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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옥이 무너지고 소실되었다"… 에도시대 '네덜란드인'이 본 '거대지진 피해' / 7/30(일) / 현대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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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리쿠 대화재, 겐로쿠 지진, 운젠·후겐다케 분화, 교토 텐메이 대화재…헤이세이, 레이와 시대와 마찬가지로 재해가 많았던 에도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재해를 벗어났는가?
18세기 네덜란드 상관장으로 나가사키에 부임한 탄토는 당시 발생한 겐로쿠 지진 피해를 목격한다. 여기서는, 전회의 <처음 「후지산」을 본 「에도 시대의 네덜란드인」이 남긴 말>에 이어, 그때 탄토가 남긴 기록을 쫓는다.
※본 기사는 프레데릭 클레인스(저), 이소다 미치후미(해설) 『네덜란드 상관장이 본 에도의 재해」(고단샤 현대 신서)의 내용을 발췌·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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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코네 고개에서 실제로 본 피해
28일은 맑았다.탄토 일행은 토카이도에서 강 건너기 다음으로 험한 곳으로 꼽히는 하코네 고개까지 올라가 점심을 먹었다. 탄토는 하코네 고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지에서 지진이 모든 것을 뒤집은 것 같다. 대부분의 가옥이 소실되었다. 불에 타지 않은 다른 가옥들은 붕괴되었다. 나머지 가옥은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재건되고 버팀목으로 지탱하고 있다. 또한 주민들은 곳곳에서 새 가옥을 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가령 재건된 가옥은]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진 구조이다."
이 하코네 고개의 피해에 대한 기술이 겐로쿠 지진 피해와 관련된 관찰 기록으로서 탄토의 일기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것이다. 즉, 하코네 고개 이서에는 겐로쿠 지진의 피해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탄토의 일기 난외에 하코네 고개에서 지진으로 야기된 재해를 처음 관찰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나시키 유키의 『유키 지진 도기』의 내용과 일치한다. 유키의 일기에도 도내 미시마 이서 지진 피해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지진으로 네덜란드인들이 매년 묵고 있던 하코네 고개의 여관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전파된 우리 숙소 주인은 아이를 하나 잃었다. 이 작은 하코네 고개의 숙소 전체에서 400명의 남성, 여성, 어린이가 그 목숨을 빼앗겼다. 우리는 이[가설] 여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비참한 상황을 지켜봤기 때문에 별로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고 탄토는 일기에 썼다.
탄토 일행은 하코네 고개에 오래 머물지 않고 여행을 계속했다. 산길을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여러 곳에서 큰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 흔적을 보았다. 이 낙석 때문에 산길은 여러 곳에서 차단되어 있었다. 또한 어떤 곳에서는 산사태가 일어나 산의 암석 및 표토가 광범위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탄토 일행이 삼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지나야 할 산길은 세 곳이 산사태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일행은 그 산사태 지점을 우회하기 위해 일단 절벽을 내려 산림을 빠져나와 다시 산길로 돌아가야 했다. 그 우회로에는 쓰러진 수목 사이에 목재와 흙으로 만든 임시 통로가 부설되었다. 그러한 임시 통로를 따라 벼랑을 오르내릴 때면 항상 위험을 느꼈다고 탄토는 돌아본다.
탄토로 인한 피해 상황 관찰 기록은 더 이어진다. 탄토 일행이 산길을 따라 통행하던 마을들의 가옥은 거의 모두 무너져 소실된 상태였다. 석공과 노동자들이 산길에 무너져 내린 바위를 부수는 작업을 부지런히 하는 모습도 보였다. 너무 커서 움직일 수 없는 돌은 석공들이 부수고 작게 만든 다음 산길을 따라 굴러 절벽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탄토는 이 광경을 보고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장소들을 경악 및 동요 없이 지나칠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곳곳에서 마주치는 슬픈 재해를 볼 때마다 손가락질을 하며 가볍게 크게 웃는다."
