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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의 물결이 기독교회를 뒤덮고 있는 이때, 일요일은 기독교인들에게 주의 날로, 성일로 지켜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기독교회의 주일은 유대인들의 안식일과는 분명히 차별화되어 있지만 안식일 전통에서 출발했고, 예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 막 2:28; 눅 6:5)고 하신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이요, 큰 날이라는 인식을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새롭게 다져볼 필요가 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며, 동시에 신자들이 영혼의 안식을 누리는 날이다. 그러므로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세속화된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가 되리라.
글리슨 아처 박사의 『성경 난제 백과사전』에 안식일이 주일로 대치되었다는 성경의 상세한 증거들을 싣고 있어서 함께 확인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출애굽기 20:8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그 주간의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완성을 기념하는 날이다(11절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나 여호와가……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계명은 다른 아홉 가지의 계명과 더불어 십계명을 형성하고 있으며, 심지어 신약성경 속에도 십계명이 기독교 신자의 양심에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거나 혹은 십계명이 아홉 개로 감소되었다는 암시는 없다. 그와 반대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없는 한 우리는 제 4계명이 여전히 우리에게 구속력을 갖는다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제 7일 안식일의 제도가 신약성경에 의하여 그 주간의 첫째 날-기독교 교회는 일반적으로(안식교를 제외하면) 이 날을 주일(Lord's Day)로 존중하고 있으며, 혹은 이 날이 기독교 안식일(Christian Sabbath)로 알려져 있다―로 옮겨졌는지의 여부이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다는 신약성경의 증거
오순절 이후부터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사도들의 선언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이 육체적 부활은 인류의 구세주가 죄인을 위해 합당하고도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였으며, 그가 인간을 위하여 죽음의 저주를 극복했다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승인이었다. 그리스도의 유효한 대속의 희생과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는 새로운 시대, 즉 신약 교회의 시대를 여는 사건이었다. 주의 만찬이 구약의 유월절 예식을 대신하였듯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제단에서의 동물 희생을 대신하였듯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아론의 제사장직을 대신하고 모든 거듭난 신자를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세웠듯이, 최소한도 부분적으로는 예식이었던 이 한 가지 계명에 있어서도, 새로운 세대에 적합한 상징의 변화가 있어야 했다. 이것을 다음의 사실들이 가르쳐 주고 있는 듯하다.
3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리아의 사도들의 교훈(The Teaching of the Apostles) 속에서 매우 재미있는 증언이 발견되는데, 그 요지는 그 주간의 첫날을 그리스도교 예배의 날로 처음 지정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이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렇게 지정하였다. 그 주간의 첫날에 예배와 성경 읽기와 헌납을 행하라. 왜냐하면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 주님이 죽음에서 부활했고, 주간의 첫날에 하늘로 승천하였으며, 또한 주간의 첫날에 마침내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Ante-Nicene Fathers 8. 668).(거의 모든 교부들의 말을 인용함에 있어서 본인은 헨리 워터맨<Henry Waterman>의 훌륭한 논문 "주의 날"(Tenney,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3:965-66>을 참고하였다.)
이런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콘스탄틴 대제(308-37) 때에 와서야 비로소 토요일 대신에 일요일이 그리스도교의 예배일로 결정됐다고 주장하는 어떤 안식교도들의 주장의 불합리함을 알 수 있다. 사도시대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을 예배와 휴식의 날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콘스탄틴이 한 일은 로마 전역에서 일요일을 매주일의 공식적인 휴일로 정하는 특별한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함
지금까지 우리는 일주일의 첫째 날을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 채택한 신약의 근거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주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켰는가-지켜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만약 우리의 앞에서의 전제가 정당하고, 주일이 안식일의 특별한 신성함을 영속화시키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라면, 일요일에 대한 우리의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안식일에 대하여 고대 히브리의 신자들이 가졌던 그 마음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주일은 어떻게 거룩히 지켜져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십계명을 참고해보면, 일주일간의 다른 6일 동안에는 지극히 합당하게 행할 수 있는 자기를 위한 유익한 일들을 중지하는 것이 주일의 특징임을 발견할 것이다(출 20:9-10). 또한 레위기 23:3에 의하면 그 날은 공공 예배의 날, “성회", 그리고 직무를 행하는 제사장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날이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여호와 앞에" 진설한 떡을 새 것으로 바꾸어야 하고(레 24:8), 민수기 28:9-10 에 따르면 이날에는 제사장들이 평상시에 드리던 희생제물(“상번제")을 두 배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안식일을 참되게 기념하는 것에 관하여 가장 큰 빛을 던져주는 구약의 구절은 이사야 58:13-14에서 발견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이 구절이 전달하고 있는 개념의 많은 부분들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60)에서 고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가? 하루 종일 거룩하게 쉼으로써, 즉 심지어 다른 날들에는 합법적인 세상적인 일들과 오락들까지도 쉬며, 꼭 필요한 일과 자비를 베푸는 데(마 12:11-12)드는 시간 이외의 모든 시간을 공적, 사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안식일은 거룩히 지켜진다." 이것이 청교도 운동-이것은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의 개신교 종교개혁의 가장 훌륭한 꽃을 보여 주었다―의 가장 이상적인 기준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기준이 지켜짐에 의해서 보다는 어겨짐에 의해서 더욱 존중되는 셈이지만, 주의 날을 존귀히 여겨야 한다는 원칙에 대하여 관용적인 현대의 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성경에게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요일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각 사람의 자의적인 뜻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주 골로새서 2:16이 구약의 제4계명의 거의 모든 법칙들을 무효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sabbatōn의 더욱 정확한 번역은 “안식일들"―단수가 아니라 복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여기서는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의 종교력(religious calendar)에는 일곱째 날의 안식일 이외에도 절기 안식일들이 들어 있는데, 이 절기 안식일은 그 절기의 첫날과 마지막 날이 그 주간의 어느 요일이 되든지에 관계없이 토요일 안식일과 똑같이 지켜져야 했다(특히 무교절과 장막절―이 두 절기는 모두 8일 동안 계속된다―에 있어서 그러하다).
