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초대석
나무 번역가 외 4편
손택수
세계일주여행을 떠난 장 콕토가 바다 한가운데 선상 갑판에서 찰리 채플린을 만난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초면에도 한눈에 상대방을 알아보고 가까이 다가가지만 정작 한 마디 말도 나눌 수가 없었지요 수줍어서? 아닙니다 그냥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채플린의 부인이 통역을 자청하고 나섰는데, 이때 채플린이 조용히 부인을 가로막습니다 통역이 되지 않는 상황, 한 마디 말도 주고받을 수 없는 이 순간이 오히려 그들을 더 간절하게 한다고, 말로 이 짧은 순간의 감동을 가로막지 말라고
시를 쓴답시고 나무들의 말을 번역하려 하였으나 오역 투성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식물사전을 펼쳐놓고 횡설수설 했지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느 도서관에서는 식물과 인문학 특강도 했지요 왜 그랬을까요 잠시만이라도 말을 멈춘 채 나무와 저 사이의 침묵에 골똘해지는 편이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도무지 번역이 되지를 않는, 말이 멎은 자리에서 생겨나는 몸짓과 눈빛과 숨결을 온전히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이 어디 나무와 저의 관계 뿐이겠습니까만은
동화의 나라
청산가리에선 아몬드향이 나지
포스겐 독가스에는 새로 자른 건초향이 나지
바다에 면한 공단에선 분홍색 눈이 내린다
염색공장들이 눈까지 염색을 해서
하늘도 구름도 염료 빛깔이다
분홍색 눈을 탈색하려면 더 많은 약품을 써야할지도 몰라
죽은 소를 잊기 위하여 등심을 꽃피우듯이
반월공단은 안산스마트허브로, 시화공단은 시화스마트허브로
악취가 나는 곳은 악취보다 더 강한 향수를 뿌리면 되지
악취와 악취를 섞어 오리무중 속으로 흘러가게 하면 되지
소가죽이 프라다 가방이 되듯이
명품관의 화려한 유리 너머 요염한 프라다만 남고
공단은 잊혀지듯이
너도 나도 명품 하나는 갖고 싶어지듯이
분홍색 파란색 눈이 내리는 도시
머리 염색이 절로 될 것 같은 거기
아이들은 총천연색 공기들을 마시지
파란 콧물을 흘리면서
성냥갑 동물원
성냥을 긋고 얼른 담배로 불을 가져갈 때
꺼지지 않게 불을 감싸던 두 손은 꽃봉오리를 품은 잎과 같았지
맞아, 그때 적어도 나는 불이 그냥 불이 아니라
누군가의 심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등으로 바람벽을 하였지
하긴 그때 성냥은 다들 동물들이었으니까
닭표, 사슴표, 펭귄표, 용마표, 오리표
동물들이 불을 켜곤 하였으니까
어쩌다 성냥골로 귀를 후비면 동굴 속에 횃불을 켜들고
내 안의 깊고 깊은 지층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같았다
불은 원앙의 날개였다가, 사자의 갈기였다가,
세상에 없는 동물들을 만나게도 하였다
천마표와 비호표, 비사표
그런 성냥갑엔 근사한 말들도 있었지
‘인간은 오직 노동에 의해서만 세상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는 편안을 누릴 수 없다.’
알 수 없는 명언들이 우리를 명상으로 이끌었지
먼지가 켜켜이 쌓인 성냥공장 노동자의 노동은 왜 골병인지,
노동은 왜 휴식이 되지 못하는지,
유황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는 내게 그 많은 동물들은
성냥이 단순히 성냥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제비표, 거북표, 공작표, 백구표
동물들의 눈빛처럼 희미하게 사라져간 성냥
두 손을 오므려 공손하게 품던 불을 불러본다
젖은 성냥을 켜듯이, 이름만 남은 나의 성냥갑 동물원
말을 위하여
보도블록은 일테면 안장 같은 것이다
야생에 얹은 나의 문장들이 그러하듯이
안장이 말의 잔등을 찧어 상처를 내기도 하겠으나
나는 말에게 안장을 얹어서 먼 길을 함께 떠나는 수고를 마냥
단죄하고 싶지만은 않다
장맛비와 일대 일로 씨름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알리라
몇 시간씩 퍼붓는 물에 침수된 지층방에서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심장을
양수기 모터가 타버리듯 돌려본 적이 있다면
물은 생명이면서 죽음이다 절망이면서 전망이다
그 앞에 똑똑히 나를 서 있게 한다
그 모든 것인 말과 함께 나는 길을 가리라
길섶에 핀 들꽃에 코를 벌름거리기도 하면서
말의 숨소리와 뱃구레의 오르내림을 따라 출렁이리라
하루의 노역에 지쳐 새어나오는 내 한숨 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는
말도 어느 순간 내 몸의 기별들에 반응을 하겠지
가령 나는 말이 고개를 돌려 나를 감아줄 때
그가 그 긴 목으로 다정하게 포옹을 하고 있음을 안다
그가 그 큰 눈망울 속에 담은 나를 보여줄 때 거기에 눈부처가 앉아 있음을 안다
허구헌 날 길을 뜯는 공사 먼지가 눈을 흐리는 일은 좀
자중하였으면 얼마나 좋겠나 발굽이 다치면 나 또한 절룩거려야 하니
안장은 사실 애물단지 같기도 하다 말과 나 사이의 장벽 같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통방을 하듯이, 거기 누고 없소
또각또각 깔린 대지에 함께 노크를 하리라
장맛비 뒤에 나온 인부들이 깨진 보도블록을 수선하고 있다
편자를 박듯 망치로 블록을 끼워 맞추고 있다
이런 식으로밖에 말과 만나지 못하는 게 좀 서글프긴 하지만
이마저 없다면 우리는 영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풀의 행성
여름풀은 그냥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고 하지만
게으름을 마냥 선전할 수도 없는 노릇
잘리는 풀잎 위로 메뚜기가 뛰고 풀여치가 뛴다
나무 위의 새들이 좋아서 왁자지껄이다
바리깡으로 밀어낸 자리마다 돋아나는 속살
뽑히면서 지뢰 파편처럼 씨앗을 더 널리 터뜨린다
손목의 정맥줄이 튀어나와라 강단을 부리는 풀들
쉽지 않다 만리장성도 어쩌면 풀이 만든 역사 아닌가
풀어놓은 양떼들이 장성을 만들고 허물며
사라진 왕조들의 국경을 선포한 것 아닌가
주린 양의 창자 속으로 들어간 국경선으로
젖을 짜는 노래를 들어라 차라리
초원을 불어가는 풀의 제국 신민이 되어라
머리 한 올 잡아당기면 몸 전체가 그쪽으로 쏠리듯이
뿌리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마당 전체가,
마당을 둘러싼 대지 전체가 앙버티고 있는 한여름
일어나는 땅거죽이 지구의 살거죽 같아서
나는 그만 들어올린 나의 행성을 가만히 내려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