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영광 그 뒷면에 감춰진 십자가
이명찬 신부
오금동 성요셉성당 주임
이제야 조심스레 하는 말이지만, 책이든 방송이든 한때 우리나라를 온통 휩쓸었던 ‘힐링’(healing) 열풍이 저는 참 불편했습니다. 모든 일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고 통하는 법이니, 비관적인 생각일랑 접고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 생각을 하자는 ‘막연한 희망’(?)을 얘기했습니다. 주변 환경을 탓하고 잘못된 사회구조를 탓하는 건 그저 개인능력이 미달되는 루저(낙오자)나 하는 짓이니, 빨리 마음 고쳐먹고 그럴 시간에 자기계발에 전념하던지, 마음 수양을 하라는 충고였습니다.
물론 이런 힐링 담론들이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기도 했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각자 마음먹기에 달린 ‘개인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사회적 책임’에는 눈감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런 위로는 그저 잠시 고통을 잊게 해주는 ‘설탕물’ 정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는 우리들이 잊어서는 안 될 ‘십자가’가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혼인미사 때,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이야 신랑 신부가 기쁨에 젖어 모든 게 밝고 아름답게만 보이지만, 우리 인생은 밝은 면만 있는 게 아니라, 비슷한 분량만큼의 어둠과 고통도 함께 있음을 알았으면 합니다. 양지가 있으면 그만큼 다른 한편에서는 어둠 속의 그늘이 있고, 오늘처럼 이런 아름다운 꽃이 있기 위해서는 땅속에서 이를 받쳐 주는 어둠의 뿌리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얻는 것(得)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失)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맛 뒤에 감춰진 쓴맛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남편과 아내,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선배 신자들이 후배 교우들에게 알려줘야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길이 늘 영광만 있는 ‘꽃방석’만은 아니라는 것, 기쁨과 보람 이면에는 십자가의 고통(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고통)이 함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늘 만사형통에 기쁨의 은총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만큼의 고난과 십자가가 함께 주어지며, 오히려 그런 십자가를 통해 사람이 성숙되고 단단히 영글어지는 것이겠지요.
오늘 주님이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냉큼 베드로가 나서서 모범 답안을 얘기합니다. 베드로는 정답을 얘기했지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대답 속에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위엄과 영광’과 같은 밝은 쪽만 생각했지, ‘그리스도라면 앞으로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어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미래 운명, 어두움 면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단, 남들이 말해놓은 정답을 인용하는 대답도, 신학적인 대답도, 추상적인 대답도 안 됩니다. 당신에게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대답해 주세요.
<서울주보 2014.8.24.>
http://cc.catholic.or.kr/root_file/seoul/jubo/2014년%208월24일%20주보(PDF).pdf
윌리엄 다이스, 양자 든 성모를 집으로 모시는 성 요한, William Dyce, St. John Leading Home His Adopted Mother, ca. 1840, Oil on Panel, 36.8 x 31.4 cm, Victoria and Albert Museum, 영국 런던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우리의 사회는 영광(육의 편안함과 즐거움)만을 찾고 고난과 십자가는 없습니다.
있어도 어리석은 자들의 짓으로 취급 받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