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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곳 가운데 평지의 궁성지와 월성리토성 2곳을 제외하면, 약 15곳이 산성에 해당합니다. 대가야박물관과 고령군 자료는 이 성곽들이 대부분 대가야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파악합니다. 고령 대가야 산성 조사 내용
대가야는 고령의 왕도(王都·임금 왕, 도읍 도: 왕이 거주하는 수도)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방어망을 만들었습니다.
가야산성-노고산성-예리산성-운라산성-옥산성으로 이어지는 북방 산성망이 대표적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산성」
따라서 현재 자료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경상북도에서 삼국시대 산성이 가장 많이 확인된 시·군은 고령군이다. 고령에서는 17곳의 성곽이 확인되었으며, 궁성지와 토성을 제외한 약 15곳이 대가야계 산성으로 파악된다.
2위는 경주시가 유력합니다
경주는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쇠 금, 재 성: 신라의 왕경)을 방어하기 위해 왕경 주변에 여러 산성을 배치했습니다. 연구자료에는 경주지역 산성 11곳이 제시됩니다. 지역문화포털 「우리나라 관방유적의 분포현황」
대표적인 산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만 관문성과 같은 장성형 성곽을 ‘산성’에 포함할 것인지에 따라 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명활산성은 405년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544년과 593년에 고쳐 쌓았다는 문헌 기록이 있습니다. 경주시 「명활산성」
3위 상주시는 수가 많지만 시대 판정이 문제입니다
상주시는 2018년 조사에서 관내 산성 유적을 19곳으로 파악했습니다. 대표적인 산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19곳 가운데 삼국시대 산성으로 확정된 곳, 삼국시대 추정 산성, 고려·후삼국·조선시대에 사용된 산성이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상주를 “경북에서 삼국시대 산성이 가장 많은 곳”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로서는 전체 산성 수는 고령보다 많지만, 삼국시대 산성의 확정 수는 고령보다 적거나 불분명하다고 해야 합니다. 상주지역 산성 정밀지표조사
문경시는 4위권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문경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또는 삼국시대 추정 산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 동일 산성, 시대가 확정되지 않은 산성터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하늘재산성은 신라계 토기와 차단성 구조를 근거로 신라의 북진 거점 또는 고구려·신라 접경 방어시설로 평가됩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하늘재산성」
문경은 산성의 수보다도 다음과 같은 ‘군사적 연속성’이 중요합니다.
영강-진남교반-고모산성-문경분지-하늘재·조령으로 이어지는 관문 방어체계
의성군은 5∼6위권이 타당합니다
의성에는 다음과 같은 산성이 알려져 있습니다.
화장산성은 『문화유적분포지도-의성군』을 근거로 삼국시대 축성으로 추정됩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의성 화장산성」
그러나 의성 산성 상당수는 정밀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축성 시기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재 자료만으로 의성을 문경·상주보다 위에 놓기는 어렵습니다.
최종 정리
현재 조사 수준에서 가장 안전한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위 고령군 → 2위 경주시 → 3위 상주시 → 4위 문경시 → 5위 성주군 → 6위 의성군
다만 이 가운데 확실성이 높은 것은 1위 고령군과 2위 경주시입니다. 상주·문경·성주·의성의 순서는 미조사 산성과 ‘삼국시대 추정’ 산성의 판정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핵심적으로 말하면, 고령은 대가야 왕도 방어 산성망, 경주는 신라 왕경 방어 산성망, 상주·문경은 낙동강과 백두대간 교통로 방어 산성망이 집중된 지역입니다.
안동은 왜 삼국시대 산성이 적은가요?
친구야, 안동에 삼국시대 산성이 비교적 적게 확인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안동이 신라의 최전선이 아니라 비교적 일찍 신라 영역에 들어간 내륙 후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산성이 거의 없었다”기보다는 조사와 보존의 차이도 큽니다.
1. 삼국의 격전지에서 비켜나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산성이 가장 많이 쌓인 곳은 대체로 국경과 주요 진격로였습니다.
반면 안동은 낙동강 상류의 내륙에 있어 5∼6세기 삼국의 주된 전쟁선에서 한 단계 뒤에 있었습니다.
