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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내 안의 새
손 계 숙
살랑살랑 살갗을 가볍게 애무하는 봄바람에 꽃향기 풍기며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괴괴할 만큼 주변은 조용했다. 나는 몇 시간째 줄곧 어둠과 정적이 적재된 마당의 나무숲에 의자를 내다 놓고 앉은 채 은하가 아름답게 흐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자유로움이 무척이나 감미로웠다. 그 감미로움을 만끽하며 산다는 동물적 본능과 이유로 나라는 존재를 실종시킨 채 감성이 메말라 건조했던 시간들을 정적 속에 묻으며 나는 열심히 새로운 나를 조각하고 있었다.
아니다. 앞으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좋은가 하는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답이 명쾌하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새로운 형태로 구축해 보고 싶은 열망의 시간은 즐거웠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보았다. 사람에게 팔자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 것인가. 참으로 미묘하게도 문득 그런 의문이 나를 지배했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절망적인 일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기쁨 보다는 슬픔과 괴로움이 끈질기게 삶을 흐트려 놓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살아온 지나간 시간들도 그렇지만 내 아버지 유진호 옹의 삶을 보아도 그렇다. 아버지는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 월남전에 참전하였는데 그때 월남에서 한 여자와 사랑하였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여러 가지 현실적 상황과 국제적 상황에 의해 복무를 마치고 혼자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여자를 한순간도 잊지 못한 채 평생을 그 여자를 가슴 속 깊이 새긴 채 그리워하며 살고 있ᄋᅠᆻ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다하여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그 여자를 만나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고 심경을 고백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리움에 몸살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측은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그랬다. 늘 무엇인가에 혼을 뺴앗긴 채 살고 있는 남편이지만 그래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현모양처의 본분을 다해 온 어머니였는데 어느 날 친정집에 다녀오는 길에 갑자기 길바닥에 쓰러져 반신불구가 된 채 십 수 년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불운한 삶을 살고 있다. 비운도 집안의 내력인지 나도 그랬다. 첫딸 아이의 죽음과 아내와의 이혼도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팔자에 의해 일어난 신의 유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게 운명적인 것이 또 있었다. 하니와의 재혼도 그렇다. 멀리 베트남에서 온 하니와 내가 결혼을 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니와 재혼한 것은 불행한 내 인생을 희망과 행복으로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었다.
슬프고 곹콩스러운 수많은 순간들을 그래도 지금까지 잘 참고 견뎌오고 있었다. 이제는 좀 안정되고 자유스러운 순간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정말로 이제는 어떤 슬픔도, 어떤 아픔도 내 삶을 흔들어놓는 것은 싫었다.
평범해도 좋으니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삶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포용하려 노력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향이 짙은 커피를 마시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금세 내게로 사뿐히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번잡한 도심의 자투리땅에 자리 잡은 열 평 남짓한 우리 집 소박한 마당에는 몇 그루의 꽃나무를 심었는데 봄이 되면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 그 꽃들이 외등의 불빛 따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밤이었다. 나는 밤의 한가운데에 앉아 또 다시 생각했다.
요즘 무엇이 그렇게도 나를 바쁘게 휘몰아 갔는지...... 나는 그동안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동분서주했는가? 정말로 그랬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계절을 느끼지도 못하고 그 계절을 떠나보냈다. 그렇다. 내가 꽃의 웃음소리인 봄의 교향악을 듣지도 못한 채 그렇게 봄은 어느개 소리 없이 내 곁을 떠나갔다.
봄이 되면 앞마당의 백목련과 뒤뜰의 자목련은 한껏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며 우리 집 마당을 황홀하게 장식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집을 꽃대궐로 만들어 주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해낸 것이 또 있다. 바로 한 그루의 벚나무이다. 마당 한켠에 초병처럼 우뚝 서 있는 벚나무는 키 큰 덩치에 다소 촌스러운 늙은 자태를 하고 있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가지마다 소중한 연분홍빛 꽃을 망울망울 맺어 소담스레 피었다.
