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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상북도교육삼락회 원문보기 글쓴이: 아무따나
2011년 12월 경북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1년 12월16일(금)
장소 : 밀양 일원
반월당역(적십자병원앞08:00출발)-대구은행(08:10)-대공원역(08:20)-(72.7km.1시간20분)-밀양표충사(9:40도착.관람.1시간20분.11:00출발)-(10.7km.20분)-영원사지(11:20도착.관람40분.12:00출발)-(10.17km.20분)-영남루.천진궁.아랑각.작곡가 박시춘 옛집.무위사(12:20도착.점심1시간.관람1시간.출발2:20분)-(4.2km.10분)-추원재(2:30도착.관람30분.출발3:00)-(6.8km.20분)-표충비각.홍제사(3:20도착.관람40분.4:10출발)-(6.8km.13분)-사명대사생가지(4:23도착.관람37분.5:00출발)-(71.7km.1시간10분)-반월당(6:30도착)
천황산 표충사 (天皇山表忠寺.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번지 )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터를 잡아 세운 죽림사(竹林寺)이다. 흥덕왕 4년(829)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먹고 병이 낫게 되자 탑을 세우고 약수 이름을 영정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절 이름을 재약산영정사라 부르고 절을 크게 부흥시켰다. 신라 때는 보우국사가, 고려시대 때는 해린국사가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며 특히 일연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탈고하였다고 한다. 조선 헌종 5년(1839) 영축산 백하암에 있던 사명대사의 사당을 이곳에 옮기면서 표충사라 하였는데, 이 사당을 절에서 관리하면서 사(祠)자가 사(寺)로 바뀌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평양 탈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신으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적진에 들어가 회담을 했고, 그 성과로 포로로 잡혀간 3003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하는 등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현재 이곳에는 중앙에 사명대사의 영정이 있고 동쪽에는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 서쪽에는 임진왜란 때 금산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주위의 뛰어난 경관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가 통합되어 있는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 주는 곳이다.
표충사 청동은입사 향완(국보 제75호)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향로로서 1957년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국내외를 통틀어 7좌밖에 없는 동제(銅製) 향로 가운데 하나이다. 향로에 도문(圖文)을 음각하고 그 음각한 홈 속에 은사(銀絲)를 메꾸어 넣어서 장식하는 소위 은상감(銀象嵌)의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완형의 몸체와 둥근 받침을 가진 대좌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 향로의 몸체 둘레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있어서 이 향로의 시대와 유래를 알 수 있게 된 것이 매우 귀중하다. "大定十七年丁酉六月八日 法界生亡共增菩提之願以鑄成靑銅含銀香완一副重八斤印棟樑道人孝初通康柱等謹發至誠特造隨喜者射文"(대정17년정유6월8일 법계생망공증보제지원이수성청동함은향완일부중팔근인동량도인효초통강주등발근지성특조수희자사문)명문에 나타난 대정17년은 금(金)나라의 년호로서 고려 명종7년(1177년)에 해당하고 명문의 호칭을 그대로 따라서 이름을 청동은입사 향완이라고 한 것인데 상부 잎새부위에는 6자의 범자문(梵字文)을 일정한 간격으로 한자씩 상감하고 글자와 글자 사이에는 서운문(瑞雲文)으로 장식하고 있다. 몸체의 바깥 측면에는 역시 같은 간격으로 동심원 속에 4자의 범자(梵字)를 배치하였으며 높은 굽다리 둘레에는 한 마리의 큰 용을 상감해서 주장식으로 삼았고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넣고 굽다리 윗부분에는 여의주문(如意珠文)을 장식해서 상하부의 균형을 얻었으며 크게 번거롭지않은 제한된 의장효과(意匠效果)를 거두고 있다.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三層石塔.제467호)
