치』라고 소리쳤다.
경비정이 2백m정도로 가까이 오자 중기관총 사수 梁鳳俊동지가 경비정 옆구리에 공포를 쏴댔다. 경비정 옆구리에서 물거품이 일자 일본 경비정은 방향을 급선회, 일본쪽으로 도망갔다. 이것이 우리가 독도에 와서 처음으로 실탄으로 일본 경비정에 위협사격을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치른 최초의 전투였고 그 결과는 승리였다. 우리 힘으로 일본 경비정을 물리쳤다는 데 우리 모두는 크게 감격했다. 9월말경 이번에는 일본 경비정 두척이 독도로 접근해왔다. 중기관총과 M1소총으로 위협사격을 하자 일본 경비정은 또 돌아갔다. 심각한 상황은 같은 해 10월22일 오전9시경에 발생했다. 세척의 일본 경비정이 빠른 속도로 독도에 접근해왔고 공중에서는 비행기 한대가 날아왔다.
비행기 양쪽날개에는 2개의 폭탄을 달고 저공비행을 하며 곧 폭격을 할 것처럼 위협시위를 했다. 경비정은 동 서 남쪽에서 우리쪽으로 좁혀왔다. 마침 우리에게는 사흘전 경북경찰국장이 지원해준 박격포와 포탄이 있었다. 우리는 즉각 전 화력을 동원, 비행기와 경비정을 겨냥해 사격을 개시했다. 30여분간의 교전이 있었을까, 박격포탄 한 발이 경비정 선수에 명중됐고 기관총탄이 기관실부위에 맞아 일본 경비정은 검은 연기를 내며 달아났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기쁨도 잠시, 이날 저녁 대책회의가 열렸다. 일본이 갈수록 병력과 화력을 증강시켜오는데 시간이 갈수록 실탄이 떨어져가고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다음날 일본 방송을 통해 『한국측이 불법으로 일본땅인 죽도를 점령하고 일본 경비정에 포격을 가해 주일대표부를 통해 한국정부에 항의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일본의 다음 공격에 대비해 며칠간 대책회의를 했지만 정부의 도움이 없는 형편에서는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풍랑으로 보급선이 끊겨 1주일씩 예사로 굶고 해초로 연명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경제적인 형편으로 주부식을 살 수가 없던 적도 여러번 있었다. 할아버지가 주신 돈이 다 떨어져 나중에는 집을 팔았고 그 돈도 떨어져 큰 아버지를 찾아가 사정 설명을 하고 논5천평과 밭 5천평을 팔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4년에는 경북도지사를 찾아가 양곡과 실탄지급을 호소했지만 『미군측의 허락이 없이는 구호양곡을 줄수 없다』는 실망스런 대답을 듣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측 공무원들이 가끔씩 구호양곡을 빼돌려 건네주기도 해 큰 힘이 됐다
54년 10월에는 울릉도 경찰서와 무선통신이 가능해졌다. 그 전까지는 벨기에산 비둘기 두마리를 훈련시켜 비둘기발에 편지를 묶어 울릉도와 연락을 취하곤 했다. 우리가 가짜 나무대포를 설치한 이후에도 일본 경비정은 한달에 3, 4차례씩 순시를 왔지만 먼거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이 해 여름 사람이 없는 무간수 등대를 설치하러온 해군들이 한동안 독도에서 우리 대원들과 함께 지냈다. 해군들은 악조건속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고 놀라며 우리들에게 「물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해군들은 처음에는 우리 막사에서 우리들과 함께 지내려 했으나 「깔다구」(바닷가에 사는 벌레)들의 괴롭힘과 험난한 섬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배로 돌아가 숙식을했다.
(洪淳七대장의 수기는 여기서 미완성으로 끝을 맺고 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56년12월 독도경비업무를 울릉경찰서에 인계하고 독도에서 철수하게 된다)〈정리〓李炳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