그런데 금년에는 참으로 아쉽게도 그 벚꽃의 앙증스러운 잔치를 보지 못했다. 그런 내가 오늘 이렇게 치열한 삶의 무거운 짐을 잠깐 내려놓고 침적된 적요 속에서 하늘에 반짝이는 은하를 바라보며 만끽하는 감미로운 자유의 시간은 특별하다. 그,리고 달빛이 아련하게 내려앉는 이 깊은 밤에 돌 틈 사이사이에 예쁜 얼굴을 쏘옥 내밀고 활짝 피어 있는 철쭉꽃과 함꼐 대화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그 무엇과도 발꿀 수 없는 이 귀한 시간의 여백 속을 마음껏 유영하면서 그동안 의식에서 실종되어 있던 나 자신을 되찾고 싶었다.
하늘을 보았다. 깊고 깊은 어둠 속에 광휘 되는 별빛이 전설처럼 친숙한 서정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주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연기를 한 모금 길게 들여 마셨다가 내뿜었다. 담배연기가 폐부에 와 닿는 쾌감이 짜릿했다. 이처럼 기가 막히게 좋은 담배를 주변에서는 왜 끊지 않는냐고 극성스럽게 몰아붙였지만 나는 담배를 끊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치 무슨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숨어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를 내뿜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문득 직장의 입사 동기인 경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진은 회사의 업무 차 나에게 서류를 전해 주려고 여길 잠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경진은 아기자기하게 조경해 놓은 우리 집의 정원을 보고 닭장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보다는 주택이 훨씬 운치가 있어서 좋다며 나를 부러워했다. 화려하게 지은 대저택도 아닌데 말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나와 경진이는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어떤 대재벌 그룹의 회장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너무나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나를 감탄케 하였다. 그 집 정원이 너무나 아름답고 멋져서 관리인에게 서울 시내에 어떻게 해서 이처럼 고풍스러운 대저택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관리인은 아주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회장님 댁의 이 집터는 조선조 영조 때 궁궐인 조정 궁터이지요. 그래서 저기 회나무 옆에 있는 저 바위에는 영조가 직접 새겨 넣은 취암이란 두 글자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선명하게 남아 있지요. 그래서 바깥 회장님께서는 자신의 호를 거기에서 따서 취암이라고 하셨지요.”
관리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그 집은 오랜 역사의 숨결이 맥락지어 내려오는 좋은 집터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 회장은 문화재관리재단으로부터 궁궐터를 매입하여 멋진 양옥을 짓고 마치 대자연의 한 부분을 옮겨놓은 것처럼 웅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 큰아들 내외와 함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원의 오른쪽에 우직하게 버티고 서 있는 수렴이 오래된 건강한 회나무가 이 댁의 길함을 수호해 주고 있다고 했다. 그 집의 정원을 보고 감탄한 정진은 자기도 언젠가 정원 한쪽에 미니 분수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게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경진은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나는 작지만 마당이 ᄄᆞᆯ린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경진은 우리 집 마마당을 유독 좋아하고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는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이에 밤은 무척 깊어져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내 시선에 포착되는 철쭉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철쭉은 며칠 전에 사납게 휘몰아쳤던 비바람을 견디지 못해 가지가 심하게 휘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 철쭉의 휘어진 가지를 바로 세워주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나를 향해 아내 하니가 말을 붙여왔다.
“이제 그만하고 들어와서 과일 드세요.”
“그래, 알았어.”
나는 하니를 향해 대답을 하며 돌아보았다. 하니를 볼 때마다 참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니는 젊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택해 주었다. 그런 하니가 나는 무척 고맙고 사랑서러웠다.