이 탑은 표충사(表忠寺) 경내에서 사천왕문(四天王門)을 들어서면 만일루(萬日樓) 앞 마당에 있는데, 기본적인 양식이 신라통일시기의 석탑 유래를 따르고 있는 단층(單層) 기단(基壇)의 3층석탑(三層石塔)이다.조선조 숙종 3년(1677년)에 작성된 『영정사고적기(靈井寺古蹟記)』에 의하면 현재의 표충사가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인도의 황면선사(黃面禪師)가 창건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탑의 조성년대도 이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기단(基壇)의 형식은 단층(單層)이나 7매(枚)의 두꺼운 판석(板石)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24cm 정도의 제법 높은 2단의 각형 받침이 마련되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를 형성하므로써 상하층 기단의 효과를 살리고 있으며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개씩의 돌로 되어 있다. 옥신(屋身)은 대체로 높은 형태를 보이고 옥개석(屋蓋石)은 첫층부터 차례로 체감되었으며 추녀밑은 수평(水平)을 이루고 낙수면(落水面)은 우아한 경사를 이루었다. 옥개석(屋蓋石)의 머리에는 풍경(風磬)을 달아 운치를 살렸고, 상륜부(相輪部)에는 1m 남짓한 찰주(刹柱)가 아직도 남아있고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등이 있으나 그 가운데는 뒤에 보수(補修)된 흔적도 남아 있다. 이 탑(塔) 옆에는 석등(石燈)도 1기(基)가 서 있으나 본래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명집책판(사명집책판.제273호.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표충사)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승장(義僧將)으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사명대사 유정(惟政 : 1554-1610)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사명(四溟)은 그의 별호인데, 대사께서 세상을 떠나자 혜구(惠球)를 비롯한 그의 문인들이 대사의 견문을 모아 편집하여 이 문집에 실었다.권 1권에는 사(辭), 권 2에는 오언율시(五言律時), 권 3에는 칠언율시(七言律詩), 권 4권에는 오언절구(五言絶句), 권 5에는 선게(禪偈), 권 6에는 잡문(雜文)과 시(詩)들이 실려 있고 뒤에 부록처럼 비문(碑文)과 행적(行蹟)이 붙어 있다.
표충서원(表忠書院.제52호.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표충사)
표충서원(表忠書院)은 본래 표충사(表忠祠)라고 불렀는데, 임진왜란때 의승장(義僧將)으로서 구국(救國)의 대공(大功)을 세운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 등 3대사(大師)를 향사(享祀)하는 곳으로서 본래는 무안면 중산리 웅동(熊洞 : 현, 대법사(大法寺)자리)에 있던 것을 서기 1839년(헌종 5년) 정월에 송운대사(松雲大師)의 8세(世) 법손(法孫)인 월파당(月坡堂) 천유(天有)가 당시 영정사(靈井寺 : 현재 표충사) 주지(住持)로 있을 때 밀양부사(密陽府使) 심의복(沈宜復)과 그의 아들인 순상(巡相) 심경택(沈敬澤)의 힘을 빌리고 예조(禮曹)의 승인을 얻어, 현 위치인 단장면 구천리 영정사(靈井寺) 경내로 옮기고 편액을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고쳐 걸고, 절의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본래 서원(書院)은 유교(儒敎)의 사학(私鶴) 시설인데, 불교(佛敎) 사찰(寺刹) 안에 고승(高僧)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한 사당(祠堂)을 두고 있는 것 자체가 일반적 관례(慣例)와는 매우 이질적이라 볼 수 있겠고, 춘추(春秋) 2회에 걸쳐 매년 실시하는 향사(享祀)도 승려가 아닌 관리(官吏 : 대개 市長)가 주재하여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1871년(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한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이 서원도 훼철(毁撤) 되었다가 1883년(고종 20년) 사림(士林)의 요청으로 복원(復院) 되었으며 근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표충사제영록책판(表忠寺題詠錄冊板)
이 책판(冊板)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사당(祠堂)인 표충사(表忠祠)에 대한 글을 모은 것인데 김상집(金尙集)이 찬(撰)한 것이다. 간행연대는 알 수 없으나 표충사(表忠祠)의 내력을 알고 사명대사의 활동과 전공(戰功)을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가 된다.모두 7권이었는데, 이를 간행하기 위해서 당시 대문호였던 교산(蛟山) 허균(許筠 : 1569-1618)에게서 서문(序文)을 받았고 발문(跋文)은 승려 뇌묵당(雷默堂)이 썼다. 그 때가 광해군 4년(1612년)이였다. 그 후 책판이 썩고 흩어져서 사용하기 어럽게 되었으므로 임진년(壬辰年) 가을에 중(僧) 성일(性一)이 사명대사의 비문과 행적(行蹟)을 부록으로 더하여 중간(重刊)하였다.
