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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직전의 시대 / 창 6:1-4
창세기 6장은 홍수가 일어나기 전, 인간들의 상황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쓸데없이 옛날 이야기를 들어야 됩니까? 이것은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노아의 때와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때가 비슷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마 24:37~39절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의 상황이, 노아의 홍수가 나기 전 상황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홍수가 나기 전 상황을, 옛날 이야기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홍수 이전의 상황을, 지금 우리의 상황과 동일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먹는 것도 과하면 탐심이 되고, 마시는 것도 과하면 취함이 되고, 결혼도 잘못하면 심판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엄중하게 선언합니다. 롬 6: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런데 죄를 지었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여지없이 의문이 찾아옵니다. ‘어 이건 뭐지?’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건가?’ ‘더 이상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러나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건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아니라 죄가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타이밍이 되면, 쌓아놓은 죄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돌이켜도 소용 없고 아니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심판이 있기 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나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 상황을 보면서,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창세기의 전반부인 1장~11장은 원역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어렵고 해석의 난제가 많아 명쾌하게 풀어내기가 힘든 게 사실입니다. ‘어 성경이 읽어지네’를 보면, 이 부분에 생장점이 집중적으로 나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말씀도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말씀과, 이해충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냥 기록된 말씀대로 풀이하면 됩니다. 항상 문제가 되는 건, 말씀을 억지로 풀 때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베드로도 염려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벧후 3: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억지로 푼다는 말은 교묘하게 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교묘하게 풀어야 은혜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1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땅 위에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아닌가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우리 생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 말합니까? 창 1: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한 것을 어떻게 봅니까?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해석의 난제에 부딪힙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해놓고, 번성한 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었다니,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죄는 개인적 차원이었습니다. 아담의 죄나, 가인의 죄나, 라멕의 죄는, 엄밀하게 말해서 개인적으로 지은 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죄가 집단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죄질이 불량해진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봐도 집단화는,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많습니다. 교회도 집단화될 때는, 좋은 경우보다 나쁜 경우가 많습니다. 죄가 집단성을 띠면, 구조적인 악이 됩니다. 그러면 고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개인의 죄야 회개하면 됩니다. 또 회개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집단이 어떤 잘못에서 동시에 돌이키는 건 어렵습니다. 결국 이 집단적인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부른 셈입니다. 집단적인 죄는 홍수 심판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집단적인 죄의 절정은 그 이후에 나옵니다. 바벨탑 사건입니다. 문제는 이 바벨탑 사건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집단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겉으론 휴머니즘으로 포장했지만, 그 속엔 마귀의 교묘한 술책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언론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언론이 권력은 아니지만, 어떤 권력보다 강합니다. 그 정도로 힘 있는 언론이, 대체적으로 반 기독교적이고, 교회에 대해 우호적인 경우는 드뭅니다.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사람이 땅 위에 번성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해 갖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견해입니다. 천상적 존재인 천사와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분히 신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군 신화도 여기에 속합니다. 단군 신화의 내용은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 땅에 내려와 곰에서 변신한 사람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참이냐 거짓이냐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신화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으로, 사람의 딸들을 가인의 후손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전통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이 가장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예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는 셋의 후예가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에덴동산을 떠나 동쪽으로 가면서, 에녹 성(城)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가인 이후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자기도 하나님을 잊어갔고, 후손들에게도 신앙을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구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번성하여 많아지다 보니까, 경건한 셋의 후손과 타락한 가인의 후손 간에, 자연스럽게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건한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이 누리는 삶을 보니까, “야, 이런 세계가 다 있구나!” 감탄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전부였는데,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제사를 드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음을 본 것입니다. 경건한 후손들이 날마다 하는 게 무엇입니까? 희생제사입니다. 짐승을 잡아 피 흘리는 일의 반복입니다. 죄짓고 회개하고, 회개하고 또 죄짓고, 사실 이게 얼마나 따분한 일입니까? 그런데 가인의 딸들을 보니까, 너무 달라 보였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움에 눈이 돌아갔습니다. 가꾸고 꾸미고 단장한 아름다운 모습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의 경건한 아름다움을 버렸습니다. 경건미는 포기하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잠 31:30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벧전 3:3-4절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현대는 외모도 스펙이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요즘 시대 흐름과는 반하지만, 성경은 여자의 미모가 전부가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될 사람을 찾아 기름을 부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삼상 16: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초청을 받아서 한 설교에도 나옵니다. 행 10:34-35절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섬기는가’에 관심이 깊으시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칭찬하시고, 그것으로 값을 매기신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남자라도,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눈이 안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아름다운 여성을 따라가지 않고, 말씀을 따라갑니다. 결혼생활이 중요하기에, 신앙에 방해되는 결혼은 하지 않습니다. 처녀 총각이 서로 교제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반해, 결혼하여 사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자는 여자의 말을 안 듣는 것 같으면서도, 끝내는 듣습니다. 솔로몬같이 믿음 좋고, 지혜로운 사람도, 이방여인들과의 결혼으로 인해 신앙이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왕상 11:4절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자기 신앙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자기는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다고 쳐도, 자식 신앙교육은 어떻게 할 건가요?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것은, 하나님 신앙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아벨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경건한 후손이 가인의 후손과 결혼하기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가치를 포기한 것입니다.