다음 달 이맘때 베트남에 있는 친정으로 나들이를 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기에 하니는 요즘 몸과 마음이 높은 음표처럼 들떠 있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하긴 결혼한 후 처음으로 가는 친정 나들이였기에 기분이 들뜨는 것은 당연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니가 나와 결혼한 지도 어느새 삼년이 지났다. 삼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부모 형제가 살고 있는 베트남에 한 번도 보내주지 못한 내가 무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니와 나는 삶의 환경과 조건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주변의 걱정과 극성스러운 반대에 부닥쳐 이루지 못할 뻔했던 사랑이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베트남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었던 아버지의 특별한 배려로 하니와 나의 사랑이 결실을 맺어 결혼을 했다. 그리고 예쁜 딸 미나까지 얻는 기쁨을 누렸다. 나의 딸 미나는 총명하고 나를 쏙 빼닮아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내가 이혼한 아내와 처음 만난 것은 대학캠퍼스였다. 그 해는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고, 군복무를 마친 나는 삼학년 이학기에 복학했다. 그런데 학교생활이 뭔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그날 도서관에서 전공에 필요한 전문서적을 찾고 있는 나와 그녀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 순간 그녀는 나를 향해 유난히 따뜻한 눈길을 보냈고, 아직은 남아 있던 군인의 체취가 전신에서 물씬 풍기던 나에게 자상한 누님처럼 끌어주었다.
한 번 두 번 만나면서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 너무나 많은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니는 사업을 크게 하는 부자였고, 그녀의 미모 또한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한마디로 내게는 과분할 만큼 조건이 아주 좋은 여자였다. 정말로 그랬다. 그녀와 나는 생활환경, 학벌, 부모의 재력, 성장한 가정문화 등 모든 것이 달랐다. 아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삶의 요건에서 발생되는 이질감 때문에 우리 사리에는 불편함이 많았다. 불편함은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만나고 있드면 자꾸만 내 자신이 왜소해지는 열등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였으며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였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그러한 이질감과 정서적 장애가 있었지맍 제대하고 만난 첫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점심시간에 그녀를 만났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데리고 학교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녀가 제동을 걸었다.
“오빠. 난 구내식당은 싫어. 어디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우아하게 먹자, 응?”
“점심 한 끼 그냥 구내식당에 가서 국밥으로 간단히 때우면 되지, 분위기 있는 곳은 좀 과하지 않니?”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밥이 뭐가 좋다고 그래. 난 싫은데......”
그녀가 토라졌다.
“나 돈 없어. 지난번에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가 돈이 모자라서 시계를 풀어 맡기고 온 거 너도 잘 알잖아. 아직 그 시계도 못 찾았어.”
“까짓 밥값 내가 내면 되잖아. 오빠는 그냥 먹기만 하면 돼. 오빠 고집부리지 말고 우리 근사한 데로 가자, 응?”
그녀는 내게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나는 그녀의 팔짱을 뿌리칠 용기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 밀착되어 오는 감각은 부드럽고 황홀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질감 좋은 화장냄새도 나를 은근히 취학세 했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고, 바닥에는 붉은색 융단이 푹신하게 ᄁᆞᆯ려 있었다. 그리고 밝고 달콤한 곡조의 음악이 마치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듯이 흘러나왔다.
나는 서민들의 삶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실비음식점에서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워 놓고 소주 한 병을 마시면 모든 것이 만족해지는데 비해 그녀는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식당이나 메뉴는 그녀가 아주 싫어하는 것들이었다. 싸구려나 천박한 것은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와 내가 상반되는 것이 또 있었다. 내가 영화를 보자고 하면 그녀는 꼭 연극이나 오페라 관람을 원했고, 나는 청바지나 티셔츠를 입고 잗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데 그녀는 나에게 가능하면 정장에 넥타이를 매라고 강요했다.
그녀의 그러한 요청은 평범한 대학생인 나에게 차츰 부담감으로 다가왔고 압박감으로 내 숨통을 조였다. 그녀의 정서에 맞추어 나가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지만 나는 묘하게도 그녀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오빠, 오늘 저녁에 롯데호텔 식당에서 가족 모임이 있는데 얼굴도 익힐 겸 오빠도 같이 가자 알았지. 남자 친구로 소개할 테니 단정한 복장으로 나와야 돼.”