표충사영정(表忠寺影幀) 및 탱화(幀畵)
표충사(表忠寺)의 영정(影幀) 및 탱화(幀畵)는 경내의 유물관 및 영각(影閣) 그리고 표충서원(表忠書院)에 일괄로 전시하고 있는 것 들이다.각 영정의 공통점이 있다면 거의 불화(佛畵)의 기법에 가까우며 비단 바탕에 채색은 당채(唐彩 : 식물성천연고무특수채색)를 사용 하였기 때문에 양호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것 같은데, 사료(史料)가 분명한 영정의 목록(目錄)은 다음과 같다.
1. 사명대사(四溟大師) : 중중 39년-광해군 2년(1544-1610), 조선시대의 고승이다. 자는 이환(離幻), 속성은 임(任)씨,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사명당(四溟堂), 송운(松雲), 종봉(鐘峯), 법명은 유정(惟政), 수성(守成)의 아들로 밀양(密陽) 출신이다.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의승대장(義僧大將)이였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임금의 명을 받아 일본에 강화사(講和使)로 가서 포로 3,000명을 송환해 오는 등 나라를 위하여 많은 공을 세운 구국성사(救國聖師)이다.
2. 서산대사(西山大師) : 중종 15년-선조 37년(1520-1604), 조선시대의 고승으로 자는 현응(玄應), 속성은 최(崔)씨, 아명은 여신(汝信), 본관은 완산(完山), 호는 서산(西山).청허(淸虛), 법명은 휴정(休靜), 세창(世昌)의 아들로 안주(安州) 출신이다.지리산에 들어가 숭인선사(崇人禪師)의 제자가 되었으며 보우(普雨)의 뒤를 이어 봉은사(奉恩寺)의 주지가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임금의 명을 받아 73세의 고령임에도 전국에서 승병 5,000명을 모집하여 총수(總帥)가 되어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제자인 사명대사에게 병사(兵事)를 인계 하였고, 선종(禪宗)인 조계종(曺溪宗)을 일원화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3. 기허대사(騎虛大師) : ?-선조 25년(?-1592), 조선시대 고승으로 속성은 박(朴)씨, 속명은 영규(靈圭),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기허당(騎虛堂), 공주 갑사(甲寺)에서 입산득도 하였고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錦山)에서 전사(戰死)하였다.
4. 화담당대선사경화(華潭堂大禪師敬和) : 정조 10년-헌종 14년(1786-1848), 속성은 박(朴)씨, 호는 화담(華潭), 밀양 출신으로 18세때 양주의 화양상(華陽寺) 월화선사(月華禪師)를 은사로 득도하여 농월율봉(弄月栗峯) 선사에게 비구계를 받고, 해인사에 주석(住錫)하기도 하였으며 가평의 현등사(懸燈寺)에서 세수 63, 법랍 48세로 입적 하였다.
5. 기암당(奇巖堂) : 명종 7년-인조 12년(1552-1634), 호는 법견(法堅)이라 기록되어 있다. 영정의 제목은 "기암당대선사지진상(奇巖堂大禪師之眞相)".
6. 연파당(蓮坡堂) : 법호는 혜장(惠藏)이라 하였으며, 대둔사에 주석했던 조선시대 고승이다. 영정의 제목은 "연파당대선사상(蓮坡堂大禪師像)".
7. 위당신헌(威堂申櫶) : 순조 10년-고종 25년(1810-1888), 고종때의 대신으로 초명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 익호는 장숙(莊肅), 본관은 평산(平山), 의직(義直)의 아들로 금영대장을 거쳐 총융사, 병조판서, 참찬, 진무사(鎭撫使) 등을 역임 하였다. 고종 13년(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서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이 영정이 표충사에 봉안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표충사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영정의 제목은 "위당거사상(威堂居士像)"『판서신공관호 53세상(判書申公觀浩 五十三歲像)』.
8. 덕암당부호(德庵堂富浩) : 철종 5년 갑인년 윤7월(1854년) 영정조성. 영정의 제목은 "선교양종국일도대선사덕암당부호지진영(禪敎兩宗國一都大禪師德庵堂富浩之眞影)".