심판이 누구 때문에 온다고 생각합니까? 죄인들 때문에 오는가요, 하나님의 아들들 때문에 오는가요? 하나님의 아들들 때문에 옵니다. ‘하나님의 백성’ 다시 말하면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본연의 기능을 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국민들의 양심과 도덕을 이끌고 갈 능력을 잃었습니다. 교회가 죄의 온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아픈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강단 메시지도 선명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설교보다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른바 “좋은 말씀”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죄를 지적하지 않고, 회개를 말하지 않고, 죄 값을 치르는 지옥이 있음을 경고하지 않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와 교회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설교자로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이 좋았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 인사가 자기 맘에 드는 말을 해줬다는 말로 들립니다. 목사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했는데, 회중은 좋은 말씀 정도로 생각한다면, 절대로 삶에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 말씀에 생명을 걸 수 없고, 그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설교는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습니다. 셋 공동체는 곧 예배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중요한 이유는, 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세상에게 임할 모든 진노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의인 열 명만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인 열 명이 드리는 참된 예배가, 소돔과 고모라의 어두운 죄악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역할이며, 이것이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올리는 중보기도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연기하고 있다는 걸 믿으면, 지금보다 간절하게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향할 때, 법궤를 멘 제사장을 앞세우고 들어갔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 강물을 밟을 때, 강물이 멈춰 섰습니다. 제사장들이 강물을 밟고 있는 동안에는, 물이 멈춰 서서, 백성들이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물에서 나오자, 요단 강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중심으로 예배드리며, 중보 기도하는 것은, 세차게 흐르는 세상의 죄와 심판의 물결을 막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나 자신을 살릴 뿐만 아니라,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최후의 보루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 곧 하나님을 모르는 여자들과 결혼한 후에,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서, 무서운 홍수 심판이 임한 거 아닙니까?
3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참고 견디다 못한, 하나님이 무서운 결단을 하십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영이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매를 맞아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떠난다는 말은, “이젠 네 마음대로 해라” “이젠 네 마음대로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왜 떠난다고 합니까?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들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육신이란 말은 고상하게 한 표현입니다. 공동번역성서로 3절을 읽겠습니다. ‘그래서 야훼께서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나의 입김이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사람은 백이십 년밖에 살지 못하리라 하셨다.’ 육신을 동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무엇과 같다는 말입니까? 동물과 같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간 우리 몸은,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존귀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고후 4: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존귀한 까닭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3: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존귀한 까닭은, 우리 몸이 성령을 모신 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비참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영이 떠난 줄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비참한 인생입니다. 당연히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인생, 성령으로 충만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입니다. 우리의 남은 삶을,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으로 살기 바랍니다.