“싫어. 기대하지 마. 나 절대로 안 가.”
내가 그녀의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왜? 우리 결혼할 거잖아.”
“암튼 싫어. 그러니까 너 혼자 가.”
그녀가 토라졌다. 난 결국 그녀의 가족 모임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 혼자서 홀가분하게 포장마차에 들러 닭똥집 구이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 일로 그녀는 나에 대한 불만이 많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관계를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이었다. 아침부터 희끗희끗 내리던 눈은 정오를 지나면서 굵어지더니 저녁부터는 폭설로 변했다. 그녀가 내 자취방으로 와서 하루 종일 함께 보내다가 저녁에 라면을 끓여 먻었다. 밖에는 비바람을 동반한 폭설이 계속 거칠게 쏟아져 내렸다.
날씨 탓이었을까? 그녀는 평창동 자기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않고 비좁은 내 자취방에 죽치고 있었다. 비좁은 공간에 단 둘이서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다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포옹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려 올랐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성과 지성적 억제력으로 버티었다. 그런데 나의 젊고 건강한 혈기는 인내력을 잃게 했다. 그녀에게로 다가가 슬며시 안았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그녀를 더욱 힘 있게 포옹하고 입술을 차지했다. 그녀도 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농밀한 애무와 포옹을 능동적으로 했다. 우리는 열정적으로 애무하고 포옹했다. 그리고 우리는 혼전 성관계를 완벽하게 치렀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내 하숙방을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육체적 사랑을 나우었다. 우린 사랑했다. 아니 그러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정한 뒤 부모님께 인사를 올리고 결혼승낙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나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뭐? 결혼을 해, 누구 마음대로......, 난 자네 같은 시골 청년에게 소중하게 키운 내 딸의 인생을 맡길 수 없어. 그러니 꿈도 꾸지 말라구.”
“아빠, 우린 서로 사랑해요. 그러니까 아빠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소용없어요.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결혼을 하고 말 거예요.”
“너, 그걸 말이라고 해, 내 허락 없이 결혼을 했다가는 널 자식 취급하지 않을 테니 어디 마음대로 해봐.”
그녀의 아버지는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우리들의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우린 너무나 단단한 벽에 부닥쳐버렸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헤어지자.”
“싫어. 난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헤어지지 않아. 그러니 다시는 내 앞에서 헤어지나는 말은 하지 마.”
그녀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녀와 인생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으로 고뇌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나를 더욱 단단히 얽어 묶었다. 그녀는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고 아예 내 비좁은 하숙방에 눌러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란히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병원 갔다 왔는데 임신이래.”
“뭐 임신?”
그녀가 임신을 했다는 말에 나는 당혹했다.
“왜 그렇게 놀라. 축복을 해 줘야지.”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 결혼식을 올리자.”
“안 돼. 난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은 절대로 할 수 없어.”
나는 결연한 목소리로 그녀의 제안을 묵살했다.
“난 이미 결심했어. 아빠가 우리 결혼 끝까지 반대하면 난 아빠 안 봐.”
그녀는 그녀대로 단호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한숨을 쉬었다. 세월이 흘러갔다. 그녀의 배가 불러 오르기 시작했고, 그녀의 혼전임신으로 우리는 주변사람들에게 온갖 수모와 질타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했다. 그날 이후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은 완전히 끊겨버렸고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대궐처럼 큰 집에서 살던 그녀가 단칸 월셋방에서 신혼생활을 하는 것이 퍽 기특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서 그녀의 불평불만이 시작되었다.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돼. 난 참을 만큼 참았어. 이제 무슨 수를 내야 하지 않겠어.”