9. 학암당원정(鶴巖唐圓政) : 철종 5년 갑인년 윤8월(1854년) 호생관(豪生館) 최북(崔北)이 영정을 그림. 영정의 제목은 "학암당대선사원정지진영(학巖堂大禪師圓政之眞影)".
10. 월파당천유(月坡堂天有) : 고종 3년(1866년) 영종조성. 영정의 제목은 "이현장사주대각등계월파당천유진영(移現創寺主大覺登階月坡堂天有眞影)".
11. 신암당영구(愼庵堂永鉤) : 기묘(己卯)2월 24일 출생. 무자(戊子)12월 12일 입적. 영정의 제목은 "국일도대선사신암당진상(國一都大禪師愼庵堂眞相)".
12. 인월당원민(印月堂圓旻) : 영정의 제목은 "대각등계인월당원민영(大覺登階印月堂圓旻影)".
13. 용허당(聳虛堂) : 영정의 제목은 "보원주국일도대선사용허당지진(補院主國一都大禪師용虛堂之眞)".
14. 경파당조안(景坡堂詔岸) : 을축(乙丑) 2월 24일 문손(門孫) 호산(虎山)이 조성한, 영정의 제목은 "보원주경파당조안진영(保院主景坡堂詔岸眞影)".
15. 용악당(龍岳堂) : 영정의 제목은 "용악당대선사지진영(龍岳堂大禪師之眞影)".
16. 묵담당영일(默潭堂永一) : 영정의 제목은 "선교양종묵담당영일지진영(禪敎兩宗默潭堂永一之眞影)".
17. 밀암당대성(密庵堂大成) : 영정의 제목은 "선교양종밀암당대선사대성지진(禪敎兩宗密庵堂大禪師大成之眞)".
18. 관월도경수(冠月都景修) : 영정의 제목은 "관월도대선사경수지진(冠月都大禪師景修之眞)".
19. 혜운당격천(慧雲堂擊天) : 영정의 제목은 "화엄종주혜운당격천지진(華嚴宗主慧雲堂擊天之眞)".
20. 운송당(雲松堂) : 영정의 제목은 "선교양종국일도대선사운송당진영(禪敎兩宗國一都大禪師雲松堂眞影)".
21. 화월당봉우(華月堂奉宇) : 영정의 제목은 "추파삼세화월당봉우지진영(秋波三世華月堂奉宇之眞影)".
22. 태허대사(太虛大師) : 영정의 제목은 "태허대사상(太虛大師像)".
23. 포허당찬명지위(包虛堂璨溟之位) : 광무 2년(1898년) 7월 염(念)8일 조성한 영정의 제목은 "포허당찬명지위(包虛堂璨溟之位)"-(位目形額子) : 影禎代用
24. 금담당.환월당지위(錦潭堂.幻月堂之位) : 영정의 제목은 "대각등계금담당대선사지위(大覺登階錦潭堂大禪師之位)", "대각등계환월당대선사지위(大覺登階幻月堂大禪師之位)"-(位目形額子) : 影禎代用
25. 약봉당영희지위(藥峯堂永希之位) : 영정의 제목은 "선교양종국일도대선사약봉당영희지위(禪敎兩宗國一都大禪師藥峯堂永希之位)"-(位目形額子) : 影禎代用
26. 칠여래탱화(七如來幀畵 : 198cm×176cm) : 견본당채(絹本唐彩) 탱화(幀畵)로서 훼손이 심하던 것을 1990년 표충사에서 복원 정비하여 유물관에 보존 전시하고 있다. 일곱여래는 시아괴회(施餓괴會)때에 창례(唱禮)하는 일곱여래를 말하는 것으로 ①보승여래(寶勝如來), ②다보여래(多寶如來), ③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④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⑤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⑥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⑦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로 구분할 수 있다.이 탱화(幀畵)는 주로 영가천도제(靈駕薦度齊) 행사시에 게양 설단(設壇)하여 사용하는 것이다.또한 번(幡 : 성호(聖號)을 문자로 작성한 깃발 모양을 말하는데, 여기에서의 번은 칠여래를 말함)을 만들어서 영단(靈壇) 앞에 게양하고 칠여래(七如來)를 강림케 한다.※ 표충사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사명대사께서 임진왜란 당시에 원불(願佛 : 표충사 유물관 중앙에 안치되어 있는 관세음보살좌상)과 함께 이 칠여래탱화(七如來幀畵)를 모시고 다녔다고 하나, 이는 지금의 탱화와는 조성연대가 맞지 않으므로 그 당시의 탱화를 1738년(건륭 3년 12월)에 개모(改摹 : 본떠 다시 만듬) 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충사소장유품(表忠寺所藏遺品)
