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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산나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복의근원정태경
특새3/누구의 길을 준비했나?/막1:1~15 말씀:라준석 목사님
오늘부터 마가복음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신약의 두 번째 책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12 제자도 아닌 [마가]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 할 때,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요?
그것을 짐작하기 위해 마가복음 1장 1절을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막1:1)
개역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의 시작이라]“(막1:1)고 써 있습니다.
여기에 두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그리스도]와 [복음]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기쁜소식>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좋은소식>입니다.
요즘은 <나쁜소식>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은 분명히 <기쁜소식>입니다.
[마가]는 1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시작이다>라고 선언하며, 쓰기 시작했어요.
귀신 들렸던 [마가]는 자신을 살리신 예수를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어요.
그럼,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1장 1절]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자식입니까?
우리는 예수 믿기전 까지는 돈과 명예와 자식을 앞세웠지만, 예수를 믿은후에는 내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는 1장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3가지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첫째는 세례요한이 나타난 사건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세례받은 사건이고,
셋째는 광야에서 시험을 당한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장 2~3절을 보십시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내가 네 앞에서 내 심부름꾼을 보낼 것이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가 있다. 주를 위해 길을 예비하라. 그분을 위해 길을 곧게 하라“고 기록된 것같이***”(눅1:2~3)
여기를 보면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메시아]가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3절을 참고해서 보십시오.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리라“(사40:3)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세상의 이치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지금 목사인 제가 오늘 새벽에 여기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제가 오고 싶어서 온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온누리 교회에 와서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것도 모두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수를 쓴다"고 그 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운]이 좋아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세례요한은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습니까?
그것은 [세례를 주는 것]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준비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목적에 이끄는 삶]을 사신 분입니다.
세례요한의 목적은 예수님이 오심을 미리 알리고, 그분이 오시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버린 사람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전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끝절에 나오는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28:20)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예수를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은 자기 위치에서 "자신의 1장 1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내 인생의 1장 1절은 “예수님과 함께 시작한다”고 생각하면서 업무에 임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부터 세례요한의 특징을 4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1. 첫 번째 특징은, 요한에게는 분명한 <메세지>가 있었습니다.
4절을 보세요.“세례요한이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막1:4)
세례요한은 말을 많이 하거나 횡설수설하지 않고, 분명하게 자기생각을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그 내용은 "죄의 용서를 위해 회개하고, 세례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무엇을 하다가 가시겠습니까? 내 인생의 분명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귀신들린 자들은 횡설수설하고, 말을 많이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분명한 [메시지]가 없어요.
2. 두 번째 특징은, 요한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서 “유대 온지방과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눅1:5)
세례요한은 군더더기 말을 붙이지 않고, 분명하게 자기가 [할말]을 정확하게 했습니다.
그 내용은 "죄 용서를 위해 세례를 주었다“고 했어요.
요한이 세례를 준 장소는 어디입니까? 요단강입니다.
이 장소는 “하나님이 세례를 주라”고 명령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에 따라 장소도 지정해 주시고, 그러면 사람들이 그곳으로 찾아 오십니다.
당신의 사역지는 어디입니까? 당신의 요단강은 어디입니까?
저(라준석 목사님)에게 주신 요단강은 온누리교회 서빙고 성전입니다.
3. 세 번째 특징은, 요한은 인생을 <간단하게> 살았습니다.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습니다“(눅1:6)
요한의 의복은 <낙타 털>을 입었습니다.
<낙타 털>은 요즘에는 고급이라고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제일 구하기 쉬운 것이 동물의 가죽입니다.
그래서 흔한 <낙타 털>로 만든 옷을 간단히 입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식사는 <메뚜기>와 <들꿀>입니다.
이것들은 광야에서 쉽게 얻을수 있는 간단한 식사입니다.
요한의 집도 광야에서 <천막>치고 살았어요.
그래서 요한의 [의.식.주]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의 모습과 같다“고 해요.
엘리야도 세례요한과 같이 [간단한 인생]을 살았고, [목적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한 내가 사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기도하는 가운데 터득한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돈이 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시고,
[할일]이 있으면, 그 때에 "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반드시 능력있는 자에게 [일]을 맡기시지 않고, [할일]이 있으면 그때에 그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4. 네 번째 특징은, 요한에게는 분명한 [정체성]이 있었어요.
7~8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 보다 더 능력있는 분이 내 뒤에 오실텐데,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막1:7~8)
나는 누구입니까?
나의 정체성(Identity)는 무엇입니까?
“나는 인간이고, 내 뒤에 오시는 진정한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하는 세례요한은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요한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분입니다. 요한은 "[나]라는 존재는 신발 끈을 풀기에도 미약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에게 성령이 역사하면, 내 인생이 바뀐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내가 전도 대상자를 선정하여 교회에 데리고 오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만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통로]에 불과하고, 진정으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 역사하시면 “나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라는 고백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확실한 나의 [정체성]을 세우고, 예수믿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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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1. 첫째, 하늘이 열리고,
2. 둘째,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리는 것을 보았고,
3. 셋째,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내 아들이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누가복음 1장 10~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물에서 막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처럼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가 기뻐하는 내 아들이다> (눅1:10~11)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하고,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의 국적은 하늘에 있는 <천국>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시길 바랍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 왔습니다.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사역을 하면, 안됩니다.
마지막 사건은 예수님이 광야로 가서 시험받는 사건이 일어 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40일동안 광야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는데, 천사들이 예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눅1:12~13)
예수님은 광야로 가서 들짐승과 같이 지냈어요. 그러나 거기에는 “사탄도 함께 있었다”고 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때로는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없지만, 귀신은 귀신같이 [성령의 사람]을 공격해오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령의 사람]은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더 [방어력]이 생겨요.
인생의 고난을 겪은 사람은 성경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더 집중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렇게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면서 예수님은 고난을 통과하고,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곳은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에 따라,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첫째로,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사탄의 시험에 꾀이지 말고, [통과]하십시오.
그러면 용맹스런 군사와 같이 복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사실수 있습니다.
특새4/사람을 낚는 어부/막1:16~34, 말씀:라준석 목사님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갈릴리 호숫가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호수 주변을 거닐다가 그물을 던지는 어부를 만났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여기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호수가에서 그들이 던지는 그물은 보지않고,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얼굴이나 경력에 관심있는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거기에서 향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만나느냐?"가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만났느냐?”에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그런 [관심]을 가지며 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막1:17)
예수님은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생각에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말을 먼저 거는 것 같지만, 그 반대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말을 거는게 아니라, 시비를 걸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오십니다.
혹시 하나님이 먼저 말을 걸어 올때는 고민과 갈등이 생깁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우리가 "처음에 교회가야 한다"고 권유 받았을 때, 교회에 갈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한참 교회다니면서 "십일조를 지키라"고 하는데, 드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말 것인가?
그러다 한참 성령충만해 지면, "선교사로 떠나라"고 하는데, 떠나야 하나? 아니면, 말아야 하나?
우리의 생활 가운데 이런 갈등은 너무나 많아, 매일매일 고민에 빠집니다.
이 물건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일을 내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나 예수님은 반드시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고, 반드시 한가지 [약속]을 해주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나를 따르라”고 만 말씀하지 않고, 뒤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 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에게도 “네고향과 네 친척, 그리고 네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떠나, 내가 네게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니, 네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창12:1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지만,
첫째,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둘째 네 이름을 크게 만들고, 셋째 네게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미리해 주신 것입니다.
그 [복]은 사람낚는 어부의 [복]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받는 그런 [복]은 돈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재물을 축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길>입니다.
음식점 주인의 가장 큰 바램은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고,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 주는 사람>이 한없이 고마운 거에요.
실력을 총동원하여 맘껏 가르쳤는데, 제자의 마음을 잡지 못하면 그것은 불행한 교수입니다. 삶에 있어서 최대의 행복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 이 있을 때입니다.
평생 그 일을 했는데, “자기를 따르는 수제자가 없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으면 직업도 물론 바뀌지만, 직업을 바꾸지 않더라도 직업의 [목적]이 바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것은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성취 가능성이 없는 일 같아도, 그 일에 도전하는 분들도 있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서,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낮서른 마을로 찾아가서,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곳으로 떠나가는 사람이 선교사예요.
우리가 주님을 따라 가다보면, 바보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러나 그 일이 헛수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계신 선교사님들은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는 [주님의 마음]을 내 가슴에 품고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취생활을 많이 하다가 보니까 “저와 같이 한방을 쓰는 사람은 예수믿게 해달라 “는 기도를 했어요.
교수님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1. 첫 번째 권세는 <가르치는 권세>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곧 안식일이 돼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 가셔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예수께서 권위있는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뿐입니다“(막1:21~22)
예수님의 사람낚는 방법의 첫 번째는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말씀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었어요.
이런 권세가 있으, 사람을 낚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권세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두 번째 권세는 <귀신을 내 쫓는 권세>를 보여 주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말했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키더니 비명을 지르며 떠나 갔습니다“ (막1:25~26)
귀신은 더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에게는 타협하지 말고, 분명하게 꾸짖어야 해요.
귀신 에게는 사정하면 안되고, 과감하게 꾸짖어야 해요.
귀신한테 “너 좀 깨끗하게 하고 다니면 ,안되겠니?"라고 타협해서 말하면, 안됩니다.
그냥 “나가 주어라”고 사정해서 말한다고, 나갈 귀신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는 “귀신아 물러가라” 아니면 “더러운 영들은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꾸짖어 나가도록 명령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들은 이제는 예술계와 문화계에도 널리 침투하여, 작품에도 나타나고 있어요.
3. 세 번째 권세는 <병고치는 권세>입니다.
20절~32절을 보십시오.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즉시 이 사실을 예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시몬의 장모는 열이 떨어 졌습니다. 곧바로 그 여인은 그들을 시중들기 시작했습니다“ (막1:30~31)
예수님의 사람 낚는 3번째 방법은 병든자의 [병을 고쳐 주는 일]입니다.
이런 능력과 권세가 우리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특새5/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는 의미/막1:35~45, 말씀:이재훈 목사님
오늘 본문을 보면 2가지 다른 상황속에서 일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른 새벽]에 기도하는 모습이 나오고,
둘째, 나병환자들을 고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2가지로 다른 상황이지만, "예수님이 [외딴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35절과 맨끝절인 45절을 보십시오. "매우 이른 새벽 아직 어둑 어둑할 때,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막1:35)
"그러나 그 사람은 나가서 이 일을 마구 널리 퍼졌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 밖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방에서 예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막1:45)
35절에 나오는 <외딴 곳>과 45절에 나오는 <마을밖 외딴 곳>은 [광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시험을 받았던 [광야]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외딴 곳]을 <한적한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래 [광야]는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한적한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외딴 곳]에서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대인 기피증이 있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인데, 왜 [외딴 곳]에서 기도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아닌 것에는 <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이끌려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균형잡힌 삶을 사신분입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은 사람의 Life style을 두가지로 표현했어요.
첫째, 무엇인가 [쫓기는 삶]과
둘째, [부르심]을 따라 가는 삶으로 구분했어요.
"자기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나가는 삶을 살라"고 권하셨어요.
우리는 한해를 돌아보면서 지난 해에 내가 해야 [할일]을 하지 못하고, 지낸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쫓기는 삶>과 <부르심의 삶>이 있었기에 그런 겁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빠서 늘 긴급한 일에만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일은 돌아 보지도 못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몰두하고 지내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그렇지 않았어요.
요한 복음17장 4~5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일을 다 완성해 이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요17:4~5)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4~5절과 같이 놀라운 고백을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하라>는 일을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드렸습니다. 그랬으니 이제는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30세 초반의 나이에 이런 기도를하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 나이에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너무나 아깝지 않으세요.
조금만 더 이 땅에 계시도록 허락했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텐데...아! 아깝습니다.
예수님의 나이 33세에 십자가를 향해 나가는데도, "예수님은 여한이 없었다"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삶을 살았기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거예요.
제생각으로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은 늘 분주하게 지내며 [종]으로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종의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종]은 쉴틈이 없습니다.