“자꾸 보채지 마라. 그런다고 내 능력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부잣집 딸인 그녀를 고생시키는 것이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내 능력이 거기까지인데 어쩌겠는가? 그녀는 자꾸만 나를 몰아붙였고 그로 인해 우리들의 행복과 사랑을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불평하는 그녀도 지쳤고, 그것을 견뎌야 하는 나도 지쳤다. 하는 수 없이 처가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쏟아졌던 비난과 차디찬 냉소를 내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았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예쁜 딸을 출산했다. 딸의 출생으로 균열될 대로 균열되어 있던 아내와의 사랑이 조금씩 복원되어 갔다. 그런데 참으로 운명은 내게 가혹했다. 천사처럼 귀엽던 우리 딸아이가 생후 다섯 달 만에 천상으로 가버렸다. 어린 딸과의 영원한 이별은 우리 부부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아내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지 못해 거의 실신상태로 세월을 보냈고, 끝내 우리는 이혼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나는 오랜 세월을 딸을 잃은 슬픔과 이혼의 아픔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자서 중얼거린다.
.....아가야. 난 너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랬다. 그 아이의 잔영은 내 기억의 강에서 영원히 유영하고 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사계절 중에 나는 유독 봄을 좋아했다.
우리 집 마당에도 개나리와 산수유가 활짝 피어 봄을 장식하고 있었다.
벌과 나비도 꽃들을 향해 분주히 날아다녔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 일요일을 맞았으나 특별히 가야 할 곳도 없고 만나야 할 사람도 없는 나는 쓸쓸한 기분이 되어 마당을 서성거렸다. 그때 옆집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대선배인 어봉출이 대문을 들어서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이렇게 좋은 날 집에만 틀어 박혀 있을 거야. 날 따라와. 관악산에사 가세. 오늘 마침 산행모임이 있어.”
“관악산 좋지요. 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산행을 하자는 문자메세지를 받은 터라 나는 망설임 없이 쾌히 응했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여 간단한 등산복 차림을 하고 따라나섰다.
“이번 모임에는 다양한 연령층이 오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등산하는 재미가 쏠쏠할 거야.”
어봉출 선배는 신이 나서 지껄였다. 그 선배는 언제나 성격이 호탕해서 좋았다. 등산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선배는 오랜 세월 동안 국가공무원으로 재직해 오다가 몇 년 전에 시청 앞에서 사무실을 개설해 결혼알선업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국제결혼이 전문이었다. 그런 직업적인 측면도 있긴 했지만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는 후배인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제는 세월도 많이 흘렀고, 직장도 안정되고 집안 형편도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는 혼자서 사는 궁상은 그만 떨고 더 늦기 전에 빨리 결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결혼 같은 것은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도 선배는 나를 만날 때마다 걱정을 해주었다. 선배와 나는 정부과천청사 뒤쪽으로 이어지는 등산길을 택해 부산하게 올라갔다. 첫 번째 집결지인 초입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회원들이 와 있었다. 회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어, 하니도 왔구.”
“네. 사장님, 안녕하세요.”
선배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아가씨는 아담한 키에 단정한 용모의 미인이었다. 한국말이 다소 어눌하기는 했지만 목소리가 맑고 또랑또랑했다. 그리고 전신에서 이국적 멋과 매력이 물씬 풍겼으며 그녀의 미소는 아주 살인적이었다. 그리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이끌려 관심 있게 바라보았다. 그런 내 속셈을 알아차렸는지 선배가 소개를 했다.
“인사해. 하니는 약 육개월 전에 S대 일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왔어. 머리가 좋아서 불과 육개월 정도 체류했는데 한국어를 가상할 만큼 잘해. 아는 언니가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군.”
선배는 하니를 비교적 자상하게 소개해 주었다. 하니와 나는 정중히 인사했다. 베트남은 우리보다 개발 후진국이지만 하니의 첫 인상은 아주 세련되고 지적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다소 구릿빛이었지만 상큼한 이미지는 나를 흔들어 놓았다. 인사가 끝나자 선배는 나에게 덧붙였다.
“하니는 아직 한국의 지리도 서툴고 언어소통도 완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특별한 연고지도 없으니 자네가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가볼 만한 서울 안내를 해 주세나. 신분이 확실한 학생이니까 아무 걱정 말고...”
