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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證言) 옥세현(玉世賢) - 일편단심 뜻만 위해 3. 옥바라지하면서 고난에 동참하고 1 선생님은 결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이 끝나고 난 다음에 나는 사정하여 뜰로 선생님을 모시고 나와서 준비해 간 점심을 드리고 손목에 수갑을 차시고 걸으시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끌려가시는 선생님과 헤어지는 나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다시 상고하였지만 형량은 줄지 않았다. 2 그때 30여 명의 식구들은 다 떨어졌다. ‘하늘에서 보낸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사탄 편 사람이다.’라고 자신들이 선생님께 속았다는 듯 원망했다. 결국 나와 김원필 씨만 남게 되었다. 3 원필씨는 그때 교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감옥에 들어가시는 바람에 사흘 동안 보안서에 끌려가서 문초를 받고 나오자 학교에서 퇴직을 시켜버렸다. 그러니까 집에서도 난리가 나서 쫓겨나고 말았다. 4 그다음 어디 갈 곳이 없어서 집 짓는 공사장에 나가서 노동일을 하면서 나와 같이 예배를 보았다. 어느 날 예배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녁때가 되어 편지가 와서 보니까 공사장에서 떨어져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 병원에 찾아가니 허리를 다쳐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 사흘 동안 치료를 받고 우리 집에서 나와 같이 생활했다. 5 그 후 선생님은 보안서에서 평양 감옥으로 이감되었고 다시 한 달 후에 흥남감옥으로 이감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평양형무소에 계실 때 한 번 면회 가고, 흥남으로 가신 직후에 한 번 면회를 갔다. 그 후 면회를 가지 못해 궁금하던 차에 한 달 만엔가 선생님으로부터 면회 오라는 편지가 왔다. 6 준비를 해가지고 저녁 기차를 타고 밤새껏 갔다. 평양에서 흥남까지는 천리 길이다. 살림살이를 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던 내가 낮도 아닌 밤에 흥남까지 가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고생하고 계시는 흥남이라 용기를 내어 묻고 물어 이튿날 아침에 흥남역에 도착했다. 곧 여관을 정해놓고 짐을 풀고는 형무소를 찾아갔다. 7 죄수들은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일을 하고 돌아올 때까지 하루종일 면회실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저녁때가 되자 푸른 수의를 입은 죄수들이 한 줄에 40여 명씩 묶여서 걸어 들어왔다. 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다. 반갑기도 했지만 숨통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8 나는 선생님을 나의 조카라고 해서 면회 신청을 했다. 잠시 후 선생님은 간수에 이끌려 나오셨다. 식구들은 잘 있느냐고 묻길래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서 모두 잘 있다고 말씀드렸다. 옆에는 간수가 있어서 몇 마디 못 하고 준비해 간 찹쌀가루를 드리고 나왔다. 9 그날 밤 여관에서 자고 이튿날 일찍 가서 선생님을 뵙고 밤차를 탔다. 차를 타고 오는데 깊은 산골 감옥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선생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슬픔을 참을 길이 없었다. 10 그다음에 면회를 자주 오라고 또 편지가 왔다. 마침 남편이 이남에 가있었고 아이들이 학교다니고 있었어도 마음대로 나다닐 수가 있었다. 얼마 있다가 고기 장조림과 옷 등을 준비해 가지고 또 면회를 갔다. 11 여관에 들어서 주인에게 죄수들에 관해서 물어 보았더니 흥남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모두 아오지로 보냈다고 말했다. 그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형무소에 가서 간수에게 물어본 끝에 본궁이라는 분소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흥남감옥에서 20리 떨어져 있는 분소였다. 12 해가지고 간 음식과 옷가지를 거기까지 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사람을 사서 짐을 지워가지고 갔다. 