3절 하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이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120년 이내가 될 것이다는 말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면, 앞으로 120년이 지나고 나면 홍수 심판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120년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내의 기한입니다. 곧 바로 심판을 하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회개할 수 있는 기한이 주어진 것입니다. 노아가 배를 만드는데 걸린 기간이 120년이었다고 하는데, 이 기간에 노아가 배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분명히 전했을 것입니다. “120년이 지나면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노아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지 않습니까? 망하는 사람은 귀부터 망하는 법입니다. 꼭 보면 흥하게 하는 사람의 말에는 귀를 틀어막고, 망하게 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활짝 엽니다. 생명의 말씀, 살리는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기 바랍니다. 당시 세상이 어떠했길래 그랬습니까? 보면 항상 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과 사조가 있습니다. 노아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사상과 사조는 한 마디로 영웅주의였습니다. 네피림이 화려하게 등장한 시대였습니다.
4절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은 일반적으로 ‘거인’이란 뜻으로 알려져 있지만, 학자에 따라서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 타락한 천사들이나 후손입니다. 둘째, 괴물이나 신동입니다. 셋째, 거인입니다. 넷째, 타락한 자입니다. 타락한 자라는 말속에는, ‘압제자, 난폭군, 훼방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네피림 중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낳은 자식들 가운데서도 생겨났습니다. 경건한 사람과 타락한 사람이 결혼을 하면, 경건한 자식이 나올 수 있지만, 오히려 타락한 정도가 배나 되는 자식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괜히 교회에서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말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도 영적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지만,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대에서 신앙이 끊어질 수 있습니다.
당시는 이 네피림이란 칭호만 얻으면, 무법자였던 거 같습니다. 모든 게 힘으로 통하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네피림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경건한 후손의 자녀가 네피림이 되고자 했지만, 처음에는 잘 안 끼워줬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네피림 무리에 끼기 위해, 더 난폭하게 굴고, 더 악하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사리 용사라는 타이틀을 얻습니다. 네피림이 되고나면, 어디를 가나 “형님”하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처럼 홍수 직전의 상황은, 하나님을 아는 경건한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모르는 가인의 사람들이나, 도대체 구분이 안 되는 시대였습니다. 신앙인의 자녀와 불신자의 자녀가 뒤죽박죽인 시대, 아니 신앙인의 자녀가 오히려 한 수 더 뜨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영락없이 오늘 이 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뒤를 이어, 신앙의 계보를 잘 이어가는 자녀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녀들이 많습니다. 결국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녀에게 신앙계승입니다. 자기 자식을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워내는 것이, 부모의 평생 사명입니다. 어떻게든 신앙이 당대에서 끊어지지 않고, 다음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바턴을 잘 넘겨주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아주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더 이상 세상사람들처럼 자기만을 위해서 살지 말며, 형제자매를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며, 힘과 인간의 욕망에 지배받는 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려하심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고, 심지어 많은 교회마저도 이 세상과 전혀 구분되어지지 않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저희 모두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노아처럼,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람의 아들, 사람의 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고 있는지 돌이켜 봅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세상의 힘을, 더 의지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내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지는 않았는지, 조그만 상처와 서운함 때문에, 미움과 복수심에 불타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게 하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다시 한번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세상적으로 화려함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단순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나의 이기적인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 보다는, 이웃을 섬기며,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세상과 아무런 구분없이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한탄하게하고 근심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로 주님만을 경배하게 하시고 주님만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노아 / 창 6:5-12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눈 덮인 알자스 산에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디어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래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점차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가만히 보니 자기가 어느 집 방안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어떤 농부가 자기 오막살이로 데려온 것입니다. 상처는 싸매져 있었고, 추위를 잊을 수 있도록 방안은 따뜻하게 불이 지펴져 있었고, 옷도 갈아 입혀져 있었습니다. 농부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오베르랑 목사님은 눈 덮인 계곡에서 떨어졌으나 얼어죽지 않고 살게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그 집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목숨을 살려주신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곳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때 농부가 웃으면서 말합니다. “저도 한가지 묻겠습니다. 저의 이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저의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름과 그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면 은혜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비할 바가 못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사람이 주는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은혜요, 영원한 은혜요, 풍성한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번성해지면서,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2절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습니다. 