골로새서 2:16의 일반적인 취지는 구약의 구별된 성일들이 신약의 신자들에게는 구속력이 없다는―왜냐하면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17절)이기 때문이다―것이다. 따라서 16절은 일차적으로 구약의식―그 하나는 안식일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 절기 안식일일 것이다-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제 4계명의 기독교적인 형태, 즉 주일 성수를 바울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완성된 "그림자들" 속에 포함시키고자 했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없다. 즉 주일 성수는 구약의 "그림자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될 수는 도저히 없다. 사실에 있어서, 주일 성수는 이미 폐물이 된 구약의 모형(즉 "그림자")이 아닌 "실체"(sōma,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몸'),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 의하여 열정적으로 지켜지던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법령이었다. 그러므로 주일을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보내도 된다는 허가를 이 구절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은 전혀 부당한 일이다. 교회 출석과 성경 공부가 주일 성수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세속화된 문화가 그 날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노력을(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나 자비를 베푸는 데에 수반되는 일들을 제외하고) 쉬어야 한다는 원칙이 주일을 거룩히 지킴의 핵심이다.
이 주제에 관한 또 다른 연구를 위해서는 D. A. Carson, From Sabbath to Lord's Day (Grand Rapids: Zondervan, 1982)를 참고하라.
글리슨 아처 저, 황영철 역, 『성경 난제 백과사전』 (서울: 생명의말씀사, 1990), pp. 158-164.
첫댓글 좋은 포스팅입니다. 특히 안식교나 안증회에 미혹된 분들이 잘 읽고 정신을 차리면 좋을 내용입니다. 일반 성도들도 주일 예배에 대한 개념을 잘 정리하게 하는 글입니다.
네, 공감합니다. 이단들이 주일 예배를 태양신 운운하며 공격을 많이 하지요.
마12:8
<호크마 주석>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눅 6:1-5 주제 강해 '안식일과 예수님과의 관계' 참조>. 막 2:27에는 안식일 제정(制定)의 근본 목적을 정의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와 누가는 이를 생략하고 있다. 마태는 1-7절의 말씀의 요점을 제사와 자비의 대조적 비교나 안식일의 기원은 사람의 안식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두지 않고 오히려 기독론(Chriistology)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랑케(Lange)에 의하면 주님은 그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시므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 준수(observance)가 되며 그를 떠나는 것은 바로 안식일의 파괴가 된다고 하였다. 특히 '주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에 대한 주체적 운용자(運用者)라는 측면에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는 안식일을 소유하고 주관하며 안식일 규례를 해석하며, 지금까지 가려워졌던 안식일이 지닌 참 자유함과 참 평안을 들추어내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을 향유(enjoyment)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칼빈(Calvin)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씀은 바로 안식일에 얽매여야 하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권세를 예수께서 받으셨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을 멍에에서 벗어나서, 멍에를 대신 져 주시는 주님에게로 와서 쉼을 얻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였다. 실로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종말론적 메시야이신 인자, 곧 예수는 그 인간들을 위해 안식일을 개방하고 계신다.
@장코뱅 호크마는 칼빈의 설명을 종종 인용하더군요. 좋은 내용 같습니다.
막2:28
<호크마 주석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먼저 '이러므로'란 안식일 논쟁의 비약적 결론구를 제시하기 위한 접속어라 할 수 있다. 실로 예수는 당신이 가르치시는 진리에 대해 단정적이고 선언적으로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 보이신다. 유대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려는 노력에 인간의 전 생활 영역을 안식일 규정으로 얽매어 놓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편협한 율법주의에 빠져들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심으로써 안식일 관행은 이제 당신의 뜻과 목적에 따라 새롭게 규명(糾明)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특히 이 같은 선언은 예수께서 안식일 규정을 마음대로 뜯어 고치시겠다는 자기 고집에서가 아니라 그 규정을 새롭고도 온전하게 주석하시고 설명하실 수 있는 당신의 자격과 신분을 선언하신 것이다(Donald W. Burdick). 한편 본문의 '인자' 선언은 마가가 관심을 가진 바 '인자 기독론'에 조화를 이룬다 즉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10절 주석 참조) 드러난 바 영광스런 하늘의 인자는 지금 바로 이곳에 나타나셔서 죄 사함의 권세를 행사하실 뿐 아니라 특히 안식일 논쟁의 결론을 내리시는 권위를
가지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Grant, Taylor).
