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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제유배문학, 용재(容齋) 이행(李荇) 유배고찰 >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 개요 : 이행(李荇,1478~1534년)은 거제도 유배문단에서 그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크다. 선생은 연산11년 1505년 8월, 익명서 사건에 연류 되어 옥에 갇히고 국문을 당한 뒤, 이듬해 거제도로 이배(移配)되었다. 선생은 현실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고통을 내면화하고 창조적 형상화로 나아갔는데, 내면화의 과정과 창조적 형상화로의 시적 변용이 관심이 된다. 충주에서 쓴 [적거록] →함안 [남천록] →거제 [해도록]을 거치면서 이러한 변환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9세이던 1506년 2월에야 거제시 상문동 고절령(高節嶺, 고자산치) 기슭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서는 가시울을 친 위리안치된 생활에서 양치는 일을 부역 맡았다. 중종반정으로 방면될 때까지 약200일 동안 이런 생활을 지속했다. 하지만 그 당시, 앞서 구신현읍에 귀양 온 분들이 약 10여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 특히 최숙생 김세필 홍언승 형제 등과 서로 위로하며 화답한 시편이 유배문학의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舊 신현읍 유배자, 홍언충(洪彦忠/直頃) 자백(子伯), 자진(子眞 최숙생), 공석(公碩 김세필), 홍대요(大曜 홍언승), 홍군미(君美), 공좌(公佐), 이공백(恭伯), 이자선(子善), 이원숙(元叔), 이강재(強哉), 이인지(訒之), 이공신(公信) 등과 함께, 현(現) 상문동의 운문폭포, 소요동, 신청담(神淸潭)과 매립전의 고현바닷가, 그리고 장평동, 유자도(현 대섬(竹島), 현재 유자섬(橘島)은 당시에는 소도(小島)), 계룡산, 구천동(삼거리)까지 함께 다니며 거제비경을 즐겼다. 거제고을 선비인 이맹전(李孟全) 이백완(伯完)도 가끔씩 참석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이 때 쓴 용재집 '해도록(海島錄)' 119편과 각종 산문은 모두 거제유배문학에 속하며, 거제를 떠난 이 후 거제 유배생활을 떠올리며 회고한 시도 수십 편에 이른다. 또한 당시의 거제 지명 지리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도 남겨, 거제도 역사의 귀중한 자산이 되고 있으며, 그의 시(詩) 중에는 500년 前 거제도에 관한 여러 이야기와 더불어 거제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그러나 노비로써 거친 땅에서 부역하며 견디기 어려운 생활이라, 그의 시는 시라기보다는 탄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 이행선생은 거제로 유배 오기 10여년 전(前)부터 산수(山水)에 뜻을 두고 지리에 관심이 많아, 후(後)에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작업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선생의 관심은 거제도 유배중에도 고현 상문동 주위의 곳곳의 이름을 지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보진당(保眞堂)', 그리고 現 '고자산치'는 당시 '화자현(火者峴)'이라 불리었는데 '고절령(高節嶺)'이라 개칭했으며, 배소 주위 유수(幽邃)한 골짜기를 '소요동(逍遙洞 삼룡초등학교에서 문동저수지 사이)'이라 하였고, 現 문동저수지의 시내를 '백운계(白雲溪)', 정자는 '세한정(歲寒亭)', 바로 앞에 샘물이 솟는 것을 보고 '성심천(醒心泉)'이라 짓고, 이 샘물에다 직접 작은 못을 만들어 '군자지(君子池)'라 하였으며, 또한 그 아래 정자를 짓고는 이름하여 '차군정(此君亭)'이라 불렀다. 그리고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보니, 푸른 벼랑이 물러서고 드리운 물결은 쏟아져서 굉음을 울리며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 마치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듯하여 '운문폭(雲門瀑 문동폭포)'이라 하였다. 폭포수 아래 웅덩이를 '신청담(神淸潭)', 그리고 주위에 평평한 바위들이 있어 휴식할만하다 생각하여 '지족정(止足亭)'이라 명명했다. 당시 최숙생(崔淑生,子眞 1457∼1520년)선생도 이행선생과 같은 제목의 시(詩)를 남겨 전하고 있다.
문동저수지 입구에서 운문(문동)폭포까지 500년 전 거제도의 고전문학이 흐르는 관광코스로 '스토리텔링'을 하여, 거제고전문학의 거제 1번지로 가꾸어야 하겠다.
