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 성령의 은사에 관한 교훈
1. 성령의 은사 ( 12 : 1-11 )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 12: 1 신령한 것에 대하여 -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1] 형제들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친숙함을 느끼도록 하였다.
2] 신령한 것에 대하여
'...에 대하여'의 헬라어 '페리'(*)는 고린도 교인들의 서면(書面) 질문에 답하는 말이다. 이는 이미 독자들이 제기된 문제점에 관하여 바울이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여기서 바울이 '신령한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신령한 것'의 헬라어 '프뉴마티콘'(*)이란 단어의 성(性)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1) 혹자는 14: 37에서 '프뉴마티콘'이 '신령한 자'(*, 에 프뉴마티코스)로 사용되기 때문에 본문의 '프뉴마티콘' 역시 남성 명사로서 '신령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본다(Hofmann, Edwards,Holsten, Heinrici).
* 고전 14: 37 -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2) 혹자는 14: 1에서와 같이 '신령한 것'(*, 타 프뉴마티카)이 중성 명사로서 '은사'를 가리킨다고 본다(Calvin, Luther, Meyer, Godet, Lenski).
* 고전 14: 1 -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본문의 '신령한 것'에 대한 성(性)이 불확실하며, 또한 (1),(2)의 내용이 서로 일맥상통하므로 어느 한쪽으로 기울 필요는 없으나 본문의 문맥과 주제상 '신령한 것'의 의미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3]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본문의 헬라어 '우 델로'(*,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바울적 표현으로 친근한 어구인 '아델포이'(*, '형제들이여')를 수반한다.
* 고전 10: 1 –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 살전 4: 13 –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희망을 분명히 천명(闡明)하면서도 그 대상에 대하여는 친근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적인 문제로 비화될 여지를 최소화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의 목적과 그 기원에 대하여 그리고 은사의 다양성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 초래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전 12: 2 이방인으로 있을 때 -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녔었다.
1]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본 절의 '이방인'은 '이교도'(Heathen)를 의미한다.
원래 고린도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으로 이방의 우상 종교를 좇아갔던 과거 상태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는 현재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다.
바울은 성령의 현현(顯現) 이전과 이후를 이방인이란 단어로 분명히 구별 짓고 있다.
2]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본 구절은 이방 종교의 허구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현으로 우상은 생명이 없어서 사람의 요구에 반응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수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 섬겼던 우상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이런 헛된 우상을 섬긴 것은 우매함과 세속적 탐심의 결과이고, 그 상태는 비극적인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3]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끄는 그대로'의 헬라어 '호스 안 에게스데'(*)에서 '호스 안'은 반복의 개념으로 쓰이는 코이네 헬라어의 관용어로서 '끌림을 당할 때마다'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끌려갔느니라'의 헬라어 '아파고메노이'(*)는 아고(*, '내가 인도하다')의 미완료 수동태 분사이다.
이는 과거의 고린도 교인들이 헛된 우상의 요구대로 이끌려 자기의 판단과 결정과는 무관하게 비인격적인 숭배를 하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