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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야영지 3 - 곽지해수욕장
이번 여행에서 내 계획은 동에서 서로 도는 것이었다. 중문 야영을 마치고, 나는 자연스레 서쪽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생각대로 금능해수욕장과 비양도에서 각각 1박을 하며 제주에서 여행을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야자수 정비 작업 때문에 야영이 제한된 금능과 협재를 모두 지나치고, 비양도마저 선사와 해녀 간의 갈등으로 운항에 차질이 생겨 가는 게 조심스러워 포기했다. 그러다 향한 곳은 계획엔 없었던, 제주 지내와 멀지 않은 곽지해수욕장이었다.
해수욕장 주차장 뒤에 데크가 여러 개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는데, 그곳에 텐트를 치고 지친 몸을 눕혔다. 해가 지기 전엔 근처의 한담공원까지 산책하고 오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담공원까지 가는 산책로(한담해안산책로)는 무수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지질이 인상적이었고, 마치 숨어 있는 듯한 작고 한적한 해변이 군데군데 있어 바람을 쐬며 가기에 좋았다.
곽지해수욕장 야영장. 데크당 1박 요금이 1만원이지만, 비수기라 그런지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무료로 이용했다.
곽지해수욕장에서 한담공원으로 걷다 보면 조그만 해변이 몇 군데 나온다.
한담해안산책로
대한민국 최남단 또는 마지막, 마라도
해가 질 무렵, 이틀 후인 월요일에 만나기로 했던 아는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주도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평일 저녁에 잠깐 시간을 내어 만나기는 아쉬우니 휴일을 틈타 못 가봤던 장소엘 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목적지를 추리다 보니 나온 곳은 마라도와 가파도. 마침 둘 다 가 보지 않은 곳이었기에 이번 기회에 발도장을 찍어보기로 했다.
갑자기 일정을 틀다 보니, 곽지에서 하는 야영은 반쪽짜리 야영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간이 없는 백패킹이기에 이런 즉흥 여행이 가능했다. 서둘러 텐트를 걷고, 정류장에서 만나 모슬포로 이동했다. 급히 잡았지만 안락한 호텔에서 하루를 머물고, 아침 일찍 운진항으로 이동했다.
마라도행 정기 여객선. 코로나로 인해 열을 필수로 잰다.
마라도와 가파도는 모두 운진항에서 갈 수 있다. 우리는 9시 20분 첫 배를 타고, 먼저 마라도로 갔다. 약 40분을 달려 마라도에 도착했다. 마라도는 대한민국 최남단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마라도에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이자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가 최남단이기 때문이다.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장. 대한민국 최남단에 있는 학교이다.
대한민국 최남단비. 마라도를 찾는 사람들이 인증샷을 남기는 필수 장소이다.
마라도에 있는 다양한 가게들이 이런 점을 활용한 마케팅을 하는 게 재밌었다. 섬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수많은 ‘마지막 OO집’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마라도를 찾는 상당한 사람들이 '최남단에 가 본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둘 텐데, 한 국가에 결코 둘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것 하나로도 뭇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수 있을 테다.
‘마지막 마케팅’을 하는 가게들을 보면서, 동생에게 우스갯소리로 “나도 마지막이란 이름 붙여서 가게 하나 열어보고 싶다”고 말을 건네었다. 그러면서 서로 흥미로운 소재를 떠올리다가 나온 게 와플이었다. “‘벨기에에서 전수한 대한민국 마지막 와플 가게’라고 누가 가게를 하나 차린 후 방송을 타고 유명해진다면 중국집처럼 몇 군데 더 생기겠지?”라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걸어갔다. 그런데 얼마 못 가 거짓말같이 와플 가게가 나타났다. 이름은 마라와플. 새빨간 옷을 입은 아담한 가게였다.
살면서 그렇게 깜짝 놀랐던 적이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인데, 진짜로 있을 줄이야”라며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인터넷에 검색해도, 지도에 찾아봐도 정보가 나오지 않는 이 가게. 네이버 지도 로드뷰를 통해서 불과 2월에 지금과 간판이 달랐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가게 밖에서 건물 사진을 담고 있는데, 주인과 눈이 슬쩍 마주쳤다. 갑자기 그냥 가기엔 뻘쭘하고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게에 들어갔다. 건물이 작은 만큼 내부도 좁았지만 아기자기한 느낌이 있었다. 메뉴는 단출했다. 와플과 커피, 음료. 와플은 와플 샌드위치라는 이름으로 5천 원에 팔고 있었다. 그 외에 와플 종류는 없는 듯했다. 배 시간 때문에 서둘러야 했던지라, 더 들여보진 못하고 와플 샌드위치 하나만 얼른 샀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주인아저씨의 너그러운 말투에 기분이 좋아졌다.
