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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회 이사야 56장-66장
이사 56-66장은 문체와 분위기가 다르고 관점도 유배기 이후로 바뀌므로 40-55장보다 후대 저자가 쓴 작품으로 보인다. 이사 40-55장에서 이사 56-66장으로 넘어가면 이 둘 사이에 사고와 어휘의 유사성과 동시에 어조와 방향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 책 저자(또는 저자들)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바빌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으면서 귀환한 유배민들의 곤경, 좌절, 비관주의를 체험한다. 이는 유배기 이후에 활동한 예언자인 하까이와 즈카리야가 처한 환경과 비슷하다.
이사 56-66장에는 키루스나 바빌론에 관해 아무 언급도 없다. 지형에 대한 묘사도 평평하고 수로가 흐르는 평야가 있는 바빌론 땅이 아니라 팔레스티나의 산악 지대와 계곡을 암시한다. 제3이사야가 유배민에 관해 말하는 내용을 보면 아직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은 동족 이스라엘을 염두에 둔다(57,5-7; 58,12; 61,3-4; 62,6-7; 66,18-21). 저자는 미래에 이스라엘이 누릴 영광을 기대하지만 왜 그것이 미루어지는지 설명해야 한다(57,14-19; 60-62장; 66,18-24 참조). 그러므로 제3이사야의 청중은 큰 희망을 품고 팔레스티나에 돌아왔지만 암울한 현실 앞에서 희망이 산산이 부서진 이스라엘인들이다.
성전이라는 주제가 몇 군데 나오는데 성전이 어떤 때는 이미 재건된 것으로 표현되고(56,6-8; 58,2; 62,9; 66,6.20 참조) 또 어떤 때는 하까이와 즈카르야처럼 저자가 성전 건축에 관여하거나, 적어도 재건된 성전을 여러 제물로 단장한 것처럼 보인다.(60,7.13; 66,1 참조) 안식일을 준수하고, 단식을 지키며, 하느님이 받아들일 수 있는 희생제물 봉헌에 관심을 갖는 내용은(56,6-7; 58,1-8; 61,1-6) 유배기 이후에 기록된 에즈라기, 느헤미야기와 말라키서의 특징인 예배와 의식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런 역사 배경을 보여주는 자료와,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 간의 여러 가지 차이 때문에 제3이사야라고 불리는 다른 예언자나 예언자 무리가 이사 56-66장을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이 가설대로라면 이 책의 연대는 유다인들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538년부터 늦게는 450년 사이에 설정되어야 한다. 이 책은 몇 개의 내용들이 서서히 덧붙여지면서 구성되었다. 이렇게 덧붙여진 결과 구원에 대한 기쁜 약속, 공동체 애가와 악인(충실한 이스라엘과 세심하게 구별된다)에 대한 심판 경고가 결합된 형태가 생겨났다.
제3이사야서 본문에는 장절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구절들이 거의 없다. 60-62장은 주제와 문체가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저자가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원 메시지만 선포하며 제3이사야서의 핵심을 형성한다. 제3이사야서에서는 시작 단락인 이사 56,1-8과 끝 단락인 이사 66,18-24에 비슷한 주제들이 나와 수미 상관 구조를 형성하여 이사 56-66장 전체의 틀을 형성한다. 두 본문에서 저자는 놀랍게도 이방인과 그들이 이스라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내용에 따라 제3이사야서를 아래와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이사 56,1-8 : 서론.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성전 예배
이사 56,9-59,21 : 1부: 참된 지도력
이사 60,1-62,12 : 구원 메시지
이사 63,1-66,17 : 2부: 슬픔에서 새 하늘 새 땅으로
이사 66,18-24 : 결론: 민족들을 모아들임
제3이사야서 안의 토라 전승
당시는 율법서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던 때인데 제3이사야서에서 토라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 그러나 저자는 아브라함 이야기(63,16)와 모세 이야기, 그리고 그가 ‘물을 가르는’ 이야기 (63,10-13)는 알고 있다.
이 예언자가 안식일 준수를 특별히 강조하는 본문은 에제키엘과 토라의 율법 전승과 연결된다(56,2-6; 58,13; 참조 : 66,12). 그러나 외국인과 고자를 재배하는 율법 전승을 무시하기 위해 안식일법을 사용하는 점에서(56,2-6; 참조 : 레위 22,25; 신명 23,2) 에제키엘과 사베계 율법 전승과는 견해가 많이 다르다(에제 44,5-9 참조).
전반적으로 보면 제3이사야는 과거 일을 잊어버리라는 제2이사야의 주제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65,17; 참조: 43,18-19) 저자는 새 율법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65,17; 66,22)이라는 비전에 사로 잡혀 있다.
이사 56,1-8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성전 예배
제3이사야는 예언자들이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윤리적 삶을 권고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1). 예언자는 이사 46,13의 한 줄을 취하면서, 하느님의 구원과 의로움이라는 중요한 사건이 가까이 오고 있고 곧 드러나리라고 강조한다. 사실상 제3이사야서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도래를 개인의 윤리적 삶과 연결한다. 그는 안식일 준수(56,2)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제3이사야서에서 중요한 주제다. 성전을 언급하는 것(“나의 집”; 56,5)은 성전 재건이 끝났다는 사실을 보여주므로 기원전 515년 후에 이 구절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설교에서 놀라운 것은 이방인에 대한 개방이다. 안식일을 준수한다면 그사람이 유다인인지 이방인인지 고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56,3-6). “정녕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며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고자들에게는 나의 집과 나의 울안에 아들딸들보다 나은 기념비와 이름을 마련해 주리라. 나는 그들에게 결코 끊어지지 않을 영원한 이름을 주리라”(4-5). 이런 관점은 에제 44,5-9이나, 이방인과 고자를 명시적으로 배제하는 신명 23,2-9과 대조된다. 제3이사야서의 일반적인 태도는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도달하게 될 배타주의와 전혀 다르다. 제3이사야에게 성전은 모든 백성이 기도하는 집이다(56,7)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 성전에 온다는 주제는 56,1-8과 수미 상관 구조를 이루는 66,18-24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사 57,1-21 기억하시는 하느님
1-2절은 의인과 악인의 운명에 대해 말한다. 이는 지혜문학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의인이 사라져 가도 마음에 두는 자 하나 없다. 알아보는 자 하나 없이 성실한 사람들이 죽어 간다. 그러나 의인은 재앙을 벗어나 죽어 가는 것이니 그는 평화 속으로 들어가고 올바로 걷는 이는 자기 잠자리에서 편히 쉬리라”(1-2). 경건한 자들이 일찍 죽고 성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통해 재앙이 임박했음을 알아야 하는데 깨닫지 못하는 상황이다. 의인은 평화 속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에 우리도 의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몰두하느라 하느님을 잊어버릴 지경이다.
