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성의식을 한마디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보냐, 보수냐, 성차별적이냐 아니냐 등의 이분법만으로는 뭔가 불충분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아마도 물밑의 얼음덩어리처럼 내면에 잠재한 성심리가 복잡미묘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1994년 백년도서에서 펴낸 <욕망의 진화>(데이비드 부스/김용석·민현경 옮김)는 인간의 성의식을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이란 분석틀로 조명한 흥미로운 책이다.
찰스 다윈은 자연생존에 위협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공작 수컷이 생식적 이득을 위해 화려한 깃털을 진화시켜온 점에 주목했다.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에서 이 진화의 동력을 ‘성 선택’으로 규정하고 자연선택과 구분지었다.
저자 데이비드 부스가 1993년 출판한 이 책은 다윈이 말한 성적 선택이 오랜 세월을 거쳐 인간 내면에 어떤 성심리를 형성시켜왔으며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표출되는가를 실증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저자와 그의 동료들은 이를 위해 6대륙 37개 문화권에 속한 1만 여 명의 남녀를 대상으로 5년간 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가 얻은 결론은 인간의 성적 욕망은 다른 신체적 욕망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겨나고 진화해 왔으며, 오늘날 인간의 짝짓기 전략은 수천 세대에 걸친 조상들의 짝짓기가 물려준 ‘성적 유산’이라는 것이다.
전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짝짓기의 기원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이 각각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들, 여성의 바람기, 남성의 자기과시, 혼외정사, 성적 갈등 요소들, 성희롱의 진화적 측면, 동성연애 등 80여 개 항목에 걸쳐 성적 문제의 심리적 인과관계를 디테일하게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왜 인간 남성의 생식기는 다른 영장류 수컷에 비해 신체 비례상 크게 진화했는가, 바람을 피우는 여성들은 왜 하필이면 가장 임신할 확률이 높을 때를 골라 애인과 만나는가 하는 데 대한 해명을 통해 인간 심리 속에 잠재된 종족 번식 욕망과 실제의 짝짓기 행위와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스와 그의 연구진이 발견(또는 입증)한 대표적인 결론은 “남자들은 종족 유지를 위해 여자의 신체적 매력이나 풍부한 생식능력을 요구하고 여자들은 그 반대급부로 남자에게 경제적 능력과 신분안정을 요구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 꾸준히 진화해온 원초적 성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이런 저자의 분석은 당시 <뉴욕타임스>의 비평대로 “남녀는 정서상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성적 우월주의를 부추기거나, 현재의 성적 상황을 불변의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의 표현이다. 특히 부스의 연구는 여성들의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코자하는 여권운동가들에게는 매우 위험스러운 주장으로 간주될 소지도 있다.
저자 역시 이 점을 의식해 자신의 책에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음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짝짓기에서 매우 불쾌하고 비도덕적 측면을 발견한 데 대해 괴로움을 느꼈다”는 ‘해명’을 서문에 쓰고 있다.
어쨌든 성에 관해 가능한 한 최대한 편견 없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또는 그런 논의 자체를 편견 없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의하든 않든 어떤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면 성에 대한 이 진화심리학적 고찰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