@장코뱅 인자 기독론? 또 하나 듣고 배웁니다.
눅6:5
<호크마 주석>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로서 그리고 인자로서 안식을 어떤 정신과 방법으로 준수하셨는가를 분명히 밝혀준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입법자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창 1:26) 제 7일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며(창 2:1-3),첫 사람 아담의 타락 후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을 다시금 회복시키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실 자이기 때문이다(히 4:1-11).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같은 안식일 제도를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로 주신데(출 20:8-11;신 5:12-15)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다. (1)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다.(2)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중에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성별시켜 주신데 대한 표징으로 삼기 위해서이다(출 31:13). (3)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신5:15). (4)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출 20:10). 이상에서 우리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아울러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같은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제 7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금기조항에만 연연한 나머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주신 선한 규례를 오히려 인간의 행동을 제어(制御)하는 악법으로 변형시키고 말았으니 그 어리석음과 잘못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수의 선언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 준수가 신자들의 신앙 성장에 장애가 되는 외적인 형식주의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주일 성수는 바리새적인 형식주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답게 자발적인 순종과 섬김의 자세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장코뱅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깨달으면 기독교 주일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요20:1
<호크마 주석>
안식 후 첫날 - 이는 일주일의 각 요일에 해당하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안식일올 중심으로 요일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안식 후 첫날'은, 하루의 해가지는 시간부터 다음날 해지는 시간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인의 방식에 따른다면 토요일일몰 후부터 일요일 일몰 때까지의 어느 시점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첫날'(* ,미아)은'하나'를 뜻하는 기수인데, 당시에 '첫째'(* ,프로토스)를 뜻하는 서수로 표현했던 일반 용법과는 다른 표현이다. 혹자는 이것이 셈어 (Sem 語)적 표현법의 영향이라고 보는데(Barrett),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히브리어나 셈어에 그런 표현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근거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어두을때 - 마태의 '미명'과 마가의 '해 돋을 때'라는 표현에 비해 다소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흑자는 복음서들의 표현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여, 집을 떠날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때였고 무덤에 도착한 때는 여명이 밝아올 때였다고본 다(Lenski). 아무튼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렇게 일찍 무덤을 방문한
것은 예수를 탄압한 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본절의 '이른 아침'그러니까 아직 어둡기는 하지만 이제 날이 밝아지기 시작하는 시각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시점이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주일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기념하는 안식일이 완성으로서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대치(代置)되는 시점인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한때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을 받다가 예수께 고침을 받은 이후 예수를 따르며 비사하였던 여제자격의 인물인데(막 16:9; 눅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르며 수종들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끝까지 남아 이를 지켜보았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19:25). 혹 독자들 중예는 이 여인을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혼동할 수도 있으나 양자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11장).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a)라는 이름은 가리키며 막달라라는 성읍은 디베랴(Tiberias) 북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본문에서는 무덤을 최초로
방문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인 것처럼 되어 있으나, 공관복음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 외에도 여러 명의 제자들이 함께 동행하였다(마 28:1; 눅 23:55;24:1). 이런 차이는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이 동행했다는 사실을 모른데서 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2절의 '우리'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물들이 무덤을 방문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아마 요한은 첫 방문자들 가운데 핵심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에만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을 것이다.
돌이...옮겨간 것을 보고 -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무덤을 방문한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막 16:1) 향유를 바르는 것은 곧 시신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유대인들은 시신이 썩기 전까지는 고인(故人)의혼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장사 지낸 후 사흘 동안 시신을 돌보았던 것이다. 한편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왔을 때 무덤입구를 막았던 돌문이 옮겨져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무덤을 막았던 돌문은 장정 다섯 명이 힘을 합해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으며 입구에 움푹 패인 홈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인 몇몇이 옮기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마가는 여인들이 돌문을 여는 것에 대해 염려하며 길을 떠나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막 16:3).
@장코뱅 안식 후 첫날과 용감한 믿음의 여인들이 연관되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주석의 설명이 참 좋네요.
@장코뱅 역시 주석의 내용이 좋습니다. 주석은 한 구절이나 한 사건에 대해서 좀 더 입체적으로 보여줘서 성경 지식의 결정판이네요.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글의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신약교회가 안식일이 아닌 주일에 예배를 드렸다는 차근차근 상세한 설명이 좋은 포스팅 같습니다.
네.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주어서 좋습니다. 조목조목 어떤 딴지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내용이 치밀하고 은혜롭습니다.
@코람데오 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