“너희는 참나무들 사이에서, 온갖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정욕을 불태우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갈라진 바위 밑에서 자식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5). 단순히 성적 타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신전 창녀와 관계하는 가나안의 관습에 따라 하는 것을 지칭한다. 자식을 죽여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몰록 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예언서들에서는 예루살렘 남쪽 힌놈 골짜기에서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는 이들에 대한 고발을 볼 수 있다.
“길을 많이 걸어 지쳤으면서도 ‘헛수고야.’ 하고 너는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는 네 손에 기운을 얻어 고단한 줄도 모르는구나”(10). 지칠 줄 모르고 이방신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헛일인 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렇게 우상을 좇아가는 삶에 대한 11절 하느님의 대답이 나온다. “누가 무섭고 두렵기에 너는 거짓말을 하고 나를 생각도 않으며 네 마음에 두지도 않느냐? 말없이 눈을 감아 준 내가 아니냐? 그랬더니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않는구나”(11). 사람이 그렇다. 하느님의 잠잠하심이 은총, 감사, 떨림으로 다가오질 않는다. 가만히 귀 기울여 어설프고 우둔한 우리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기다리질 않는다. 성경 말씀 속에서 이처럼 하느님의 부재인 것 같은 공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끝이 없는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잠잠하신 것이다. 이에 경외함으로 순종하며 나아가야 할 텐데 57장에서 이스라엘의 반응은 각자의 우상숭배를 따라 살아갔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해오던 그것을 해도 별 일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잠잠하심으로 더욱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할 우리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서 잠잠하시니 더욱 하느님은 안중에 없고 오직 세상살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때에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내가 너의 의로움과 너의 행실들을 밝혀내리니 그것들은 너에게 소용이 없으리라”(12). 하느님께서 잠잠하고 계신 그때도 하느님께서 다 기억하신다. 잠잠하신 것은 그들과 우리의 죄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삶을 그대로 기억하셨다가 후에 '밝혀내리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소용이 없으리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다. 이 잠잠히 계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에게는 도리어 힘이요, 안식인 것이다.
14절 이하의 말씀은 그들의 죗값대로 다 갚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을 간섭하시어 고쳐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쌓아 올려라, 쌓아 올려라, 길을 닦아라. 내 백성이 갈 길에서 걸림돌을 들어내어라.’ 드높고 뛰어나신 분, 영원히 좌정하여 계신 분 그 이름 ‘거룩하신 분’께서 정녕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드높고 거룩한 곳에 좌정하여 있지만 겸손한 이들의 넋을 되살리고 뉘우치는 이들의 마음을 되살리려고 뉘우치는 이들과 겸손한 이들과 함께 있다”(14-15). 제2이사야는 유배지에서 시온으로 돌아가는 길을 닦으라고 말했지만(이사 40,3-4 참조), 제3이사야는 제2이사야의 표현을 인용하면서도 귀향 후의 상황에서 그 의미를 변화시킨다. 이미 이스라엘은 유배에서 돌아와 있고,이 절에서 말하는 ‘길’은 흩어진 이스라엘이 시온으로 돌아오게 되는 물리적인 의미의 길이라기보다 영적인 의미에서 하느님을 향해가는 길이다. 14절에서 ‘걸림돌’이 하느님의 구원이 도래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면, 제3이사야의 문맥 안에서 그것은 이스라엘의 불의를 가리킨다. 15절에서 “드높고 뛰어나신 분, 영원히 좌정하여 계신 분”이란 하느님의 초월성을 부각한다. 이사야서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하느님의 이름인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은 이사야 6장에서도 잘 보여준다. “뉘우치는 이들의 마음을 되살리려고 뉘우치는 이들과 겸손한 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던 것을 철회하며, 하느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난다.
“18 나는 그들의 길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그들을 인도하며 그들에게 위로로 갚아 주리라. 또 그들 가운데 슬퍼하는 이들에게 19 나는 입술의 열매를 맺어 주리라. 멀리 있는 이들에게도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도 평화, 평화!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리라”(18-19). 18절과 19절 두 절에 거쳐 하느님께서 친히 “나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리라” 강조해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말하는 치유는 이스라엘이 겪은 고통과 상처를 낫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용서를 포함한다. 하느님은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시편103,3)이시다. 이처럼 치유와 용서라는 구원은 하느님께로만 있는 것이다. 에페소서 2장 8-9절에서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바오로는 말한다.
이사 58,1-14 단식과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
58장에 대해 먼저 시대적인 배경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는 바빌론이 멸망하고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할 때이다. 이것은 곧 다 망한 나라를 새롭게 세우려는 그 과정 속에 수반되는 사회적인 혼란이 있었다는 말이고 신앙공동체인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이 당장의 현실을 채워주지는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유대사회는 점점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약한 사람들이 압제당하고 착취당하는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따라서 율법의 참된 정신을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이사 58장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정의와 공정의 실천을 요구하는 제3이사야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 장에서는 율법 가운데 특히 단식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에게 구원의 약속이 실현될 것임을 말한다.
유배를 바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이 혼돈의 시대 속에 있다. 58장은 그러한 혼돈 속에서 드리는 예배와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2절과 3절을 보면 이러한 혼돈의 상황 속에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2-3).
이들은 정치, 경제, 문화의 혼돈 속에서도 날마다 주님을 찾으며 주님의 길을 묻는 자들이다. 하느님의 길을 찾으며 주님이 알려주신 규범대로 살려고 하는 이들이다. 심지어는 하느님과 가까이 하는 것을 즐거워했던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단식까지 하며 하느님께 기도한다. 율법에서 단식을 하도록 되어 있는 날은 본래 속죄일뿐이다(레위23,26-32).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기 위하여 단식하는 관습이 점차로 생겨났다. 유배 이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포위된 날과 함락된 날 등에도 단식했다.
우리는 단식의 참된 의미를 새겨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6). 자신은 단식이라는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신실한 신자로서 대접을 받는 것을 즐기면서, 정작 그들의 삶의 디테일 한 부분에서는 하나라도 손해보지 않기 위해 약자들을 학대하는 일까지도 서스름없이 저질렀다는 말이다. 삶의 현장에서는 단식의 모습 즉 회개하고 돌이켜서 정결하게 살려는 모습이 없었다. 오히려 더 큰 죄악을 서스름 없이 저지른다. 그렇다면 이처럼 죄악된 행동을 하면서도 단식이라는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는 그 모습으로 하느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다.
