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逸話)
강진에 가면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찾아간다. 양 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강진만의 풍광이 주변의 숲 사이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바다가 일구어낸 생활 터전에 뿌리내린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포근한 남도 고유의 애잔하고 정겨운 숨소리가 들리는 곳이다. 만을 벗어나면 끝없이 이어진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서로가 키를 맞대고 이리저리로 연결된 교량 사이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속살들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남도에서도 해남과 강진은 가장 토속적인 정서와 풍광 그리고 인정과 맛이 한데 어울려 진 곳이다. 그에 더하여 문객과 선비들이 남긴 고유한 문화유산이 넘치는 곳이다.
그 중심에는 「다산」과 「추사」, 「초의」와 「혜장」, 「소치」 등 한 시대를 빛낸 위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생의 정점에서 우연히 만나 교유하며 후대에게 엄청난 학문이나 인품, 시문이나 서화 등을 통해 실로 빛나는 유산을 남겨주었다.
이는 마치 서양의 르네상스시기를 능가하는 자랑스러운 위대한 업적이었다. 고유한 한국적 사상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예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여 향후에도 그런 시대의 도래(到來)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지방은 예로부터 수많은 예술가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 비교적 넓은 들과 그다지 높지 않은 산 그리고 남해와 서해 바다의 풍족한 어족자원이 어울려 여유롭고 따뜻한 심성과 독특한 풍미의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고장이다. 이에 더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예술의 고향으로 보통의 가정에서도 서화 한, 두 점 정도는 걸어두고 생활 속에서 함께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519년에 있었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탈관직, 유배, 사사되었던 많은 문인들의 후손이 대를 이어 문화예술을 전승하였다. 여러 문인들 가운데서도 「하천(霞川) 고운」(高雲: 1479~1530),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1545), 「귤정(橘亭) 윤구」(尹衢:1495~1549) 등은 그들의 가문이 오늘날 이 지역의 명문사족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고운」은 사화의 중심인물인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의 친분 때문에 낙향하였다가 52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호랑이 그림을 잘 그렸다. 그 후손들은 5대에 걸쳐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고운」의 손자였다. 「고경명」은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문장과 시·서·화에도 뛰어났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위해 상소하다가 삭직되어 고향에 내려왔는데 인근 화순으로 유배 온 「조광조」와 매일 만나 학문을 논하였다. 유배 온 지 한 달 만에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임종을 지켜보고 염습까지 하였다. 장례를 도운 일로 그의 큰 아들까지도 평생 과거에 응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대나무 그림에 능하여 묵죽도(墨竹圖)를 잘 그렸다. 「양 팽손」이 지켰던 의리는 아들과 재당질이었던 「양산보」(梁山甫:1503~1557)에 이어졌다. 「양산보」는 「양팽손」의 추천으로 조광조의 제자가 되었으나 스승이 죽자 벼슬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평생을 지냈다. 그는 ‛소쇄원’(瀟灑園)을 축조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했는데 특히, ‛소쇄원’은 원림문화의 선례이자 유유자적한 풍류문화가 정착되는 데 기여하였다.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던 「윤구」는 서화 감상에 취미가 있어 상당한 서화를 수장했으며, 그의 차남 「윤의중」(尹毅中:1524~1590)은 정 2품의 관직까지 오른 사림의 중심인물로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를 계기로 큰 화를 입었다. 「윤구」의 증손자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남인의 거두가 되었으나 서인에 밀려 오랜 유배생활을 했다. 말년에 보길도에 칩거하면서 ‛세연정’(洗然亭)을 짓고 살았다. 그는 17세기 최고의 시조작가이자 서화 감상과 수장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또한 이런 예술적 취향이 증손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로 이어져 대대로 가전되었다.
「윤두서」는 사실주의 회화의 압권인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림은 물론이고, 천문·지리·수학·병법·금석·음악·기예 등 다양한 학식으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된 후에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을 내왕하며 「윤두서」의 서화를 접했고, ‛녹우당’에 소장된 방대한 장서를 저술의 토대로 삼았다.
이처럼 기묘사림들에 의해 꽃을 피웠던 남도예술은 다시 19세기를 맞이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당시 중심에 있던 인물들이 바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초의」(草衣)선사와 「혜장(惠藏)」선사, 「소치(小癡) 허유」(許維) 등이었다.