[종]은 종으로써 해야 할 [일]과 종으로써 해야 할 [삶]이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이 식사할 틈도 없었고, 풍랑이 거세게 일고 있는 바닷가의 한가운데에서 깊이 잠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만큼 그의 삶은 어떤 비결이 있었습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 비결은 <혼자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새벽 미명에 <홀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은 어땠습니까?
첫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외딴 곳]에서 혼자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셨고,
두 번째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니까 그 무리들을 피해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는, 겟세 마네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혼자 제자들을 피하여 기도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할 때도 기도하셨고, 변화산에서 [변화]될 때에도 기도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많은 군중들이 몰려오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단이 요구하는 유혹과 같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지않고, <영광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즉, 고난을 받지 않고 메시아가 되는 길을 사탄이 제의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혼자 기도했습니다.
다시말해서 [십자가 없는 영광]는 예수님이 원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35절에 나오는 <매우 이른 새벽>은 아직도 [어두운 새벽]을 말합니다.
이 [새벽]은 안식일 다음 날 [새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예수님의 하루종일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그 주위에 있는 회당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날 하루의 일정에도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고, 베드로의 장모 집을 심방하여 열병을 고쳐주고,
또 식사를 하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만나다 보니까, 병을 고쳐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자정이 넘도록 일하시고, 새벽녁에 잠시 눈을 붙이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은 일찍 일어나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깼을까요?
예수님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므로, 아직도 아침에 잠이 많은 청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기 때문에> 새벽에 잠에서 깬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도 다음 날 중요한 사람과 만날 약속이 있으면, 아침에 일찍 일어 납니다.
우리는 피곤하기 때문에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피곤한 거예요
기도를 잃었기 때문에 피고하게 느끼는 거예요
이런 예수님의 습관에는 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찍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하는 습관은 너무도 좋은 습관입니다.
우리들도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새벽에 일찍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했읍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하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에 [큐티]를 해야 합니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은 혼자 있지 못하고, 대중속에 빠져서 같이 지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너무 외로우니까, 자신을 잃어 버리고 대중과 같이 휩쓸려 지내려고 합니다
요즘에 제일 많이 팔리는 약이 <우울증 약>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외로워서 우울증에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울증에 왜 걸립니까?
우울증은 혼자 있어서 걸리는 병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혼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립니다.
혼자 있는 내면의 고독이 <외로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립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내면의 고독]을 [창조적인 고독]으로 자기 자신이 바꿀 때,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나홀로]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혼자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혼자 있지만, 시장 한 복판에 있는 것처럼 어수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 속에 있어도 혼자 있는 것과 같이 느끼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두란노의 책 중에서 <영적 발돋음>이란 책에서 [영적 흐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로움을 창조적인 고독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왜 분주하게 사는가?
그것은 <외로움을 참지 못해서 사람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합니다.
이 사람을 만나고, 저 사람을 만나는 가운데 외로움을 잊으려고 해요.
그래서 이일을 해 보고, 저 일을 해 보는데 특별히 안정되지 않아요.
어떤 목적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려고 일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방법이 아니예요.
오히려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꿀 때 <진정한 영적 생활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창조적인 고독을 즐기세요.
이런 시간을 우리는 Quiet Time [큐티 시간]이라고 해요
그런 [큐티]시간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수많은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사람]에 이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고, <목적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둘째, 예수님의 삶은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이 잘 균형잡힌 삶이란 것을 우리가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쉽게 무너지는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들이 환경에 이끌려 가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에 이끌리는 삶>에서 <성령에 이끌리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특새6/지붕을 뚫는 믿음/막2:1~1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지붕을 뚫는 사건>이 가버나움에서 일어 났습니다.
가버나움이란 도시는 갈릴리 호수가 북부에 있는 번화한 도시입니다.
여기는 베드로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가보면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배한 척으로 살았던 어려운 살림이 아니고, 상당히 재력이 있는 선주의 집과 같은 곳입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할 때 본부와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베드로의 장모님의 병을 고쳐주셨고, 나병환자도 고쳐 주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2절을 보십시오.
“며칠 후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다시 들어가시자 예수께서 집에 계신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던지 집안은 물론 문밖까지도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막1:1~2)
여기에 나오는 집은 아마도 [베드로의 집]이라고 추정됩니다.
예수님은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보다도 회당과 집에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집안은 물론 문밖까지도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이때 기가 막힌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사건]은 네 사람이 중풍환자를 데리고 나타납니다.
그들은 뒤늦게 도착해서 예수님이 계신 집안까지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집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너무 사람들이 많으니까 되돌아가는 방법이 있을 테고,
둘째는, 끝날 때 까지 기다리는 방법이 있을테고,
셋째는, 기발한 방법이지만, 지붕을 뚫고 들어가는 방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비상식적인 도발적인 방법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도저히 예수님 앞에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집은 원하면 뚫기 좋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어요.
지붕은 낮은 편이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쉽게 지붕과 연결되어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 지붕을 뚫고 그 집안에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중단된 것은 물론이고, 진흙이 떨어져서 방바닥에 흩어 졌을테고, 그 파편이 튀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썼을 것입니다.
그럼, 그들 네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첫째로, “네 사람 모두 이런 idea에 동의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를 즉석에서 회의를 했을 것이고, 그중 4명중에서 한명이
“지붕을 뚫고 들어가자!”는 아이디어를 꺼냈을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너 미쳤니? 지붕을 파헤치면, 복구해 줘야 하는데, 재료값도 비싼데 어떻게 보상하느냐?“
그러자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네 사람이 마음을 합해져서 <지붕을 뚫기로> 합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엉뚱해 보이는 방법 같지만, 그 때 그 상황으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이 방법 밖에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 네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친구의 병을 고쳐주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어요.
만약에 예수님에게 의심이 있었다면, 그들은 지붕을 뚫으면서 예수님을 만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중풍병자인 친구를 예수님 앞에 데려가면, “확실히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믿음은 있지만,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계신 것과 하나님은 그분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히11:6)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도 "너희에게 겨자 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갈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마17:20)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그런 [믿음]이라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했어요.
"그런 믿음에 생명력이 있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크기가 아니고, [질]입니다.
[믿음]은 그 안에 [생명력]이 있을 때에 역사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확실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셋째로, 이 사람들의 마음에는 [절박한 믿음]이 있었어요.
“지금이 아니더라도 때가 되면 먼 훗날 다시 이곳을 지나가면, 그때 만나보자“라는 나태한 생각을 했다면 그들은 그냥 돌아갔을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절박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세상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 믿으면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젊은 나이에 교회에 묶여서 내가 구속받을 필요가 없으니, 죽기 전에 마지막 순간에 믿자!“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마치 십자가 위에 묶여 있던 강도와 같아요.
강도가 예수님에게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고, [꼴깍]해도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이런 방식은 절대로 우리의 모델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친구들에게 전도할 때에도 “네가 예수를 믿었으면 좋겠다”고 권하면, 다양한 변명이 나옵니다.
“내가 좀 바쁘거든.....” 그럴 때는 “할 수 없지, 뭐”라고 대답하면, 신사적인 방법 같지만 그런 사람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예수 믿지 못해요.
그런 사람은 나중에 봐도 언제나 똑같이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피해요.
그러니까 오늘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아주 [절박한 믿음]을 갖고,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다급하게 전도를 하세요!
넷째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댓가]를 치러야 하는 믿음>이 있었을 꺼예요.
네 친구들은 지붕을 뚫는데는 성공했으나, 병을 고치고 나서는 걱정이 많아졌어요.
친구들 중에 한사람이 "변상을 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게 하자“ 고 주장하여, 그 일을 성사시켰을 꺼예요.
또 “이 정도의 희생은 우리가 감당하자”고 미리 합의했을 꺼예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불신자들인 친구에게 예수 믿게 하려면, 돈을 써야합니다.
댓가를 지불해야 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한 생명>의 귀한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지는 사고가 나면 알 수 있어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한 사람이 살아있다”고 확인되니까 며칠씩 교통이 통제됐어도, 아무도 불평하거나
항의하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오로지 [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불편도 감수하고, 참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고,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댓가]라도 치러야 한다“는 분위기예요.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네 죄가 용서 받았다” (막2:5)
이 친구들은 죽을 고생을 해서 지붕을 뚫고, 어렵게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 갔는데, 예수님은 “네 병이 나았다”라고 말씀 하시지 않고,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죄와 용서>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냈어요.
예수님의 관심은 <죄>의 문제입니다.
“먼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자동적으로 병은 낫게 된다“는 이론 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네 죄는 용서 받았다”고 선포하신 거예요.
회개한 자에게 용서가 주어진다면,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을 거예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 하셨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죄]를 용서했어요.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받은 것으로, 우리는 그냥 체험하면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얘기에서 집나간 아들이 돌아와서 죄를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 이전에, 이미 죄를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둘째 아들이 돌아 왔을 때에 제일 싫어한 사람은 누구예요?
그 대답은 <첫째 아들>이 가장 싫어 했어요.
그러나 첫째 아들 보다 더 싫어 한 것은 뭐예요?
그것은 <살찐 송아지>입니다. (주무시던 분들은 잘 이해가 안가겠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한 게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 이전에> 벌써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했어요.
[회개]란 그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고, 받아 드릴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회개가 먼저가 아닙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하늘나라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거꾸로 표현하고 있어요.
하나님 나라가 왔으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겁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죄의 용서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용서가 너희에게 임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는 속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욕했다”고 속으로 생각했어요.
마가복음 2장 6~7절을 보십시오. “거기에 앉아있던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구나. 하나님은 한분이 맞고, 누가 죄를 용서 할 수 있단 말인가?“(막1:6~7)
여기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은 신분을 속이고,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 나온 서기관 들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이 얘기하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말은 [옳은 말]입니다.
첫째, 하나님만 죄를 용서 할 수 있고,
둘째, 예수님이 <죄 용서를 선포한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이란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자신이 하나님 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을 한 번도 수정한 적이 없고, 일관되게 주장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이런 주장에 우리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첫째, 만약에 그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정신병자이고 미친 사람입니다.
둘째, 만약에 그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의도적인 [사기꾼]이고, 우리 모두 이 말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 말이 [참말]이라면 우리는 첫째, 그분을 받아 드리던지 아니면,
둘째, 그 분을 거부하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이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받아 드려야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들을 했지만, 예수님은 정작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예수님의 중풍병자로 고쳐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우리는 알았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이라는 것을 간증하신 사건입니다.
2009년에도 우리는 어떠한 한계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지붕을 뚫는 믿음과 같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특새7/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 막2:13~22, 말씀: 한홍목 목사님
[적조]는 동물성 프랑크통의 이상 번식으로 인하여 바닷물이 붉게 물들어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런 [적조]는 바다가 죽음과 같이 되는 것이지만, 이런 [적조]를 없애려면 태풍이 불어와야 합니다.
이런 [특새]가 우리에게는 <영적인 태풍>인 것입니다.
저는 이런 [특새]가 그런 [태풍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찌꺼기가 남아 있는 [적조현상]을 갈아엎는 기폭제가 되시기 바라고, 새로운 인생의 새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신> 얘기입니다.
마가복음 2장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만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는 예수님의 말씀에 레위는 일어나 예수를 따랐습니다. (막2:14)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누구를 만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이런 의미에서 우리 생애에 최고의 사건은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이고, 주님이 <내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 인생이 180도 달라집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하고, 지상에서 영원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레위에게 딴말은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했어요.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그는 벌떡 일어나 따라 나섰습니다.
그 당시의 세리는 현재 국세청장과 같이 높은 자리이고, 돈이 많아 타워팰리스에 살고, 오피러스와 같은 차를 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은 세리를 격멸하였고, 그 아이들은 아마도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은 잘나가는데 속은 별로 기분 좋은 사람이 못됐습니다.
그런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은 권능의 눈빛으로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니까, 레위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에 눈 녹듯 빠져 들어가 자석처럼 예수님에게 따라 간 거예요.
우리들도 하나님의 [이끄심]에 끌려서 이 아침 새벽에 여기까지 와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레위가 <마태>라고 나와요.
레위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마태는 헬라식 이름 이예요.