참된 단식은 우리에게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향을 가리켜 준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8). 하느님이 가르쳐주시는 단식이 무엇입니까? 참된 회개와 참된 거룩함이 무엇인가? 우리의 삶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참된 단식을 하는 자는 압제 당하는자 주린 자 헐벗은 자들은 다 이웃들이다. 아직 온전하지 않은 나라를 재건하며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빛을 발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경건이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이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의 삶은 자유를 잃은 자에게 자유를 찾아주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처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있어 절대로 범하면 안되는 안식일에 대해 말한다.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13-14).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14절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품안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얻는 것임을 말함으로 주님에게서 기원되는 삶을 살아갈 때 예배가 예배되어지며,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되어 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언자는 안식일에 다른 일을 하지 말고 쉬라고 권고하는데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58,13-14). 예언자는 안식일 준수를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과 결합함으로써 예수님이 안식일 준수에 대하여 가르치실 말씀의 토대를 닦는다(마르 2,23-3,6).
이사 59,1-21 주님의 구원의 손
이사야 59장은 같은 장 안에서 서로 다른 형식의 본문들이 나타나 그 종류를 규정하기 어렵다. 주제 면에서는 전체적으로 58장을 이어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구원이 실현되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탓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임을 말한다. 1-2절에서는 59장의 핵심을 요약하고 3-8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한다. “보라, 주님의 손이 짧아 구해 내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분의 귀가 어두워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가 너희에게서 그분의 얼굴을 가리어 그분께서 듣지 않으신 것이다”(1-2).
59장은 주님의 백성들이 범죄함으로 인해 하느님과 깨어진 관계의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다. 예언자 이사야는 죄악으로 인해 무너진 백성들의 삶을 규탄하고 있다. 1,2절을 통해 책임 소재를 먼저 밝힌 후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유도하고 있다. 2절에서는 너희의 죄악이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았다고 한다. 주님께서 들으시지 않거나 구원을 베풀기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관계의 파괴는 “너희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전적으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악과 함께 머무러 있지 않고(시편 5,4),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태초에 하느님과 허물이 없이 지내던 인간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한 원인이 바로 인간의 죄악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응답하지 않으심도 이 때문이다. 이 죄악으로 하느님과 자녀된 백성들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사이가 갈라진 모습을 3절에서 8절까지 살펴볼 수 있다.
손으로 일삼는 모든 일들이 죄악으로 더러워졌다. 3절에서는 입술에는 오직 거짓과 악독이 흐른다. “너희 손바닥은 피로, 너희 손가락은 죄악으로 더러워졌고 너희 입술은 속임수를 말하며 너희 혀는 불의를 지껄인다”(3). 그 어떤 정치 지도자들도 평화와 공정을 판단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지속적인 죄악을 낳는 것이다. 8절에서는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한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길에 공정이란 없다. 그들이 자기네 길을 비뚤게 만들어 그 위를 걷는 자는 아무도 평화를 알지 못한다”(8). 평화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길이며, 하느님과 온전한 영적 교제를 하는 자들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한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여 하느님과 관계가 완전히 깨진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결과 9-11절에서 하느님께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을 멀리하시므로 공정이 사라지고, 빛을 바라나 어두움만이 지배할 것이다. 눈 없는 자처럼 방향을 잃은 체 구원에서 멀어진다. “우리는 눈먼 이들처럼 담을 더듬는다. 눈이 없는 이들처럼 더듬는다. 대낮에도 캄캄한 듯 비틀거리고 몸은 건강하다고 하나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다”(10).
이때 12절에서 이 백성들을 대표하는 예언자가 주님을 향한 허물과 죄를 시인하는 고백이 등장한다. “정녕 저희 악행이 당신 앞에 많고 저희 죄가 저희를 거슬러 증언합니다. 참으로 저희 악행이 저희와 함께 있고 저희 죄를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12). 이스라엘 자손이 정의를 바라지만 없고 구원을 바라지만 멀리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허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넘어져있는지 확실하게 알며 깊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다시 13절과 15절까지 이어진다. “13 저희가 주님을 거역하고 배신하였습니다. 저희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억압과 반항을 이야기하였으며 거짓말을 품었다가 마음속에서부터 내뱉었습니다. 14 그래서 공정은 뒤로 물러나고 정의는 멀리 서 있어야 합니다. 정녕 진실은 장터에서 비틀거리고 정직은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15 진실은 자취를 감추고 악에서 떠난 이는 약탈을 당합니다. 공정이 없음을 주님께서 보시고 언짢아하셨다”(13-15). 주님을 배반함, 속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어그러진 길을 가는 것, 왜곡된 마음과 폭력적인 성향을 그대로 언어로 담아 말을 함으로써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것, 거짓으로 찌들어 있어 진실조차 말할 수 없는 상태이다. 범죄한 자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면서 동시에 이웃들과도 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우리가 이웃과 멀어져있는 모습을 통해 혹여나 하느님과 멀어져있는 모습을 발견한다면 다시금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59장 16절에서 21절까지 대반전이 일어난다. 주님을 거역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께로 돌아온 백성들에게 구원과 응보의 약속을 통해 영원한 동행을 약속하신다. “그분께서는 정의를 갑옷처럼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셨다. 응보의 옷을 입으시고 열정을 겉옷처럼 두르셨다”(17). 하느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으로서 자기 백성이 불의한 세력에 의해 억압을 당하는 것을 도저히 참아 보지 못하시고 의로운 분노를 발하신다. “그분께서는 저마다 그 소행대로 갚으시니 당신의 적들에게 분노하시고 당신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시리라. 섬들에게 보복하시리라”(18).
구원자가 시온에게 올 것에 대한 20절의 약속이 성취된 결과 회복된 선민들 가운데 주님께서 영원히 동행할 것이라는 예언이 선포된다. “그분께서는 시온에게, 악행에서 돌아선 야곱 땅 사람들에게 구원자로 오시리라. 주님의 말씀이다”(20).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눈먼자가 되어 어떠한 정의와 공정도 일삼지 못한 사람에게 주님은 약속을 맺으신다. 이 약속이 주님과 맺은 계약이다.
악행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것이 그들과 맺은 나의 계약이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내가 너의 입에 담아 준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히 네 입과 네 후손의 입, 그리고 네 자자손손의 입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말한다”(21). 이사야는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백성과 맺은 계약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사 60,1-22 예루살렘의 영광 선포
60-62장 안에 이어지는 구원 약속은 제3이사야서에서 핵심이 되는 대목이다. 예언자의 위로 설교에서 출발하여(60,1-9), 하느님이 대부분 일인칭으로 말씀하시는 신탁이 이어진다(60,10-22). “너의 성벽을 쌓고”(60,10)라는 표현은 이 신탁이 기원전 445년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전에 선포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방인도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영광에 포함된다. 예루살렘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과 영광이 예루살렘의 ‘빛을 향하여 오는’ 민족들을 비춘다.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2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3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1-3). 1-2절에서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떠올랐다’, ‘그분의 영광이 나타나리라’라는 같은 의미의 표현들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주님께서 오심을 강조한다.