특히 신라가 북진한 방향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경주·영천 → 의성·상주 → 문경·단양·충주 → 한강 유역
안동은 이 진격로의 중심축에서 동쪽으로 조금 벗어나 있었습니다. 따라서 문경처럼 고개마다 산성을 쌓거나, 상주처럼 강과 분지를 둘러싼 조밀한 전방 방어망을 설치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2. 안동은 ‘전선’보다 ‘후방 행정 거점’ 성격이 강했습니다
안동의 산성은 수가 많지 않더라도 주요 교통 결절점에 설치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선성산성입니다.
발굴조사 결과 선성산성에서는 다음 시설이 확인되었습니다.
선성산성은 둘레 약 500m의 비교적 작은 산성입니다. 연구에서는 이 성이 문경 고모산성이나 보은 삼년산성 같은 최전선 요새가 아니라, 후방 방어선과 중요 교통로를 연결한 군사·행정 거점이었다고 봅니다. 이후에는 신라의 지방 치소성(治所城·다스릴 치, 곳 소, 재 성: 지방 관청이 있던 성)으로 사용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안동 선성산성 소고」
즉 안동에서는 여러 개의 작은 산성을 촘촘하게 배치하기보다 주요 지점에 군사·행정 기능을 갖춘 거점성을 운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3. 안동분지는 자연적으로 방어하기 쉬웠습니다
안동은 다음과 같은 자연 지형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천과 산악이 자연 방어선 역할을 했기 때문에 문경의 좁은 고개나 상주의 서쪽 접경지처럼 산성을 연속적으로 쌓을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또한 안동으로 들어오는 길은 넓은 평야를 곧바로 통과하는 길보다 하천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산봉우리에 성을 쌓기보다 다음과 같은 지점을 선택적으로 지키는 방식이 효과적이었습니다.
4. 안동은 일찍 신라의 안정적인 영역에 편입되었습니다
안동 일대에는 고대의 창녕국·고타야군 등과 관련된 지명과 정치세력의 흔적이 전해집니다. 정확한 편입 과정은 자료가 부족하지만, 대체로 삼국시대 중반 이후에는 신라의 안정된 지방 영역이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상주·문경·고령은 오랫동안 다음과 같은 군사적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지역주요 대립
| 고령·성주 | 대가야 ↔ 신라 |
| 상주 서부 | 백제 ↔ 신라 |
| 문경 북부 | 고구려 ↔ 신라 |
| 경주 | 왜·백제·고구려의 왕경 침입 방어 |
| 안동 | 신라 영역 안의 후방 통치와 교통 관리 |
국경이 안정되면 산성을 새로 쌓는 수요보다 기존 거점성을 행정 중심으로 사용하는 비중이 커집니다.
5. 안동은 북진 간선로의 ‘주축’보다 ‘갈래길’에 가까웠습니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때 가장 중요한 길은 상주·문경·단양·충주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문경 고모산성은 낙동강 상류와 중원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지킨 5세기 후반 신라 산성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금강·낙동강 상류 관방유적 조사·연구 현황과 과제」
안동에서 영주·죽령을 넘어가는 길도 중요했지만, 신라 북진의 핵심적인 군사 통로로는 문경·단양 방면이 더욱 직접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문경 방면에 산성 방어시설이 더 집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6. 목책·토성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모든 성이 오늘날 눈에 보이는 석성(石城·돌 석, 재 성: 돌로 쌓은 성)은 아니었습니다.
초기의 성곽은 다음과 같이 조성되기도 했습니다.
목책과 토성은 돌로 쌓은 산성보다 흔적이 쉽게 사라집니다. 농경지 개간, 묘지 조성, 임도 개설, 산림 훼손 때문에 지표에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선성산성도 최초에는 토성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는 안동에 석축산성이 적게 보인다고 해서 고대의 방어시설까지 실제로 적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7. 조사량과 연구 관심의 차이도 큽니다
고령·문경·경주는 비교적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반면 안동에서는 산성보다 다음 유적에 연구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2018년 안동 산성공원 발굴에서도 삼국시대로 판단되는 높이 약 3m의 성벽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안동의 성곽 가운데 후대의 성으로 알려졌던 곳에도 삼국시대 성벽이 남아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안동 산성공원 발굴조사 보도
따라서 앞으로 발굴이 늘어나면 안동의 삼국시대 산성 수는 증가할 수 있습니다.