표충사(表忠寺)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에 소장된 유물의 대부분이 사명대사께서 사용하시던 유품들이다. 그 중에는 1604년 강화사(講和使)로 일본에 갔을 때 선물로 받은 대형 목탁(木鐸)과 북(鼓)등이 있으며 소장유품의 수량은 총 200여점에 이르는데 우선 문화재로 지정 받은 목록은 다음과 같다.1. 조선강화사 호송(朝鮮講和使 護送)에 관한 문서 1매, 39×26cm2. 포로동포 송환(捕虜同胞 送還)에 관한 문서 1매, 39×26cm3. 포로동포 송환(捕虜同胞 送還)에 관한 문서 1매, 표구51×148cm4. 목재연엽형오함(木材蓮葉形五艦) 1조(5점), 외기 9.8×22.5cm5. 연(輦 : 가마의 일종) 2대, 310×132×66cm6. 표충사지목판(表忠寺誌木板) 1조(2매), 59×31cm7. 금강경 목판(金剛經 木板) 1조(10매), 외54×26cm, 내44.5×18cm8. 표충사사적비문음각판(表忠寺事蹟碑文陰刻板)1조(4매)- 외89×49cm, 내56.5×30.8cm9. 서산.송운대사비명음각판(西山.松雲大師碑銘陰刻板) 1조(6매)- - 외115×72.5cm, 내95×52.5cm10. 팔양경목판(八陽經木板) 1조(9매), 외59×27.5cm, 내40×26cm11. 태상현허북두본명연생진경목판(太上玄虛北斗本命延生眞經木板) 1조(6매)- 외45×37.8cm, 내34×25cm12.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咤經 : 漢文板) 1조(5매)- 외47.5×26.5cm, 내20.5×27cm13.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咤經 : 한글판) 1조(5매)- 외49.5×27cm, 내27×19cm14. 광명경목판(光明經木板) 1조(5매), 외47×27cm, 내26.3×18cm15. 불설고왕관세음경목판(佛說高王觀世音經木板 1조(4매)- 외50.5×27cm, 내27×19cm16. 대화상왕장하목판(大和尙王帳下木板) 1조(13매), 45.5×38.13cm17. 타라니진언목판(陀羅尼眞言木板) 1매, 81×29.5cm18. 타라니목판(陀羅尼木板) 1매, 80×28cm19. 호계첩목판(護戒牒木板) 1매, 107×50cm
표충사 석등(表忠寺 石燈)
표충사(表忠寺) 경내에 있는 보물 제467호인 표충사3층석탑(表忠寺三層石塔)의 동쪽에 서 있는 이 석등(石燈)은 방형(方形)으로 된 지대석(地大石)과 원형(圓形)으로 된 하대석(下臺石)이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일부가 부서진 상태이다. 하대석은 낱장의 연꽃잎 모양 8매가 둘레에 고루 조각되어 있고, 각형(角形) 1단의 받침으로 8각의 간주(竿柱)를 받치고 있다.간주(竿柱)에는 명문(銘文)이나 조각(彫刻) 등이 전혀 없고 중대석(中臺石)에도 하대석 처럼 낱장의 연꽃잎 모양 8매가 조각되어 있다. 화사석(火舍石)은 부등변(不等邊)의 8각형으로 4면에는 장방형(長方形)의 화창구(火窓口)가 나 있다.옥개석(屋蓋石) 추녀에는 낙수(落水) 홈이 있고, 옥개(屋蓋)의 이면에는 8구(區)의 희미한 안상(眼象)이 있으며 화사석(火舍石)과 연결되어 있다.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은 경쾌하며 옥개석(屋蓋石) 윗면 중심에 낱장의 연꽃잎 모양 13매가 둘려져 있으며 정상에 보주(寶珠)를 꽂도록 되어 있다.보주(寶珠)는 복발형(覆鉢形) 2단의 몰딩 받침위에 원좌(圓座)를 두르고 그 위에 연봉오리 1개를 얹었는데, 석등(石燈)은 대체로 완형(完形)이지만 간주석(竿柱石), 화사석(火舍石), 보주(寶珠) 등은 뒤에 보수(補修)된 흔적이 있다.조각의 특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대광전(表忠寺 大光殿)