창 6: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 곧 셋의 후손들이, 사람의 딸들 곧 가인의 후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거 아닙니까?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배 공동체인 셋 자손과 힘의 공동체인 가인 자손이, 섞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용사인 네피림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받아드리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아담에게도,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소년을 죽인 라멕에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당장에 심판하실 수도 있었는데도, 긍휼로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우심을 악용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죄로 가득 채웠습니다. 죄악이 온 세상에 퍼져 있었습니다. 암세포도 어느 한 부위에만 있을 땐, 그 부위를 수술하여 절개해내면 됩니다. 하지만 암세포가 전이 되어, 몸 전체에 퍼져버리면, 치료가 불가능해집니다. 노아 당시의 시대 상황이, 죄악이라고 하는 암세포가, 이미 몸 전체에 퍼져버려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세상이 이 정도가 되면, 어떤 악도 수용되는 분위기가 됩니다. 마음이 악에 전염되면, 다른 건 볼 것도 없습니다. 5절하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마음이 악하면, 생각하는 것도 악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다 악한 일을 한 번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실수로 악을 한두 번 행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생각했다 하면 악입니다. 계획을 세웠다 하면 악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마음이 오염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주의 재림이 가까워진, 오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홍수 심판을 앞둔, 그때보다 상태가 나을까요?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아 보입니다. 불 심판을 앞두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 시대를 예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마 24:38-39절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6절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한탄하십니다.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한탄하다”는 말의 원뜻은, ‘신음하다, 숨이 차다’입니다. 곧 자신 또는 타인의 아픈 현실로 인해, 고통 가운데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비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말합니다. “근심하다”는 말의 원뜻은, ‘심령이 찢어지다,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으로 짓눌리다’입니다. 곧 죄악으로 온 세상에 가득한, 이 비극적 현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찢어질 듯한 마음의 고통을 받으셨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좋아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심판 이전에, 하나님의 찢어질듯 한 아픔과 비통의 눈물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지만, 사람들을 향한 애정 때문에, 그토록 고통 중에 한탄하시고 근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앙인들마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분은 묵묵히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리스도인마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데도, 그분은 스스로 괴로워하고 아픔을 감내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우리는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벧후 3: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참으시는 데는 선수입니다. 그분만큼 잘 참으시고, 그분만큼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인내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내만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내를 끝내시는 순간이 옵니다.
7절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날입니다. 오래 참으시던 하나님은, 결국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쓸어버리다”는 말은 ‘씻다, 빨다, 닦다’는 뜻입니다.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는 말은, 물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심판의 대상도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심판은 다 함께 당하게 됩니다.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의 대표성이, 누구에게 있다는 말입니까? 사람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자연은 따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사람의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눈여겨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체 중에 심판의 대상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물고기입니다. 노아가 배에 암수 한 쌍씩 데리고 들어갈 때도, 물고기는 빠졌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후에 구원을 상징하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꼭 한 번쯤은 봐야 할 영화 중에 ‘쿼바디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쿼바디스는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 아래 있는 교회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인상 깊은 영화 장면 중에 하나가, 땅에 물고기 그림을 그리고는 얼른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기독교임을 나타내고, 상대가 기독교인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물고기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 의미만 살려서, 기독서점에 가보면 물고기에 이상한 글씨가 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 스티커를 차량 뒤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글씨가 헬라어로 ‘익투스’라는 단어인데, 뜻은 물고기입니다. 원뜻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이시다’의 머리글자를 딴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애정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동시에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버릴 수 없으셨습니다. 차마 전멸시킬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이 심판을 선언하실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노아였습니다. 노아와 다른 사람들의 차이는, 노아에게는 죄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는 죄가 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노아가 한 치의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그 시대 사람들과 노아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느냐의 여부입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은혜가 무엇인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호의를 말합니다. 은혜의 반대 개념이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심판이란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심판이 아닌 호의가 베풀어지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① 그들이 지은 죄 때문입니다. ② 그들이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답은 ②번입니다.
