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외 4편
임은경
구름이 둥근 얼굴을
호수에 담근 날
꼬마는 비눗방울 놀이에 한창인데
비눗방울이 커졌다가 사라질 때를 기다려
천천히 잔디공원을 걸었다
라일락 향기가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를 따라가더니
무더기 무더기마다 꽃을 피웠다
비눗방울 수만큼 머물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나둘 돌아가면
공원 여기저기는
사랑의 흔적
몽고반점
엄마 자궁에서 나올 때
푸른 점 하나 엉덩이에 새겼지
오래된 기억을 새기고
첫발을 내디딜 땐 모두가 환호했지
초원을 걸을 때나 하늘길을 달릴 때도
푸른 점은 아이를 지켜줬지
아이가 커가면서
몽고반점은 점점 희미해졌지
흙바람에 눈을 감기도 하고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도 하면서
아이는 점점 흙을 멀리하게 되었지
어느 날,
바다 깊은 곳에서 태초의 기억이 말을 걸어왔지
바다 이야기를 간직한 물고기 이야기,
나비와 새가 날던 숲의 이야기
억만 광년의 거리에서 보면
우리는 푸른 점 안에서 살고 있지
서로 손잡고 있지
빈 그릇
임은경
돌담 귀퉁이에
놓여 있는 그릇 하나
홀로된 어머니처럼 빈 가슴이네
끼니마다
육신 같은 그릇을 닦아
팔꿈치가 닳도록 담았다가 비웠다가
애썼다는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한 채
투명한 말만 담아 내어놓았을 어머니,
텅 빈 얼굴이네
연둣빛 바람이 볼 비비며 지나가고
부처의 미소가 내려와 눕고
햇살에 잠긴 숲
임은경
나뭇잎 새로
햇살이 부서질 때
전나무는 전나무 빛으로 부서져 내리고
고목나무는 고목나무 빛으로 쓰러져 눕는데
산수유 노랗게 불 밝힌
산자락,
바람이 한바탕 숲을 깨우면
청설모는 힘을 모아 나무 위로 오르고
새들은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치네
숲은
햇살에 잠겨
여전히 투명한데
블랙홀
임은경
화면 너머
낯선 풍경을 바라보면
빛과 어둠의 경계 어딘가에
비일상적인 세계의 저편 어딘가에
끊임없는 적막이 질문을 시작하면
되돌이표가 꼬리를 문 채 돌고 있는 사이
물음표가 흔들린다
어둠의 질량을 변화시키기 위해
문장을 푸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적막 뒤에서 온 빛이
중력에 휘감겨 고리 모양을 하고 있다가
보물상자를 여는 순간
낯선 에너지를 뿜어낸다는데
적막의 시공간을 탈출하지 못해 생긴 무덤,
블랙홀 중심으로 빠져든다
당선소감
임은경
윤동주의 「서시」를 접하고부터 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를 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는 본연의 감성을 끌어내주었습니다.
시세계에 빠져들수록 하늘과 나무와 새,
굴러다니는 돌멩이마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전체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무한한 상상력은 고비사막으로 날아가 낙타도 볼 수 있고,
원시의 초원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인상 당선 소식을 듣고
시로 인해 선물 받은 위로와 감동, 용기, 즐거운 상상이
누군가의 마음자리로 번져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약하나마 시로써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에 동참하겠습니다.
졸시를 어여삐 봐주신 심사위원님과
시를 끌어내고 키워주신 안현심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시삶문학회 회원들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희로애락을 함께한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임은경
.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 한남대학교 사회문화행정대학원 심리상담학과 석사 졸업
. 시낭송가
. 이메일 : ekimbook@naver.com
. 현재 ㈜엔에스전력 대표이사
첫댓글 축하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