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 이문구 저. 독후감
이문구가 1972년(32세) 13년만에 다시 찾아온 관촌부락은 떠나기 전의 모습이 거의 사라진 농촌이다. 그가 그리워하는 사라진 모습은 반상의식의 잔재가 남아있었던 1940년대의 농촌이다. 그 곳에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부류의 추억들이 있다. 하나는 이문구의 양반 가문을 상징하는 부분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친구들과의 추억들이다.
첫 번째, 이문구의 양반 가문을 상징하는 한가운데에는 고색창연한 이조인 할아버지께서 계신다. 이문구는 할아버지 생전에 동몽선습과 천자문을 통해서 받은 가르침을 진실로 받들고 따르고 싶어한다. 할아버지의 존재와 추억에 관한 기억들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상주목사의 아들이요 강릉부사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과거를 스스로 포기하셨다. 이미 선조들께서 벼슬을 반납하고 낙향해 버리셨고, 당신도 공부에 대한 의기가 꺾이고 가세도 기울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가문에서 마지막 양반어른이셨다. 그러기에 손주인 이문구에게 양반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들을 하나하나 가르치셨다. “세상이 아무리 앞뒤가 웂어졌더래도 가릴 게라면 가려야 쓰는 게여. 생치(꿩)는 양반 반찬이구 비닭이(비둘기)는 상것들이나 입에 대는 벱이니라.”(23쪽) 양반이 먹는 음식에는 겨자와 생이 꼭 들어가야 한다. 양반은 상놈의 집 울안에 들어서서는 안 된다. 양반은 책에서 배운 대로 살아야 한다. 그 할아버지는 1950년 12월에 90세를 일기로 “부디 족보만은 잘 간수해야 허느니라..”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돌아가시고 만다. .
할아버지와 함께 이문구네 양반가문의 상징물로는 왕소나무가 있다. 이 왕소나무는 400여년전 한산 이씨 선조이신 토정 이지함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꽂아 놓았는데 큰 소나무로 자라난 소나무이다. 장정 두 팔로 꼭 네 아름이나 될 만큼 큰 소나무는 마을의 주인노릇을 했다. 토정 할아버지가 '그 왕소나무 앞으로 철마가 지나가거들랑 한산 이씨 자손들은 이 관촌부락을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대목이, 철로(장항선)가 깔리고나서도 계속해서 살고 있는 이문구 집안의 장래에 큰 불행이 닥칠 것을 예감하게 해준다. 결국 한국전쟁 때 아버지와 큰 형이 좌익활동이 빌미가 되어 사망을 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는 큰 불행을 만나게 된다. 한 해에 집안의 기둥이신 세 분이 한꺼번에 돌아가신 것이다. 이 왕소나무도 이문구가 19세(1959년)에 관촌부락을 떠난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또 하나의 양반가문 상징물로는 당시 온 마을의 종가였던 기와집이 있다. 갈머리(대촌읍 대촌리 37번지)에 있던 대지 350평에 건평 70여평의 ㄷ자집은 이문구가 태어나서부터 18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어머니께서 육개월 동안 천식으로 고생하시다 1955년(15세)에 돌아가시고나서 집안의 감나무도 죽었다. 이문구는 같은 해에 이 집을 선로원 김씨에게 팔아 넘긴다. 그 후 이 집은 그 옛날 풍채를 잃고 추레하게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할아버지 산소가 양반가문의 마지막 상징물이다. 갈머리 집 옆 범바위 밑에 있었다.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이 산소를 갈머리에서 고만으로 면봉을 한다. 그로부터 관촌부락에 남아있던 이문구의 양반가문과 관련이 있는 모든 유무형의 상징물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400여년을 굳건하게 이어내려오던 가문의 역사가 끝이 났다.