미국 서부 개척 당시에 텍사스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텍사스에서는 살인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어느 날 한 술집에서 청년들이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청년이 말다툼 끝에 권총으로 옆에 있는 사람을 쏴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평소에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언제나 이웃에게 칭찬을 받았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의 간곡한 바람이 담긴 연판장을, 주지사에게 제출했습니다. 탄원서를 읽은 주지사는, 자신이 직접 그 청년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죄를 짓고 나서, 성격이 많이 변했습니다. 자포자기하여 비뚤어진 생각에, 난폭한 행동까지 거침이 없었습니다. 주지사가 사면장을 들고 그를 면회하려 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으나, 그는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죽은 것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장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기보다는, 죄인들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절했기 때문에 영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자신 있게 설 사람이 있겠습니까? 롬 3:10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9절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인이 나옵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이 말은 충격적인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시대상황이, 물로 심판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너무도 타락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을 때, 혼자만 죄를 짓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시대에, 세상에 물들지 않게 산다는 것은 순교적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고독이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엔 별나게 믿는다고 핀잔을 받았을 것이고, 나중엔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전혀 욕을 먹지 않고 살고 있다면, 우리가 가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살아도, 결정적으로는 그들과 다릅니다. 그들과 추구하는 바가 다릅니다. 그들과 세계관이 다르고, 그들과 가치관이 다릅니다. 오늘날 비극이 무엇입니까? 교회와 세상이, 별로 다른 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과 동일하게, 화내고, 욕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돈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아니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는 세상과 차별화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노아가 의로운 자였다는 것이, 한 번도 죄의 충동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노아 역시 죄성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노아도 사람인 이상, 죄에 대한 충동을 느껴보았을 것입니다. 그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노아를 가리켜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당시에 상대적으로 완전한 자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노아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이 점이 그가 의인이란 칭호를 얻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사입니다. 노아의 삶에는 희생 제사가 있었습니다. 모든 경건한 후손들은 포기했지만, 노아만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 곧 예배를 생명줄로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가 의인이 된 것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자기 힘으로, 도저히 이 세상에서 죄 짓지 않고 살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만 생기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곤란한 인간관계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의인으로 사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죄와 동떨어진 삶을 살고 싶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주동행(與主同行), 곧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출발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물론 예배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의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출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입니다. 예배를 잘 드린 사람이, 교회 밖에 나가서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 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이, 교회 밖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자를 통하여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주간 동안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 여부는,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노아가 의인이었음을, 우리가 객관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120년 후에나 올 심판을 대비해, 산 위에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말 않고 순종하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 남은 삶을 전부 이 심판을 대비하는데 사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노아가 무슨 특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10절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한 아내와 동거하고, 자식들을 낳고 오순도순하게 살았습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온 가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가족 모두가 신앙으로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산수 공부 좀 하겠습니다. 노아가 최초의 심판을 들을 때가 몇 세였습니까? 그럼 노아가 몇 세에 홍수가 났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없습니다. 오픈북할까요? 7:6절입니다. 창 7:6절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몇 세였습니까? 600세였습니다. 노아가 심판의 말씀을 들은 후, 몇 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습니까? 이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120년입니다. 600에서 120을 빼면 480입니다. 그럼 노아가 최초의 심판 소식을 들을 때의 나이가 몇 세란 말입니까? 480세입니다. 그럼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을 때 나이가 몇 세였습니까? 오늘 본문에 없습니다. 이것도 오픈북, 5:32절입니다. 창 5:32절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500세 된 후였습니다. 그럼 노아가 심판 소식을 듣기 전입니까, 들은 후입니까? 들은 후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방주를 만들면서도, 밤에 아내와 동거하여 자식 낳았다는 말입니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내일일지라도, 농부는 논밭을 둘러보러 나가야 하고, 과원지기는 과수를 돌보아야 하고, 직장인들은 출근해야 하고, 자영업자들은 자기 일을 하고, 애를 둔 엄마는 육아를 해야 하고, 전업주부는 집안 살림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마지막 시대에는 결혼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생겨날 거라고 했습니다. 딤전 4:3절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딤전 4:1절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후일입니다. 나중에 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졌을 때를 말합니다. 그때는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 활발합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이단이 극성을 부릴 것을 내다본 말씀입니다.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이상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예로 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눅 17:27절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이 말씀이 진짜 그런 뜻입니까?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 자체는, 분명히 복입니다. 그것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는 게 문제입니다.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게 문제입니다. 결혼하기 전보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게 문제입니다. 거기에 더해,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여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반복하는 게 문제입니다.