이 탄토의 기술에는 서양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자연재해를 받아들이는 방법의 차이가 나타나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지진대국 일본에 비하면 갑자기 닥치는 자연재해는 별로 없었다. 물론 네덜란드는 땅이 해수면 아래에 있는 저지대여서 홍수로 인한 재해는 많았다. 그러나 홍수에 대해서는 토목공사를 통해 어느 정도의 대책이 가능하다. 네덜란드에서는 "세계를 만든 것은 신이지만 네덜란드를 만든 것은 네덜란드인"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네덜란드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형성한다는 기질을 갖고 있다. 이런 기질은 앞 장에서 본 소화펌프 개발 개량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경험하지 못한 지진이 일어나자 네덜란드인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지진과 같은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에 일본인들은 멧돼지에게 끊임없이 노출되었고, 그로 인해 독특한 일본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냉엄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 문화의 특징 중 하나일 것이다. 현실을 수용함으로써 긍정적으로 부흥에 임할 수 있다.
일본인의 태도에 대해 탄토가 적어놓은 곳곳에서 마주치는 슬픈 재해를 볼 때마다 손가락질을 하며 가볍게 크게 웃는다는 행동은 결코 슬픔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웃는 것은 재해로 인한 정신적 손실을 치유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방어 기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지진과 화재에 대해 에도시대 일본인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런 막심한 재난의 흔적을 처음 본 탄트라는 이 피해 상황에 마음이 흔들렸다. 슬픔을 표현해야 한다는 윤리적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던 탄토는 일본인의 심정이나 행동 이면에 있는 것까지는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 오다와라의 피해 상황과 번주의 진력
하코네 고개를 넘어 오다와라에 도착한 탄토는 그곳에서 본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년에 묵고 있는 오다와라에 도착했는데, 모든 가옥이 무너져 소실된 상황이었다. 활기차게 부흥에 임하고 있는 생존자는 가설 주택이나 텐트에서 살고 있었다. 오다와라 성도 완전히 소실돼 파괴됐다".
네덜란드인은 에도참부 도중 오다와라에 숙박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번에 너무 많은 피해 상황에 놀란 탄토는 예외적으로 오다와라에 머물지 않고 오이소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말을 타려고 할 때 통사가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이 마을에서만 지진 재해와 화재로 인해 4만명의 남성, 여성과 어린이가 사망했다. 그러나 그 숫자에는 지진 초기에 일어난 화재로 목숨을 잃은 성내 사람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사망자 수는 비밀에 부쳐져 있기 때문이다."
상기와 같이 통사로부터 들은 정보로서 탄토가 기록하고 있는 오다와라에서의 사망자수는 4만명으로 되어 있는데, 이 숫자는 신빙성이 보다 높은 일본측 사료와 크게 괴리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전술한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공용 일기 「락지도 연록」에서는 오다와라에서의 사망자수를 291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오다와라 번사에 의한 겐로쿠 지진 피해에 대한 기록 「오다와라 지진 각서」에 기재되어 있는 오다와라 영내 261명 및 여행자 41명이라는 사망자 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탄토에게 이 정보를 가져다 준 통사는 아마 마타우에몬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탄토의 일기 기술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타에몬에는 피해 규모를 과장하여 전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러한 피해정보의 기록은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일본인의 심정에 관한 중요한 정보원이기도 하여 사람들이 피해를 심대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통사는 오다와라의 네덜란드 숙소 주인에 대한 정보도 전해주었다. 이에 따르면 현지 숙소 주인집은 똑같이 무너져 소실됐다. 그는 하인 외에 아이 한 명을 잃었다. 그는 지금 에도에 있고 숙소를 재개하기 위해 새로운 주택 건설을 오다와라 번주에게 청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그 숙소가 없으면 처자와 함께 생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 탄토의 기록에 의하면, 모든 것을 잃은 정숙의 주인은 오다와라 번주에게 구제금을 청원하기 위해 3월경 에도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다와라 번주는 오쿠보 다다마스였다. 겐로쿠 지진 이후의 충증에 의한 부흥 사업에 대해 기록한 사료가 남아 있다. 전술한 「오다와라 지진 각서」이다. 이 사료는 오다와라 번사였던 이와세 가문에 전존하고 있다. 『오다와라시사』의 사료편(근세2번 영일)에 번각이 게재되어 있으므로 참조하기 쉽다.