우리가 헌신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권능의 눈빛]을 바로 보지 못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능력을 잘 모르기 때문에 헌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는 예수님의 권위에 눌려서 부수적인 질문도 없이 곧바로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이 언제든지 부르면 따라 나설 수 있게 [심플]하게 사십시오.
[영성]이 좋다는 것은 <단순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영성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이 갖지 마시고, [심플]하게 사십시오.
주님이 나를 쓰시기 편리하게 <단순하게> 만드십시오.
15절을 보면 “식사를 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제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니 아마도 잔치를 벌였을 것입니다.
그 잔치에 정상적인 사람들은 없었을 테고, 주변에 있던 세리들과 창녀들과 거지들이 모여서 예수님에게 선택
받은 기쁨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좋은 곳에 오면, 초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들 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직접 말을 못하고, 뒤에 있는 제자들에게 투덜거립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바리새파 사람들인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느냐?“(막2:16)
바리새인들은 항상 <먹는 것>을 가지고 참견을 해요.
우리나라 속담에는 “먹을 때는 개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바리새인들은 먹는 문제로 시비를 겁니다.
그쪽의 전통은 <더러운 사람과 함께 먹으면, 같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남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을 즐겨 하는 특기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에 넉넉히해야 해요.
17절에서 예수님은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2:17)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에 이중적인 화법을 구사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의인>이라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알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깨우쳐 줍니다.
또 "너희들은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영적인 병자임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난한 영혼을 찾아갈 것이다>라는 메시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이거나 남의 잘못을 기다렸다가 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17절에서 제자들을 건드려 보았으나 본전도 못 찾더니, 이제는 두 번째로 18절에서, 예수님에게 <금식을 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당신들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예수께 물었습니다.(막2:18)
그 당시의 율법에 의하면 <1주일에 2번은 금식을 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부수적인 율법사항의 수백 가지도 더 있어요.
그래서 그 율법에 노예가 되어 그것을 지키는 것이 [거룩]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19절을 보면, “신랑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결혼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금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한 금식을 할 수 없다“고 예수께서 대답 하셨습니다“(막2:19)
첫번째로 [금식]의 의미는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혼잔치는 신랑신부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축제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이니까, 그분과 같이 있으면 언제나 축제와 같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신랑인 예수가 함께 있으니까 축제를 즐겨야지, 예수님은 <금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금식]보다 [축제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축제의 시간]으로 화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서로 만나서 교제하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제일 즐거운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금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하시는 분들은 모두 다 아는 얘기이지만, [음치]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박치]입니다.
안 나와야 할 때 나오고, 나올 때 나오지 못합니다.
여러분? 혹시 [영치]를 아십니까? 이분은 영적으로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분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보고, [영치]라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막2:20)
여기에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온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금식하는 날입니다.
그날이 십자가에서 죽는 날이고, 그날이 오면 [금식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의 죄를 돌이켜 보면서
<영적으로 참회하고, 십자가를 생각하며 금식하기 바란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금식의 의미는 죄를 지어 [관계회복]이 필요할 때에 금식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은 주님과 첫사랑을 맺으면 <그 [관계]가 생각나면 금식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영적 민감성이 떨어질 때, 첫 번째로 믿기 시작하던 때를 생각하면서 금식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주님과의 [관계]에 필요한 것이지, <네 믿음이 좋으나> <내 믿음이 있으냐?>를 따지는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집의 옆에 있는 다른 집사님이 <금식 안한다>고 비난하고 욕하지 마세요.
그 집사님은 그 집사님 대로 금식을 안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요.
[금식]은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낡은 옷의 비유>와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새 포도주의 비유>가 나옵니다.
먼저 <낡은 옷의 비유>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천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 당겨, 더
찢어지게 된다“(막1:21)
예수님은 세상에 올 때에 부분적인 개혁을 하려고 오시지 않고, 완전히 새롭게 만들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낡은 사고]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되기를 바라십니다.
자기의 인생가운데 [어떤 분의 틀]을 집어 넣어서, [종교]라는 틀에 끼워 넣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내일]을 충실히 하고, 일요일만 <주님의 날>로 지키려고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일용>이 아닙니다.
그 분은 중고차를 [부분수리]하러온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방법은 낡은 차는 완전히 폐차하고, 새로운 차를 만드는 분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완전히 폐차시키고, 새롭게 다시 [거듭 태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날>은 개혁이 아니라, [거듭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낡은 몸을 부분수리하는게 아니라, 내 옛사람을 완전히 없애고, 새로 만드는 분입니다.
교육은 [겸손]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신앙은 [죽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사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옛사람이 녹아지고, 내 몸 안에 예수님이 자리 잡아 <새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그분이 나를 일일이 간섭하는 것이 새 포도주를 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낡은 부대]로는 [새포도주]를 담을 수 없습니다.
22절 “또한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포도주가 새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 모두를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막2:22)
[새 부대]는 탄력이 있어서 포도주가 발효되어도팽창하여도 터지지않고, 잘 견딥니다.
그러나 [낡은 부대]는 그 압력을 감당할 수 없어요.
그래서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어요.
만약에 낡은 부대에 담그면,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터뜨려 망가지게 됩니다.
[새 부대]는 탄력성이 있어서 그 압력을 견딥니다.
여기서 [새 부대]는 새로운 리더십, 새로운 비젼, 새로운 능력을 말하고,
그 크고 엄청난 주님이 주는 은혜를 감당하려면,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준비 해야 할 [그릇]은 어떤 것입니까?
그 그릇은 우선 커야 하고 신축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처음 믿을 때에는 따끈따끈한 찐빵 같지만, 하나님을 오래 믿으면서 전통의 노예로 변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낡은 가죽부대를 벗어 버리고, 새 가죽 부대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새 가죽부대]는 우리들의 [영혼의 틀]입니다.
누가복음 5장 39절을 보십시오.
"묵은 포도주를 마셔본 사람은 새 포도주를 마시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묵은 것이 더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눅5:39)
낡은 포도주에 익숙한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꺼려 합니다. 오히려 낡은 포도주를 찾고 고집합니다.
인간은 너무도 이상해서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최고의 것보다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편하니까 낡은 포도주를 마시려해요. 그것은 전통을 좋아하는 사람과 같아요.
내가 불편하니까 거부하는 거예요. 내가 불편하니까 안가는 거예요.
이런 모습은 구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같아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이 우리교회에 오면 놀래요.
교회에서 박수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환호성을 질러요.
어떻게 주일 설교하는데, 양복을 안 입고 설교하느냐? 고 물어요.
우리교회에도 손들고 찬양하는데 2년이 걸렸어요.
<신디>라는 악기가 본당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린지 아십니까?
그것은 [술집의 악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치열한 신앙논쟁 속에서 이제는 교회에 들어와 자리 잡았어요.
이렇게 전통을 깨기가 어려워요.
우리의 문제는 예수를 안믿는것이 아니라, 내게 익숙한 방법으로만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와 방법이 다른 사람을 싫어해요.
에스겔 36:26~27 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새마을 주고, 너희 속에 새정신을 넣어주며, 너희에게 돌같이 굳음 마음을 제거 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영을 너희 속에 넣어주어 너희가 내법을 따르고 내 명령을 준수하게 하겠다(겔 36:26~27)
새로운 영이 필요해요. 새로운 마음이 필요해요. 새로운 가죽부대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은 그것이 터져 버려요.
컴퓨터를 예를 들어 설명하지요.
지금까지 사용하는 낡은 386 컴퓨터는 이제 곤란해요. 새로운 펜티엄급 컴퓨터가 필요해요
소프트웨어를 386용량에서 펜티엄급 용량으로 바꾸어야 그 많은 정보를 저장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원해요.
그 많은 축복은 하드 드라이브를 바꿈으로써 받아 드릴 수 있어요.
우리의 하드드라이브가 부족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새 부대로 무장해야 해요.
오늘의 말씀에서 [새 부대]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주시는 <유연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쓰시기 좋은 찰흙과 같은 <유연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자기의 고집]은 있어도 [선입관]은 버리세요.
[거룩한 신념]은 가지시더라도 [자기 고집]을 버리세요.
[자기 사람]을 심지 말고,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하세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십시오. 이것이 <유연한 사람>이 되는 비결 이예요.
2. 그 새 가죽 부대의 두 번째 의미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은혜를 당연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남이 안 보이는 장소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셔야 생기는 것입니다.
남을 무시하는 내 옛 모습이 무너지고, 항상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하소서.
3. 새 가죽부대는 <열정의 비유>입니다.
[새 가죽부대]는 다이나믹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열정의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적인 말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흥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정의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출줄 알아야 합니다.
[영성]이란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영성을 갖고, 하나님과 춤을 출 준비를 해야 합니다.
4. 새 가죽 부대는 <잃어 버린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애타게 부탁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가슴에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영혼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은 갈갈이 찢겨진 불쌍한 영혼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일본을 품기 어려웠지만,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love sonata를 진행했어요.
그것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우리가 일본을 먼저 품은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품고 열정의 마음을 보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특새8/진정한 안식일/막2:23~3:6/말씀: 한홍목사님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 안하고 자기힘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사람은 겉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사람입니다.
특히 부모님의 기도를 받고 자란 사람은 확실히 다릅니다.
오늘은 목사님들이 기도해 주겠지만, 부모님들이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십시오.
매일 아침마다 또는 늦은 밤 시간에 기도해 주면, 자녀들에게 솔로몬의 지혜가 나타나고, 다니엘의 용기가 생길 것이고, 에스더의 순결함과 담대함이 임할 것이고, 느헤미아의 리더십이 생길 것입니다.
이제는 무한 경쟁의 글로벌 시대이므로 세계가 하나의 경쟁 상대입니다.
거기에 뒤지지 않는 지혜와 능력을 겸비해야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문제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정면으로 부딪 칩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됩니다.
항상 제자들이 일을 벌리면, 후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해결해 줍니다.
마가복음 2장 23~24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사이를 지나가시는데, 함께 가던 제자들이 밀의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어째서 저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하는 것입니까?"라며 트집을 잡았습니다."(막2:23~24)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안식일 날 쉬지않고, 노동을 했다"는 거예요.
그들의 생각에는 안식일 날 밀밭에 들어가서 노동한 것이 [죄]라는 거예요.
<안식일 날 일하지 말라>는 것은 상식인데, [해서는 안될 일]을 했기 때문에 <율법을 어겼다>는 거예요.
그 당시 유대나라에는 너무나 율법에 매이다 보니까, 개그 콘서트에서나 볼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안식을 확실히 지키기 위해 "여행을 하지도 말라, 장사도 하지 말라, 물도 길지 말라, 환자가 발생해도 치료하면 안된다"고 너무나 많이 얽어 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 날에는 "있는 음식이나 먹고, 철저하게 쉬라"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는 심한 것 같지만, 그래도 유대인들의 역사속에서 그 수많은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유대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 준 [핵심]이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첫째가 <구약 성경>이고, 둘째는 <성전을 향한 그리움>이고, 셋째는 <안식을 지키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 세가지가 그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파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안식일 성수]가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25절~26절을 보세요.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고파 먹을 것이 필요했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아비아달 대 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장만 먹게 돼 있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나눠주지 않았느냐?"(막2:25~26)
여기에서 진설병은 하나님의 <임재의 떡> 입니다.
이 진설병은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이 임재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떡]을 재단에 갖다 놓았어요.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백성사이에 언약이 새로워 진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떡은 아주 놀라운 [영적인 의미]가 있는 떡입니다.
그런데 아비아달 제사장 시절에 사울의 추적자들이 쫓기던 경황에 너무나 배가 고프니까,
제사장의 도움으로 이 귀중한 떡을 먹은 거예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정을 가지고 얘기하는데, 예수님은 엉뚱하게 이렇게 딴 얘기를 하십니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개념>으로 맞받아 친 것입니다.
다윗은 위급할 때 진설병을 먹었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이 수백년동안 지켜온 전통인 율법이 [인간의 법]인데도,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법]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을 자기들이 만들은 [율법]으로 바꿀려고 하고 있어요.