11-12절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사람들의 죄가 최고조의 상태에 이르게 되자, 하나님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했다지 않습니까?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다지 않습니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한 마디로 ‘죄를 권하는 사회’였습니다. 죄에 묻혀 죄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이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죄짓는 것이 일상이요, 죄된 생활이 문화였던 것입니다. 사회적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회 구조악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개인의 회개 운동과 사회의 도덕성 회복 운동은 꼭 같이 가야 합니다. 국가나 사회의 타락지수는, 종교의 타락지수와 거의 비례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교회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인의 자손 때문에 심판하신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셋 자손 때문에 심판하셨습니다. 셋 자손이 가인의 자손과 섞였기 때문에 심판하셨습니다. 셋 자손은 예배 공동체로서, 그들과 확연히 구별되게 살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희망은 셋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사명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자신들이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결국 셋 자손도 가인의 자손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사회 때문에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한 교회 때문에 심판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희망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통로는 교회 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마저 무너지면 희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 교회는 안전합니까? 교회의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정말 안전합니까? 그날에 우리 교회는 심판과 무관합니까? 그날에 교회 구성원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심판과 상관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고, 서로 협력하고 하나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함께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가고, 또한 그런 가정과 일터를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올 한해도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한해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며, 서로 협력하며 하나를 이루어가는 공동체를 기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에 속하게 하시어, 서로 섬기고 나누고 협력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은 혼합되고 섞이는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 저희가 과거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는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거룩한 교회공동체로 불러주셨으므로, 세상의 부패한 가치관과 유행에 오염되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이 저희를 불러주신 순수한 목적과 사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정말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교회, 가정, 일터를 만들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노아가 다 준행하였더라 / 창 6:13-22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보시기에 이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나요, 아니면 점점 나빠지고 있나요? 겉모습만 보고 물질적인 면만 보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신기한 물건들이 속속 등장하고, 물질적인 환경이 편리해지는 것만 보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보면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자원이 고갈되고, 자연 환경이 훼손되고, 세상살이가 각박해지고, 곳곳에서 사건 사고가 터지며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더 심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은 이 세상을 가리켜 장망성(장차 멸망할 성)이라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 때는, 온 세상이 완전했습니다. 그리고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고, 모든 게 뒤죽박죽되어 버렸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하면서, 모든 만물도 덩달아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인간에게 사망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사망은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영혼이 끊어지는 영적인 사망, 육체적인 죽음 넘어 영원한 사망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범죄와 타락의 결과, 인간도 만물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영원한 사망과 최후의 심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경쟁하듯이 죄악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마치 죄악의 올림픽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눈뜨고 일어나 신문을 펼치면, 죄악의 신기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처럼 죄악의 풍조가 나날이 심해져 가는 가운데, 인간에게 남은 것이 하나님의 심판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다행이고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공의로써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역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지나간 세기의 유명한 무신론자 중에, 로버트 잉거솔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무신론 강의 도중, 탁상에 시계를 꺼내 놓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5분의 시간을 주겠다. 내가 5분 동안 하나님을 저주할 터인데, 그 동안에 나를 죽이기를 바란다. 내가 만약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거나 있어도 실패자에 불과하다.” 침묵의 5분이 지났습니다. 학생들도 긴장하는 표정이었습니다. 5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승리자요, 신은 실패자라고 외쳤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데오도르 파커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런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5분으로 단축시켜 보려고 한, 잉거솔의 무모하고 의미 없는 시도가 실패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짧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해선 안 됩니다. 그러다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하나님의 인내도 끝날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았던 분노를 폭발하실 때가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 영원히 참으시는 분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끝났을 때, 그분은 그동안 허락한 것을 다 거두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기 전에,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돌아오는 데도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됩니다. 회개의 가장 적합한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내가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는 지금이, 회개의 가장 적합한 때입니다. 다른 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다가올지 불분명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하는 날에 회개하는 자가 사는 것입니다.
14절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심판을 선언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세상을 살리실 계획도 세우십니다. 인간의 범죄가 분명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구원선을 예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된 생활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으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방주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 앞에, “너를 위하여”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만들라고 하지 않고, 노아 너를 위하여 만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에 들어갈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밖에 없을 것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엄밀히 말하면, 택한 백성을 위하여 지어진 집입니다. 교회는 문이 항상 개방되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누구든지 오라고 초청합니다. 그러나 아무나 오지 않습니다. 택한 백성만 옵니다. 구원받기로 예비된 백성만 오는 것입니다. 행 13:47-48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었다지 않습니까? 문제는 누가 구원받기로 예비된 자인지, 누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교회로 초청하여 복음을 듣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기로 예비된 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그저 네 나름대로 상식을 가지고 방주를 한 척 만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그렇게 만든 배로는 일 년 동안의 홍수를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상한 모양의 배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주였습니다. 그러니까 방주의 설계자는 하나님입니다.