2. 유배자의 애환과 탄식
① 우연히 절구 세 수를 읊다. / 이행(李荇)
乘興無人載酒過 흥을 타고 술 싣고 오는 이 없고
南隣東里礙山河 남쪽 동쪽 이웃들은 산하에 막혔어라
不愁鬢髮紛紛白 머리털 분분히 세는 것 시름 않고
還喜詩篇日日多 날로 많아지는 시편에 외려 기뻤도다.
自笑窮途萬事疏 궁도에 모든 일 무관심해 우스웠더니
祇今更擬斷詩書 지금은 다시금 시서마저 끊을 작정일세.
海山風雨三還夢 해산의 풍우 속 세 번 배소 옮긴 꿈
歸去何鄕是定居 돌아갈 곳 그 어드메가 이 몸 정처인고.
辛苦誰知死獨難 신고 겪으매 죽는 게 어려운지 누가 알랴
百年人事亦多般 백 년 평생 사람의 일은 다단하기도 하구나
西風一夜霑襟血 서풍 부는 하룻밤 피눈물로 가슴 적시노니
未老先驚骨髓乾 늙기도 전에 먼저 골수가 말라서 놀라노라
[주1] 세 번 배소(配所) 옮긴 꿈 : 용재는 연산군 10년(1504),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존호 추숭(追崇) 문제로 장형(杖刑)을 받고 충주(忠州)로 유배되었다가 박은의 논사(論事)에 연루되어 경남 함안군(咸安郡)의 관노(官奴)로 유배되고, 다시 거제도의 고절령(高節嶺) 아래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주2] 신고(辛苦) …… 알랴 : 고통 속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도 한 번 죽는 게 유독 어렵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리라는 뜻이다.
◯ 외롭고 쓸쓸한 배소에서 선생은 앞서 죽은 동문들을 생각하며, 자신에게 닥칠 죽음의식이 투영되어 위 시의 전반에 내재해 있다. 유배지에서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며, 속박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시(詩)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고생이 심할수록 더해가는 부모처자에 대한 그리움에 "아니 곡해도 눈물은 없지 않고 몸뚱이 잊으니 정이 더욱 깊어라(不哭非無淚 忘形更有情)"라고 탄식하기도 하였다.
② 아버님의 편지를 받고 / 이행(李荇)
白雲書遠到 백운의 편지가 멀리서부터 왔기에
跪讀意還迷 무릎 꿇고 읽으매 마음 외려 아득해라
父母更憂疾 부모님은 이 몸이 병들까 걱정하고
妻孥無定棲 처자식은 머물러 살 곳이 없어라
流年過隙駟 세월은 틈을 지나는 사마처럼 빠르고
萬事觸藩羝 만사는 울타리를 들이받은 숫양 같아라
此日傷心極 이날 이내 마음은 너무도 아프나니
何時彩服齊 그 언제나 색동옷 입고 나란히 설꼬.
[주1]백운(白雲)의 편지 : 멀리 있는 어버이로부터 온 편지를 뜻한다. 당(唐)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에 있을 때 그의 어버이는 하양(河陽)에 있었는데, 하늘에 흰 구름[白雲]이 외로이 떠 있자 좌우의 사람들에게 “나의 어버이가 저 아래 계신다.” 하고는, 서글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구름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자 그 자리를 떠났다 한다. 《新唐書 狄仁傑列傳》
[주2]울타리를 들이받은 숫양 :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곤궁한 처지에 빠졌음을 뜻한다. 《주역》 대장괘(大壯卦) 상육(上六)에, “숫양이 울타리를 들이받아 물러나지도 나아가지도 못하여 이로운 바가 없다.” 하였다.
[주3]색동옷 …… 설꼬 : 형제가 나란히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며 어버이를 기쁘게 하였다고 한다. 《小學 稽古》
③ 매미 / 이행(李荇)
爾性頗高潔 너의 성품이 자못 고결하거니
誰言蟲類微 누가 곤충이라 미천하다 하리요
嘯風心獨苦 바람에 울어도 마음 유독 쓰리고
飮露腹長饑 이슬을 마셔도 배는 늘 주려라
螗斧潛懷毒 사마귀의 도끼는 몰래 독을 품고
蛛絲未解圍 거미의 실은 포위 풀지 못하나니
有形眞是累 형체 가지면 참으로 누가 되건만
此物本無機 이 동물은 본래 삿된 마음 없어라
◯ 이행(李荇)은 남달리 예리한 통찰력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그것에서 부단히 자아를 확인하려 했던 시인이다. 이행이 시에서 추구한 자아에 대한 사실적 통찰은 대부분 시 속의 객체와 서정적 자아가 화합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때 서정적 자아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기도하고 때로는 직접 '자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거미줄에 걸린 매미는 바로 유배지에서 속박된 생활을 하는 이행 '자신'이었다.
