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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그대 가슴에 | 로라 | 백인 과부 | |
수지 | 로라의 딸 | ||
스티브 | 사진 작가 | ||
애니 | 흑인 과부 | ||
사라 | 애니의 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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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날 뉴욕 해변은 많은 휴가객들로 붐볐다. 사람들이 붐비는 가운데 백인 아이(수지)가 엄마(로라)를 잃어버린 사이에 흑인 미망인(애니)이 딸(사라)과 함께 해변에 머물다 사진작가 스티브의 도움으로 로라의 엄마를 찾아준다. 이런 만남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런데 백인 엄마와 흑인 엄마는 모두 미망인이다. 외동딸 만 기르고 있으며 서로의 처지가 같다는 것을 의식한 두 미망인은 형편이 훨씬 나은 로라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한다. 두 가족은 서로의 환경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오랫동안 한 가족처럼 사랑과 웃음이 넘치는 생활이 계속된다. 그런데 로라는 영화배우라는 큰 목표를 그리고 있었고 딸을 찾아준 인연으로 사진작가 스티브를 만나게 되나 교제의 제의를 뿌리치고 배우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함께 사는 애니의 딸 사라는 얼굴이 백인이지만 흑인의 피를 가진 혼혈아다. 두 가족이 함께 살면서 딸들은 성장하며 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남자친구들 이야기가 주된 대화다. 자신이 혼혈아인 사라는 동생 수지가 언니는 사귀는 남자친구가 백인이냐고 물으면 늘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도 백인이라고 속내를 감추곤 한다. 서로가 예민한 시기의 사춘기 여자 아이들이다. 어느 날 애니가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와 딸 수지에게 전해주려고 하니 항상 예민한 딸은 그만 들통이 나고 만다. 영화의 줄거리는 여기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사라는 엄마처럼 살지 않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말하며 마치 엄마를 저주하듯 대한다. 사춘기의 혼혈아인 자신을 원망하며 깊은 생각을 하니 엄마의 삶이 비록 백인 과부 집에서 함께 살지만 편치 않은 삶은 계속 된다.
1930년대이니 그 시대의 미국 사회는 흑백차별이 많았던 시대다. 비록 링컨대통령에 의해 남북전쟁을 치르며 흑인을 해방시켜 합중국이 된 미국사회이지만 내면의 세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갈등은 계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마침 백인처럼 흰 얼굴이며 혼혈아인 사라가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남자친구는 사라가 혼혈아인 것을 눈치 채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만 사라에게 심한 폭행과 심하게 저주하는 듯한 말을 사라에게 함으로서 금이 가고 말았다. 실화소설을 영화한 것이지만 오로지 백인만을 고집하며 백인이 되고 싶어 했던 몸에 흐르는 흑인의 피를 증오했던 사라는 어쩌면 희망을 잃고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념의 문제 종족 간에 문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해결 할 수 없는 미증유의 문제인거 같다.
한편 로라의 딸은 성장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식에는 엄마 로라와 사라의 흑인엄마 애니도 참석하여 축하하는 기쁜 행사였지만 사라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 지경에 이르렀는데 참석할 수가 없었다. 사라는 방황했다. 원하는 대로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사라는 시내 중심가 바(술집)에 나가는 댄서로 변했다. 요염한 자태로 성인클럽에서 허벅지를 보이며 뭇 남성들에 노리개가 되어 있었다. 미모였지만 혼혈을 감추며 미모의 백인행세를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딸 사라가 오로지 좋은 학교를 마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를 원했던 애니의 마음은 그저 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딸 사라는 삶의 모든 것을 숨겼으며 속이는 삶의 연속이다. 엄마에겐 도서관에서 일한다고 거짓말 까지 하면서 말이다. 노래와 춤에 빠진 사라는 영영 구제불능이 되어가고 있었다.