15-16절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하나님은 어느 날 노아를 불러놓고, 방주의 청사진을 보여주시고, 꼭 이대로 만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원이 철저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완성되었듯이, 방주 역시 하나님의 아이디어로 계획되었습니다. 방주의 크기를, 우리들이 쓰는 미터법으로 환산해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1규빗은 약 45CM입니다. 그러므로 길이가 135M 정도입니다. 폭이 22.5M 정도입니다. 높이가 13.5M 정도입니다. 방주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배’형태가 아닌 ‘박스’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방주의 원어가 ‘테바’인데, 출애굽기 2:3절에 나와 있는 모세를 담은 갈대 상자를 ‘테바’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박스 형태로 생긴 배로는 전혀 속력을 낼 수 없습니다. 사실 방주는 뱃머리도, 배꼬리도 없습니다. 또한 엔진이 없습니다. 엔진은 고사하고 노도 없습니다. 돛도 없고, 닻도 없습니다. 방향키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노아가 무슨 나침반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방주가 항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물 위에 안전하게 떠 있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가르쳐 주신 방주의 크기와 양식은, 세상에서는 본 일이 없는 이상한 모양의 배였으나, 노아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경험과 상식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따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순종입니다.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이상한 말을 하면, 굳이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강단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에 근거하여 말할 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말할 때, 자기 생각하고 조금 맞지 않더라도, 자기 경험한 바와 일치되지 않더라도,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과 어긋나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게 참된 순종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 나름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인은 군대식으로, 의사는 병원식으로, 사장은 회사식으로 교회를 보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올바른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식으로 하는 것이 교회의 봉사입니다. 힘의 방식이 아닌 섬김의 방식으로 해야 참된 교회 봉사입니다.
그 큰 방주에 창은 하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 하나의 창은 공기와 햇빛이 들어오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하나님께만 시선을 집중하도록 고안된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밖을 보지 않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스도인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시선을 세상에 두면, 타락하든지 절망하든지, 둘 중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정도를 걸어가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여호사밧의 기도처럼 오직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대하 20:12절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선을 확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선을 좁혀야 합니다. 아니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사람을 사건을 봐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생활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방주에서 나올 때까지 일 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일 년 동안 그들은 방주 안에서 꼬박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이 생활은 정말 답답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창문이라도 있어서 밖이라도 내다 볼 수 있다면, 덜 답답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설계에서 창문을 넣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 그들이 창문을 통해 밖을 보았다면, 그들은 절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창을 열고 볼 수 있는 것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 있는 사람의 시체와 죽은 동물뿐입니다. 그것을 보면, 탄식하고 절망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밖을 보는 것을 차단하였던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세밀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 중에, 가톨릭은 자유로운데 개신교는 금하는 것이 많다고 불평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지, 교회가 무슨 덕 보자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을 우리의 삶을 제한시키는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피곤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면 편합니다. 말씀을 벗어나면 자유로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말씀 안에 있을 때 자유함이 있습니다. 말씀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요 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은 언약입니다. 언약을 하고 난 후, 언약을 지킬 때 자유로운가, 언약을 깨뜨릴 때 자유로운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17-18절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였습니다. 17-18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언약’입니다. 집 주인이 그냥 집을 쓰라고 하면 사실은 불안합니다. 언제 나가라고 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계약서를 쓰고 계약을 하면, 그 계약 기간 동안은 주인도 함부로 나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계약을 세우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노아와 계약을 세우심은 스스로를 제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계약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방주 안에 들어가면 내가 너희 모든 삶을 책임지겠다.’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방주 속에 있는 모든 생명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신다면, 하나님은 능력이 없으신 것이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언약하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구원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행 16: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합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호랑이와 방주 밖에 있는 호랑이가, 다른들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방주 안의 호랑이는 더 온순하고, 방주 밖의 호랑이는 더 사나운 게 아닙니다. 다 같은 호랑이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극과 극입니다. 방주 안과 밖은 삶과 죽음을 가릅니다. 방주 안에 있느냐 방주 밖에 있느냐의 차이가, 생사를 결정합니다. 예수 믿는 것과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영생과 영벌의 차이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갈라놓는 차이입니다. 홍수 심판에서 구원의 길이 무엇입니까? 방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방주가 아닙니다. 