27절을 보십시오. "그러고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막2:27)
여기에서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이런 대목에서는 잘못 믿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잘못된 믿음은 나를 죽이고, 다른 사람들도 죽여요.
그런 낡은 박제화된 신앙으로 율법을 강요하면 안됩니다.
어느 마을에 3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각자의 생활이 너무나 바빠서 부모님을 뵙지도 못하니까 회의 끝에 유럽으로 단체 여행을 보내 드리기로 결정했어요. 그런데 유럽여행을 다녀오신 부모님의 표정이 별로 밝지 않았어요.
그래서 또다시 막내 아들이 제주도를 2박 3일로 모시고 다녔는데, "그 부모님이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막내 아들의 이름이 [한홍]이예요.
여기에서 우리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것은 제주도의 풍광이 아니예요.
부모님들이 원하시는 것은 아들과 함께 같이있는 [시간]이예요.
이와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이예요.
부모님의 생일날에 내가 좋아하는 피자를 사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니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사드려야 해요.
우리들은 너무나 바빠서 우리들의 시간관리에 신경을 쓰지만,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함께 같이 있는 [시간]이예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오는 거예요.
안식일의 두번째 의미는 3장에 나와요.
3장 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회당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혹시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지나 않을까 하며, 예수를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고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막3:1~2)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보니,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오른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생계를 유지할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것은 오른손은 활동하는 손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병을 고쳐주는 일>보다, <안식일 날 노동을 했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안식일 날 노동한 것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어요.
환자의 입장에서는 안식일 날이더라도 병을 고쳐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게 자기의 자식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오로지 예수님을 공격하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거룩]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지요.
우리는 이런 점에서 영적인 시야가 바로 잡혀야 하고,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행동을 다 알고 있었어요.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3:3)
우리는 도망가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내 인생에 <더러움과 추함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빛]이 임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세요.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은 무슨 일을 하는게 옳겠느냐?> 선한일이냐, 악한일이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 그러자 그들을 말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막3:4)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을 고쳐주면 그는 살게 될 것이고, 가만히 놔두면 그는 절망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무관심]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이런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에게 사랑이 있다면, 이사람을 살려야 한다.
"안식일은 단지 무엇을 하지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두가지 입니다.
첫째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두가지 말씀이지만, 같이 붙어 다니는 한가지 말씀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자기만 알고,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자로 크게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미가서 6장 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 사람들아? 여호와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보이셨다. 여호와께서 네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에 맞게 행동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다.(미6:8)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첫째, 공의에 맞게 행동하고,
2. 둘째, 긍휼을 사랑하며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고,
3. 셋째, 겸손한 마음으로 너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서로 이해하며 살기를 바래요.
그래서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고 명령했어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쭈그러진 인간 관계도 펴지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두가지 목적이 있어요.
첫째는, 휴식이예요. 그 휴식은 인간의 고통소리를 멈추고 <하나님에게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집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끌고가서 기도하게 만들어요.
집에서 TV로 영화를 보는 것과 극장에 가서 큰 화면으로 보는 것은 엄청나게 달라요.
그것은 보는 느낌도 다르고, 마음에 와 닿는 감동도 달라요.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해요.
둘째로, 안식일의 두번째 의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해요.
크리스찬의 안식일은 한 달을 시작하는 첫번째 날이예요.
그날은 [하나님의 날]이므로 감격을 실천하는 날 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매월 첫 번째 주일을 [성찬식]을 가져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의 날에 [예배]와[사역]을 동시에 같이 해야 해요.
그날은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하고,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날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은 두 단어예요. 그것은 [COME]과 [GO]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야 합니다.
"와서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하고,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면 떠나야 해요.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을 체험하는 경험을 하고, 세상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일꾼]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거기에, 그냥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돼요.
미가서 6장 8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며,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 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체험하고, 그 충전된 힘으로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평화가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특새10/내 마음 밭은 어떤가/막4:1~12/말씀:반태효 목사님
예수님의 이름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고,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화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문가 집단인 종교 지도자들은 협조하기는 커녕, 트집을 잡아 예수를 고소하려고 준비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예수님은 이들과 다투거나 이들의 말에 응대하지 않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마가복음 4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주위에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배에 올라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호숫가를 따라 앉아 있었습니다“ (막4:1)
여기를 보면 예수님은 호숫가에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했어요.
예수님은 보통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때로는 호숫가에서 노방전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강가에 대고, 배위에 강단을 만들어서 말씀을 했어요.
예수님은 전통적인 랍비들이 하는 방식으로 설교하지 않고,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어요.
마가복은 4장 3~8절을 보십시오.
“잘 들으라!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고 있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모두 쪼아 먹었다. 어떤 씨는 흙이 많이 않은 [돌밭]에 떨어 졌는데, 흙이 얕아 싹이 금방 돋았지만, 해가 뜨니 그 싹은 말랐고, 뿌리가 없어서 시들어 버렸다.
다른 씨는 [가시덤블] 속에 떨어 졌는데, 가시덤불이 무성해 그 기운을 막는 바람에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 또 다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잘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막4:4~8)
예수님의 말씀은 씨뿌리는 자를 [비유]를 들어서 가르쳤습니다.
에수님은 4가지 밭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블]에,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에 관한 얘기 입니다.
[비유]는 WINDOW와 같이 <진리에 이르는 창>입니다.
[비유]는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창문과 같습니다.
[비유]는 보물을 케는 작업과 같아요.
유대지역에 있던 어떤 사람은 예수님 앞에 올 때에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왔다가, 갑자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고 가는 분도 있었어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어떤 분은 불면증으로 잠을 못자고, 고생하는데, "교회만 오면 졸음이 온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설교들으면서 조는 분들에게 축복하기로 했어요.
[교회]라는 곳은 그냥 기대 없이 왔어도, 어떤 깨달음을 느끼고 가는 곳이 되어야 해요.
이것이 [비유의 축복]이고, 이것을 잘 하시는 분이 [예수님] 이예요.
그 당시 구약종교에 젖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전역에 별별 곳을 다 찾아 다녔는데도 별로 느낌이 없었는데, 오늘 여기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까 진짜로 귀한 보물과 같은 얘기를 들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언어로 가르치려고 하면, 혹자들은 아예 안 들으려고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4가지 밭을 [비유]해서 말씀드리니까 쉽게 이해 했어요.
[씨와 밭]에 관한 얘기는 내일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그 원리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잘 들으라”고 예수님이 말씀했으니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듣는 귀가 있다”고 듣는 게 아닙니다.
“들은 귀가 있다”고 다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들었다”고 다 듣게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청력으로 듣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청력으로 듣는 게 아니고,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청각장애자는 <귀>로 듣지는 못해도, 마음으로 들어서 우리보다 은혜 가운데 있는 분들도 있어요.
그럼, 마음으로 들을 때는 [어떤 마음]이어야 합니까?
첫째로, [좋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을 보십시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교양 있는 사람들 이어서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 드리고,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찾아 보았 습니다“(행17:11)
원래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로 가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곳에 폭동이 일어나서 우선 급한대로 베뢰아로 피신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베뢰아에서 말씀을 전하다 보니까,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신사적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드리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도 놀랬습니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들었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간절한 마음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들과 같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들어야 은혜가 됩니다.
우리도 이번 새벽기도 시간에 새벽바람을 맞으며 나왔으니, [간절한 마음]으로 여기에 온 거예요.
두 번째, <좋은 땅>은 어떤 땅입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십시오.
데살로니가 2장 13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실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입니다“(살전2:13)
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에 베뢰아 사람들은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고생했지만, 그 교회만 생각하면 너무나 고마운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얘기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하는 것으로 받아 드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너무나 고마운 거예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옥토]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밭이 [좋은 땅]인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데살로니가만 생각하면 아픈 기억들이 생각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가슴이 뭉클함을 느껴요. 그래서 감사한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들을 귀]를 가진 사람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분은 [다윗]입니다.
사실, 다윗이 저지른 [죄]는 너무나 크지만, 다윗은 그 죄를 회개하고, 더 큰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다윗은 회복할 수 없는 간음과 살인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회개하고 다시 거듭 났어요.
그런 힘은 어디에서 났을까요?
그것은 다윗에게 [들을 귀]가 있었던 거예요.
다윗이 다시 바로 설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들판에서 양떼를 치면서 자연 속에서 하늘의 별들을 보고,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주의 하늘과 주의 손으로 베풀어 주신 하늘의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8:1~3)
그는 목동생활을 하면서 하늘의 달을 보고 하늘의 별을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양떼를 치면서도 <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는 경험을 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살아나요.
요한복음 5장 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요5:25)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 때가 오는데 그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잠언 25장 2절을 보십시오.
“일을 감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광]이다“(잠25: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일을 밝혀내는 것은 왕들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감추어 둘때가 많아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았지만, 때가 되어야 우리에게 열어 주십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직접 얘기하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그들이 용서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 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해,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막4:11~12)
[들을 귀]는 있어야 해요.
마치 불교에서 [선문답]하는 것으로 느끼면 안 돼요.
[비유]로 말씀한 것은 마음이 닫혀있는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에게도 기회를 한번 더 주는 것이예요.
[비유]는 <진리에 이르는 창>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창]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거예요.
이 말씀의 배경은 이사야 6장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날, 하늘의 영광을 보았어요.
이사야는 하늘의 보좌를 보았어요. 그러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주께서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까?>라고 말하니까, 이사야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합니다. 그 때에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여라. 듣기는 들어도 너희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보기는 보아도 너희는 알지 못할 것이다.(사6:8~9)
그때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면서 하는 말씀은 “내가 너를 보내는데 각오하고 가거라. 이 백성들은 말을 잘 듣지 않는 백성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어요.
"하늘이여 들으라! 짐승도 모두 주인을 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주인을 모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징계를 내려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1~3절을 보십시오.
“옛날에 여러 차례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한 그를 통해 모든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입니다“(히1:1~3)
여기에 하나님은 옛날의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한 번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더 늦기 전에 제발 이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곧 길이고, 살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금년에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특새11/영적인 부익부와 빈익빈/막4:13~25/말씀:이재훈 목사님
어제는 반태효목사님이 비유의 원론적인 내용을 말씀하셨고, 제가 [밭의 비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씨앗과 땅]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씨앗을 땅에 뿌리고 열매맺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의 [마음]을 가리 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씨앗과 땅]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한번에 다이나믹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세가지 단계와 과정을 거칩니다.
첫째, 먼저 씨앗을 뿌리는 단계이고,
둘째, 뿌려진 씨앗이 자라는 단계이고,
셋째, 열매를 맺고, 추수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비교해 보겠습니다.
그 첫번째 단계는 <씨앗을 뿌리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는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사역이 [씨뿌리는] 첫 단계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온 세계에 전해지는 단계를 말합니다.
세번째 단계는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추수할 때를 가리 킵니다.
그런데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물론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 가니까, 천국의 리포터인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 지상에 계실 때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예수님이 전하신 [사랑]을 온 세계의 사람들이 이제는 다 알고 있나요?"라고 묻자,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직은 팔레스타인의 소수 사람들만 알고 있지!"라고 대답했어요.
"그럼, 모든 사람들이 알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라고 가브리엘 천사가 물으니까
예수님은 "내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부탁을 이미 해 놓았네"라고 예수님이 대답하니까
천사는 "아니! 베드로를 믿는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도망간 사람이 베드로인데....."
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한 사람인데....."
그럼, "그 밖의 다른 대책은 없으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다른 대책은 없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믿고 있다네!"라고 대답했어요.
예수님의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믿음]은 헛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시므로 제자들의 마음속에 심었던 말씀의 씨앗이 온 세상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럼, 어떤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집니까?
하나님 나라는 한번에 <짱>하고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씨 뿌리는 농부와 같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농부처럼 일하고,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추수할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분입니다.
오늘 씨앗을 뿌리고, 내일 추수하러 가는 농부는 아무도 없습니다.
농부는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추수해야 하므로, 그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이 예수님이 하신 그 첫 단계의 사역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단계]를 입니다.
인간의 [마음 밭]을 4가지 종류의 밭으로 비유합니다.