선배 어봉불의 말은 나더러 하니와 한 번 잘 사귀어 보라는 암시였다.
그래서 나는 쾌히 대답했다.
“하니 양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하지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미가 생글 웃으며 내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서로를 향해 조금씩조금씩 다가갔다. 내가 하지를 만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고 내 인생의 구원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니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해 이혼을 했으며 이혼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아 고통과 번뇌와 좌절로 혼란스럽고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니는 베트남 여자였기에 나와는 국적과 언어가 다르고 문화적 가치와 감각이 달랐다. 그런데도 하니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지금까지 이성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생경함과 신선함으로 내 빈 가슴에 파고들었다.
정말로 그랬다. 하지의 샛별처럼 반ᄍᆞᆨ이는 순수한 눈망울과 미묘한 매력을 충기는 이국적인 모습은 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하니는 한 치의 거부감도 없이 나에게 부드럽고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곧 사랑의 징후였다. 우리는 서로 극과 극이 다른 자석처럼 서로에게 강력하게 끌렸고 점화되기 시작한 사랑의 불꽃은 우리를 마른 가랑잎처럼 빠르게 불태웠다. 왜 그런지 몰랐다. 그녀와 만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하니와 재혼을 했으며 딸 미나를 낳았다.
이제 막 첫돌을 넘기고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미나는 얼굴색이 뽀얗고 계란형으로 아주 예뻤다. 게다가 긴 속눈썹, 맑고 큰 눈망울, 오똑한 콧날 그렇게 미인의 조건을 다 갖추고 태어났다.
전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첫 아기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나는 생각지도 않게 베트남 여자인 하니를 만나 예쁜 딸 미나를 얻었으니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며 하나임은 정말로 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주더니 이제는 가슴 벅찬 행복을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가버린 아기와 너무나 닮은 미나! 미나를 보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꼐서 먼저 천상으로 가버린 그 아기에게 귀한 생명을 불어넣어 미나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딸 미나는 나의 행복 그 자체였다. 내가 하니와 결혼을 하겠다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시켰을 때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넌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애비처럼 여자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짓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요즘은 다문화가정이 많이 생겨나는 사회적 추세이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의 생각과 의사를 존중한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촉촉한 비애로 젖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눈빛과 분위기에서 하니를 보는 순간 베트남에 두고 온 첫사랑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갑자기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어쩜 아버지는 베트남 여자인 하니와 결혼을 하겠다는 나를 통해서 젊은 날 미완성으로 끝난 자신의 사랑을 완결시켜 보려는 대리보상 심리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그랬다. 젊은 시절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운명적으로 사랑한 한 여인을 무책임하게 두고 온 죄책감에 자괴하면서 늘 가슴 한켠에 묻어놓고 그리워했던 아버지는 한순간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니는 스스로 죄인이라 구형하고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소리 없는 선행을 했으며 복지관 노인정에 다니며 봉사활동을 해왔다. 아버지의 봉사와 사랑실천은 우리 집의 가훈이 되었으며 구심점이 되었다.
또 며칠이 지나갔다. 창 밖에 내려앉는 달및은 밤이 깊어지면서 더욱 괴괴하고 교태로웠다. 그리고 열어놓은 창문으로 짙은 꽃향기가 풍겨왔고 나뭇가지 끝에는 초롱초롱한 별들이 매달려 있ᄋᅠᆻ다.
집안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바람에 수초처럼 일렁이다가 조용히 정지된 채 평화롭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책을 읽고 있던 나는 봄의 향연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자지 않고 왜 나왔어?”
쏟아지는 달및을 흠씬 받으며 사색을 질기고 있던 아버지가 나를 맞아 주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잠이 안 와....... 왜...... 혹시 직장에서 무슨 고민거리라도 생긴 거니?”
“아뇨, 이런저런 생각으로요.”
“앉아라, 아무 일 없으면 됐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한 잔 할래?”