오다와라 지진 각서에 따르면 겐로쿠 지진이 일어났을 때 번주 오쿠보 타다마스는 에도에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직후 오다와라에서 에도로 파견된 번사에 의해 오다와라의 피해 상황이 전해졌다. 다다마스는 음력 12월 1일(1747년 1월 7일)에 부흥을 위해 막부로부터 15,000냥을 빚졌다. 타다마스 자신은 12월 5일 에도를 떠나 다음날 오다와라에 도착했다. 오다와라 성은 붕괴 상태였기 때문에 오다와라에 있는 동안 오두막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오다와라 성과 하코네 등을 시찰한 타다마스는 12월 21일 오다와라를 떠나 에도로 돌아왔다.
또 이 사료에 따르면 오다와라에 머무는 동안 다다마스는 오다와라 마을의 부흥에 충당하기 위해 쌀 30가마와 대출금 1500냥을 제공했다. 조금 전 탄토의 일기에는 다다마스가 이미 에도로 돌아온 후에 네덜란드인 숙소 주인이 번주를 따라 에도로 향했다고 쓰여져 있기 때문에 타다마스가 오다와라에 있는 동안에는 정숙의 주인은 구제 청원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청원은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탄토의 후임 상관장 페르디난드 데 휴로트의 일기를 조사했다. 드 휴로토는 지진 이듬해인 1705년 3월 12일에 하코네 고개를 넘었다. 일기에는 지진으로 무너진 가옥 상당수가 아직 철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이 해는 네덜란드인이 오다와라를 그냥 지나 오이소에 숙박했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이 시점에서 오다와라의 숙소는 아직 재건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이 해의 귀로에 있어서도, 네덜란드인은 오다와라가 아니라, 오이소에 숙박하고 있다.
또한 다음해 1706년 에도에 참회한 할마누스 멘싱의 일기를 살펴본다. 멘싱의 일기를 더듬어 보면, 가는 길은 드 휴로트와 마찬가지로 오다와라를 그냥 지나간다. 그러나 귀로길 중 일기에 오다와라에 숙박한다는 기술이 보인다. 겐로쿠 지진 발생 2년 후에야 오다와라의 숙소가 재건된 것 같다.
또한 연재 기사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이 본 '거대지진'의 충격>에서는 탄토의 경력부터 그가 겪은 재해 모습까지 자세히 해설하고 있습니다.
프레데릭 클레인스
https://news.yahoo.co.jp/articles/6962d233ea9322caad373fb27830c62e6b542251?page=1
「すべての家屋が倒壊し、消失している」…江戸時代の「オランダ人」が見た「巨大地震の被害」
7/30(日) 7:03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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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ビジネ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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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暦の大火、元禄地震、雲仙・普賢岳の噴火、京都天明の大火……平成、令和の時代と同じように災害の多かった江戸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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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びとはいかに災害を生き抜いたのか?
18世紀にオランダ商館長として長崎に赴任したタントは、当時発生した「元禄地震」の被害を目の当たりにする。ここでは、前回の<はじめて「富士山」を見た「江戸時代のオランダ人」が残した言葉>に引き続き、そのときタントが残した記録を追う。