안동 산성이 적게 보이는 이유의 중요도
순서원인중요도
| 1 | 삼국의 최전선이 아닌 신라의 내륙 후방이었다 | 가장 중요 |
| 2 | 신라 북진의 핵심 축이 상주·문경 방면이었다 | 매우 중요 |
| 3 | 여러 산성보다 주요 군사·행정 거점성을 운영했다 | 중요 |
| 4 | 강과 산지가 자연 방어선 역할을 했다 | 중요 |
| 5 | 목책·토성 흔적이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 보완 원인 |
| 6 | 산성에 대한 정밀조사와 발굴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 보완 원인 |
결론
안동에 삼국시대 산성이 적은 것은 군사적 중요성이 낮았기 때문이 아니라, 안동이 신라의 국경 최전선보다 후방의 행정·교통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문경은 ‘고갯길을 막는 전선’, 상주는 ‘서쪽 국경과 분지를 지키는 전선’, 고령은 ‘대가야 왕도를 지키는 산성망’이 필요했습니다. 반면 안동은 주요 하천과 교통로의 결절점에 선성산성 같은 거점성을 두고 넓은 지역을 관리하는 방식이 적합했습니다.
또한 조사 부족과 토성·목책의 소멸 때문에 적게 보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안동에는 삼국시대 산성이 적었다”고 단정하기보다 “현재까지 삼국시대 산성으로 확인된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예천과 영주는 신라 북진의 핵심 축으로 , 문경과 상주에 비해서 보기 어려운가요?
친구야, 예천–영주–죽령 축은 문경–상주 축보다 덜 중요한 길이 아닙니다. 특히 진흥왕 때 고구려 영역인 단양과 한강 상류로 진출한 북진로로는 오히려 영주–죽령 축의 문헌 근거가 더 분명합니다.
앞서 제가 “신라 북진의 핵심 축은 상주–문경 방면이었다”고 설명한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표현입니다. 다음과 같이 바로잡아야 합니다.
두 개의 핵심 북진·서진 축
구분예천–영주–죽령 축상주–문경–하늘재 축
| 주요 방향 | 경북 북부 → 영주 → 죽령 → 단양 | 상주·문경 → 하늘재·조령 → 충주 |
| 주된 상대 | 고구려 | 백제·고구려 |
| 핵심 목적 | 단양·제천·한강 상류로 북진 | 충주·남한강 및 금강 동부로 진출 |
| 대표 근거 | 『삼국사기』 551년 죽령 북쪽 10군 점령, 단양 적성비 | 고모산성·하늘재산성·마골점산성, 상주·문경 산성군 |
| 성격 | 대규모 북진군의 진출축 | 교통로 확보·측면 방어·서북방 진출축 |
| 판단 | 진흥왕 북진의 주력 축 | 또 하나의 전략적 핵심 축 |
1. 영주–죽령은 문헌에 명시된 북진로입니다
『삼국사기』 진흥왕 12년(551) 기록에 따르면 거칠부 등이 지휘한 신라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다음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도 이를 신라군이 죽령을 넘어 한강 상류 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역사넷 「한강유역의 상실」
따라서 적어도 551년 진흥왕의 북진에서는 다음 경로가 가장 명확합니다.
신라 내지 → 경북 북부 → 영주·풍기 → 죽령 → 단양·적성 → 한강 상류
단양 적성비도 신라가 고구려 영역이던 적성을 점령하고 현지 협력자를 포상한 사실을 전합니다. 비는 대체로 545∼550년 또는 550년 전후에 세워진 것으로 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양 신라 적성비」
즉 영주–죽령–단양 축은 금석문(金石文·쇠 금, 돌 석, 글월 문: 쇠나 돌에 새긴 글)과 문헌이 함께 뒷받침하는 신라 북진의 핵심축입니다.