첫째는, 길가의 밭, 둘째는 돌밭, 셋째는 가시 밭, 넷째는 좋은땅 (옥토밭)입니다.
이것을 마치 4가지 운명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즉 길가의 운명, 돌밭의 운명, 가시밭의 운명과 같이 미리 예정된 운명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달라지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아침에는 돌밭이었는데, 오후에 좋은 밭으로 변할수도 있어요.
또 새벽에는 좋은 땅 이었는데, 오후에는 돌밭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어요.
예전에는 성경에 밑줄치고 강조해서 읽던 구절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른 의미로 내가 느끼는 것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은 성경이 변한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의 토양이 바뀐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깨닫지 못한 말씀을 요즘와서 다시 읽어보니, 내 마음의 토양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유에서 <마음의 토양이 바뀐다>고 했어요.
그 때는 [가시밭]일지라도 가시덤블을 걷어내면, [좋은 밭]으로 변해요.
또 [나쁜 밭]도 갈아서 엎는 과정을 통해서 [좋은 땅]으로 만들수 있어요.
오늘의 말씀에서 가장 핵심은 23절의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막4:23)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귀가 없다>는 말이 아니예요.
이 말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친구로 삼습니다.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가까이 대하지도 않습니다.
[들음]이란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관계 형성]의 출발은 [들음]에서 부터 시작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밭]을 4가지의 토양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2 종류 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반응하여 열매를 맺는 토양(1가지)과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드는 토양(3가지)입니다.
1. 첫 번째로, 마음 밭이 <길가>와 같은 토양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길가>에 뿌렸다 는 것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곧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가로채 간다"(막4:15)
[길가]와 같은 사람은 말씀을 거절한 사람입니다. 이런 상태를 사탄이 가장 좋아합니다.
사탄도 부지런히 교회에 다닙니다. 사탄은 우리가 오기 전에 먼저 교회에 다닙니다.
사탄이 교회를 끝마치면, 주차장에 먼저 가서 기다리며 어떤 방법으로 던지 시험에 들도록 연구해요.
2. 두 번째로, 영혼의 흙은 <돌짝 밭>입니다.
16~17절을 보세요.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즉시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씀때문에 고난이나 핍박이 오면 곧 넘어진다"(막4: 16~17)
유대지역의 땅은 흙이 얇게 덮힌 돌짝 밭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위는 흙이고, 그 밑에는 돌이 있어서 뜨거운 태양이 비추면, 싹은 바로 나지만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해, 곧 시들어 죽게 됩니다.
오히려 싹이 천천히 나야 뿌리가 깊이 박히고, 튼튼한 줄기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빨리 흥분해서 찾아오는 군중들처럼,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믿음이 없는 <얕은 신앙>을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깊은 신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피상적인 신앙을 보여 줍니다.
깊이 뿌리를 내린 신앙과 차이는 무엇입니까?
결국 <지속성이 없는> 신앙인은 믿음이 약하다기 보다, 금방 무너 집니다.
저는 여러분의 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는 신앙이기를 바랍니다.
3. 세번째는 <가시 밭>과 같은 영혼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들은 말씀이 <가시 밭>에 떨어진 것과 같아서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걱정과 돈의 유혹, 그 밖에 다른 많은 이 세상의 걱정과 돈의 유혹, 그 밖에 다른 많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의 기운을 막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막4:18~19)
[가시 밭]에 뿌려진 씨앗은 싹도 나고 줄기도 자랍니다. 그러나 가시와 같이 자라요.
사실 가시가 있어서 그렇지, 아주 <좋은 땅>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이중적인 마음]을 보여 줍니다.
선천적으로 따뜻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도와주고 싶은 사람은 처음에 믿기도 잘 하지만, 이 세상의 유혹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4. 네번째, [좋은 땅]입니다.
20절을 보세요.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떨어진 것과 같은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을 맺는다(막4:20)
성경에서 [좋은 땅]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모델이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주의 은혜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얘기하니까,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령이 너를 덮으시니, 네가 처녀이지만 아기를 낳을 것이요...>라는 말씀에, 마리아의 반응은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라고 반응했어요.
이것이[아멘]입니다.
[아멘]으로 응답해야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제가 강준민 목사님한테 들은 얘기인데,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라, 말씀을 안할수도 없어서 합니다.
"어떤 시어머니가 하는 말입니다. 젊은 며느리가 아이가 없어서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불쌍하게도 며느리는 믿음이 없고요. 반대로 시어머니는 목사님 말씀에 <아멘! 아멘!>하면서 놀라운 믿음으로 화답을 했어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애를 가졌대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앞에 <아멘>으로 대답할 때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하나의 <예>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믿음을 보면 놀랍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입니다.
영화 [Passion of The Christ]를 보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때에 마리아의 모습이 크게 <크로즈업>됩니다. 그때 마리아는 전혀 흥분하지 않아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과연 육신의 어머니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녀는 결코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마리아가 한국의 어머니 였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로마 군병 앞에 몇번은 뛰어 들어가 제지했을 꺼예요.
"이놈들아? 나를 죽이고 데려가라"고 소리지르면서 그러나 마리아는 끝까지 반항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거예요.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 어머니 마리아는 어디에 계셨을까요?
그녀는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어요.
그녀는 한사람의 사도로써 순종하는 여인으로 남아 있었어요.
이것이 <좋은 밭>을 가진 여인입니다.
이런 모습이 한 여인을 통해서 구워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좋은 땅>이었으나 관리를 하지 않으면 가시가 돋아나고, 단단해져서 돌밭이 되고, 열매맺지 못하는 땅으로 변합니다.
영적 생활은 <마음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원을 늘 가꾸어야 하듯이 <마음을 가꾸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좋은 마음>으로 다스려야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면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가두지 말고, 많은 사람 들에게 전하고 주변에 나누어 줄 때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특새12/하나님 나라의 소망/막4:26~41/말씀:한홍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어제 말씀 드린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연속되는 사항입니다. 마가복음 4장 26~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두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싹이 나고,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마침내 여문 알곡이 맺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씨가 땅속에서 성장하는 과정에 인간의 노력이 전혀 개입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에 끝은 창대한 것입니다. 30~3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 그 씨는 땅에 심은 것 가운데 제일 작은 씨지만, 일단 심어 놓아 자라면 어떤 식물보다 더 큰 가치들을 뻗어 그 그늘이 공중의 새들이 깃들 수 있게 된다“(막4:30~32) 겨자 씨는 좁쌀보다 작아요. 겨자씨를 심고 다 자라면 높이가 3m에 달하지만, 그 씨는 이 세상의 씨앗 중에서 제일 작습니다. 지금 교회에 나오는 주일학교의 어린 학생이 성장하여 자라면, 놀라운 한국의 빌리그레함과 같은 사역자가 될지 어찌 압니까? 하나님은 어떤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이 모두 다 소중합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청교도 조상들은 미국을 개척했고, 오늘과 같은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어요. 오늘의 말씀중에서 더 집중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35절부터 나오는 [폭풍]에 관한 말씀입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께서는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뒤로 하고, 예수를 배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러자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 갔습니다. 그때 매우 강한 바람이 불어와 파도가 배안으로 들이쳐, 배가 물에 잠기기 직전이 되었습니다“(막4:35~37)
예수님이 탄 배에 폭풍이 불어오는 [폭풍사건]을 만납니다.
[폭풍]의 특성을 알아 봅시다.
한번 폭풍이 불어오면 내가 아끼던 집이나, 가구나, 차도 모두 다 날아 갑니다. 2. 폭풍의 두 번째 특징은, 폭풍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찾아 옵니다. 갈릴리 호수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호수지만, 갑자기 폭풍이 몰아치면 사나운 바다로 변합니다. 영어로 suddenly로 표현하듯이, 폭풍은 <갑자기> 들이 닥칩니다. 3. 폭풍의 세 번째 특징은, 우리들을 마비 시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배 뒷부분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빠져 죽게 됐는데 모른 척 하십니까? 예수께서 일어 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파도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고요하라! 잠잠하라!> 그러자 바람이 멈추고, 호수가 잔잔해 졌습니다“(막4:38~39) . 그것은 <예수를 믿어도 푹풍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배에 계시는데 폭풍이 오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우리에게 [환난이 닥쳐 오는 것]입니다.
내게 어려움이 닥쳐오면 마치 그 때는 하나님이 숨으신 것 같습니다.
시편 10편 1절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 드리는 [폭풍]은 변형된 축복의 서곡입니다. 그럼, 폭풍이 오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요? 우리가 기도를 하는데, 기도 할 수 밖에 없을 때, [하는 기도가 진짜 기도]라고 해요. 그러나 그래도 안되니까? 예수님을 깨웠어요.
폭풍 속에서 고난을 받은 사람은 진지하고, 젊잖아요. 2. 두 번째로 폭풍은, 우리를 정결케 해줍니다. 서울 시내에 [황사현상]이 나타나면, 너무나 하늘이 흐리고, 먼지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니까 [폭풍]은 나를 변화시키는 Turning Point (전환점)가 됩니다. 3. 셋째로, 폭풍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붙잡게 해 줍니다. 4. 넷째로, 폭풍은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십니다. 미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가 <미식축구>입니다.
오히려 재정 상태가 어려워 실내 돔구장도 없고, "아주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가난한 구단이 우승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굳건한 믿음만이 슬리를 안겨 주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풀고 나오지 못해요. 혹시 <자신의 문제를 푼다>고 해도 엉켜요. 돌팔이 의사가 수술하면 [뒷탈]이 생겨요. 그러나 명의가 수술해야 [뒷끝]이 없어요. 여러분 절망을 선언하십시오. 4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을 몹시 두려워하며 서로 수군 거렸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파도까지도 복종하는가?“(막4:41) 이것이 [예배]입니다. 뺄셈을 통해서 덧셈을 알게 해주는 하나님입니다. |
특새13/예수님의 사랑과 권세/막5:1~20/말씀:라준석 목사님
마가복음 5장 1~2절과 15절을 먼저 보십시오.
"예수와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 거라사 지방으로 갔습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와 마주치게 됐습니다.(막5:1~2) 그들이 예수께 와서 군대 귀신들렸던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 정신이 들어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막5:15)
두 구절 중에서 밑줄 친 두 단어에 집중해서 보세요.
첫째, 2절의 "예수와 마주쳤습니다."는 구절과
둘째, 15절의 "제 정신이 들어"라는 구절입니다.
이 두곳을 서로 연결시키면 <예수님을 만나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정신나간 사람도 <제 정신>이 듭니다.
오늘, 우리들도 성령님을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여기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은 본래 어떤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더러운 귀신에 들린 사람입니다.
귀신은 더러운 [영]이므로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귀신에 들리면 그 인생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3~4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덤사이에서 살았는데 아무도 그를 잡아 맬 사람이 없었습니다. 쇠사슬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여러번 쇠사슬로 손발이 묶이기도 했지만, 번번이 사슬을 끊고 발에 찬 쇠고랑도 깨뜨렸습니다. 아무도 그를 당해 낼 수 없었습니다.(막5:3~4)
더러운 귀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귀신은 집을 떠나서 무덤에 삽니다.
무덤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므로, <거기에 산다>는 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정이 파탄나고, 질서가 깨지고, 인간을 짐승의 위치까지 내려 놓습니다.
그래서 12가지 동물을 [띠]로 만들어서, 마치 사람이 동물과 같이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나는 개띠다. 너는 소띠다>라고 말하면서 존귀한 인생을 동물에 비유합니다.
2. 귀신은 아무도 그를 통제하지 못힙니다.
귀신들린자는 너무나 힘이 강하기때문에 누구도 그를 막을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통제를 받아야 [제 정신]이 드는 거예요.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죄]입니다.
[꿈꾸는 비전]은 좋지만, [엉뚱한 비전]은 곤란합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이데오로기라도 그 사람은 고칠수 없습니다.
3. 귀신은 자신을 상하게 만듭니다.
5절을 보면, "그는 밤낮으로 무덤들과 언덕을 돌아 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찢곤 했습니다.(막 5:5)
귀신에 들리면 자기가 자기를 망가뜨려요.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의 꼬임을 받아 하와가 남에게 핑계를 대다가, 망하게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할 수 없어서, 스스로 몸부림 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상황은 모두 다 [관계]가 깨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은 마치 요즘을 사는 현대인들을 모습과 같은 것 같아요.