④ 개똥벌레 / 이행(李荇)
一爲流落客 한번 귀양살이 신세가 된 뒤로
幾度見飛螢 몇 차례나 개똥벌레를 보았던고
變化因殘草 썩은 풀이 변화해 생겨났건만
光輝抗列星 그 광휘 별들과도 견줄 만하여라
何曾耐霜雪 서리와 눈을 견딘 적이 있으랴
自是喜幽冥 본래 그윽한 곳을 좋아하느니
得意休矜耀 득의하다고 빛 자랑하지 말라
陽烏有炳靈 양오가 신령스런 빛을 뿜는단다.
[주] 양오(陽烏) : 태양 속에 산다는 세 발 달린 까마귀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태양을 의미한다.
◯ 개똥벌레를 보며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대신 시구에다 담아 표출하고 있다.
⑤ 비온 뒤 / 이행(李荇)
上帝重民稼 상제께서 백성 농사를 중시하여
雨澤勤及時 때맞추어 비의 은택 내려 주시누나
高田水沒踵 높은 곳 논은 물이 발꿈치 잠그고
下田水瀰瀰 낮은 곳 논은 물이 철철 넘치도다.
嗟哉彼蒼生 그런데도 아아 저 백성들은
胡不事耕菑 어이하여 논밭을 갈지 않느뇨.
溝中有餓死 도랑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있어도
莫怨天公爲 아무도 하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네.
◯ 때맞춰 내린 비에도 개천에서 굶어죽은 시체가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 이행은 그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밟히지 않은 채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서도 충분히 당시 현실세계에서의 비리를 시속에 암시하고 있다.
⑥ 비(雨) 2수(二首) / 이행(李荇)
우리가 유배된 뒤로, 가시 울로 둘러치고 병졸이 지키는 집에 살며, 낮에는 밖으로 나가 일하였다. 진유근리사(鎭幽謹理使)란 호칭의 이품(二品) 재상(宰相)이 출입을 감시하다가, 비가 와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문을 걸어잠그게 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昨夜濃雲潑墨色 어젯밤 짙은 구름이 먹빛으로 덮이더니
曉來白雨銀絲直 새벽녘에 흰 빗줄기가 은실처럼 내리누나.
閉門遷客休怨咨 문 닫은 귀양객은 아무 원망도 안 하나니
上帝勤民不廢職 상제께서는 늘 백성 보살피느라 여념 없구나.
睡罷鵲聲何太忙 잠 깨니 까치 소리가 그리도 바쁘더니만
疾風殺雨斜陽漏 질풍에 비가 줄고 구름 사이 비치는 석양,
一笑扶筇聊出門 한 번 웃으며 지팡이 짚고 문을 나서니
蒼茫原野無耕耨 창망한 들판에 밭일하는 사람이 없어라
[주] -民盡流亡 無有耕作 -백성들이 다 유망(流亡)해 버려 경작하는 이가 없었다.
◯ 당시 유민의 정황을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1506년 이행이 유배 왔던 해에 거제도 전역에 흉년이 들었고, 염병까지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거제도 배소(配所)에서 이 같은 전경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⑦ 기사(記事). 1506년 배소(配所) 고절령 아래에서 / 이행(李荇)
石田賦重歲又荒 따비밭에 과중한 세금 해마저 흉년이라
去冬癘疫連死殤 지난겨울엔 돌림병으로 사람들 죽어 갔지
數間茆屋風雨僵 몇 칸의 작은 띳집은 비바람에 쓰러지고
倂日饘粥煎飢腸 날을 걸러 죽 먹자니 주린 창자가 타는 듯
四隣散盡親戚亡 이웃들 다 흩어지고 친척들도 도망쳤는데
一身徭役安可當 한 몸으로 그들의 부역을 어이 감당하리요
朝來惡使眞豺狼 아침에 온 못된 아전놈 참으로 이리 같아
徵索更到毫與芒 지푸라기 하나 안 남기고 샅샅이 뒤지더니
室中罄懸無留藏 집안이 텅텅 비어 낱알이라곤 하나 없자
牽牛負鼎如探湯 소를 끌고 솥을 지고 가도 손댈 수 없어라
主嫗氣奪空在傍 주인 할미 기가 막혀 속절없이 곁에 서서
拊膺籲天聲何長 가슴 치며 하늘 부르는 소리 어찌나 슬픈지
莫拊膺恐汝傷 가슴을 치지 마오 그대 몸 상하겠소
莫籲天天茫茫 하늘을 부르지 마소 하늘은 아득하다오.