아무 배나 들어간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18절 끝부분, ‘그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설계하신 ‘그 방주’,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방주의 출입구가 몇 개입니까? 하나뿐입니다. 요즘 배처럼, 승선하는 문이 따로 있고 하선하는 문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각층마다 출입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주적인 복음으로 알려진 요한복음도,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유일성을 말합니다. 요 14: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0:7-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타종교에서는, 기독교의 구원관이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고 편협하다고 비판합니다. 어째서 구원의 길이 예수밖에 없냐고 항의합니다.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그 점에 대해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지 않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구원을 주시는 분이 ‘그렇다’고 하니 할 수 없습니다. 고아원의 아이를 양자로 입양한 분에게, 다른 아이가 달려가 분개하며 “왜 하필 그 친구입니까? 내가 그 애보다는 모든 면에서 월등한데”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구원의 유일성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문이 하나라도 열려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심판을 받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살 길을 하나라도 마련해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래도 그렇게 따지고 시비를 걸어온 사람은, 구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영혼을 위해, 실제로 기도하기 바랍니다. 먼저 구원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 하나님께서 장차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경고했을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노아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신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벧후 2:5절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노아가 “오직 의”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노아가 오직 방주에 들어와야 살 수 있다고 외쳤듯이, 우리도 오직 예수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전해야 합니다. 전도의 열정에 대해서는 바울을 능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딤후 4:1-2절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우리는 흔히 2절 앞부분의 말씀만 따로 떼어 생각하는데, 사실 1절 때문에 2절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니까 홍수 심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고 새로운 사회의 건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재림 목적은, 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롭게 하는 것은 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19-20절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심판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심판의 목적은, 멸망시킴이 아니라 생명 보존, 곧 구원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도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물로 심판하는 중에 생명을 보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생명이 보존됩니다. 그렇다고 나 혼자만 생명을 보존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가족의 생명이 나와 같이 보존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가족 구원을 기본으로 칩니다.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나와 함께 생명이 보존되어야 할 사람을 찾으셨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중보기도하기 바랍니다. 아직 못 찾으셨습니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찾아보기 바랍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친인척일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이웃일 수 있습니다. 대상자를 찾았으면 그 영혼을 위해, 내 영혼의 문제인 것처럼 기도하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연만물의 청지기로서, 이 하나밖에 없는 초록별 지구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맑은 물, 푸른 나무, 아름다운 꽃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실 물, 먹을 식량, 숨 쉴 공기가 언제까지나 넉넉하리라 믿었는데, 지금은 걱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크게 보면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21절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성경은 구원에 있어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심판으로부터 직접적인 구원은 누구의 소관입니까?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모든 먹을 모든 양식을 가져다가 저축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주에 타고 있어도 먹거리가 없으면 완전한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이건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물을 아껴 쓰고, 댐을 만들어 저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건강을 관리하고, 몸을 돌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장사하여 갑절로 남기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특권을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고 찾고 열리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의 하실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겨드리고, 내가 할 일은 내가 성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혼돈하면 안 됩니다. 노아가 그걸 잘한 사람입니다.
22절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에 대한 평가는 간단합니다. 그는 순종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시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순종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순종의 삶을 낳습니다. 믿음이 노아의 삶의 방식을 말씀 중심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인류를 향한, 멸망의 계획과 구원의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계획은 모두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 언약명령임을 믿고 순종하기 바랍니다. 일부가 아니라 모두,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노아의 시대와 다를 바 없는, 악하고 험한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노아와 같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는 택한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의 날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담대히 선포하게 하옵소서. 신앙생활의 기본은 말씀을 붙드는 것이므로, 믿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종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고,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님을 더욱 의지하며,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면서, 방주를 짓는 자, 방주 안에 들어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