둘째, 보이지 않는 무형의 추억들은, 할아버지가 그토록 말렸던 상놈 출신의 친구들과 살갑게 만나면서 만들어간 정겨운 추억거리들이다. 가장 많이 만나고 정이 들었던 친구는 열 살이나 많았던 옹점이다. 이문구가 태어나기 삼 년전에 부엌데기로 들어온 옹점이는 마음씨가 비단결처럼 곱고 솜씨가 좋으면 눈썰미가 뛰어나고 인정과 동점심이 많은 사람이다. 학교를 다닌 적도 없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웬만한 글은 국한문을 가리지 않고 읽어낼 만큼 영악하다. 1949년(9세)에 다래실 김씨와 혼인을 하느라 몰래 떠나간 옹점이를 생각하며 이문구는 논두렁에 쭈그리고 앉아 고랑물에 마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노래도 잘하던 옹점이는 남편이 징집이 된 후 유골로 돌아오자 시집에서 쫒겨나는 불운을 겪는다. 그리고 이문구는 나중에 대천장에서 약장수를 따라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옹점이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옹점이는 이문구에게 친구이자 누나 같은 푸근함을 안겨주었으며 상놈 출신 중에서 가장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 다음에 대복이가 있다. 일곱 살부터 이 년 동안 어린 이문구를 듬직하게 잘 보살펴 주었던 대복이는 이후 절도죄로 영창에 들어간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좌익활동을 하다가 순심이와의 사건으로 다시 영창에 들어가고 전쟁 후에는 군대를 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할아버지와 부모 그리고 형들을 잃고 기대 곳 없었던 이문구에게 가장 생각이 나는 사람은 바로 대복이였다. 대복이는 이문구에게 친구이자 든든한 형이었다.
또 다른 친구는 석공 신현석. 이문구의 아버지가 신현석의 혼인 날 처음으로 집으로 찾아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축하해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신현석은 이문구의 아버지를 찾아와 평생 부끄럽지 않게 살겠노라고 다짐을 한다. 이후 이문구의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성심성의로 도와주고 관촌마을에 필요한 일을 맡아 하면서 올곧게 살아간다. 백혈병에 걸려서 삼십칠 세에 생을 마쳤으나 이문구는 일생을 살면서 추모를 해도 다하지 못할 만큼 은혜를 입었노라고 고백을 한다. 신현석은 이문구에게 인생의 선배이자 롤모델같은 사람이었다.
마지막 친구는 복산이다. 복산이는 이문구보다 세 살이나 위인데, 대복이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그는 구부러진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다. 그는 이문구에게 고향에 가려면 반듯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관산과 같은 존재이다.
위의 두 가지 양반과 상놈으로 대표 되는 부분들은 처음에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양반을 대표하는 할아버지와 상놈을 대표하는 신현석의 아버지, 신서방과의 대립이 그것이다. 할아버지는 집안 가족들을 상놈집 울안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여 이문구의 아버지는 결혼 후 삼십 년 동안 출입하지 않았다. 신서방은 솔만 먹으면 기와집에 사는 양반들을 향해 가이새끼라고 욕을 해댔다. 이문구의 아버지가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신서방집 울안으로 들어가 신현석의 혼인을 축하해 주자 신현석과 사이에 믿음과 신뢰가 생긴다. 이런 과정을 보고 자란 이문구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렸음에도 스스럼이 없이 상놈 출신의 친구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따뜻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관촌수필’에 대해서 평론가들은 사회학적, 역사학적으로 분석하기에 바쁘다. 어느 평론가는, 봉건적 시대를 그리워하는 듯하여 반근대적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한 작가의 질펀한 충청도 사투리가 버무러진 자전적 소설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니 관촌부락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질만큼 아주 서정적인 표현도 많이 눈에 띈다. 갈머리에 집이 있고 집 옆 범바위에는 할아버지 산소가 있으며, 논 끝머리에는 신작로가 있고 왕소나무가 있다. 그 건너에는 철로가 지나가고 그 다음은 갯벌이 이어진다.
10세가 넘기 전인 19040년대에 할아버지가 계시고 넉넉한 생활에다가, 동네 사람들에게서 떠받들어지며 살던 여유로운 농촌생활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생활 속에서는 사람의 냄새가 풍겨나온다. 어렵고 팍팍했던 생활만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도 1960년대의 어린시절을 동경하지만 가족들과 덜 바쁘게 정겹게 살았던 부분에 대해서이지, 찢어지게 가난했던 생활에 대해서는 일말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다.
‘관촌수필’을 읽고나서 짧막하나마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산소로 성묘가는 시절 이야기를 써보았다. 그 전에는 무조건 불편하고 어렵고 불쌍하게만 느껴졌던 추억이었으나 막상 글로 써 놓고 보니, 그 안에는 잊고 지냈던 정겨운 모습들이 들어있었다. 아직은 용기가 없어서 더 자세한 글을 담아낼 수 없다. 하지만 박완서 선생이 ‘나목’에서 데생을 하고 후속 작품들에서 세밀화를 그리셨듯이 한 번 더 시도해 보고 싶다. 이문구 선생도 이 글들을 쓰시면서 끔찍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큰형님 주변에서 할아버지, 기와집, 왕소나무, 산소자리와 친구들을 발견하고 훈훈한 정감을 느끼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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