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그림의 법고 창신의 묘경(4)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중신으로-
-강관식-
이 첫 번째의 시고는 청관산옥에서 여름철에 운자(韻字)도 없이 그저 손길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이런저런 시구들을 써준 것이다. 청관산옥은 과천의 청계산(淸溪山)과 관악산(冠岳山) 사이에 있다고 하여 추사가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 따라서 이 시고는 추사가 과천에서 달준에게 써준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달준이는 추사가 과천에 은거할 때 같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추사가 청관산옥에서 그저 아무렇게나 손길 가는 대로 달준에게 시를 써주는 모습은 바로 추사가 달준이에게 <불이선란도>를 손길가는대로 부담없이 그려주던 모습과 거의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특히 주목된다. 그리고 추사가 아무렇게나 손길가는대로 읊고 그려준다는것을 ‘만념’(漫拈)과 ‘만필(漫筆)이라고 하여 두 번 모두 같은 만(漫)자로 쓰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추사의 문집에 들어 있는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은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다.
소 외양간 돼지우리 옆에 발을 개고 앉았는데 盤坐牛宮豚柵邊
쑥대머리 몹시 커서 묵은 책을 압도하네. 蓬頭特大壓陳篇
태고(太古)라 천황씨(天皇氏) 일만팔천 글자들을 天皇一萬八千字
삼 년인가 이 년인가 맹공이처럼 울어대네. 蛙叫三年或二年
이 두 번째의 시는 구체적인 장소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추사는 달준이가 쑥대머리를 하고 돼지우리와 소 외양간 옆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2,3년이나 맹꽁이처럼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외우고 있는 모습을 마치 눈 앞에 보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村家의 田舍 모습을 묘사한 이 시는, 추사가 흔히 ‘강상(江上)’이라고 표현했던 노량진의 일휴정(日休亭)보다도, 통상 ‘전사(田舍)’나 ‘전간(田間)’이라고 일컬으며 이 시와 유사한 풍격의 전원시(田園詩)나 촌가(村家) 즉사(卽事) 같은 시들을 많이 썼던 과천과 더 연관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달준이가 과천의 청관산옥에서 추사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한 첫 번째 시고의 내용을 고려하면 더욱 그와 같이 생각된다.
특히 이 두 번째 시는 달준이의 신분이나 추사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어 더욱 주목된다. 왜냐하면 달준이가 쑥대머리를 한 채 외양간과 돼지우리 옆에서 맹꽁이처럼 <시팔사략>을 외우고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그는 평민(平民) 출신의 학동(學童)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기실 똘똘하다는 뜻이 담겨있는 ‘달준(達俊)’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이름도 그가 평민 출신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그리고 추사가 아무런 부담도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손길 가는 대로 그림도 그려주고 시도 써주면서 자연스런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 사실이나, 달준이가 추사 곁에서 2,3년이나 공부하고 있었던 사실로 볼 때, 그는 집안일도 하고 추사를 시봉(侍奉)하면서 최소한 시화(詩畵)를 감상할 줄 아는 학동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앞의 시고에서 살펴본 것처럼 달준이는 과천의 청관산옥에서 추사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므로, 만약 달준이가 추사 곁에서 <십팔사략>을 2,3년간 외움U 공부하던 것도 과천에서 있었던 일로 본다면, 추사가 1852년 8월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 바로 과천에 은거했기 때문에, 달준이가 과천의 추사 곁에서 공부하고 시봉하던 시점은 대략 1953,4년경 정후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추사는 과천에 은거하던 1853년 봄에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난초 그림에 제발을 쓰면서 “여기저기 떠도느라 (난초를) 그리지 않은지가 이미 20여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달준이에게 그려준 <불이선란도>의 첫 번째 제시에서도 “난초 그림 안 그린지 20년 만에 우연히 본서의 참모습을 처냈네”라고 하여 거의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 <불이선란도>에서 말한 ‘20년’은 운자를 맞추며 쓴 것이기 때문에 대략 ‘20여 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이는 1853년에 석파에게 써 주었던 제발에서 말한 ‘20여 년’과 거의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으며, 추사가 말한 이 ‘20년’이나 ‘20여 년’이란 그저 대략적으로 어떤 느낌의 시간과 기억의 시점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추사가 과천에서 1853년에 석파에게 ‘20여 년’ 동안 난초를 그리지 않았다고 말하였고, 도한 ‘20년’간 난초를 그리지 않다가 우연히 달준이에게 <불이선란도>를 그려주었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과천의 천관산옥에 함께 있었던 달준이에게 장난삼아 시를 서준 시점도 대략 1853,4년경 전후일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연관시켜 생각하면, 이 <불이산란도>는 일차적으로 추사가 1853,4년경 전후에 과천에서 달준이에게 그려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불이선란도>에 들어 있는 추사의 자호와 도장 및 제발의 서체나 서풍(書風)은 대체로 북청 시절이나 과천 시절에 남긴 만년의 작품들에서 주로 보이거나 공통점이 많은 편이고, 특히 과천 시절과 더욱 구체적으로 연관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 <불이선란도>가 과천에서 그려진 것일 가능성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준다고 할 수 있다.(계속)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다음호 기대할께요. 평안한 5월 되세요.
4회이후를 이어 가야하는데... 노력하겠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달준과 추사.....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
물꽃나무님,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작품이기에 저런 명작이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ㅎㅎㅎ
우리네 선조들의 훈향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들을 안위하는 힘이 있음을 절감하며 이시대에 님발자취를 따라가 볼수 있게 안내하여준 님들의 덕또한 길이 양지 일겁니다 감사드립니다
과찬이십니다. 이어가야하는데 조금 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