예루살렘을 무시하고 억눌렸던 사람들도 놀라워하면서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경배하기 위해 이 도성에 올 것이다. 민족들의 재산과 “금과 유향”이 예루살렘에 몰려오고 “타르시스의 배”(60,6-9)로 ‘먼 곳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온다. 이런 표현은 모든 사람에 대한 개방과 예루살렘이 받게 될 새로운 영광에 대한 극적인 묘사다. “낙타 무리가 너를 덮고 미디안과 에파의 수낙타들이 너를 덮으리라.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6). 금은 부유함의 상징이고, 유향은 예배에 사용된다. 마태 2,11에서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져와 예수님께 드린 것이 여기에 연결된다. 예루살렘이 영광스럽게 될 때에 이를 보고 모든 민족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5-6절에서 민족들의 재물이 시온으로 오는 것 또한, 시온의 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심이 모든 민족 앞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60장에 나오는 지명(60,6-9)은 대부분 남쪽과 남동쪽에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미디안은 아라비아 남부 지역이며, 에파는 미디안과 연관된 아라비아 부족 이름이다(창세 25,4 참조). 스바도 아라비아 남부 지역이고 케다르는 트란스요르단 동쪽에 있는 아라비아 북부의 부족과 지역 이름이다. 느바욧은 케다르 부족과 관련된 아라비아 부족이다(창세 25,13 참조). 타르시스는 성경에 보통 배와 관련하여 몇 번 나오는데 때로는 서쪽에 있는 먼 장소(스페인?)를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인도 근처 지역을 가리키기도 한다. 타르시스의 위치는 정확하게 어디이지 파악할 수 없지만 ‘타르시스의 배’라는 용어는 일반 명사처럼 되어 원양을 항해하는 대 선박을 가리키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문은 ‘늘 열려 있는’(60,11)문으로 평화의 시대를 상징한다. 예루살렘 도성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은 특별하고 두드러지며, 결코 여러 민족 중 하나로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영광과 특출함은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 덕분이다. 해와 달이 필요 없이 예루살렘을 비추는 빛(60,19)이요 예루살렘이 그 빛을 받아 다른 민족을 비출 수 있는 빛인 하느님의 현존 덕분이다. “19 해는 너에게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달도 밤의 광채로 너에게 비추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 20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않고 너의 달이 사라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이제 네 애도의 날들이 다하였기 때문이다”(19-20). 19-20절은 시온에게 너의 빛이 왔다“고 선포하는 1-3절에 연결되며, 시온을 비추는 빛이 해나 달의 광채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임을 밝힌다. 해와 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이 햇빛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햇빛이 보이 않게 되는 것이다.
이사 61,1-11 구원의 기쁜 소식
이사야 61장은 제3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 역할을 한다. 이사 42,1의 ‘그 종’처럼 “주 하느님의 영”(61,1)이 예언자에게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제2이사야처럼 제3이사야도 자기 사명을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40,9 참조)으로 여긴다. 이 기쁜 소식을 듣는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인 비천한 이, 마음이 부서진 이, 잡혀간 이다.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3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 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정의의 참나무’ ‘당신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라 부르도록 하셨다”(1-3).
루카 3,22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내려 오셨다는 것을 전하고 4,18-19에서는 이사 61,1-2을 인용함으로써 예수님이 받으신 성령이 그분 사명의 원천임을 말한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공생활 시초에 당신께서 자라신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두루마리를 받아 이 말씀을 읽으시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기름 부음을 받으면서 주님의 영을 받는 것은 본래 임금에게 해당하는 것이다(1사무 16,13). 이사 11,2에서는 메시아 임금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고 예고했고,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인 42,1에서는 주님께서 당신 종에게 당신의 영을 주셨다고 말했다. 이제 그 영은 예언자에게 내려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한다. 여기에서 예언자는 메시아적인 면모를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1절에서 ‘가난한 이들’이란 히브리말로 ‘아니윔’이라고 말한다. 이는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다. 이사야서에서 ‘기쁜 소식’은 하느님께서 유배 중인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유배 후의 공동체에게 예루살렘의 영광을 예고하는 데에까지 이어진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당신이 메시아인지 확인하려는 세례자 요한에게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한다(루카 7,22 참조).
“잡혀간 이들”, “갇힌 이들”은 이사야서 제2부에 속한 49,8에서는 유배 간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러나 귀향 후의 공동체에 제2이사야의 메시지를 새로이 선포하는 58,6과 지금의 본문에서는 그 공동체 안의 억눌린 이들을 지칭한다. 바빌론 압제를 받는 이들에게 선포된 구원의 기쁜 소식이,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에서 힘센 이들에게 억압을 당하는 이들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2절에서 ‘주님의 은혜의 해’는 7년에 한 번 돌아오는 안식년이나 50년 만에 지내는 희년에 종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응보’가 불의와 악을 척결함으로써 정의로운 세상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갚음을 의미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유와 해방을 온전히 보존하도록 손상된 관계들을 복구시키는 희년의 의미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은혜의 해”와 “응보의 날”은 모두 하느님께서 본래 뜻하고 세우신 질서를 되찾게 하기 위한 것이다. 2절의 끝 부분인 ‘위로하여라’라는 말씀은 슬퍼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며, 이사야의 소명이 무엇이진 잘 보여준다. 위로는 곧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다른 말로 시온의 회복이고, 시온의 회복은 다른 말로 온 인류의 회복이다. 죽을 것 같은 바빌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회복이었다. 사실 회복은 우리 모두의 주제이다. 교회에도, 가정에도, 여러분에게도 회복이 필요하다. 건강, 관계 등 모든 부분에서 회복이 필요하다. 이사야서 61장에 회복에 대한 말씀은 성령의 기름부음 받음이다. 하느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 주 하느님의 영이 함께 있다.
‘기름을 부었다’라는 뜻의 이름이 ‘메시아’이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왕과 예언자와 제사장에게만 기름을 부었다. 왕과 예언자와 제사장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는 분은 인류에서 오직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이분이 메시아이다. 신약에서는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고 한다. 역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메시아의 사명이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복음은 부유한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다. 오만한 사람,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육체적, 영적, 정신적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 빈 마음을 갖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온다.