◯ 위의 시는 작가 이행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 작품이지만, 당시의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선생은 남달리 현실 사회의 비리와 비행 때문에 고심하였던 시인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 태도는 백성들을 대변하는 입장에 서있는, '애민의식'이 현실인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요소이다.
참혹한 형벌과 유배 생활이 이어지는 속에서도 그는 한마디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은 채 책 읽기를 쉬지 않으면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으리오.”하였다.
3. 거제비경을 즐기며..
⇨ 이행(李荇)선생은 거제도 상문동에 유배와서 외롭고 힘든 삶을 영위하기도 했지만, 곧 舊신현읍 유배자 10여명과 거제고을 선비, 그리고 고을관리들의 배려로, 현(現) 상문동의 운문(문동)폭포, 소요동, 신청담(神淸潭)과 매립전의 고현바닷가, 그리고 장평동, 유자도(현 대섬(竹島), 현재 유자섬(橘島)은 당시에는 소도(小島)), 계룡산, 구천동(삼거리)까지 함께 다니며 시문을 주고받고 거제비경을 즐겼다.
⑧ 술 취해 노닐며 부르는 노래[醉遊歌] / 이행(李荇)
21일, 공백(李恭伯), 자선(李子善), 원숙(李元叔), 강재(李強哉), 인지(李訒之), 공신(李公信)을 불러 함께 신청담(神淸潭) 가에서 술을 마셨는데, 고을 선비인 이맹전(李孟全) 이백완(李伯完)도 와서 참석하였다.
神淸潭上醉遊客 신청담(문동폭포 밑의 웅덩이) 가에서 취해 노는 사람들
酒酣放狂天地窄 술 기운에 광태 부리니 천지가 좁아라
座中八人七人同 좌중 여덟 사람 중 일곱 사람이 같고
--나와 여섯 사람이 모두 유배 중이었다.
一士復是隴西籍 게다가 한 선비마저도 본적이 농서일세
--나와 일곱 사람이 모두 성(姓)이 이씨(李氏)인데, 백완(伯完)도 성이 이씨였다.
古心定與秋水澹 예스런 마음이 정히 추수와 더불어 맑으니
兩眼休比新醪白 두 눈을 새 막걸리 흰빛에 비기지 마시라
雲門懸瀑轟怒霆 운문이라 드리운 폭포(문동폭포) 굉음이 우레와 같고
翠壁開張造化跡 푸른 절벽 펼쳐진 품이 조화의 자취로세
楓林葉靑老藤絡 단풍 숲 잎새 푸른데 늙은 등나무 얽혔고
閃爍陽烏覰缺隙 번쩍이는 태양은 그 틈 사이로 엿보누나.
沈瓜泛觴據蒼石 물에 외 담그고 잔 띄우고 청석에 걸터앉아
冷酌頻添面易赤 시원한 술 자주 마시니 얼굴 쉬이 붉어라
懽娛幾何哀自多 즐거움 그 얼마뇨 슬픔이 절로 많은데
好鳥飛鳴山氣多 고운 새는 날며 울고 산 기운은 많구나.
下視悠悠又可愕 아래를 굽어보니 아득하여 놀랄 만하니
安得吾身生兩翮 어찌하면 이내 몸에 두 날개가 돋아나
蓬萊方丈歸去來 봉래산이며 방장산에 맘껏 다니며 놀다
更向人間撫金狄 다시금 인간 세상에 와서 금적 어루만질꼬.
[주1]신청담(神淸潭) : 운문폭포(문동폭포)를 비롯하여, 이 시에 나오는 경치는 《용재집》 제6권 〈소요동기(逍遙洞記)〉에 자세히 나온다.
[주2]두 눈을 …… 마시라 : 진(晉)나라 완적(阮籍)이 미운 사람을 만나면 백안(白眼)으로 보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청안(靑眼)으로 보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모두 반가운 사람끼리의 만남임을 말하였다.