애니 와 사라. 모녀의 삶이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면서 애니 는 그만 자신도 모르는 병이 들어가고 있었다. 비록 로라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딸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체 겉으로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얼굴이 창백해지며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그렇다고 가만히 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애니 는 뉴욕시내 곳곳에 바(술집)를 뒤지면서 딸이 노래하며 춤추는 곳을 찾아냈다. 그러나 사라는 내 어머니가 아니라면서 자취하며 살았던 가방에 짐을 싸들고 도망쳐 나온다. 바 에서 나온 사라와 애니는 서로를 부둥켜 않았지만 다시는 딸을 찾지 말라고 사라는 증오의 말을 하고 만다. 그러나 엄마 애니는 네가 어디서 어느 때곤 너를 기다릴 테니 주저 없이 돌아와 달라고 마지막 호소를 하며 딸과 헤어진다.
다른 한편에서 백인 엄마 로라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하여 스타 배우가 된다. 로라는 뉴욕해변에서 잠시 로라를 잃고 울고 있었던 딸을 찾게 한 사진작가 스티브를 만나 가정을 이루려고 한다. 하지만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성인이 된 로라의 딸 수지가 엄마의 애인인 스티브를 사랑하는 삼각관계가 되고 말았다. 스티브가 속이고 로라와 딸을 사랑한다는 이중성을 마침 그것도 로라의 집에서 그 관계를 딸이 알고 만 것이다. 소설의 이야기지만 다른 스토리의 전개다. 모든 것을 포기한 딸 수지는 공부하기 위해 엄마도 모르는 다른 지역 멀리 있는 대학으로 공부하러 떠나고 만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애니는 자신의 죽음이 슬픔이 아닌 제일 큰 좋은 행사로 치러 달라고 목사에게 부탁을 한다. 자신이 죽으면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곷마차와 고적대를 불러달라고 애원한다. 장례식에 부르는 음악도 슬픔 음악이 아닌 기쁜 음악으로 불러달라고 한다. 결국 애니는 딸 사라를 만나지도 못한 체 죽음에 이르렀고 교회에서 목사의 인도 하에 장례예배를 거행된다. 관에 담긴 애니 는 영구꽃마차에 올려진다. 애니가 원했던 대로 네 마리의 백마가 나타나 교회 앞에 멈추자마자 그렇게 엄마를 증오하고 저주했던 딸 사라가 달려와 영구 꽃마차를 세우고 만다. 넘어질 듯 울부짖으며 달려온 사라는 관을 붙잡고 그만 “엄마 미안해요, 사랑해요, 용서해요, 내가 엄마를 죽였어요, 엄마! 엄마! 나는 엄마한테 오고 싶었어요. 라고 하며 울부짖으며 쓰러진다. 영화를 보는 관객과 이 글을 쓰는 내 눈가에도 이슬이 맺힌다. 내 오른 손 왼손이 자꾸 내 눈을 훔치게 된다.
특히 장례식 장면이 특히 내 마음을 찡하게 한다. 장례예배 마지막 장면에 마할리아 잭슨 · Mahalia Jackson 가스펠 가수가 직접 부른 “험한 세상 · Trouble of World”는 음악은 영화관객들 눈물 흘리기에 정말 애처로운 음악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다. 하기야 거의 백년이 다가오는 지금이니 나의 전 세대들이 많이 들었고 음미했던 이 영화 “슬픔은 그대 가슴에 · Imitation of Life 1959” 영화는 어느 때 또 보고 싶다. 대개 서구의 영화는 주로 장례식 장면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 영화처럼 두건 쓰고 상여 메고 회 밟는 모습까지 길게 하는 장면은 없다. 흑인 혼혈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감추며 백인의 모습으로만 보여지고 싶어 하는 모습이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인권을 강조하는 미국도 이러할 진데 어느 나라는 더 할 것 같다. 불과 한 세기 전에 일이다. 자유와 박애 인권을 자랑하며 자신하는 미국도 지난 1964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취임해서야 흑인이 비로서 투표권을 얻을 수 있었다. 불과 오십 년 전이다. “나에겐 꿈이 있어요 · I Have a Dream” 이라는 유명한 킹 목사의 죽음이 계기가 된 것 같다. 국가 간 민족 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가 벽을 가르는가 보다.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피부색들이 모두 다른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시간에도 진하게 분칠한 얼굴과 금발머리를 흉내 내는 것은 또 무엇인가?
첫댓글 안녕하세요.!
내일은 은혜 받는 귀한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