메시아가 그들에게 전하는 소식은 무엇인가? 첫째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고 감싸준다. 둘째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셋째 갇힌 사람은 풀어준다. 넷째 주님의 은혜의 해와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한다. 다섯째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쁜 소식, 아름다운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으면 다섯 가지 결과가 온다. 첫째, 폐허가 된 시온이 아름다운 도시로 재건된다. “그들은 옛 폐허들을 복구하고 오랫동안 황폐한 곳들을 다시 일으키리라. 폐허가 된 도시들, 대대로 황폐한 곳들을 새로 세우리라”(4).
둘째, 이방인들이 돌아온다. “낯선 사람들이 나서서 너희의 양 떼를 치고 이방인들이 너희의 밭과 포도원에서 일하리라”(5). 이스라엘을 공격하던 이방인 바빌론이 이스라엘을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이방인들이 와서 우리 양 떼를 치고 우리 밭과 포도원을 갈아주고 일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
셋째, 메시아가 오면 기쁜 소식이 오면 우리들이 주님의 제사장이 되고 하느님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주님의 사제들’이라 불리고 ‘우리 하느님의 시종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너희는 민족들의 재물을 향유하고 그들의 영화를 이어받으리라”(6). 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주님의 제사장이 되고 하느님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다. 만민사제직에 대한 말씀과 같다.
넷째, 수치도 갑절이나 받았지만 영광도 상속도 배로 받을 것이다. “그들은 수치를 갑절로 받았고 치욕과 수모가 그들의 몫이었기에 자기네 땅에서 재산을 갑절로 차지하고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7). 7절에서 “영원히 그 기쁨이 그들의 것”이라고 했다. 수치를 받은 만큼 명예가 오고, 시온의 영원한 기쁨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 기쁨은 영원하다.
8절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나 주님은 올바름을 사랑하고 불의한 수탈을 미워한다. 나는 그들에게 성실히 보상해 주고 그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어 주리라”(8). 첫째 하느님은 올바름을 사랑한다. 불의를 미워하신다. 둘째, 하느님은 강도질하고 약탈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셋째, 하느님은 고생한 사람에게 반드시 대가를 주시는 분이시다. 넷째, 하느님은 영원한 계약을 맺어 주시는 분이다.
이사 62,1-12 새 예루살렘
이제 신부로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미지가 다시 나오는데 이는 예언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 이 본문에서 그것을 철저하게 긍정적인 이미지로,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품고 계신 강렬하고 기쁨이 넘치는 사랑을 표현한다. 예루살렘은 유배민이 돌아왔을 때 보았던 도성, ‘하느님이 버리신’ 폐허가 아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다.
“시온 때문에 나는 잠잠히 있을 수가 없고 예루살렘 때문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의 의로움이 빛처럼 드러나고 그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2 그러면 민족들이 너의 의로움을, 임금들이 너의 영광을 보리라. 너는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리라.”(1-2).
1절을 보시면 끊임없이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나온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을 멈추신 적이 없다. 1절에서의 ‘나’란 이사야라고 해석할 지라도 그 안에 하느님의 마음을 부으셨기에 이사야의 부르짖음은 곧 하느님의 말씀과도 같은 꼴이 다.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도록 일하신다. 주님께서 친히 지어 주실 이름으로 불리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통하여 어떻게 일하셨지에 대해 6절에서 말한다. “예루살렘아, 너의 성벽 위에 내가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낮이고 밤이고 잠시도 잠잠하지 않으리라. 주님의 기억을 일깨우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마라”(6). 파수꾼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고 주님께 간구하도록 주님께서 세우셨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당신의 손으로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은 일하셨다.
“곡식을 모아들인 이들이 그것을 먹고 주님을 찬미하리라. 포도주를 짜낸 이들이 그것을 내 성소의 뜰에서 마시리라”(9). 이스라엘인들이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주간절과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축제에 참여한 것과 같이(신명 16,16-17),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경신례를 드린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나온 소출인 양식을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은 신명기적이며, 하느님 앞에서 축제를 지냄을 강조하는 것 또한 그렇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과 상급은 바빌론에서 돌아오는 것을 넘어서서 시온과 그 백성이 하느님의 도성,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보라, 주님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셨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구원이 다가온다. 보라,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11).
이사 63,1-6 에돔에 대한 심판
묵시문학적 요소가 나타나는 이사 63-64장은 이사야서 제3부의 다른 본문들과 거리가 있다. 본문이 단편적이고 아래에서 보게 될 것처럼 본문 비판에도 문제점이 많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크게 말한다면 구원을 바라는 탄원의 기도라고 볼 수 있다. 그 첫 단락인 63,1-6은 예언자의 질문에 하느님께서 대답하시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하느님은 포도 짜는 확을 밟다가 옷이 붉게 물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 확에서 밟힌 이들은 이스라엘의 원수인 여러 민족들인데, 에돔이 그들을 대표한다.
“에돔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이신가? 진홍색으로 물든 옷을 입고 보츠라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이신가? 화려한 의복을 입고 위세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분은 누구이신가? 나다. 의로움으로 말하는 이 구원의 큰 능력을 지닌 이다. 어찌하여 당신의 의복이 붉습니까? 어찌하여 포도 확을 밟는 사람의 옷 같습니까?”(1-2).
1절에서 옷이 진홍색 즉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그 붉음의 의미는 결국 사람의 피로, 참혹함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1절에서 말하는 에돔은 2절의 '의복이 붉다'에서 붉다는 뜻의 단어 '아돔'에서 파생된 단어이고, 보츠라라는 에돔의 주요 도시인데 이 보츠라 역시도 '포도를 수확하다'라는 ‘바차르’에서 파생된 단어로 붉은 색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즉 1절의 에돔, 붉은 옷, 보츠라 모두가 붉게 물들어진 옷을 입은 이의 상태를 나타내주고 있다.
그래서 물어본다. “어찌하여 당신은 포도즙을 짜는 사람들의 옷처럼 붉은 색으로 물든 옷을 입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우리를 섬뜩하게 한다. 붉게 물든 옷이 포도즙이 아니라 사람의 피이며, 심판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심판은 하느님의 분노의 결과였다. 6절을 보면 에돔에 대한 심판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분노로 민족들을 밟아 으깨고 진노로 그들을 부서뜨려 그들의 즙을 땅에 흘린 것이다”(6).