[주3]어찌하면 …… 어루만질꼬 : 인간 세상을 보며 문득 신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금적(金狄)은 금으로 만든 사람, 즉 금인(金人)으로, 진 시황(秦始皇) 때 열두 개의 금인을 주조하여 궁문(宮門) 앞에 두었는데, 그 무게가 각각 24만 근이었다. 그런데 후한(後漢) 때 선인(仙人) 계자훈(薊子訓)이란 사람이 한 노인과 함께 이 금인을 어루만지면서 “이것을 주조하는 것을 본 지 이미 오백 년 가까이 되었구나.” 하였다.《後漢書 薊子訓列傳》
⑨ 제군(諸君)들과 함께 구천(九川, 구천동)장에 놀러 갔다가 연시(聯詩)를 작은 돌에 적어 바위 구멍에 감추어 두다. 발문(跋文)을 아울러 붙이다. / 이행(李荇)
危壁淸溪上 맑은 시냇가에 가파른 벼랑 -언방(彦邦)-
玆晨竝馬看 오늘 아침 나란히 말 타고 보노라 -행(荇)-
蒼苔今古色 푸른 이끼는 고금의 빛이건만 -세필(世弼)-
人事盛衰端 사람의 일은 성쇠가 바뀌누나 -언승(彦昇)-
雨點催詩急 빗방울 떨어져 시 짓길 재촉하고 -악(鶚)-
杯心引興寬 술잔 속은 느긋한 흥을 이끌도다 -언방(彦邦)-
小篇留姓字 작은 시편으로 성명을 남기노니 -행(荇)-
牛斗莫相干 모쪼록 우두일랑 범하지 말아라-세필(世弼)-
▷부계(缶溪) 홍언승(洪彦昇) 대요(大曜), 홍언방(洪彦邦) 군미(君美)와 덕수(德水) 이행(李荇) 택지(擇之)와 계림(鷄林) 김세필(金世弼) 공석(公碩)이 이악(李鶚)과 함께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고 한껏 즐겁게 놀다가 자리를 파하다. 이악은 이 고을 선비로 자는 사립(斯立)이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 연산군12) 7월 26일에 적다.
⑩ 1506년 9월 6일, 자백(子伯)과 공석(公碩) 및 자선(子善), 원숙(元叔), 강재(強哉)와 함께 주봉(主峯 계룡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연구(聯句)로 짓다. 3수(三首)
1) 時序重陽近 절서는 중양절이 가까웠고 -자백(子伯)-
江山落日催 강산에 지는 해는 바쁘구나 -택지(擇之)-
東南迷遠目 동남쪽 멀리 눈길은 아득하고 -공석(公碩)-
衰病且深杯 병약한 몸으로 깊은 술잔 드노라 -자백-
萬里心逾壯 만리 밖 마음은 더욱 씩씩하고 -강재(強哉)-
孤雲首屢廻 외로운 구름에 고개 자주 돌린다 -택지-
乘桴千古意 뗏목 띄우는 것 천고의 뜻이요 -공석-
人事轉悠哉 사람의 일은 더욱 아득해지누나 -자선(子善)-
2) 目斷滄溟夕 눈길 다한 푸른 바다의 저녁 -원숙(元叔)-
天高九月秋 하늘이 높은 구월의 가을이여 -공석-
登臨今日意 높은 곳에 오른 건 오늘의 뜻 -택지-
風物暮年愁 풍물은 늘그막의 시름이로세
夷島蜒涎外 교룡의 입 저편에 오랑캐 섬 -자백-
淸樽鰈海頭 접해 가에서 술동이 비우노라 -공석-
坐中誰主客 좌중에 그 누가 주객인고 -자선-
談笑付悠悠 담소하며 유유한 데 부치노라 -자백-
3) 未覺吾身遠 내 몸이 먼 곳에 있는 줄 모르겠고 -택지-
唯看馬島平 오직 수평선 너머 대마도만 보노라 -공석-
層雲生眼底 겹겹이 구름은 눈 아래서 일어나고 -자선-
斜日媚秋淸 비끼는 해는 맑은 가을에 아양 떤다 -택지-
衰鬢淵明菊 쇠잔한 머리털은 도연명의 국화요 -자백-
歸心張翰羹 돌아가고픈 마음 장한의 국이어라 -택지-
悠悠今已幸 유유한 지금의 생활도 다행이니
莫惜醉宜城 의성에서 취하길 아까워 마시라 -공석-
[주1]뗏목 띄우는 것 : 무도한 세상을 피해 바다에 뗏목을 띄워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공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지라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 浮于海]”고 한 말에서 유래한다. 《論語 公冶長》
[주2]접해(鰈海) : 우리나라 바다를 뜻한다. 우리나라 바다에 가자미가 많이 난다 하여 우리나라를 접역(鰈域)이라 부른다.
[주3]도연명(陶淵明)의 국화 : 도연명(陶淵明)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주4]장한(張翰)의 국 : 후한(後漢) 때 오군(吳郡) 사람인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의 순챗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고사를 차용하여 고향 생각을 나타내었다. 《晉書 張翰列傳》
◯ 당시 같은 죄로 함께 유배 온 최숙생(崔淑生,子眞 1457∼1520년)선생도 이행선생과 똑같은 제목의 시(詩),(각각 5언절구) "소요동(逍遙洞) 백운계(白雲溪) 성심천(醒心泉) 군자지(君子池) 차군정(此君亭) 운문폭(雲門瀑) 신청담(神淸潭) 지족정(止足亭) 보진당(保眞堂) 세한정(歲寒亭)"를 남겨 전하고 있다.