※本記事は、フレデリック・クレインス (著), 磯田 道史 (解説)『オランダ商館長が見た 江戸の災害』(講談社現代新書)の内容を抜粋・再編集した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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箱根峠で実際に見た被害
二十八日は晴れだった。タント一行は東海道において川越えの次に難所とされる箱根峠まで上がり、そこで昼食を取った。タントは箱根峠の様子を次のように記録している。「当地において地震がすべてをひっくり返したようだ。ほとんどの家屋が焼失している。焼失していないそのほかの家屋は倒壊している。残りの家屋は人が住めるように可能なかぎり再建され、控え柱で支えられている。また、住民たちは至るところで新しい家屋の建築に一生懸命に取り組んでいる。しかし、〔仮に再建された家屋は〕とても簡易に作られた構造である」。
この箱根峠の被害についての記述が、元禄地震の被害に関連する観察記録としてタントの日記においてみられる最初のものである。つまり、箱根峠以西には元禄地震の被害はあまりなかったと思われる。実際にタントの日記の欄外に「箱根峠で地震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た災害をはじめて観察した」と書かれている。これは、前述の梨木祐之の『祐之地震道記』における内容と一致している。祐之の日記にも、道中の三島以西における地震の被害の記録はほとんど見られない。
この地震を受けてオランダ人が毎年泊まっていた箱根峠の宿屋はどのような状況だったのか。「全壊した我々の定宿の主人は子どもを一人亡くした。この小さな箱根峠の宿場全体で四百人の男性、女性、子どもがその命を奪われた。我々はこの〔仮設の〕宿屋で昼食を取った。しかし、前述の悲惨な状況を見ていたので、あまり食べる気がしなかった」とタントは日記に綴っている。
タント一行は箱根峠に長く留まらず、旅を続けた。山道を東方面へ下る道すがら、複数の場所で大きな岩が下へ転がり落ちた跡を見た。この落石のせいで山道は複数の箇所で遮断されていた。また、あるところでは、山崩れが起きて山の岩石および表土が広範囲にわたって崩れ落ちていた。
タント一行が杉の並木道に沿って通るはずの山道は三ヵ所が土砂崩れによって塞がっていたため、一行はその土砂崩れの地点を迂回すべく、いったん崖を下りて、山林を抜けて、そして山道に戻るためにふたたび上る必要があった。その迂回路には倒れた樹木の合間に木材と土で作られた仮の通路が敷設された。そうした仮の通路を辿って崖を上り下りする時はつねに危険を感じたとタントはふりかえっている。
タントによる被害状況の観察記録はさらに続く。タント一行が山道に沿って通行した村々の家屋はほとんどすべて倒壊し、焼失していた。石工や労働者が山道に崩れ落ちた岩を砕く作業をせっせとおこなっている様子もみられた。大きすぎて動かせない石は、石工たちが砕いて小さくしてから、山道に沿って転がされ、崖の下に落とされていた。
タントはこの光景を見て感じたことを、次のとおりに書き記している。「これらの場所を驚愕および動揺なくして通ることができない。しかし、日本人は、このことについて話すと、各所で遭遇する悲しい災害を見るたびに指を差して、軽々しく大笑いをする」。
このタントの記述には西洋人と日本人とのあいだにみられる自然災害の受け止め方の違いが表れている。オランダでは地震大国日本にくらべると、突然襲ってくる自然災害はあまりなかった。もちろん、オランダは土地が海面下にある低地地帯であるので、洪水による災害は多かった。しかし、洪水に対しては土木工事によってある程度の対策が可能である。オランダでは「世界を造ったのは神であるが、オランダを造ったのはオランダ人である」という表現があるほど、オランダ人は自分の運命を自分で形作るという気質を持っている。このような気質は、前章でみた消火ポンプの開発・改良にもつながっている。
しかし、オランダで経験したことのない地震となると、オランダ人もお手上げだった。地震のような防ぎようもない自然災害に日本人はいにしえから絶えず晒され、それにより独特の日本文化が形成されたといえる。厳しい現実をありのまま受け入れることは日本文化の特徴の一つであろう。現実を受け入れることによって、前向きに復興に取り組むことができる。
日本人の態度についてタントが書き留めた「各所で遭遇する悲しい災害を見るたびに指を差して、軽々しく大笑いをする」という行動は、決して悲しみを軽くとらえることを意味していない。笑うことは、災害による精神的損失を癒やすための一種の自己防衛機能であると筆者は考える。絶えず起こる震災や火災に対して、江戸時代の日本人は現実を受け入れて、耐え忍ぶしかなかった。一方、このような甚大な災害の痕跡をはじめて見たタントはこの被害状況に心を揺さぶられた。悲しみを表現すべきであるという倫理的認識を強くもっていたタントは、日本人の心情や行動の裏にあるものまでは理解しようとしなかった。