이사 63,7-19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
그런데 하느님의 관심은 이 선혈이 낭자했던 에돔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바로 선혈이 낭자한 그 자리에서 시선을 떼서 이스라엘을 바라보게 하고,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총을 바라보게 한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이나 에돔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실제로 그들의 삶을 들어가 보면 이스라엘 역시도 수많은 영적 잘못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헌신짝처럼 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에돔은 죄의 결과로 사망이 선포되었는데, 왜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은 이유가 8절에 있다. “그분께서는 ‘정녕 그들은 나의 백성,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자녀들이다.’ 말씀하시고 모든 곤경 가운데 그들에게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8).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거짓을 행하지 않는 자녀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셔서 스스로 구원자가 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은혜이다. 구원자가 되시기로 작정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9절 이후의 말씀이다. “사자나 천사가 아니라 그분의 얼굴이 그들을 구해 내셨다.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동정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지난 세월 모든 날에 그들을 들어 업어 주셨다”(9). 하느님이 친히 이 모든 환란에 동참하신다는 것이다. 에돔과 똑같이 불충하고 죄에 사로잡혀있는 모습이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로 삼아주고, 자녀로 선언하였기에 친히 우리와 함께 환란을 당하시고 고초를 당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다 누려야하는 은총이다. 이 은총을 누린다는 것에 대해 14절에서 말한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떼처럼 주님의 영이 그들을 안식처로 데려가셨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당신 백성을 이끄시어 영화로운 명성을 떨치셨습니다”(14).
하느님은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편히 쉬며 영화로운 인생을 살기를 바라신다. 이러한 삶을 주님과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버지 되신 하느님의 마음이다. 하느님의 약속밖에 있을 때에는 선혈이 낭자한 두려움과 공포와 죽음밖에는 없지만, 하느님의 약속 안에 있을 때에는 같은 삶을 살아도 편함과 영화로움이 있다. 왜 그럴까? 하느님이 그 모든 삶속에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이스라엘이 부르는 노래가 15절 이하로 계속된다. 17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의 길에서 떠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이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우리와 함께 해달라는 간청이다.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17). 그리고 19절의 고백처럼 주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처럼 되지 않게 해달라는 노래이다. “저희는 오래전부터 당신께서 다스리시지 않는 자들처럼, 당신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자들처럼 되었습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19).
이사 64,1-11 토기장이
63장 연장선으로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문을 담아낸 본문이다. 이사야가 어떤 심정으로 이 고백들을 써내려갔을까.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통감하는 실존적인 예언자로 하느님 앞에 드려진 그 심정을 헤아리며 함께 본문을 살펴보면 좋겠다.
“마치 불이 섶나무를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하리이다. 이는 당신의 적들이 당신 이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니 민족들이 당신 앞에서 무서워 떨리이다”(1). 1절 본문 ‘마치’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그 다음 이어지는 동사들이 과거형으로 연결되기에 무엇 하면 좋을텐데라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소원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석하자면 “당신이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셨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구원의 간구를 들어 주지 않아 서운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오셔서 역사를 베풀어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1절은 동시에 주님의 구원이 어떠한지를 이사야가 묘사하고 있다. 섶나무는 히브리말로 ‘폭력’(하마스)라는 단어와 유사하다. 따라서 불이 섶나무를 사르는 것은 하느님께서 폭력을 꺽으심을 나타낸다. 불은 신의 현현이며, 물을 끓는 것 또한 신의 현현을 의미한다. 2절도 역시 하느님께서 내려 오셨을 때에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어 거룩한 심판으로 확연하게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 하실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저희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일들을 당신께서 하셨을 때, 당신께서 내려오셨을 때 산들이 당신 앞에서 뒤흔들렸습니다”(2).
4절에서는 이와 같이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구원을 기대하는 자들을 이렇게도 붙드시는 신은 오직 하느님뿐임을 강조한다.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 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4). 그 어떤 신과 우상이 당신의 백성들을 이렇게까지 지키겠는가? 그 어떤 종교가 이와 같은 신의 열심을 담아내는가? 과거에도 이후에도 오직 하느님만이 이룰 수 있는 구원의 역사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을 것이다.
5절부터 다시 이사야는 백성들의 죄악을 시인하며 8절부터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의지한 용서를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사야는 처음부터 이 백성의 잘못을 깊이 통감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반영한다.
주님은 도우시는데 우리가 죄를 지었다. 오랫동안 불순종하여 구원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5절에서는 직설적으로 주님의 진노는 오직 이스라엘의 범죄에만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재차 범죄한 것이다.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5). 때론 구약의 폭군과 같은 하느님을 만나며, 불안과 불행으로 뒤덮인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하느님 구원 역사에 의문점을 가질 때가 있다. 구원뿐 아니라 하느님 존재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 죄는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 6절에는 직유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6). 6절에 죄로 더러워지면서 모든 의로운 행동도 더러운 옷과 같고 죽은 나뭇잎과 같다.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등을 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락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완전한 몰락으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은 7절에서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며 토기장이며 우리는 손으로 빚어진 진흙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7). 이사야는 29장과 45장 그리고 예레미야도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용한다. 부성애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냥 만드신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손으로 빚으셨다는 것이다.
이사 65,1-7 우상숭배자들에게 내린 벌
이사 64장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연결되는 65-66장은 심판과 구원을 함께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당신 백성이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으나 이스라엘은 그분께 돌아가지 않았다. 이 본문의 특정은,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심판이나 구원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선고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종들’에게는 구원이 예고된다는 데에 있다. 66장 끝부분에 이르면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느님의 영광이 전해지는데 그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이들과 그분을 거역하는 이들은 서로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 65-66장은 60-62장보다 늦게 형성된 것으로 보는데,여기에서 구원만을 선포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선포된 구원을(60-62장 참조)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서 저11부에서 선포된 심판과 제2부에서 선포된 구원은 이스라엘 전체에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인적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본문의 첫 단락인 1-7절은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선고한다.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문의를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만나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겨레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반항하는 백성에게 날마다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멋대로 좋지 않은 길을 걷는 자들,”(1-2).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점층적으로 묘사된다. 문의를 받아주고 만나주려 하시는 하느님의 태도,“나 여기 있다”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그리고 팔을 벌리고 계신 하느님의 행동이 당신을 찾지도 않는 이들을 향해있다. 인간이 하느님께 청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은총을 베푸신다. 인간이 하느님을 부르고 만날 수 있는 것마저도 하느님께서 먼저 그 가능성을 열어주시기 때문이다. 인간 편에서 그 은총을 거부하고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 편에서는 그 이전부터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얼굴을 숨기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가 없다는 백성들의 말에, 하느님은 오히려 말씀하길 “나를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는 만나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고 한다. 하느님은 오히려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백성을 맞이하기 위하여 온 종일 팔을 벌리고 서 계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선택된 민족은 일차적으로는 이사야 당시의 유다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응징 경고는 유다 백성들의 바빌론 포로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선민은 궁극적으로 볼 때 신약 시대에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져 우상 숭배를 비롯한 각종 악행을 일삼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한 유다인들이다.