⑪ 운문폭(雲門瀑 문동폭포) (1) / 이행(李荇)
石門頟頟 우뚝한 저 석문이여
孰開闢之 그 누가 열어젖혔는가
瀑流虩虩 콸콸 흐르는 폭포는
孰導畫之 그 누가 끌어 놓았는가.
巨靈擘之五丁役 거령이 쪼개고 오정이 일했나니
雲氣拍之龍所宅 구름 기운 부딪치고 용이 깃들도다.
神慳鬼呵肇古昔 태곳적부터 귀신이 아끼고 지킨 곳
霞關霧鎖終不隔 자욱한 놀과 안개도 끝내 감추지 못해
余嬰禍網世共斥 내가 재앙을 만나 세상에 버림받았지만
飽怪富異天或惜 기이한 경치 실컷 보니 하늘이 아낀 건가
欲將名字記岩石 이내 이름을 바위에 새기고자 하노니
百年在後尋吾迹 백 년이라 뒤에 나의 자취를 찾으리라
⑫ 운문폭(雲門瀑) (2). / 이행(李荇)
蒼崖倚天半 반공에 기대어 선 푸른 벼랑
懸瀑空中垂 폭포수가 공중에서 쏟아지누나
白日忽霆掣 대낮에도 갑자기 우레가 울리니
風雲颯在玆 풍운이 문득 여기서 일어나도다
千年閟壯觀 천년토록 장관을 감춰 두었다가
偶許幽人窺 우연히 내가 보도록 허락했는가
恨無謫仙句 적선의 시구 없어 한스럽나니
不減廬山奇 여산폭포만 못하지 않는 것을
[주]적선(謫仙)의 …… 것을 : 적선은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그가 여산폭포(廬山瀑布)를 바라보며 지은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 “나는 물줄기 곧장 삼천 척 높이로 쏟아져 내리니, 아마도 은하수가 구천에서 떨어지는가 하여라.[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는 시구가 절창(絶唱)으로 인구(人口)에 회자된다.
⑬ 소요동(逍遙洞,문동저수지 부근) / 이행(李荇)
森森喬木陰 빽빽하게 교목은 우거지고
決決淸流瀉 콸콸 맑은 시내 쏟아지누나
道上有暍死 길에는 더위먹어 사람 죽어도
谷中無朱夏 이 골짜기엔 더운 여름 없어라
竹筇伴還往 대지팡이 짝하여 오고 가노니
不必朋從假 함께할 벗이 필요하지 않구나
持玆問傲吏 이를 가지고 오리에게 묻노니
誰是逍遙者 그 누가 진정 소요하는 자인고
[주] 이를 …… 자인고 : 오리(傲吏)는 오연(傲然)한 관리란 뜻으로, 칠원(漆園)의 관리를 지낸 장자(莊子)를 가리키는바, 장자가 관리로 있으면서도 그 뜻이 높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즉, 용재 자신이 소요동에 노닐면서 자적(自適)하는 심정이 장자의 소요유에 비길 만하다는 것이다.
⑭ 백운계(白雲溪) / 이행(李荇)
石溪鳴濺濺 바위 틈 시냇물 콸콸 흐르고
常有白雲宿 항상 백운이 머물러 있도다
雲去無定姿 구름은 가 일정한 자태가 없고
溪流不少畜 시내는 흘러 조금도 쌓이지 않지
拘留淹日月 구류된 채 그저 세월만 보내니
人世悲局促 인간 세상 국촉한 신세가 슬퍼라
悵望淸潁濱 서글피 맑은 영수 가를 바라고
高歌白雲曲 백운곡 노래를 높이 부르노라
[주1] 영수(潁水) : 요(堯) 임금이 당대의 고사(高士)인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넘겨주겠다고 하자,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고 영수(潁水)의 물에 귀를 씻었다 한다. 《莊子 逍遙遊》
[주2] 백운곡(白雲曲) : 도연명(陶淵明)의 〈화곽주부(和郭主簿)〉란 시에, “아스라이 백운을 바라본다[遙遙望白雲]”라는 구절이 있는바, 은자(隱者)의 시를 뜻하는 듯하다.