평양에서 올 때부터 신발이 작아서 발톱이 아프더니 본궁까지 가면서 끝내 발톱이 빠져버렸다. 아픔을 참고 본궁에 당도하여 숙소를 정하고 그 집에서 감옥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른쪽에서 리어카 소리가 나기에 바라보니 선생님이 리어카를 끌고 나오시는 것이었다. 13 너무나 반가워서 ‘선생님 나 면회왔어요’ 하고 뛰어가니 선생님도 깜짝 놀라셨다. 선생님께서 짐을 실으러 간다고 하셨다. 리어카 뒤를 한참 따라가니까 뒤돌아 보시며 ‘다음에는 무얼 많이 가지고 오라’라고 하셨다. 14 그길로 돌아와서 미숫가루와 찹쌀을 사다가 찧고, 시장에 가서 사과 반 접과 달걀 한 꾸러미, 그리고 쌀강정이를 만들고 또 집에서 가져간 것 하고 합하니 큰 자루에 하나 가득했다. 그것을 간수에게 전해 달라고 주고 왔는데, 가게 주인의 말이 본인에게는 반도 돌아가지 않고 중도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 먹어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걱정을 하니까 잠도 안 왔다. 15 다음 날 아침에 형무소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선생님께서 뜰을 쓸고 계셨다. 달려가서 어제 보낸 것 잘 받으셨느냐고 물으니 잘 받았다고 하셔서 안심이 되었다. 선생님께서 곧 들어가셔서 다시 여관에 와서 바라보니 뒤뜰을 쓸고 계셨다. 그래서 간수에게 평양에서 조카한테 왔으니 말 좀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해서 선생님과 한참 이야기했다. 한 달 후에는 다시 흥남으로 가신다고 하시고 들어가셨다. 16 선생님께서 흥남 형무소에서 본궁 분소로 이감하신 후 발이 시려우니 덧버선을 기워 보내달라고 편지가 왔다. 덧버선 2개를 만들어 가지고 면회를 갔으나 간수가 받아주지 않아서 그냥 가지고 왔다. 17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옛날 속담에 ‘머리칼로 신을 삼아서 은혜를 갚아도 다 못 갚는다’라는 말이 생각나서 내 머리카락 자른 것으로 두 켤레의 양말을 떠서 다음번에 갖다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출감하시고 평양으로 오시면서 그 양말을 신고 오셨다. 18 그런데 선생님이 우리 집에 계실 때 그 양말을 빨아두고 피난 올 때 잊어버리고 그냥 왔다. 그 후에 선생님께서 그 양말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셔서 잊어버렸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니, 그걸 왜 버리고 왔는가’ 하시며 책망하셔서 마음이 몹시 꺼림칙하였다. 그래서 다시 머리칼을 모아서 양말을 만들어 드렸는데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19 6.25사변이 나자 면회도 못 가고 궁금해서 기도만 하고 있으니 ‘선생님은 잘 계시니 안심하라’라는 계시가 내렸다. |
証言 玉世賢 - 「一片丹心、み旨だけのために」 3. 牢獄の先生に侍りながら苦難に同参して 先生は結局、五年の刑を宣告されました。裁判が終わった後に、私は先生に庭に出てきていただいて、準備していった昼食を差し上げました。そのとき、手首に手錠をかけて歩かれる先生の後について歩いたのです。引かれて行かれる先生と別れる私の心をどのように表現す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私は再び上告しましたが、減刑されませんでした。 そのとき、三十数人の食口たちは皆、離れていきました。「天から送られた人だと思ったのに、そうではなくサタン側の人だ」と言い、自分たちは先生にだまされたと恨んでいました。結局、私と金 元弼 さんだけが残ったのです。 元弼さんは、そのとき教員生活をしていたのですが、先生が監獄に入っていかれたので、元弼さんも保安署に連れて行かれました。そして三日間、取り調べを受けて、出てきてから学校を退職させられたのです。ですから、家でも大騒ぎとなり、家から追い出されてしまいました。 その後、どこにも行く所がなかったので、家を建てる工事現場で働きながら、私と一緒に礼拝をささげました。ある日、礼拝時間になっても元弼さんが来ないので心配していると、夕方になってから手紙が来たのです。見てみると、工事現場で高い所から落ちて病院に入院しているというのでした。その翌日、病院に訪ねていくと、腰をけがして横になっていたのです。病院で三日間治療を受けた後、私の家で私とともに生活しました。 その後、先生は保安署から平壌刑務所に移動させられ、さらに一か月後に興南刑務所に移られました。私は、先生が平壌刑務所にいらっしゃるときに一度、興南に行かれた直後に一度、面会に行きました。 その後、面会に行くことができずに心配していたところに、一か月ぶりでしょうか、面会に来るようにという手紙が先生から来たのです。 