이 대광전(大光殿)은 표충사(表忠寺)의 주불전(主佛殿)으로 중앙에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 동쪽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서쪽에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등 삼존불(三尊佛)을 봉안 하고 있다.건물은 석조(石造)로 된 축대(築臺)와 기단(基壇)위에 웅장하게 건립되었으며 초석(礎石)은 새로 만든 가공석(加工石)을 사용 하였다. 건물의 모양은 단층 팔작(八作) 지붕으로 목조와가(木造瓦家)이며 정면(16.3m) 5간(間), 측면(8.9m) 3간(間)의 화려(華麗)한 다포(多包)집 양식이다. 정면(正面) 기둥 사이는 중앙의 3간(間)이 동일하고 좌우변(左右邊) 2간(間)은 퇴(退)를 뺀 규격인데 간(間)마다 빗살문(文)의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기둥 윗몸에 창방(唱榜)을 짜돌려 그 위에 평방(平枋)을 둘렀으며 내외로 삼출목(三出目)의 갖은 공포(공包)로 짜 올렸다. 내부 중도리 중간에는 우물 천장(天井)이 있고 그 좌우의 충량(衝樑)은 용신(龍身)으로 장식하여 대들보 위에 얹었다. 천장(天井)과 공포(공包)가 맞닿은 부분에는 연당초(蓮塘草)와 조수문(鳥獸文)등 갖은 문양(文樣)을 새겼고 주존불(主尊佛)의 뒷벽을 장식한 삼천후불(三千後佛)의 탱화(탱畵)와 함께 건물 내부가 온통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한 듯한 복잡성과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다.불단(佛壇)도 건물과 동시에 만들어 졌는데 3단의 단신(壇身)에는 안상(眼象)으로 구획하여 화초(花草), 당사자(唐獅子), 운문(雲文) 등을 섬세하게 새기고 그렸다.불단(佛壇) 상부의 보개(寶蓋)는 정자형(丁字形)이며 포작(包作)으로 구조되고 천장부는 용(龍)과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내외부를 통하여 금단청(金丹靑)을 하였다. 현재의 대광전(大光殿)은 1926년에 큰 화재로 인하여 1929년에 중창한 건물인데, 본래 영정사(靈井寺 : 표충사의 옜이름) 건립 당시의 원위치로 추정되는 보물 제467호 표충사삼층석탑(表忠寺三層石搭)을 중심으로 단탑형(單塔形) 가람(伽藍) 배치상태를 고려해 보면 정전(正殿)으로서의 대광전(大光殿)은 그 위치와 건물의 좌향(坐向)에 의문이 있으므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표충사 팔상전(表忠寺 八相殿)
일반적으로 사찰(寺刹)에서의 팔상전(八相殿)은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가지 모습 즉, 하천(下天), 탁태(託胎), 강탄(降誕), 출가(出家), 강마(降魔), 성도(成道), 전법륜(轉法輪), 입열반(入涅槃)으로 나누어 표현한 탱화(幀畵)와 존상(尊像)을 모신 법당(法堂)을 말한다.본래 표충사(表忠寺)의 팔상전은 철종 5년(1854년)에 당시 주지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지장전 구지(地藏殿 舊址 : 현재 종무소 자리)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의 팔상전은 창건 연대가 명확하지는 않다.현재의 팔상전은 헌종 5년(1839년) 봄에 사명대사(四溟大師)의 8세 법손(法孫)인 월파당 천유(月坡堂 天有)가 무안면 영취산(靈鷲山)에 있던 표충사(表忠祠 : 서산, 송운, 기허 등 3대사를 모신 사당)을 당시 영정사(靈井寺)였던 이곳으로 옮겨오며 절 이름을 표충사로 바꿀 당시에는 관음전(觀音殿)이 였던 곳인데, 이 곳에다 3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扁額)하고 향사(享祀)를 받들어 왔다.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만아니라 더구나 대광전(大光殿)과 나란히 불제자(佛第子)의 유상(遺像)을 모신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부처님에 대하여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표충서원이 있던 자리에 팔상전을 옮기고, 본래 팔상전이 있던 자리(현, 종무소)에는 표충서원 옮겨 1992년 복원사업이 완료될 때까지 존치(存置)했었다.