와플 샌드위치는 말 그대로, 빵 대신 와플을 활용해 만든 것이었다. 두툼한 와플 사이에 샌드위치의 기본 재료인 햄, 치즈, 달걀, 피클이 들어간 무난한 비주얼이었다. 맛 또한 익숙했다. 식빵으로 만든 샌드위치에서 빵만 와플로 바꾼 느낌이었다. 다만, 와플 자체가 식빵과는 모양과 두께, 질감 등이 다르다 보니 조금은 다른 식감이 새로웠다.
최남단과 함께 떠오른 키워드는 짜장면이었다. 마라도에 짜장면이라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수 있지만, 제주도는 짜장면의 주원료인 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전 편에 소개한 밭담과도 맥이 통한다. 제주도가 화산섬이기 때문인데, 토양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산회토에서는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 밀, 보리와 같은 작물을 재배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도에는 개성 있는 빵집이 많고, 제사상에도 빵을 올리는 풍습이 있다. 고기국수, 보말칼국수 등 면 요리도 다양하다. 마라도에도 예전부터 낚시꾼에게 배달하던 짜장면집이 있었는데, 그 유명한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대사가 나온 통신사 광고를 시작으로 방송을 타며 짜장면이 유명해졌다. 나와 동생도 ’1박2일‘과 ’무한도전‘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마라도 짜장면을 접했다.
하지만, 가게는 많지만 정작 어디서 먹을지 결정하는 게 쉽진 않았다. 지도와 후기를 참고해 정보를 찾았는데 아쉽다는 평이 많이 보였다. 유명세를 업고 장사를 하는 것 같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짜장면 맛이 특별하지 않고 평범했다는 반응도 많았다. 최남단인 만큼 특별함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평범함이 감점 요소로 작용한 듯했다. 하지만 개인차가 있으니, 직접 겪기 전까진 모르는 바였다. 먼저 동생이 가장 원하는 무한도전에 나왔던 집으로 갔는데, 하필 휴무일이 일요일이었다. 두 번째 가게도 아직 열기 전이라 발걸음을 돌렸다.
'무한도전'에 나왔던 짜장면집을 뒤로하고
세 번째로 찾아간 곳에서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다. 각각 9천 원짜리 전복해물짜장을 주문했다. 짜장면에는 큼지막한 전복을 비롯해 다양한 해산물이 있었는데, 톳이 눈에 띄었다. 짜장의 맛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사람에 따라 밍밍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내 입맛엔 담백했다. 기름지거나 느끼한 느낌이 없어 편하게 먹었다. 먹기 전까지 마라도 짜장면에 대한 일종의 편견이 있었는데, 이 한 그릇에 괜찮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인간극장'에 나왔던 짜장면집을 찾았다.
짜장면만 기억하기엔 마라도는 풍경도 멋진 곳이었다. 과거 마라도는 삼림이 울창한 무인도였다. 고종 대부터 사람들이 옮겨와 살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뱀을 쫓기 위해 불을 지른 게 100일 가까이나 이어지며 숲이 탔다고 전해진다. 나무가 우거진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안타깝지만, 바다까지 한눈에 담기는 광활한 풍경은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초원 위에 작은 마라도 성당이 보이는 풍경은 마라도의 상징이라고 해도 될 만큼 아름다웠다. 성당은 문어와 전복, 소라를 형상화해 지었다고 하는데 흔히 떠올리는 외형과는 형태도, 색깔도 분명히 달라 독특했다.
마라도 성당
성당과 교회만 있는 줄 알았던 마라도에는 꽤 큼지막한 '기원정사'라는 절도 찾아볼 수 있었다. 내부는 대체로 휑하고 낡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절 터에는 키가 제법 큰 해수관음상이 눈길을 끌었다. 미니어처같이 작은 탑이 아기자기한 볼거리였다. 절 터에서 뒤를 돌자 바다와 함께 보이는 경치는 이 절만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기원정사 해수관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