맥주를 마시고 있던 아버지가 빈 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아버지가 주는 잔을 받아 들었다. 아버지가 잔을 채워 주었다.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나자 아버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잘해 줘라.”
하니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네.”
내가 짧게 대답했다.
“가져갈 것 미리 잘 챙겨 놓구.”
아버지가 자상하게 배려했다.
“네, 거의 다 준비했어요. 아버지.”
“여자들이란 별것 아닌 아주 작은 것도 챙겨주지 않으면 서운하게 생각한단다.”
평소 정이 깊은 아버지였다. 그러나 베트남 출신 며느리인 하니에게는 더욱 각별했다. 그 또한 첫사랑을 챙기지 못함에 대한 연민이었으리라. 맥주잔을 여러 차례 주고받았다. 전신에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아버지의 여자’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 요즘도 그 분 생각나세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탄식조로 대답했다.
“그래, 아주 가끔...... 참 고운 여자였지.”
그 분을 참 고운 여자라고 표현할 때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리움이 절정에 오르고 있음을 나는 감지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구쳤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번에 우리랑 베트남에 같이 가세요. 그,리고 그 분을 찾아보시지요.”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그렇게 하세요.”
내가 보채듯이 다시 제안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대답 없이 하늘만 을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너무 늦었다.”
아버지가 탄식조로 짧께 대답했다. 그 한마디 속에는 그 분과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는 것을 나는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아버지가 더욱 안쓰럽게 보였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망설이지 마세요. 혹시 알아요. 그 분을 만날 수 있을지...”
나의 지나친 욕심일지는 모르지만 그 분이 지금까지 홀로 살면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병원에 누워 있는 네 어머니에게 더욱 큰 죄를 짓는 일이지. 죄 짓는 것은 한 번으로 끝내야 하는 게야.”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가슴 속에 있는 그 분에 대한 그리움이 깊고 크면 클수록 어머니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후로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머니의 병실에 들러 대소변도 갈아주면서 지극 정성으로 간병했다.
그러는 것이 자신이 지고 있는 죄를 조금이라도 면죄 받는다고 생각했기 떄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베트남에 가서 그 분을 한 번 찾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슴 속에 숨긴 채 아버지는 늘 슬프게 살아왔다는 것을...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이 제법 내려갔다. 약간의 서늘함이 엄습해왔다. 모처럼 갖는 부자지간의 대화를 마치 시샘이라도 하듯 잠잠했던 마당에 바람이 차갑게 일렁거렸다. 현관을 향해 절을 하듯이 등을 굽히고 있는 소나무가지 끝에 총총 매달려 있던 별들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아버님. 날씨가 차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에서 하니가 우리를 향해 외쳤다. 하니는 늘 아버지를 친정아버지 대하듯이 따뜻하고 공손히 모셨다. 그러한 그녀가 무척 고마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우리 집에 들어온 후 지금껏 단 한 번의 언쟁도 없이 좋은 가족 구성원이 되어 화목을 지켜나갔다. 그래서 아버지도 하니의 처신에 만족해 하면서 시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주고 있었다.
“오냐. 들어가마.”
대답과 동시에 아버지와 나는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갔다.
“미나는?”
아버지가 재롱둥이 미나를 찾았다.
“방금 잠들었어요.”
“그래? 오늘은 우리 미나의 재롱을 못 보겠구나. 이거 섭섭해서 어쩌지?”
아버지가 아쉬워했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하니가 거실에 둘러앉았다. 그리고 다시 다음 달에 베트남의 처가에 갈 준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가에 가져갈 선물은 베트남의 어운 날씨를 감안하여 그곳에서 꼭 필요한 생필품을 주로 준비했다. 그런데 하니가 유독 압력밥솥을 꼭 하나 가져가고 싶다고 해서 그것도 하나 샀다. 하니가 압력밥솥을 선물로 고집한 것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압력밥솥에서 지은 밥을 먹어 보았는데 밥알이 서로 엉켜 붙은 결집력이 뛰어나고 좌르르 윤기가 흐르며 입안에서 풍기는 구수한 맛이 너무 좋아서 친정어머니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서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
“베트남에 있는 우리 식구들이 맛있는 밥을 빨리 먹을 수 있도록 엄마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하니는 압력밥솥을 만지작거리며 베트남에 있는 엄마를 떠올리며 좋아했다. 그러다가 하니는 밝고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셋이서 와인 한 잔 하실래요.”