표충사 명부전(表忠寺 冥府殿)
표충사(表忠寺) 경내 남쪽편에 관음전(觀音殿)과 나란히 있는 명부전(冥府殿)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속으로 옮겨놓은 법당이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위수(爲首)로 봉안 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하기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審判官)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최초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임진왜란으로 회진(灰塵)되기 이전에 이미 명부전이 있었던 것 같다. 광해군 2년(1610년)부터 금당(金堂)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殿閣)과 함께 복구가 이루어졌으나 숙종 5년(1679년)에 큰 화재를 만나 다시 소실(燒失)되었다. 숙종 7년(1681년)에 주지 도한(道閑)을 비롯한 신일(信日), 계화(戒和)등 승려들이 합심하여 새로 지었는데, 정조 24년(1829년)경에 절의 수호 관리가 어려워 건물이 퇴락하였다. 헌종 5년(1839년)경에는 표충사 중흥주(中興主) 월파선사(月坡禪師)에 의해서 명부전 자리가 서산(西山), 송운(松雲), 기허(騎虛)등 3대사(大師)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으로 바뀌어졌다가, 철종 8년(1857년) 7월에 현재의 위치에 재건되었다. 1926년에 또 큰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2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9년 개축한 것이다.
표충사 만일루(表忠寺 萬日樓)
표충사(表忠寺) 경내 서북편에 있는 만일루(萬日樓)는 H자형의 독특한 구조의 건축물로서 철종 11년(1860년)에 이 절의 방장(方丈)인 월암상인(月庵上人)이 그의 조실(祖室)인 혜원법사(慧遠法師)의 유풍을 떨치고자 발심(發心)하여 만일(萬日)의 기도 끝에 이룩한 건물인데, 불교의 48원(願)을 표증(表證)하는 48칸의 선실(禪室)을 108번뇌(煩惱)를 상징하는108평(坪)의 부지에 지어 처음에는 『동림고사(東林古社)』라고 이름하였다. 이 전각(殿閣)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하고 중생(衆生)을 구제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여 정진하기도 하였던 곳으로, 정화 이후에는 무량수각(無量壽閣) 또는 서래각(西來閣)이란 이름으로 편액(扁額)되어 선방(禪房)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의 중건을 계기로 경내 칠성전(七星殿) 뒷편의 요사(寮舍)와 고방(庫房)을 비롯한 부속 설비를 일제히 정비하고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여 "영남제일선원(嶺南第一禪院)"이란 현판을 새로 걸게 되었다.1926년 큰 화재로 인하여 소실(燒失) 되었다가, 1929년에 중건되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曺溪宗)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宗正)을 역임하고 수행과 자비 교화로써 일생을 보낸 효봉 대종사(曉峰大宗師)께서 말년을 보내시다가 1963년 열반(涅槃)하신 곳이기도 하다.현재의 건물은 1992년에 보수된 것이다.
송운대사분충서난록책판(松雲大師奮忠序難.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23)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승장(義僧將)인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충성을 다해 난리를 이겨나가는 활동사항을 모아둔 전쟁활약 실기(實記)이다. 대사의 5대법손(法孫)인 태허당(泰虛堂) 남붕(南鵬)의 주선으로 영조 14년(1738년)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이 편집하여 영조 15년(1739년)에 현재의 무안면 중산리 대법사 자리인 구. 표충사(表忠祠)에서 개간(開刊)하였다.내용은 갑오(甲午)년 4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영(陣營)에 들어가서 정탐한 탐정기(探情記)를 비롯하여, 명(明)나라 장군 유정(劉綎) 총병(總兵 : 備倭副總兵署都督僉事)과 만나 왜군을 격토하기 위하여 협력한 이야기, 일본에 건너가서 관료들과 나눈 문서 등 활약상과 그에 대한 후대사람들의 평(平)들이 담겨 있다.책 머리와 끝에 김중례(金仲禮)의 서문과 송인명(宋寅明), 윤봉조(尹鳳朝)의 구발(舊跋) 신유한의 신간발(新刊跋)이 붙어 있다. 특히 이 말미에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이정구(李廷龜) 등이 사명대사를 찬(讚)하는 절구(絶句), 율시(律詩)가 수록되어 있으며 간행기(刊行記)에는 "上之十五年己未七月密陽靈鷲山表忠祠開刊(상지15년기미7월밀양영취산표충사개간)"이라고 써 있다.