2. 그렇다면 예천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예천은 영주–죽령으로 올라가는 남서쪽 배후 연결지였습니다. 낙동강과 내성천을 이용하면 상주·문경·의성·안동 방면에서 예천을 거쳐 영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가능한 육상 연결망은 다음과 같이 복수로 존재했습니다.
서남쪽 연결로
상주·함창 → 예천 용궁 → 예천읍 → 영주·풍기 → 죽령
남동쪽 연결로
경주·영천 → 의성 → 안동 → 영주·풍기 → 죽령
중간 연결로
의성·비안 → 예천 → 영주 → 죽령
다만 이 세부 노선 전체가 『삼국사기』에 하나의 행군로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지형·하천·고대 유적 분포를 바탕으로 복원한 경로이므로, 세부 구간은 ‘추정’이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예천에는 다음과 같은 고대 성곽이 알려져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서는 예천의 매곡성·어림성·원산성을 백제 또는 고구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곽으로 설명합니다. 우리역사넷 「교통로 개척과 성곽시설」
따라서 예천은 북진군의 최전선이라기보다 다음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3. 영주에는 산성이 적어 보여도 북진로의 중요성은 매우 큽니다
산성 숫자와 교통로의 중요성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습니다.
영주의 핵심 군사적 가치는 다음 세 지형에서 나왔습니다.
풍기분지는 죽령을 넘기 직전 병력과 물자를 모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죽령은 좁고 험한 고개이므로 모든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기보다 고개 입구와 배후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또한 영주 순흥지역의 고분군은 5∼6세기 신라 지방 지배세력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이는 영주가 단순한 통과 지점이 아니라 신라의 북방 경영을 지원한 지역 중심지였다는 사실과 연결해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문경–하늘재 축도 분명 중요한 북진축입니다
문경–하늘재 축의 중요성도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길은 문경에서 충주로 직접 연결됩니다.
상주·문경 → 영강 → 고모산성 → 문경분지 → 하늘재 → 충주
다만 551년 거칠부의 북진군이 실제로 문경–하늘재를 넘었다는 직접 기록은 없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죽령 이북’이라고 나오므로, 해당 원정의 주력 경로는 영주–죽령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문경–하늘재 축은 다음 기능이 강했습니다.
5. 상주는 ‘북진축’이면서 서부 전선이었습니다
상주의 기능은 영주와 조금 다릅니다.
상주는 북쪽 문경으로 올라가는 병력과 물자의 집결지였지만, 동시에 서쪽의 백제 방면을 경계해야 했습니다.
상주 → 문경 → 하늘재 → 충주
상주 → 화령·보은 → 금강 유역
상주 → 김천 → 추풍령·옥천 방면
따라서 상주는 순수한 ‘고구려 상대 북진기지’라기보다 다음 기능이 겹친 복합 군사 중심지였습니다.
6. 시기별로 중요도가 달랐습니다
시기더 중요한 축역사적 상황
| 5세기 후반 | 상주–문경–충주 축과 영주–죽령 축 모두 | 신라의 소백산맥 방어·진출 준비 |
| 545∼551년 전후 | 영주–죽령–단양 축 | 적성 점령, 고구려 공격, 한강 상류 진출 |
| 553년 이후 | 죽령·단양과 충주 양쪽 축 | 한강 유역 경영과 고구려 방어 |
| 554년 이후 | 상주·보은·옥천 방면 | 관산성전투 이후 백제와 격렬한 대립 |
| 590년 무렵 | 죽령·단양 방면 | 온달의 아단성 전투와 고구려의 영토 회복 시도 |
| 7세기 | 상주·김천·추풍령 방면 | 백제와의 전쟁 비중 확대 |
결론
“예천과 영주는 문경과 상주보다 신라 북진의 핵심축으로 보기 어렵다”는 말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영주–죽령–단양 축은 진흥왕의 고구려 상대 북진에서 문헌으로 확인되는 주력 축이었다. 문경–하늘재–충주 축은 충주와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핵심 전략축이었다. 예천과 상주는 각각 이 두 북진축을 연결하고 병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배후 거점이었다.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북진로는 하나가 아니라, 죽령로와 계립령로가 서로 보완하는 복수의 길이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장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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