여러분!
누가 이렇게 귀신들린 자에게 관심을 가집니까? 누가 이 사람의 병을 고칠수 있습니까?
이렇게 절망가운데 있는 이 사람을 누가 구해 줍니까?
주변에 그런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입니다.
1절에서 "예수님과 마주치게 됐다"는 말은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거라사 지방으로 갔을까요?
그 대답은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만나러 간 것입니다.
6~8절에서 예수님이 병을 고쳐준 과정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더니,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찢어질 듯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제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것은 앞서 예수께서 그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막5:6~8)
이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귀신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귀신도 대화가 가능하고, 귀신도 집이 필요하고, 그래서 귀신은 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서 집을 만듭니다.
그런 귀신을 보면서 예수님은 어떤 마음일까요?
1. 첫째, 망가진 사람의 마음속을 회복시키고 싶은 열망이 있을 꺼예요.
주님은 무엇을 봅니까? 주님은 망가진 마음을 불쌍히 보시고, 회복시키려고 하십니다.
그 영혼에 대해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려는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보고 계십니다.
빌립보서 2장 9~10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여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빌2:9~10)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어떤 [권세]를 주셨습니까? 그것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하늘과 땅에 있는자가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에수님은 그런 권세를 이미 갖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런 [권세] 앞에 귀신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 앞에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물러가라>고 말하면 물러 갑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은 오직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마침 큰 돼지 떼가 거기 비탈진 언덕에서 먹이를 먹고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께 애원했습니다. 우리를 저 돼지속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에게 들어 갔습니다. 그러자 2,000 마리정도 되는 돼지떼가 비탈진 뚝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습니다. "(막5:11~13)
현실적인 계산법을 적용하면, 예수님은 "돼지 2,000 마리를 죽여서 한 영혼을 살리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돼지 1마리가 300,000원 하니까, 2,000 마리를 계산하면 <돼지 값 6억원을 들여서 한 영혼을 구원하셨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때로는 우리한테도 모든 것을 한꺼번에 쓸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렇게 우리를 흔들 때 우리는 내가 가진 어떤 부분을 포기하고, [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 인생에 개입하여 나늘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붙잡아 주십시오" 라는 마음 속의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한 영혼에게 관심갖는 예수님은 늘 깨어진 인생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배에 오르려고 하는데, 귀신들린 사람이 따라 가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얼만 큰 일을 해 주셨는지? 어떻게 자비를 베푸셨는지 가족들에게 말해 주어라. 그리하여 그 사람은 데가볼리로 가서,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얼마나 큰 일을 베푸셨는지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을 사람들 마다 모두 놀랐습니다.(막5: 18~20)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한명의 영혼을 살리셔서 예수 믿게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방법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다윗처럼*** 오늘의 본문에 나온 사람처럼***
그가 [제 정신]을 차리게 되면, 본인이 직접 <예수이야기>를 하고 다닙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귀신들린 자 입니다.
2. 경력은?--->화려하지 않습니다. 한가지 밖에 없어요. 그것은 <귀신들였다>는 사실뿐.
3. 예수를 믿은 년수는?--->아주 없어요. 방금 예수를 믿었어요.
4. 가진 것은 많나요?--->가진 것은 없어요. 무덤가에 사는 사람이 뭘 가졌겠어요.
5. 일대일 교육은 받았나요.?--->안받았어요. 교회 임직자 규정에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요.
6. 그럼 왜?---> 딱 1가지, "예수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그것 하나만 가지고, 사람이 완전히 변한 거예요.
당신에게도 예수님을 만나는 기적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막1:1~15/ 말씀: 하용조 목사님
오늘부터 하용조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마가복음의 강해설교>가 시작됩니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고, 간결하고, 긴박감이 있는 책입니다.
한마디로 마가복음은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한 복음서>입니다.
복음서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몇 가지 내용을 비교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① 첫째로,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해서 쓴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족보>는 유대인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두 번째로, 누가복음은 헬라인을 생각하면서 쓴 글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역으로 추적하여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아담과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③ 세 번째로 요한복음은 누구를 지칭하지 않고, 온 인류를 대상으로 쓴 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시작이 아주 특이합니다. 그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시작 합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 말 입니다.
오늘부터 공부하는 마가복음은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니므로, 간결하고 선언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생략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다>라고
딱 1절로 정리하여, 예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 핵심이 중요하고, 핵심을 을 놓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막1:1)
여기서 “시작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① 첫째는, “마가복음 전체를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② 둘째는,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③ <마가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가> 복음을 쓴 것과 같이, <내가복음>으로 쓴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이단>이지요.
자기가 생각한 것, 자기의 환상을 글로 쓰거나, <자기가 본 것>을 [복음]이라고 우기니까,
그러니까 <이단>이지요.
우리의 복음은 반드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기쁜 소식>입니다. 세상에 기쁜 일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그런 기쁨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죽은 기쁨>이 아니라, <뛰고 싶을 만큼 기뻐야 >하고,
날고 싶은 <생동감이 있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복음]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주제>가 되어야 하고,
②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예수님이 탄생하기 <오래 전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는 바로 이날까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왔기에 여기 서서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앞으로 일어나리라고 예언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행 26:22)
모세와 예언자들로 부터 <이 복음은 예언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내가 순간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은 창세기 이전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사도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겼어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유대인에게도, 그리고 헬라인에게도, 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로마서 1장 16~17절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종교개혁을 일으킬 핵심이 복음이라>고 말했어요. 로마 카토릭은 이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어떤 행위를 자꾸 주장했기 때문에>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입니다“(막1:1)
[예수]란 어떤 분입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그 이름은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기름을 부은 자, 즉 <메시아>라는 뜻 입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태어났다“고 했어요"
<메시아>라는 말은 모세 이후에 여러 가지 면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국가적으로, 군사적으로, 종교적으로, 광범위하게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항상 그리스도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입니다.
선지자처럼, 제사장처럼, 왕처럼 <기름 부으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오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람이 <세례요한> 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내가 네 앞에 내 심부름꾼을 보낼 것이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할 것이다. 또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가 있다. 주를 위해 길을 예비하라, 그분을 위해 길을 곧게 하라"고 기록돼 있는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막1:2~4)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운을 뗍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을 등장시켜서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 당시에 태어난 증인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이사야의 말씀>에 나타난 사람입니다.
[성경]은 무슨 책입니까?
이미 예언하고,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예언과 성취>가 서로 짝을 이루어 기록된 책입니다.
그럼,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첫째, <예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 길을 터주는 <예비자>입니다.
구약의 끝에 있는 말라기 3장 1절을 보면 "보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보내, 내 앞에 길을 닦게 하겠다. 그러고 나면 너희가 바라는 주께서 갑자기 그 성전에 올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신약과 구약의 목적은 [복음]입니다.
<구약의 끝>과 <신약의 시작>이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는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복음의 시작>이라는 <빵빠레>와 같은 것입니다.
2. 둘째, <세례요한은 광야에게 그의 사역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예루살렘이나 ,유다에서 태어나거나, 자라거나, 일하지 않았어요.
세례요한은 열악한 광야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광야는 유명한 곳이 아니고, 그렇게 화려한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마치 <선교지와 같은 곳>입니다. 선교지는 누구도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선교지는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 아닙니다. 선교지는 외로히 <혼자 가는 길>입니다.
선교지는 <하나님이 보내야 가는 곳> 입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맞아드리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회개 없는 세례가 없고, 회개 없는 구원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영성은 <자기 부인>에서 시작합니다.
3. 셋째, 세례요한은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려면 “길목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틀린 말이예요.
그러나 최근에는 “유년 주일학교 시설이 좋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유치원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비록 광야에서 살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 다녔어요.
그만큼 세례요한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유대 온 지방과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막1:5)
광고를 한 것도 아닌데, 누가 초청을 한 것도 아닌데, 세례요한이 가는 곳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어요.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은 무척 메말랐어요.
그래서 <가짜 예언자>가 많아서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메말랐던 거예요.
홍수에 먹을 물이 없듯이, 영혼이 메말랐기 때문에, 광야까지 사람들이 찾아온 거예요.
5. 다섯째로, 세례요한은 <자기 부정의 삶을 살았어요>
6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낙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습니다.“(막1:6)
세례요한은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았어요.
크리스천의 삶은 <복잡한 삶>이 아니고, <simple life> 이어야 합니다.
뭘 많이 끼고 사는 사람은 영성이 떨어집니다.
꾝 중요한 것만 챙기고,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갖고 사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는 검소했고, 자기절제와 결단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세례요한의 눈>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나는 <예수님의 눈>은 인자하고 사랑스러운 눈을 가졌지만, 그러나 세례요한의 눈은 <칼날같이 매서운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가끔 인정받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기부정의 삶>을 살았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자기 선전시대>를 살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화제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7~8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 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내 뒤에 오실 텐데***, 나는 몸을 굽혀 그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분은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막1:7~8)
여기에서 우리는 2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① 첫째,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과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는 나>를 비교했어요.
이것은 <그분의 탁월성>과 <나의 무가치성>을 비교한 거예요.
그러나 그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주 탁월한 분입니다.
② 둘째, 세례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주십니다.
요한이 주는 물 세례는 <회개의 세례>를 뜻하고, 이것은 우리가 받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는 <성령 세례>는 <불세례>로 <하늘의 내려 주는 세례> 입니다.
저는 중학교 3때에 세례를 받으면서 진지하게 받지 못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장로이고, 우리 어머니가 권사이므로 너무도 교회생활에서 익숙해서, 세례를 받으면서도 눈을 찡긋거리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세례를 받았어요.
그 때에는 솔직히 <복음의 능력>을 몰랐어요.
그러나 대학에 가면서 내 영혼이 너무 메마른 것을 느끼고, 괴로워 하다가, 산에 가서 기도를 하면서, <성령 세례>를 체험했어요.
그 때의 성령 세례는 말로 설명 할 수 없어요.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해요.
강물이 봇물 터지듯이 불이 내려왔고,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황홀하기 그지없으며,
놀라운 <영적인 경험>을 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중3 때에 받았던 [물세례]와는 전혀 다른 <영적 경험>을 했어요.
그러니까 <성령 세례>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받으면, 누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전혀 의식하지 않아요.
9~11절을 보십시오.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 강으로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뭍에서 막 나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무척 사랑한다“(막1:9~11)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물세례를 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주어야하는데,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어요.
이것은 순서가 뒤바뀐 세례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순전한 요구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세례>는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받은 세례입니다.
세례는 죄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도 세례를 자청해서 받았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의 자기 부정인 <겸손>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후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1. 첫째로, 성령 세례 받은 후 뭍 에서 나온 후에 <하늘이 열렸어요>.
[겸손]은 <하늘 문>을 엽니다.
여기서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하고 통했다>는 뜻이고입니다.
2. 두 번째로,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임했다" 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온유하게 이슬비처럼> 내리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①성품이 온유하고, ②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③남에게 덕을 끼치며,
④서로 사랑하고, ⑥남을 포용하는 성격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30세가 될 때까지 <인간의 몸>으로 그냥 살았어요.
그러나 30세가 지나면서 어떻게 그런 신적인 권위가 생겼을까요?
그렇게 변화된 싯점이 언제 일까요?
그것은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부터> 그런 [능력]이 생겼어요.
왜 우리들이 하는 일에 피곤하고 힘이 드나요?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안계시니까> 그런 거예요
혹시 교회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 그 원인을 아십니까?
혹시 여기에 목회자가 계시다면 내 말을 명심하세요.
그것은 그 교회에 <성령님이 안계시니까> 그런 거예요.
내가 신학교를 나오고, 지적인 지성은 많이 배우고 쌓았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그런 불평은 하지 마세요. 그럴수록 자신이 <성령세례>를 받으세요.
인간의 경험으로 목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이고, 사역도 피곤합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3일이 지나면 알아요. 그러다 한 달이 지나면, <탈진>합니다.