특히 ‛녹우당’은 「초의」선사의 주선으로 「추사」의 제자였던 「소치」가 소장된 작품을 살펴 모사를 했으며, 「다산」 역시 많은 자료들을 활용하였다. 당시 최고의 지성이었던 「다산」이 축적한 실사구시의 학맥과 「추사」의 지도에 힘입은 「소치」에 의한 ‛남도화단’의 정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문화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여하튼 이들이 살면서 남긴 인간적인 교유에 대한 일부의 편린(片鱗)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李匡師:1705~1777)는 영조 때 전남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왔는데 「이광사」가 벽장을 열어 보여주었다. 그 속에는 좋은 벼루와 기이한 술잔 같은 값나가는 물건이 가득하였다. 신지도의 진장(鎭將)이 이런 물건을 가져다주고 자기글씨를 사간다고 하였다. 진장은 그의 글씨를 얻어다가 한양에서 비싼 값에 팔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귀양지인 섬에서 박을 심어 나중에 그 속에다가 자기가 쓴 글을 넣고 밀랍으로 주둥이를 봉해 바다로 띄워 보냈다. ‟누군가 열어보고 바다 동쪽에 「이광사」란 사람이 있음을 알아주면 족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진장에게 글씨를 팔아 배부르게 지냈다. 그것도 모자라 박에다 제 글을 담아 세상을 향해 띄워 보내며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했다. 그는 결국 섬에서 나오지 못하고 거기서 쓸쓸히 죽고 잊혀졌다.
반면에 「다산」은 강진 유배 18년 동안에 500여권의 저술을 지었다. 참고할 서적도 넉넉지 않고, 여건도 여의치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 이룩한 경이로운 성과였다. 스스로가 경계하고 공경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는 동안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고 했다. 「다산」은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운 귀양살이의 시간을 하늘이 준 축복으로 알고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 몰두했다. 우리나라 학술사에 경이로운 금자탑을 세웠는데, 그의 오랜 귀양살이는 그에게는 절망이었지만, 조선 학술계를 위해서는 큰 축복이었다.
「다산」의 『주역』(周易)에 대한 지식은 심오하였다. 백련사의 「아암(兒庵) 혜장」 (惠藏 :1772~1811)선사 역시 대단한 법기(法器)로 학문의 깊이가 대단하였다. 1805년 봄에 「다산」이 신분을 감춘 채 「혜장」을 찾아가 만났다. 깊은 밤 한 방에 묵게 된 「다산」이 「혜장」에게 『주역』에 대해 넌지시 묻자 「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논리를 조금도 거침없이 설파하였다. 문밖에서 그 모습을 보던 그의 제자들은 숙연해져서 숨도 못 쉬고 듣고만 있었다. 「다산」은 그날 밤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장공, 자는가?” ‟아닙니다.” ‟건괘(乾卦)에서 초구(初九)는 무얼 말한게요?” ‟구(九)라는 것은 양수(陽數)의 끝이지요. ‟음수의 끝은 무엇인가?” ‟십(十)에서 그칩니다.” ‟그렇구려, 그렇다면 어째서 곤초십(坤初十)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아암」은 한참 동안 깊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깃을 바로하며 내게 호소했다. ‟산승의 20년 『주역』 공부가 모두 헛된 물거품입니다. 감히 묻습니다. 곤초육(坤初六)은 무슨 말입니까?” ‟알 수 없지. 기수(奇數)로 돌아가는 법은 최후의 수가 4거나 2일세. 모두 기수라고 여기지만, 2와 4는 우수(偶數)아닌가?” 「아암」이 구슬피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와 초파리는 잘난 척할 수가 없는 것을! 더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후에 이 둘은 ‛백련사’와 ‛다산 초당’을 오가는 산책길을 따라 수 없이 거닐며 해박하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거친 성품을 누그러뜨려 아이처럼 유순하게 굴겠다고 다짐하며 호까지 아암(兒巖)으로 고쳤다. 그러나 「아암」은 잘못 불문에 들어 인생을 그르친 것을 후회하는 듯한 기색으로 실의한 듯, 술만 퍼마시다가 술병으로 배가 불러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만일 그가 「다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선문(禪門)의 존경받는 「선사」로 한 삶을 자족하게 마쳤을지도 모른다. 「다산」의 한 마디 가르침이 그의 인생을 온통 바꿔놓았다. 해남 ‛대흥사’의 부도 밭 정중앙에 ‛혜암선사 탑’이 있는데 이의 비문을 「다산」이 짓고 썼다.
무엇보다 「추사」와 평생 친구인 「초의」는 「소치」를 「추사」에게 천거하여 제자가 되게 한 인물이다. 그런데 「한승원」의 소설 『초의』에서 「초의」를 향한 한 비구니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마치 현실 속의 이야기로 다가 온다.
설 명절 동안에 「정 민」교수의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과 「이 선옥」박사의 『호남의 감성으로 그리다』라는 책을 읽고서 느낀 바를 두서없이 써보았다. 행여 고증이 필요한 부분은 「유 홍준」 교수의 『완당 평전』을 참고하였다. 하지만 짧은 지면에 주역의 곤초육(坤初六)을 기술하기 어려웠다.
많은 선대의 위인들은 바른 처세로 후대의 귀감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의 후대는 선대를 욕되게 하는 언행으로 가문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어떻게 선조의 긍지와 유산을 지키고 바른 심신을 연마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 곧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적거지(謫居地)와 매화향기를 찾아 유람 길에 나설 생각이다.
(2025.1.31.작성/2.26.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