7절은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산들 위에서 분향하고 언덕들 위에서 나를 모욕한 그들의 죄악과 그 조상들의 죄악을 함께 되갚으리라. 나는 먼저 그들이 받을 응보를 재고 나서 그들의 품에다 되갚으리라”(7).
이사 65,8-16 주님의 종들과 죄인들의 운명
8절은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참신자와, 겉만 번지르르한 거짓신자의 모습을 비교하며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응보를 이야기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포도송이에 즙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안에 복이 들어 있으니 그것을 으츠러뜨리지 마라.’ 하고 사람들이 말하듯 나도 나의 종들을 위해 행동하여 그들을 모두 파멸시키지는 않으리라”(8). 첫 구절에서부터 하느님을 믿는 백성들의 생각과,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백성들의 생각이 많이 다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어떤 혈통을 타고났으며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내가 세상이나, 교회에서 멋진 모습으로 보이는가, 즉 사람의 외모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 모든 조건과 형편에 관계없이 위선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심판의 칼을 뽑으실 것이지만, 그를 신실히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복된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들이 8절부터 16절까지의 단락에서 일곱 번이나 사용된 ‘나의 종들’로 일컬어지는 참 신자들과, 이와 상호 교차되는 거짓 신자들의 모습을 통해 강조된다. “─ 그러므로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나의 종들은 먹겠지만 너희는 굶주리리라. 나의 종들은 마시겠지만 너희는 목마르리라. 나의 종들은 기뻐하겠지만 너희는 수치를 당하리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워 환호하겠지만 너희는 마음이 아파 울부짖고 넋이 부서져 통곡하리라”(13-14).
이스라엘 자손이 아무리 주님의 백성이며, 그들이 가여움을 자아낼 정도의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결단코 그들 모두에 대해 은혜를 베풀지는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선민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을 때에 그들에게 주셨던 특권을 빼앗아 이방인들에게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시선을 잠시 거두셨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 안에 머무르는 자, 늘 하느님에 대하여 바른 태도를 가지기에 힘쓰며, 교만을 경계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각성하여, 그 은혜 안에 머물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하느님의 손길이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놓지 말아야 한다. “땅에서 자신을 위하여 복을 비는 자는 신실하신 하느님께 복을 빌고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신실하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여라. 지난날의 곤경들은 잊혀지고 내 눈에서 사라지리라”(16).
이사 65,17-25 새로운 창조
이 단락의 구원 선포는 이전의 예언자들이 사용했던 표현들을 다시 취하면서(이사 11,7.9), 온 세상이 새롭게 되는 변화를 예고한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17-18).
예전에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는 제2이사야서 주제(43,18-19)를 반복하면서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65,17)이라는 묵시론적 주제를 소개한다. 요한계시록 21장의 주제이기도 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별히 이것이 남은 자의 축복과 악인의 심판을 예언한 8-16절 바로 다음에 제시된다는 것은 이 새로 도래할 왕국이 주 하느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종들만 누릴 수 있는 의로운 왕국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사야 당시의 상황 속에서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스라엘 자손이 바빌론에서 풀려나는 것이나, 예수님의 강생 이후에 이루어진 교회의 아름다움을 기대했을지 모르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나라인 천국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구원은 명시적으로 창조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우주의 창조(2코린 5,17; 묵시 21,1 참조)만큼이나 핵심적인 것으로서 하느님의 근본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구원은 장수, 재산 소유, 소출을 거두는 추수, 그리고 안전한 해산으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하느님 편에서 서둘러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특징짓는다(65,20-24). 이어서 제3이사야는 자연이 낙원으로 바뀌는 것을 묘사하면서 이사 11,1-9의 예언을 암시한다. 그러나 다윗 가문의 임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65,25).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25).
이사 11,6-9에서 선포하는 메시아 시대의 모습을 일부 인용하고 있다. 늑대와 사자가 새끼 양과 함께 풀을 먹는다는 것은 그들이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관계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들을 양식으로 먹게 된 것도 노아의 홍수 이후의 일로서(창세 9,3 참조) 에덴동산에서는 없던 일이다.
“뱀이 흙으로 먹이로 삼으리라”라는 구절은 창세 3,14에 연결된다.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게 되었던 뱀은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동물들은 실제로 악하게 또는 패덕하게 행동할 수 없으므로 이 마지막 구절은 25절에서 말하는 늑대,새끼 양,사자,소가 사람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임을 알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25절 전반은 인간들 사이에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폭력과 불의가 사라지리라는 것을의미하는 것이다.
이사 66,1-4 진정한 예배
“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지어 바칠 수 있는 집이 어디 있느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2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1-2).
성전 건축의 가치에 의문을 품는 신탁은 같은 시대에 활동한 하까이와 즈카르야가 성전 건축을 재촉하는 것과 대조된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예루살렘에 ‘집’을 갖는다는 역설은 제3이사야서에 새롭게 나오는 주제가 아니다(1열왕 8,27 참조).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진정한 어좌는 하늘이라고 계속 말한다(시편 29,10; 에제 1,26-28 참조). 땅과 성전은 하느님의 발판이다. 저자는 백성이 두 번째 성전의 초라한 모습에 실망했을 때 이 신탁을 선포했을 것이다.
제3이사야는 예언 문학에 나오는 전형적인 주제를 따라가며 하느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성전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예식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인”(66,2.5) 자세다.
이사 66,5-17 어머니로서 예루살렘의 구원
제3이사야는 여성적인 이미지로 책을 마무리한다. 예루살렘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하는데(66,7-12) 지금까지 나온 여러 해산 이야기와 비교할 때 속도와 양이라는 측면에서 단연 으뜸을 차지한다. “진통을 겪기 전에 해산하고 산고가 오기 전에 사내아이를 출산한다. 누가 이런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누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느냐? 한 나라가 단 하루 만에 탄생할 수 있느냐? 한 민족이 단 한 번만에 태어날 수 있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이 오자마자 자식들을 낳는다”(7-8). 온 민족이 그 여인이 낳은 “사내아이”다. 12-13절에서 예루살렘은 어머니이신 하느님으로 이미지가 바뀐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12-13).
생명과 모성적인 돌봄을 다룬 이 아름다운 장면은 고전적인 하느님 현현 양식 안에서 죽음과 심판을 묘사하는 틀 안에 놓여 있다. 곧 하느님이 그분의 적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등장한다(66,6.16; 참조: 이사 30,27-33; 예레 25,15-38).