準備して夜汽車に乗り、一晩かけて行きました。平壌から興南までは千里(一里は約392メートルで、日本の一里の十分の一に当たる)の道のりです。普段の生活で外出しなかった私が、昼にではなく夜、興南まで行くということは並大抵の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先生が興南で苦労していらっしゃるので、勇気を出して尋ね回り、翌朝、興南駅に到着しました。 すぐに旅館を定めて、荷物をほどいてから刑務所に訪ねていきました。しかし、囚人たちは仕事のために出かけているので、仕事を終えて帰ってくるまで一日中、面会室で待ってい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夕方になると、青い囚人服を着た囚人たちが、一列に四十数人ずつつながれて、歩いて帰ってきました。先生のお姿を拝見すると、言葉では表すことができないくらいうれしかったのですが、同時に息が詰まるようでもありました。 先生を自分の甥だと言って面会申請をすると、しばらくしてから、先生は看守に引かれて出てこられました。そして先生は、「食口たちは元気でいるのか?」と尋ねられたのです。私は安心していただくために、「皆、元気でいます」とお答えしました。横に看守がいたので、あまり話すことができず、準備していったもち米の粉を差し上げて出てきました。 私は、その日の夜は旅館で休み、翌日早く出かけて先生にお会いして、夜の汽車に乗りました。汽車の中で、深い山あいの監獄で苦労されている先生のことを考えると、涙が目にあふれ、悲しみを抑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その後、「面会によく来るように」とまた手紙が来ました。ちょうど夫は以南(朝鮮半島で休戦ライン以南を言う語)に行っており、子供たちは学校に通っていたので、私は思いのままに外出できました。それで私は、肉のしょう油煮と服などを準備して再び面会に行ったのです。 旅館に入って、囚人について旅館の主人に尋ねてみると、「興南監獄にいる囚人たちは皆、アオジに送られた」と言いました。その瞬間、がっくりと心が沈んでいくようでした。刑務所に行って看守に聞いてみると、本宮という分所にいらっしゃることが分かりました。そこは、興南監獄から二十里離れている分所でした。 準備していった食べ物と衣類をそこまで持っていくことができないので、荷物を背負う人を雇ってそこまで行ったのです。平壌から来るときから、靴が小さくて足の爪が痛かったのですが、本 宮 に向かう途中で、ついに足の爪がはがれてしまいました。痛みに耐えて本宮に到着し、宿を定めてそこから監獄を眺めていると、右側からリヤカーの音がしてきました。すると、先生がリヤカーを引いて出てこられたのです。 あまりにもうれしくて、「先生、私が面会に来ました」と言いながら走っていくと、先生も驚かれ、「荷物を載せに出かけるのだ」と言われました。リヤカーの後をしばらくついていくと、後ろを振り返られて、「次は、○○をたくさん持ってきなさい」と言われました。 そして、途中ではったい粉ともち米を買って帰り、それでもちをつくりました。市場に行ってりんごを五十個と卵を一包み買い、さらに米のお菓子をつくったのです。それらを家から持ってきたものと合わせると、大きな袋いっぱいになりました。 それを「先生に渡してください」と言って看守に渡してきたのですが、店の主人が言うには、本人のところには半分も届かずに途中で他の人が食べてしまう、というのです。それを聞いて心配になり、眠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 翌日の朝、刑務所を眺めていると、先生が庭を掃いていらっしゃいました。走っていき、「昨日、送ったものをきちんと受け取られましたか?」とお尋ねすると、「受け取った」と言われたので安心しました。 先生はすぐに戻っていかれました。旅館に戻ってまた眺めていると、先生は裏庭を掃いておられるので、看守に、「平壌から甥に会いにきたので少し話せ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と頼んで、先生としばらくお話をしました。そのとき先生は、「一か月後にまた興南に行く」と言われて戻っていかれました。 その後、興南刑務所から本宮分所に移動してから、「足が冷えるので、ポソン(朝鮮足袋)の上に履くものを繕って送ってください」と先生から手紙が来ました。 それで私は、それを二組つくって面会に行ったのです。しかし看守が受け取ってくれなかったので、そのまま持って帰りました。家に帰ってじっくりと考えていると、「髪の毛でわらじを編んで恩を返しても、すべてを返しきれない」という昔のことわざを思い出しました。それで、自分の髪の毛を切って二足の靴下を編み、その次の機会に持っていって差し上げたのです。 先生は出監されて平壌に来られるときに、その靴下を履いてこられました。ところが、先生が私の家にいらしているときにその靴下を洗っておいたのですが、避難してくるときに持っていくのを忘れてしまい、そのまま置いてきてしまったのです。 その後、先生が「あの靴下を持ってきたか?」と尋ねられるので、「忘れてしまいました」とお答えすると、「何、なぜあれを忘れてきたのか!」とおっしゃりながら叱責されるので、とても申し訳なく思っていました。それでもう一度、髪の毛を集めて靴下を編んでさしあげたのですが、それを今も保管されているそうです。 六・二五動乱が起きてからは面会にも行けず、心配で祈祷をするのみでした。すると、「先生は、元気でいらっしゃるので安心しなさい」という啓示が下りました。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