小田原の被害状況と藩主の尽力
写真:現代ビジネス
箱根峠を越えて、小田原に到着したタントは、そこで見た状況について、次のように記録している。「例年宿泊している小田原に着いたところ、すべての家屋が倒壊し、焼失しているという状況だった。元気よく復興に取り組んでいる生存者は仮設住宅やテントで暮らしていた。小田原城も完全に焼失し、全壊した」。
オランダ人は江戸参府の途中で小田原に宿泊するのが通例だった。しかし、今回あまりの被害状況に驚いたタントは例外的に小田原に泊まらず、大磯まで進むことに決めた。馬に乗ろうとした時に、通詞がもたらした情報によると、「この町だけで震災と火災によって四万人の男性、女性と子どもが死亡した。しかし、その数字には、震災の初期に起こった火災で命を落とした城内の人びとは含まれていない。その死者数は秘密にされているからである」。
上記のように、通詞から聞いた情報としてタントが記録している小田原での死者数は四万人となっているが、この数字は、信憑性のより高い日本側史料と大きく乖離している。例えば、前述の柳沢吉保の公用日記『楽只堂年録』では小田原での死者数を二二九一名と記録している。これは小田原の藩士による元禄地震の被害についての記録「小田原地震覚書」に記載されている、小田原領内二二六一人および旅人四一人という死者数とほぼ一致している。タントにこの情報をもたらした通詞はおそらく又次右衛門である。これまでのタントの日記の記述内容から推察すると、又次右衛門には、被害の規模を誇張して伝える傾向があったように思われる。他方、このような被害情報の記録は、誇張されたものであったとしても、当時の日本人の心情に関する重要な情報源でもあり、人びとが被害を甚大なものとして認識していたことを示唆している。
通詞は小田原におけるオランダ人の定宿の主人についての情報も伝えてくれた。それによると、「当地の定宿の主人の家は同じく倒壊し、焼失した。彼は使用人のほかに子ども一人を失った。彼は今江戸にいて、宿を再開するために新しい住宅の建設を小田原藩主に請願している。というのも、彼はすべてを失ったので、その宿がなければ、妻子とともに生活できないからである」。
以上のタントの記録によると、すべてを失った定宿の主人は小田原藩主に救済金を請願するために、三月頃に江戸に赴いたようである。当時の小田原藩主は大久保忠増であった。元禄地震後における忠増による復興事業について記録した史料が残っている。前述の「小田原地震覚書」である。この史料は小田原藩士だった岩瀬家に伝存されている。『小田原市史』の史料編(近世二藩領一)に翻刻が掲載されているので、参照しやすい。
「小田原地震覚書」によると、元禄地震が起きた時に藩主の大久保忠増は江戸にいた。地震が起きた直後に、小田原から江戸へ派遣された藩士によって小田原の被害状況が伝えられた。忠増は旧暦の十二月一日(一七〇四年一月七日)に復興のために幕府から一万五〇〇〇両を借金している。忠増自身は十二月五日に江戸を発って、次の日に小田原に到着した。小田原城は崩壊状態だったため、小田原にいるあいだは小屋に泊まったようである。小田原城や箱根などを視察した忠増は十二月二十一日に小田原を発って、江戸に戻った。
また、同史料によると、小田原に滞在しているあいだに忠増は、小田原町中の復興に充てるために米三〇〇俵と貸付金一五〇〇両を提供した。さきほどのタントの日記には、忠増がすでに江戸に戻った後に、オランダ人の定宿の主人が藩主を追って、江戸に向かったと書かれているので、忠増が小田原にいるあいだには、定宿の主人は救済の請願ができなかったようである。
彼の請願はどのような結果に結びついたのだろうか。それを知るためにタントの後任商館長フェルディナンド・デ・ヒュロートの日記を調べた。デ・ヒュロートは地震の翌年の一七〇五年三月十二日に箱根峠を越えている。日記では地震によって倒壊した家屋の多くがまだ撤去されないまま残っていると書かれている。また、この年はオランダ人が小田原を素通りして、大磯に宿泊したとの記述があるので、この時点で小田原の定宿はまだ再建されていなかったことがわかる。なお、この年の帰路においても、オランダ人は小田原ではなく、大磯に宿泊している。
さらに、翌年の一七〇六年に江戸に参府したハルマーヌス・メンシングの日記を見てみる。メンシングの日記を辿ると、往路はデ・ヒュロートと同様に小田原を素通りしている。しかし、帰路の道中日記に「小田原に宿泊する」という記述が見られる。元禄地震発生の二年後にようやく小田原の定宿が再建されたようである。
さらに連載記事<長崎の「オランダ商館長」が見た「巨大地震」の衝撃>では、タントの経歴から、彼が体験した災害の様子まで詳しく解説しています。
フレデリック・クレイン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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