이사 66,18-24 민족들을 모아들임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18-19). 이 책의 결론 단락은 시작 단락인 56,1-8과 보편주의라는 관점에서 수미 상관을 이룬다. 타르시스, 풋(아프리카 북부), 루드(소아시아 서부), 투발(소아시아 중앙부), 야완(그리스)에서 온 백성이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보러 예루살렘에 오고 민족들 사이에 예루살렘의 영광을 선포할 것이다. 성전에 봉헌 제물을 가져오는 이스라엘처럼 이들도 예루살렘에 제물을 가져올 것이다.
제3이사야는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21)라고 애매하게 표현하지만 이 표현은 이방인도 사제나 레위인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여 아주 놀랍다. 이 단락은 하느님이 “새 하늘과 새 땅”(66,22)을 창조하시고, 모든 민족이 매달 초하룻날과 매주 안식일에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리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된다(66,23).
이사야서 전체의 마지막 구절(66,24)은 심판 장면, 곧 하느님을 거역하던 사람들의 주검이 부패하고 불태워지는 장면을 묘사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나를 거역하던 자들의 주검을 보리라. 정녕 그들의 구더기들은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한 채 모든 사람들에게 역겨움이 되리라”(66,24). 신약성경에서 마르코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사야서의 이 구절을 인용한다(마르 9,42-48). 유다교 회당에서는 이사야서를 이렇게 무서운 경고로 끝맺지 않으려고 23절의 약속을 다시 반복한다.
제3이사야서의 메시지
제3이사야서에서 두드러진 이미지는 빛이다. 시온을 비추는 빛, 이방인들을 비추는 시온의 빛(60,1-3), 해와 달을 대체하는 야훼의 영광이라는 빛(60,19-20)이다.
하느님은 여성과 어머니로 등장하나(66,13) “영원한 계약”(61,8)과 새 하늘, 새 땅을 선포하시는(65,17; 66,22) 이스라엘의 아버지(63,15-16; 64,7)로도 불린다.
백성에 대한 이미지들은 항상 문이 열려 있는 예루살렘 도성에 집중된다(60,11). 다른 나라들이 황금과 유향을 가지고 시온으로 물밀 듯 밀려오고(60,6) 타르시스의 배들이 집으로 향하는 시온의 자녀들을 실어 나른다.(60,6-9) 시온은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신부962,1-5; 참조: 호세 2,16-19)이자 많은 사람의 어머니(66,7-13)로 등장한다.
우리가 선택한 본문에서 보았던 제3이사야의 특징적인 주제에는 아래 내용이 포함된다.
· 시온의 구세주이자 구원자인 야후;(609,16; 62,11)
·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을 뜻하더라도(65,17) 하느님의 구원이 오는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56,1).
· 안식일 휴식을 강조하는 진정한 야훼 경배(58,13-14)와 성전이나 성전 희생 제물이 아니라(66,1-3)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공경하는 자세의 중요성(66,2.5)
· 성전 예배에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은(56,3-7)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모은다는 뜻이다.(66,18-21)
· 굶주린 이, 집 없는 이, 헐벗은 이에게 정의를 베풀고 돌보는 것.(58,6-10) 제3이사야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다.(61,1-3; 참조: 40,9-11)
제3이사야서의 신학은 자애로운 하느님 개념이 있다. 제3이사야서에서 야훼는 자애로운 분이시다. 하느님의 모성적인 돌봄이라는 이미지는 대부분 위험스러운 하느님 현현을 대체한다. 성전 짓는 일을 그전처럼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초월성을 생생하게 강조한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66,1) 야훼는 어떤 성전보다 위대하시다. 제3이사야는 더욱 영적인 하느님을 설교한다.
제3이사야는 성전 건축보다 정의가 중요
종교에서 하느님 말씀을 존중하고(58,6-7; 66,1-2) 가난한 이를 돌보는 것, 올바른 것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56,1)이 성전 건축보다 중요하다. 성전 건축에 대한 열정은 자신도 모르게 우리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남기려는 욕심이 될 수 있다. 교회를 둘러친 담은 쉽사리 외부인이나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배척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제3이사야는 이런 형태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66,3) 어떤 성전이든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56,78)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이 역사 너머의 심연에서 말씀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저의 실천과 다른 사람에 대한 개방으로 돌아가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외부인에 대한 개방
제3이사야는 이방인에게 가장 많이 열려 있는 예언자일 것이다. 이방인도 이스라엘이 기도하는 장소에 들어가 함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방인들은 사제와 레위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66,21) 이것은 혁명적 언어다. 그러나 제3이사야는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인다. 하느님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65,17) 위로의 심연 같은 미래가 열린다. 그 심연으로부터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을 새로운 현실과 일치로 이끄신다. 제3이사야는 많은 점에서 신약성경의 바오로를 예시한다. 바오로도 이방인에 대한 개방과 “새로운 피조물”(2코린 5,17)이되는 것과 다름없는 화해를 강조한다. 에페소서도 그리스도의 모 안에서 유다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은 벽이 무너진다는 것을 선언한다(에페 2,11-18).
실망의 시기에 희망을
제3이사야는 그 시대 유배민들의 실망을 해결해야 했다. 제2이사야가 ‘계곡이 메꾸어지고’ ‘산들이 솟아오른다.’고 예언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하느님의 영광에 이끌려 광야를 통과하는 화려한 장관을 이루는 행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야훼를 굳게 믿는 이들은 이런 실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상황은 제2세대 그리스도인의 상황과 아주 비슷하다. 주님은 첫 세대에게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까지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제3이사야는 희망을 꺼뜨리지 않았다. 제2이사야의 말을 토대로 제3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곧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이사 56,1; 참조: 46,13) 예언자는 이 희망을 의로운 행실과 연결한다. 다가오는 하느님의 구원을 준비하는 길은 서로에게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제3이사야는 사실 사회에서 지켜야 할 윤리가 제대로 지켜질 때 하느님의 구원이 더 빨리 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재림에 관련하여 깨어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 깨어 있는 자세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마태오복음서에서 끝 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작은 이들을 돌보라는 비유에서 절정에 이른다(마태 25,31-46). 이 ‘작은이들’은 제3이사야서에 언급된 사람들과 거의 같은 이들, 곧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미래에 올 구원에 대한 희망은 현재에 의롭게 살고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실현된다.
제3이사야는 미래의 구원을 어떤 특별한 정치적 사건과 명확하게 동일시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는 최근에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나 해방의 순간으로서 등장하는 어던 군사적 승리에도 호소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야훼의 도래를 단순히 빛을 비추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가 기대하던 사건은 더욱 영적이며 신비로운 것, 더욱 종말론적인 것이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