그리고 [화]가 납니다.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성령이 임해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노력하는데, 산기도 간다고 들려오는 게 아니예요
<하나님의 음성>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3. 세 번째로,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11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너희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1:11)
<하나님의 음성>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음성은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축복 받은 자이니, 안심하라”
여러분, 당신이 이런 음성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이 세상을 다 가질 것과 같은 <기쁜 음성>으로 들려올 것입니다.
이런 음성만큼 기분좋고, 기름 부은 음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운명적인 예언]이 아닙니다.
“주님, 내가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을 때에 “동으로 가라”는 음성이 아니예요.
“하나님 어느 대학으로 갈까요?”라고 물었을 때에 “너는 이대에 가라”는 음성이 아니예요.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운명을 점쳐주지 않습니다.
“내가 너의 병을 고쳐 주겠다”라는 주술사와 같이 말하는 그런 음성이 아닙니다.
4. 네 번째로,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사탄의 시험을 받고 이기셨습니다.
성령께서 광야로 데려가서 사탄을 만나게 했어요. 그 후 40일을 금식하고, 사탄의 시험을 받게 만들었어요.
왜 성령께서 사탄에게 인도했을까요?
①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패배한 것을 회복시켜야 하겠기에> 사탄을 만나러 갔어요.
②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위해 사탄을 이겨야 하겠기에 사탄에게 인도한 거예요.
5. 다섯 번째로,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4~15)
여기에 <때가 찼고>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불완전한 때가 아니라, <성숙한 때>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땡감을 먹으면 맛이 시고, 뜳고, 텁텁해요. 그럴 때는 <단감>을 먹어야 합니다.
과일도 다 때가 있어요. 어린아이를 잉태하면, 10달을 채워야 해요. <미숙한 것>은 기다려야 해요.
미리 줄 수는 있지만, 그건 <미숙함>을 의미해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힘들지만, 그러니까 기다려야 해요.
여러분은 시계 있으시지요? 우리가 시계를 차고 있듯이, 하나님도 시계를 갖고 있어요.
“우리들은 <내 시간>에 응답해 달라”고 조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①나를 기다리게 만들고,
②그런 시간을 통하여 내 인격이 성숙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이제 <신약의 시대>가 왔으니, “때가 찼다”는 거예요.
그것은 <어떤 공간>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것>을 의미해요.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뜻 이예요.
<하나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초청하면, 나는 너에게 들어가서, 너를 지배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전제 조건은 <너의 죄를 회개하고, 죄를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는 어떻게 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을 수 있어요.
그렇게 당신이 <당신의 죄를 인정해야> 죄가 씻겨 나갈 수 있어요.
이런 과정을 <회개>라고 말해요.
다른 말로 이것을 <성만찬>이라고 말해요.
우리는 선교를 생각하면서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해요.
혹시 내가 지원하면, “나를 아프리카와 같은 곳으로 보내지나 않을까?“라는 걱정을 해요.
그러나 걱정 하지 마세요.
내가 아는 하나님은 여러분 같이 바람만 불면 넘어지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아프리카로 보내지 않아요.
①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나, ② <성숙한 사람>만 골라서 아프리카로 보내지,
여러분과 같이 연약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곳에 보내지 않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떠날 생각 마시고, 보내진 선교사님들을 기도하며 후원하세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를 따르라/ 막1:16~34/ 말씀: 하용조 목사님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마가복음]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을 자세히 읽어보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씀이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연애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사랑을 할 때에 상대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순식간에 느낀다”고 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드는 것은 상대를 보는 순간에 “쨍“하고 통하거나, “몇 천분의 일초의 짧은 순간에 상대의 마음을 울려야 그 사랑이 성공한다”고 합니다.
서로 한참을 생각해 보고, “알아보고 결정을 하겠다“는 사랑은, 이미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상대를 보는 순간에 <쨍하고 느끼는 순간>, 서로 통해야 합니다.
시간을 가지다 보면, 생각하다 보면, 벌써 그 사랑은 물 건너 간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그렇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공부하고, <깨달아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배운 것은 한 마디로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장 15절에 나오는,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고, 이 말씀은 마가복음 전체를 이끌고 가는 <주제의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 첫째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16~17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다가 시몬과 그 동생 안드레가 호수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셨는데,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16~17)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해 3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왜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했을까요?
우리의 생각을 그렇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일하지 않고,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고, 동역자로 삼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동역자요, 공동체의 같은 구성원입니다.
② 둘째로, 예수님이 제자를 뽑을 때는 입회비나 자격을 논하지 않았어요.
현대인들은 어디를 가나 모든 것에 돈이 연결되어 있고, 자격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격을 논하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을 부르셨어요.
예수님은 전문가 집단이나, 신학자들을 부르지 않고, 성직자들도 원하지 않았고, 바닷가에서 쉽게 만나는 어부들로 제자들을 삼았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람을 부르지 않았어요.
③ 세 번째로 예수님이 부르는 사람은 목적에 따라 부르셨어요.
예수님은 돈을 많이 벌거나, 어떤 조직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름]에 대하여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 했습니까?
18~20절을 보십시오. “시몬과 안드레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곧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아버지와 일꾼들을 배에 남겨두고, 곧바로 예수를 따라갔습니다.“(막1:18~20)
시몬과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렸다”고 했어요.
야고보와 그 동생도 곧 부르셨고, 아버지와 일꾼을 남겨 놓고 “곧바로 예수를 따라갔다“고 했어요.
한참 생각하고, 그물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어요.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① 첫째는,예수님의 [부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름]에 <사랑의 화살을 맞듯이> 즉시, 예수님을 따라 가기로 작정했어요.
② 두 번째는, [순종]입니다. 순종은 한참 생각하다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그냥 따르기로> 결정 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자격>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헌신과 순종>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도 없어요. 그냥 좋아서 따르는 거예요.
우리가 연애할 때에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뛰고, 그래서 편지를 쓰게 되고,
그래서 그 사람과 한 공간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결국에는 결혼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들도 예배할 때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서 생각이 많으신 분들은 즉시 회개 하세요.
예수님은 계산하고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머리 속이 복잡한 사람들은 생각이 많아서 결정을 곧 바로 못해요.
제가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하지요.
사람들은 언제 감동을 받나요?
*** 모든 것을 포기할 때에 감동을 받아요.
돈 많은 재벌을 보면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나요?
***그들의 이름이 유명하고, 그들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그들에게 감동을 받지는 않아요.
왜 우리의 사랑에 감동이 없습니까?
***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에 감동을 받지요.
움켜쥐는 사람에게는 감동이 없어요.
어떤 사랑이 감동을 받습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에 감동을 받아요.
내가 사랑 받을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을 나누어 줄 때에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이 <치유>예요.
왜 우리에게 <사랑의 감동>이 없을까요?
“그렇게 죽자 살자“고 좋아해서 결혼을 했는데, 10년이 지나가면 얼굴은 차가와 지고,
마음엔 짜증나기 시작하지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기적인 사랑>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그들은 사랑을 안 한 것이 아니예요.
그들은 <이기적인 사랑>을 했기 때문이지요.
부인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좋아 하는 것을 따라 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상대가 좋은 것을 권했으면, 그들은 그렇지 안했을 꺼예요.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요구했더라면, 안 그랬을 꺼예요.
사랑은 조정하기 시작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포기하고 순종하세요.
여러분, <진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죽기 까지 따라 갑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면, 따라가지 않아요.
우리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내가 준만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균형이 깨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망으로 변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과 같이 모든 것을 내 주고, 포기할 때에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훈련을 받지 않았어요.
우리들은 “훈련받은 사람만 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고, 만나는 순간부터, 훈련을 시작 했어요.
예수님의 훈련은 강의실에서 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몸소 직접 가르쳤어요.
예수님은 어덯게 [삶]을 어떻게 가르쳤나요?
마가복음 1장:21~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곧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권위있는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막1:21~23)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안식일>에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회당>은 어떤 장소입니까?
교회가 생기기 전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그렇다고 <회당>은 구약에서 말하는 성전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장소를 살펴보면, 구약에는 <성전>이라고 했고, 예수님 당시에는 <회당>에서 모였고, 사도행전 이후에는 <교회>라는 곳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은 랍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장소이고, 교육과 결혼식과 장례식이 거행되는 생활공간이 <회당>입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들이 깜짝 놀랐다”는 거예요.
그들은 왜 깜짝 놀랐을까요?
유대인 랍비들이 말하는 것과 겉으로는 비슷하기는 한데, 그 말씀 속에서 <신비스러운 권위가 있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는 <반전이 있었기 때문에> 놀란 거예요.
3. 세 번째로 예수님은 “귀신을 쫒아 버렸다”는 사실을 가르쳤어요
마가복음 1장 23~26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 때 회당 안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한명이 울부짖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오셨습니까? 당신이 누구신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나와라> 그러자 더러운 귀신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키더니 비명을 지르며 떠나갔습니다.“(막1:25~26)
여기서 <귀신에 대한 정보>를 발견 합니다.
첫째, 귀신은 “회당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신도 회당 안에 있을 수 있어요.
어떤 권사님은 “목사님 저는 꼭 성경을 가지고 다닙니다.”라고 자랑했어요.
그러나 성경을 가지고만 다니면, 뭣합니까?
읽어야 귀신이 나가지, “성경을 가지고 다닌다”고 귀신이 나갑니까?
두 번째로 귀신은 <사람의 몸 안>에 들어와서 살아요.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사람 몸 안에> 귀신이 있어요.
그렇게 귀신들린 사람은 비판적이고, 시니컬하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는 안 그러려고 하는데, “어떤 존재가 자기를 움직이고 있다”고 해요.
그것은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귀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① <더럽다>는 거예요. [더러움]은 귀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고, 귀신이 살기 좋은 곳은 <청소가 말끔하게 되지 않은 지저분한 집>을 더 좋아 한데요.
② 화내는 것도 귀신의 장난이고 ③ 욕하는 것도 귀신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예요.
④ 귀신이 나갈 때는 소리를 지르고, 발작을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요.
⑤또 귀신은 곤두박질치며 넘어지기도 하고, 거품을 품으며 소리를 지르면서 나가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귀신은 상관이 있다>는 거예요.
어떤 관계인가요? 예수님을 보면 <귀신이 무서워서 떠나간다>는 관계이지요.
예수님은 귀신을 망하게 하기위해 오셨으므로, 귀신도 예수님을 보면 무서워서 떠납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잘 아는데, <귀신만도 못한 인간>이 많이 있어요.
귀신은 <귀신같이> 예수님을 보면, 금방 알아채요.
귀신은 이론이 아닙니다. 귀신은 옛날 동화책에 나오는 그런 상상이 아닙니다.
귀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 눈에 안보이니까 우리가 모르지, 귀신은 다 압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더군. 저가 더러운 귀신에게 명령까지 하고, 그에게 복종하니 말이야>. 그래서 예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온 지역으로 삽시간에 퍼졌습니다.(막1:27~28)
그 당시 사람들 중에는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보였어요.
그러나 한 번도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본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귀신이 떠나가라“고 <꾸짖는 거예요>.
여러분! 귀신에게는 부탁을 하면 안돼요. 귀신에게는 <명령을 해야> 해요.
또 귀신에게는 환영을 하면 안돼요.
귀신을 환영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 몸속으로> 쑥 들어갑니다.
여러분, 죄를 지으면 귀신은 금방 알고 “저기가 내가 살 곳이다”라고 금방 들어와요.
그러므로 귀신이 접근 하지 못하게 꾸짖고, 큰 소리로 내 좇아야 해요.
그 다음으로는 귀신이 들어 올만한 환경을 만들지 마세요.
“내 머리위에 새가 찾아오는 것은 있어도, 머리에 둥지를 만들지 말라”. 루터가 한 말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으니까, 귀신이 판을 치고 있었어요.
예수님만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 크리스천이 그런 능력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도 나오고, 성경 공부도 하지만, <그런 능력이 없다>고 생각을 해요.
그건 왜 그럴까요?
얼굴에 기쁨이 없는 것은 여러분 안에 <귀신이 남아있기 때문> 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귀신에게 농락당하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개혁이 보이는 거예요, 그것은 <느헤미야의 말씀>에서 우리가 배웠어요.