⑮ 성심정(醒心亭) / 이행(李荇)
鑿泉巖石底 바위아래에다 샘을 파니
六月氷雪冷 유월에도 얼음처럼 물이 차
挹之一漱齒 손으로 움켜 양치질을 하면
已覺神魂醒 정신이 번쩍 깸을 느끼누나.
平生老木瓢 평소 지니던 고목 표주박을
取用功莫竝 꺼내어 쓰니 더없이 좋아라
爲報同心子 마음 맞는 벗에게 이르노니
松根來煮茗 솔뿌리 가져다 차를 달이세
[주]고목 표주박 : 《용재집》 제5권 〈단풍나무 표주박〉에 그에 관한 내용이 있다
⑯ 군자지(君子池) / 이행(李荇)
小池絶淸淨 작은 못은 몹시도 청정하고
愛此君子竹 이 군자 대나무 사랑스러워라
菖蒲亦非凡 창포 역시 범속하지가 않아
涼影相倚綠 서늘한 그림자 녹음이 짙구나.
蒼石百年奇 푸른 돌은 백년토록 기이하고
遊魚一樂足 노니는 물고기 한 즐거움 누려라
客來莫洗耳 이곳에 와서 귀를 씻질랑 마소
下有人飮犢 송아지 물 먹이는 이 아래 있다오
[주]이곳에 …… 있다오 : 허유(許由)가 천하를 맡아 달라는 요(堯) 임금의 말을 듣고 못 들을 말을 들었다고 영수(潁水)에 귀를 씻고 있는데 그의 벗 소부(巢父)가 마침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 그 까닭을 묻고는, “그대가 사람이 안 사는 깊은 골짜기에 은거하면 누가 그대를 볼 수 있으리요. 그대가 짐짓 부유(浮游)한 행위를 해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구려. 이 물을 먹였다가는 내 송아지 입이 더러워지겠군.” 하고 송아지를 끌고 상류(上流)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한다. 《高士傳》
⑰ 신청담(神淸潭) / 이행(李荇)
石潭淺見底 물이 얕아 바닥이 뵈는 바위 소
不雜沙土氣 더러운 흙먼지는 섞이지 않았어라
遊人神骨淸 노니는 사람 정신과 뼈가 맑아지니
造物功力費 조물주가 만드느라 몹시 애썼구나.
潭下有嘉魚 소 아래엔 좋은 물고기가 있고
潭邊產香卉 소 가에는 향기로운 풀이 자라지
臨風復喟然 바람을 맞으며 다시 한숨 쉬노니
玆地人所諱 여기는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로다.
[주]여기는 …… 곳이로다 : 변방의 귀양지 거제도를 뜻한다.
⑱ 지족정(止足亭) / 이행(李荇)
不止無所止 그치지 않으면 그칠 바가 없고
知足皆可足 만족을 알면 모두 만족할 만한 법
向來昧斯戒 예전엔 이 경계를 알지 못했나니
欲悔歲月促 후회하려니 세월이 빨리 흘렀구나.
平生佳山水 평생에 늘 산수를 좋아한 것은
性實愛之酷 성품이 실로 이를 몹시 사랑해서지
恐此復太多 이 정도도 아마 내겐 과분하리니
於焉斂遐躅 여기서 나의 발길을 거두어야겠다.
[주]이 정도도 …… 거두어야겠다 : 평소에 산수를 좋아했는데 이곳의 경치가 몹시 좋으니 더 이상 산수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겠다는 것이다.
⑲ 보진당(保眞堂) / 이행(李荇)
保眞當少慾 참을 지키려면 욕심이 적어야지
養性當保眞 성품을 기르려면 참을 지켜야지
久聞老氏說 노씨의 말을 들은 지 오래이니
名與身孰親 이름과 몸 어느 것이 친한가
小屋莫洒掃 작은 집 청소할 것 없나니
自然無俗塵 자연히 세속 티끌이 없는 것을
煕煕以卒歲 희희낙락하면서 평생을 보내노니
何似羲皇人 희황 적 사람과 비교해 어떠하뇨.
[주1] 이름과 …… 친한가 : 《도덕경》 제44장에, “이름과 몸 중 어느 것이 더 나와 친한가.” 하여, 세상의 명예보다는 몸이 더 자기에게 소중한 것임을 일깨우고 있다.
[주2] 희황(羲皇) 적 사람 : 태고 시절 근심 걱정을 모르고 살던 순박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백(李白)의 〈희증정율양(戲贈鄭溧陽)〉이란 시에, “맑은 바람 부는 북창 아래 누워 스스로 태곳적 사람이라 하네.[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하였다.
