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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 처가살이 설움도 많아] 처음에는 속사정을 모르던 장인어른도 멀쩡한 제복 자리를 내놓은 사위가 탐탁지 않았지만 국수 기계 돌리는 일이 워낙 고생이 심한지라 차츰 하나하나 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30대 초반 장인에게서 독립하게 됐지만 생각지도 않은 호된 신고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창 공장 설비 준비에 여념이 없는 어느 날 저녁, 인근 공장 주인들이 찾아와 가게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종용한 것이다. 원래 어느 시장이나 동종 업체끼리 치열한 경쟁은 감내해야 하는 것이지만 장인이 경영하던 공장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아우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것도 개업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장사를 하지 말라니 서운함을 넘어 억울함에 밤잠을 설쳤다. 저들은 숫자를 믿고 덤볐지만 판석에게 의지할 것은 법 하나밖에 없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경찰에 투신했던 덕인지 저들의 불법과 허점은 너무나 자명했다. 관할서는 아무래도 공정한 판결을 내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부산시경으로 직접 서류를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이 발보다 빠르다고 했던가? 투서를 접수한 다음 날, 상인들이 백기 투항한 것이다. 지금이야 1대 곽 사장 마음속의 섭섭함은 사라진지 한참이고 그보다 그렇게 아옹다옹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구포를 떠나 소식마저 끊어진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IMF 그리고 눈물의 잔치 국수] 곽 사장이 믿는 구석은 설비도 기술도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갓 제대한 장남 곽조길이 비장의 카드였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댄 결과, 공장을 넓혀 국수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활로를 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곧장 적당한 공장 물색에 들어간 아버지와 아들에게 낙점된 곳이 바로 지금의 공장이다. 원래 카펫 공장으로 쓰던 건물이었는데, 아버지 곽 사장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엉뚱하게도 옆 건물에 들어서 있던 양조장이었다. 술이나 국수나 다 물이 좋아야 하는 것인데, 양조장 옆집이니 수질도 그만할 것이라고 미뤄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자금이었다. 공장으로 쓰고 있는 지금의 건물과 집을 처분해도 공장 매입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계약은 도장 찍기 전까지 모르는 법. 대금을 마련하지 못한 채 건물주와 계약을 하러 간 곽 사장이 마지막으로 내민 것은 엉뚱한 조건이었다. 공장을 명의 이전 해주면 그 공장을 담보로 잡아 대금을 치르겠다는 것이다. 공장주 고향 동네 사람을 어렵게 모셔 중개인으로 넣은 덕분인지 당시로는 황당한 계약은 물 좋은 옆집 막걸리의 지원 속에 기분 좋게 체결되었다. 현재 1대 곽 사장은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2대 곽조길 사장이 구포 국수의 맥을 잇고 있다. 한때는 국수 공장 사장 입장에서 혹 할 만한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수 열풍이 부는 듯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잔치 국수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슬프게도 IMF, 빚잔치가 가져온 씁쓸한 국수 전성기의 귀환이었다. 6·25 전쟁이 끝나고 한참 동안 구포역에서는 당황스러운 진풍경이 벌어졌다. 여객열차가 정차하는 시간이면 살벌한 외침이 들러왔기 때문이다. ‘내 딸 사이소’, ‘내 배도 사가소’ 뭘 팔고 뭘 사라고? 자세히 귀 기울여 보면 그 외침은 다행이도 심청이 같은 예쁜 딸아이를 내놓은 소리가 아니고 딸기를 사라는 것이다. 당연 배 역시 물 많고 달기로 유명한 대저 배를 말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첫 열차가 출발할 때쯤이면 상행·하행 가릴 것 없이 객석과 통로는 함지박을 내려놓은 아낙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딸기와 배가 모두 팔린 함지박은 국수 다발로 채워졌다. 열차를 타지 못한 아낙들은 경비를 추렴해 트럭을 대절해 부산 시내로 국수 장사를 나갔다. 그때 그 시절, 구포 시장을 새하얗게 수놓았던 그 많던 국수 공장들과 밀양으로 안동으로 아니면 부산 시내로 국수를 팔러 다니던 ‘아지매’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