“와인...... 조오치.”
약간 취기가 오른 아버지는 사양하지 않고 하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왕이면 시원한 것으로 한 잔 다오.”
아버지가 특별 주문까지 했다.
“네, 아버님.”
하니가 얌전하게 대답했다. 늦은 시간에 그렇게 해서 와인 파티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와인도 와인이거니와 저녁식사를 일찍 한 탓인지 시장기가 느껴져 하니를 향해 큰 목소리로 라면을 끓여주면 좋겠다는 의사표시를 우회적으로 했다.
“아버지, 고종황제는 특히 면을 좋아했대요.”
“정말이야? 고종황제가 면을 즐겨 들었다는 게......”
“네, 아버지. 면을 드시는 고종의 곁에서 민비는 와인 샤또마고떼를 즐겨 마셨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영웅들은 와인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지난번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도 청와대에서는 식사에 맞춰 와인을 대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더 아는 체 와인에 대해 늘어놓았다.
“청와대 점심식사 때 내놓은 적포도주는 미국 켈리포니아산인 샤또 몬텔레나 에스테이터 가메르테 소비뇽 2005년산이었고, 백포도주는 피터마이클의 라프레미디 소비뇽 블랑 2006년산이었답니다.”
“그래? 넌 어려운 와인 이름을 잘도 외는군.”
“제가 원래 와인에 대해 취미가 있잖아요.”
우리 부자의 대화를 듣고 와인을 준비해온 하니가 방긋 웃었다.
“자, 우리도 축배를.......”
아버지의 멘트에 이 순간만큼은 세상과 삶에 대한 모든 괴로움은 모두 잊은 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까지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도 당신께서 첫사랑의 여자를 버린 탓에 받는 죄값이라며 괴로워하였다. 그래서 가끔 혼자서 훌ᄍᅠᆨ이며 울기도 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마음이 울적해졌다. 모든 인간사는 보이지 않는 업의 굴레에 슬픔도 괴로움도 연원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렇다. 인간만사 모든 것은 본인이 지은 업보에 의해 그 결과가 도래되고 끝없이 윤회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꼐서 풀지 못한 그 업보를 자식인 내가 그대로 물려받아 베트남 여자인 하니와 부부의 인연을 맺어 그 한의 업을 좋게 풀어내고 있다고 나는 믿었다. 와인을 한 잔 다 마신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니를 향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야, 사람은 말이다. 행복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절대로 행복은 오지 않는다. 행복은 가족이 합심하여 부지런히 만드는 것이다. 우리 앞으로도 열심히 행복을 만들자, 알겠니?”
“네, 아버님. 행복이란 각자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한 마리의 새이지요. 그 새는 가만히 놓아두면 어디론가 금세 날아가 버린답니다. 나는 내 마음 안에 있는 새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나는 너희 어머니 병원에 가봐야겠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거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한 뒤 밤이 깊어 어둠이 적재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달빛과 별빛이 쓸쓸히 걸어가는 아버지의 어깨 위로 말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프로필
시인, 소설가
진주교육대학교졸업
한국문인협회회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회원
서울 청다문학회부회장(전), 남강문학회부회장(전)
대구일보 ‘大邱詩評’ , ‘달구벌 칼럼’ 등 칼럼집필활동(전)
수상 : 한국문학비평가협회문학상, 설송문학상
대한문학상, 전국시조현상공모 장원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지게재 우수작품선정
시(詩): 장바구니를 비우며<문예운동게재>
저서 : 시집 -「그 안에 휴(2019년)」외 4권 상재.
3인공저「저 하늘에 사랑등불 매달고」
외 공저 30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