◯ 거제도(巨濟島) 사람들은 12월 유자의 공덕을 이렇게 칭송한다. “유자는 얽어도 제사상에 오르고 탱자는 고와도 똥밭에 구른다" ["얽었어도 유자"]란 속담이 있다. 유자가 겉은 우굴 쭈굴 보기 싫어도 속은 달고 좋다는 뜻으로, 가치 있는 것은 좀 흠이 있어도 제 값어치가 있다는 말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감귤(재래감귤 품종은 유자, 산귤, 당유자, 홍귤, 탱자 등 5품종)은 고려 문종 6년(1052년) 이전 제주 특산품으로 임금님께 진상되는 귀한 과일이었으니 거제도 유자도 이 당시 개경으로 진상되었으리라.
500년 전의 이행(李荇)의 기록에도 거제도는 유자나무가 우거졌고 귀한 과실로 대접을 받았으니 그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을 것이고, 또한 조선시대말까지 각종 상납 물품에 빠짐없이 특산물로서 등장하고 있다. 거제 사람과의 오랜 역사적인 인연인지, 친숙하게 다가오는 향기로운 늦가을 보배이다.
⑳--(1). 해도록(海島錄) 정덕(正德) 병인년 봄 2월,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간 이후 지은 시들이다.
자진이 반죽 지팡이를 준 데 사례하다.[謝子眞乞斑竹杖] 걸(乞) 자는 거성(去聲)이다.
내 벗님 가까이 유자도에 머무나니 / 故人住近柚子島
유자도에는 반죽의 숲도 매우 많지 / 柚子島多斑竹林
내게 금옥 같은 대지팡이를 주었으니 / 乞我錚錚一枝足
흰 구름 봉우리 위로 올라 가야겠다 / 白雲岑上要登臨
유자도(柚子島)는 거제시 舊 신현읍 유자도(삼성조선 매립)에 유배 온 동료 홍언충과 신현읍 장평동 삼성호텔자리에서 유배 살던, 최자진이 이전에 지은 시에, “이르노니 적선께선 높이 착안하라. 흰 구름 위에 기이한 봉우리 있느니.[爲報謫仙高着眼 白雲頭上有奇岑]”라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⑳--(2). 해도록(海島錄) 정덕(正德) 병인년 봄 2월,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간 이후 지은 시들이다.
말 위에서 석류꽃을 보고. / 이행(李荇)
석류가 몇 척 높이로 섰으니 / 海榴高幾尺
울타리에 저녁노을이 붉어라 / 籬落暮霞丹
타향살이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 / 有客經時出
비낀 석양에 말을 세우고 보노라 / 斜陽立馬看
유자와 함께 공물로 바쳐져야겠고 / 應隨橘柚貢
도끼에 무참히 베어질까 걱정일세 / 更恐斧斤殘
거제현(縣) 사람 중에 유자나무를 벤 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좋은 시구가 없다 괴이쩍어 말라 / 莫怪無佳句
노년에 괴롭게도 기쁜 일이 적단다 / 衰年苦少歡
[주-1]좋은 …… 말라 : 용재(이행)가 석류를 보고, “너를 읊을 좋은 시구가 없다고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4. 맺음말 : 이상으로 ≪용재집≫ 해도록의 거제유배문학에 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행선생은 자신의 환경이 바뀔 때마다 시집 외에 삶의 기록을 한권의 시고로 엮었다. 남달리 현실사회의 비리와 비행 때문에 고심하였던 시인이다. 유배자의 노비신분에서 좌의정에 이르기까지 각양의 인생을 체험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의 인생역정은 '죽음의식'과 '현실인식' '애민의식'이 선생의 근간을 이루는 화두이며 철학이었다. 또한 선생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학인(文學人)의 한 사람으로, 그의 시문집은 관각 문학의 전형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그는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웠지만 그 형식만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깊은 의격(意格)을 체현(體現), 혼연히 일가(一家)를 이루어 조선조 굴지(屈指)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한편 그는 정치적으로는 훈구 관료(勳舊官僚)에 속했으면서도 친구 남곤(南袞)과는 달리 사림파에 대해 온건한 자세를 가졌으며, 그의 사상적 성향 역시 오히려 사림(士林)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정희량(鄭希良)은 젊은 시절의 용재를 두고, “학문은 모두 정주(程朱)의 그것이었다.”고 칭찬하였거니와, 그가 말년에 지은 화주문공남악창수집(和朱文公南岳唱酬集)에는 과연 도학적(道學的) 의취(意趣)가 분분하다.
어찌되었건 선생께서 거제로 온 것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유배 時 남긴 시와 각종산문, 지명 기록들은 오늘날 거제역사문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선생께 존경의 념(念)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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