느헤미야의 말씀에서 “성경을 읽으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한 거예요.”
성경을 보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에 대해 자신을 발견하게 되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변해야 하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때 더러운 귀신이 떠나 갑니다.
4. 네 번째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것은 <병든 자의 긍휼과 병든 자를 고쳐주었어요.>
29~3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곧바로 야고보아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집으로 갔습니다. 이때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즉시 이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 가셔서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곧바로 그 여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습니다.(막1:29~31)
예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긍휼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를 하셨어요.
긍휼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아가페 사랑>입니다.
29절에서 예수님은 저들의 집을 심방했어요. 예수님은 자기가 택한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방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심방을 가면 그 집안 사정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도 심방을 가보니,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열병은 고열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면 죽습니다.
이런 사실을 <심방가지 않았으면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손을 잡고 일으키려는 순간에 열병이 사라졌어요.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게 하는 충격과 함께 영적 진리에 눈을 뜨게 만듭니다.
은혜를 받고, 기적을 보면,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소문을 들었던 병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복음의 소식>으로 들렸을 거예요.
32~33절을 보시면 놀라운 광경입니다.
“그날 저녁해진 후에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전부 예수께로 데려 왔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고쳐 주었습니다.”(막1:32~33)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어요.
예수를 믿으면 복도 받고 병도 고쳐 주지만, 그러나 병을 낫기 위해서 <예수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타락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기적을 너무 쫓아다니다 보니까, 신비주의에 빠져서, <신앙의 균형>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언을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치유를 너무 너무 좋아 하지 마세요.
겉만 쫓아다니지 마세요. 이런 일도 다,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봐야 100년이 지나면, 모두 다 죽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기복 신앙]에 치우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 고침>이 목적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귀신을 쫓는 일>이 목적이라면, 우리의 신앙은 [무당신앙]으로 전락합니다.
기독교는 그런 값싼 종교가 아닙니다.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 병을 낫기 위해서, 내가 복 받기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축복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기적을 일으켰나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싸인 입니다.
나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지만, <내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이용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수단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스런 종교이지만, 그러나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신앙이 <기복 신앙>이면 곤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따르는 여러분의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매우 이른 아침 새벽에/ 막 1:35~45/ 말씀 : 하용조 목사님
1장 35절을 보십시오. “매우, 이른 새벽, 아직도 어둑어둑할 때,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막1:35)
여기를 보면 여러 가지 정보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바쁜 사람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침 이른 새벽에, 해가 뜨기 전에 “예수님이 기도하셨다”고 했어요.
여기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하고 대화 한다”는 사실을 “기도하셨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장소는 <외딴 곳>에 가셨는데, 그 <외딴 곳>은 "혼자 있었다"는 말이고, "홀로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은 <새벽>에, 홀로, 외딴 곳에 가셨을까요?
예수님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기도하시려는 생각으로 그곳에 가셨어요.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용한 시간을 선택하여, 조용한 장소로 가서, 홀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매일 묵상하는 [큐티]가 이런 모습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혹시 자기 생각인 것을, <내뜻>대로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엉뚱한 짓을 하지 않으십니까?
온누리교회가 25년 동안 [큐티]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큐티하는 습관을 기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리스천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예요.
지금까지 우리들은 <40일 새벽기도>를 5년째 계속했어요. 처음에는 <10일기도>도 하기 힘들었는데, <40일 새벽기도>를 하다 보니까, 이제는 새벽기도를 100일 정도는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계산해 보니까 11월에 시작하여 2월 초까지 하면 구정 전까지 끝날 수 있어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을 하면, 삶이 흔들리지 않아요.
우리의 삶을 <말씀중심>, <기도중심>으로 살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생겨요.
또 성경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읽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리고 성경을 통째로 통독을 하면, 성경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데 의미가 있어요.
<예수님의 능력>은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요?
그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인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고, <예수님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예수님은 드러난 시간보다 숨어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사람과의 관계>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그러면 드러난 시간, 눈에 보이는 시간은 뭐예요?
귀신 쫒는 일과 병 고치는 일은 쉽게 눈에 보이는 시간이지요.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시간은 뭐예요?
그것은 홀로 기도하는 시간이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는 시간 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은 아무도 볼 수 없는 드러나지 않는 시간이지요.
예수님의 하루는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새벽에 시작했어요.
예수님은 그렇게 훈련하고, 단련했기 때문에, <십자가>가 와도 흔들리지 않고 받았던 거예요
우리들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새벽에 홀로<큐티>로 단련시키고, <말씀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인 마가복음 1장 32~33절을 보면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달한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병원도 없고, 의료시설이 없어서 무당을 데려다가 병을 고쳐 주는 상황이니까,
“예수님이 병을 고쳐준다”는 일에 얼마나 고마워했겠어요.
32~33절 “그날 저녁 해진 후에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전부 예수께로 데려 왔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었습니다.”(막1:32~33)
우리들의 삶은 어떨까요? 거의 대부분 병 때문에 <병치레>하며 살아요.
나이가 들고, 세월이 가면, 모두 다 병에 들게 되어 있어요.
병이 좀 나은가 싶으면, 또 아프기 시작하면서 병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예요.
34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귀신들도 내 쫓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막1:34)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면, 금방 알아 봐요. 귀신은 영물이라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요.
귀신은 <귀신같이> 그걸 맞춰요. 그래서 “귀신같이 맞추네” 라는 말이 있는 거예요.
35절을 보십시오. “매우 이른 새벽 아직 어둑어둑할 때,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막 1:35)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을 하셨나요?
① 첫째, 매우 이른 새벽에, 홀로 밤이 맞도록, 외딴 곳에 갔어요.
② 둘째, 그러면서 하나님과 대화했어요. (=기도했어요)
③ 셋째, <하나님과 대화>하니까, 말씀이 능력으로 변하여, 예수님에게 능력이 생겼어요.
④ 넷째, 그래서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면 떠나가고, 병든 사람들을 만져주면 병이 나았어요.
여러분! 사람들은 만나면, 남는 게 없어요. 사람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다보면, 외로움과 허전함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외롭거나, 허전하고, 방황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지 말고, 하나님을 만나세요.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게 되나요?
①먼저 외로움이 사라지고, ②사나운 사람들이 부드럽게 변해요.
③ 그리고 성격이 변하는데, 성품이 조용해 지고, ④인격이 바뀌어 <자기 내면의 삶>이 변화되어 [꿈]이 생겨요. ⑤하나님의 비전이 직통으로 나에게 생겨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그 꿈을 따라 살면서 <비전의 사람>으로 변해요.
⑥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꿈>으로 채워져서, 누구를 만나도 즐거워하고, 행복해 져요.
어제 최성수 장로님이 간증하신 말씀인데, 중국의 북경농장에서 7명의 몽골 청년들을 데려다가 한 달간 일을 시켰어요 그들은 자기들이 매일 하던 대로, 아침에 일어나 일찍 [큐티]하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농장 일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 달이 지나서 그들이 떠나려는 자리에서, “선생님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싶어요” 라고 고백을 해서, 그들이 <세례를 받고 떠났다>고 간증을 했어요.
저는 그때 이 얘기를 전해주던 장로님의 초롱초롱하던 눈동자를 기억해요.
또 중국에서는 <목사님>을 “목사님”이라고 부르지 못하여, <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박종길 목사님이 최성수 장로님과 만나서, “장로님? 목사가 설교를 못하는 고통을 아세요?”라고 반문하니까, (***목사가 설교를 하고 싶은데, 설교할 수 없는 상황이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러니까 최성수 장로님은 박종길 목사님에게 “의사가 환자를 돌보지 못하는 고통을 아시나요?”라고 되받더라“는 거예요.
(*** 최성수 장로님은 치과 의사인데, 그걸 버리고 선교사로 가서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대화는 <끼리끼리 만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침묵을 배운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못하면서도,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중국에서 사역하는 일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요.
이런 모습을 본 몽골 청년들도 감동이 되어서, “스스로 세례를 받겠다”고 자청한 거예요.
이런 모습이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행동>인 거예요.
다시 35절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셨습니다.
<외딴 곳>이라는 곳은 어디입니까? <외딴 곳>은 아무도 없는 장소가 외딴 곳이지만
① 첫 번째는, <하나님 만나는 장소>입니다.
② 두 번째는, <하나님만 품고, 생각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능력의 원천이 [①말씀과 ②기도] 라는 것을 알았어요.
여러분, 온누리교회가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는 것은 뭘까요?
우리는 25년간 끊임없이 ①큐티에 중점을 두었고, ②말씀을 열심히 읽었고, ③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의 사역은 3가지입니다.
①말씀은 전파하는 일, ②병 고쳐 주는 일, ③복음을 전파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
예수님이 하신 3가지 일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은 병을 고치는 일이겠지만,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는 일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복음 전파에 주력하셨어요.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은 이 마을, 저 마을로 두루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어요.
저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겼어요. 그 의문은 “각 고을을 가면, 각각 말이 다를 텐데***,
어떻게 복음을 전달했을까요?“ 고을 마다 말이 통합니까?
서로 다른 말과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달하였을까요?
그 대답은 <복음이 능력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우리가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 120년 전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어떻게 한국에 들어와서 복음을 어떻게 시작했을까요? 그들이 통역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을 까요? 아니 예요.
그것은 ①<복음의 능력이기 때문에> ②<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영어로 말을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금방 알아들은 거예요.
그 이유는 <복음의 핵심>인 몇 마디만 외워서 얘기한 거예요.
말이 많으면 복잡해 져요. 말이 많다고 전도가 되는 게 아니 예요.
딱 몇 마디만 기억해서 <복음의 핵심>을 찔러서ㅡ 얘기하니까, 금방 알아차린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당신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말>로 들려졌기 때문에, 복음이 쉽게 이 나라에 받아 들여진 거예요.
40절을 보십시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애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저를 깨끗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막1:40)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합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병든 사람을 고쳐 주었을까요?
1. 첫째로, ‘나병 환자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고 했어요?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야>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렵고, <절망으로 떨어져야>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축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뜻대로 다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지만, 자식이 아프면 반드시 하나님을 찾으러 새벽기도에 나오게 됩니다.
2. 두 번째, “환자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이 해 주실 수 있습니다.” 라고 환자가 말했어요.
이 말을 바꾸면, “당신이 고쳐 주지 않으면 나는 죽습니다.”라는 심정을 가지고, 애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매달린 것입니다.
그 당시 나병환자는 <천형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병 환자는 먼저<내 옆으로 오지 말라>고 소리쳐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어요. 그래서 <반드시 내 병을 고쳐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은 나를 고쳐 줄 수 있어요”라고 외친 거예요.
그래서 병이 어떻게 나았나요.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나았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에도 너무나 갈등을 많이 해서 복잡해요.
인간의 머리가 너무 발달해서, 이성이 지나치게 작동하여, 병이 고쳐지지 않아요.
성경대로 사세요. 성경에서 <하라>는 대로 하세요.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지 마세요.
“이래 가지고 병이 나을까?”라고 의심하면, 병이 낫지 못해요.
4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자 깨끗이 나아라. 그러자 나병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가 깨끗이 나았습니다.(막1:41)
3. 세 번째로, 예수님은 나병환자 보고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어 주었다“고 했어요.
카토릭 신부이지만 이태석 신부가 왜 우리에게 감동을 줄까요?
그는 나병 환자의 피부를 직접 만져 주었기 때문에 감동이 오는 거예요.
<그의 믿음>과 <예수님의 긍휼>이 합쳐졌으니까,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예수님은 말씀했어요. “내가 원한다.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면 우리는 그냥 받으면 돼요. 그러면 나병은 깨끗이 나았어요.
우리는 너무 따지고, 의심을 많이 하니까, 병이 낫기 어려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음이 단순해야 해요.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냥 <통과>라고 말하세요.
여러분이 떠드니까 시끄러운 거예요.
오히려 소리 지르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대로 하세요.
그러면 그 후에는 하나님이 움직이세요.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 여러분에게 나타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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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산나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복의근원정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