사명대사(四溟大師) 금란가사(金欄袈娑)와 장삼(長衫)
표충사(表忠寺) 경내(境內) 유물관(遺物館)에 전시(展示)되고 있는 이 금란가사(金欄袈娑 : 스님들이 장삼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입는 法衣)와 장삼(長衫 : 스님들이 평상시에 입는 길이가 길고 소매를 넓게 만든 웃옷)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승병대장(義僧兵大將)으로서 구국(救國)을 위하여 헌신(獻身)한 사명대사(四溟大師) 임유정(任惟政 : 1544-1610) 스님이 친히 입으시던 복식(服飾)이다.재질(材質)은 적조에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자연부식(自然腐蝕)과 탈색(脫色), 원형 손결(損缺) 등이 심하여 1983년에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에서 유물의 원형을 일부 보수(補修)하고 오물(汚物)을 제거하는 한편 탈취(脫臭)와 훈증(薰蒸)처리 등 특수 보존처리(保存處理)를 하였다.의상(衣裳)의 규격은 가사(袈娑)와 가로 260cm, 세로 80cm이며 장삼(長衫)은 기장 103cm, 길이 122cm 이다.
영원사지보감국사부도(瑩源寺地寶鑑國師浮.밀양시 내일(활성)동 112)
밀양시 활성2동 구서원(舊書院) 마을에 있는 이 영원사지 보감국사 부도(瑩源寺地 寶鑑國師 浮屠)는 1972년에 경상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 되었다.본래는 이 부근에서 파손(破損)된 채 흩어져 있던 유구(遺構)들 가운데서 유사(類似)한 것 끼리 모아서 복원(復元)한 것으로서 불완전한 모양의 부도(浮屠)인데 이것을 보감국사 부도탑(寶鑑國師 浮屠塔)으로 인정할 만한 근거와 가치는 사실상 희박하다 하겠다. 그러나 이곳에는 고려 충숙왕(忠肅王)때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으로 비문(碑文)을 지은 보감국사비(寶鑑國師碑)가 있었고 그 비문 중에 보감(寶鑑)의 탑호(塔號)를 "묘응(妙應)"이라고 한 사실등으로 미루어 보아 필경 보감(寶鑑)의 사리(舍利)를 장치(藏置)한 부도(浮屠)가 이 사지(寺地)에 있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여 부도(浮屠)와 관련된 유구(遺構)를 모아 이 부도(浮屠)를 복원(復元)한 것이다.지대석(地帶石)과 기단석(基壇石)을 완전하게 갖추지 못하여 불안하고 탑신(塔身)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부족함이 많으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고려시대 부도탑(浮屠塔) 형식과 옥개석(屋蓋石)등 부재(部材)의 조각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므로 부득히 문화재로 지정을 하게 된 것이다.
영원사지보감국사묘응탑비(瑩源寺地寶鑑國師妙應塔碑.밀양시 내일(활성)동 112)
보감국사(寶鑑國師)는 고려 말기 충숙왕(忠肅王)때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지낸 고승(高僧) 혼구(混丘 : 1251-1322)의 시호(諡號)인데,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이 왕명을 받들어 "조계종자씨산영원사보감국사비명병서(曹溪宗慈氏山瑩源寺寶鑑國寺碑銘竝書)"라는 비문(碑文)을 지었고 이때 세운 비석(碑石)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나 밀주구지(密州舊誌) 등에도 "비상입기지(碑尙立基地)"라고 적고 있어서 이곳에 있었던 것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밀주승람(密州勝覽)에서도 "영원사재자씨산하고려이제현사승보감비명비석상재(瑩源寺在慈氏山下高麗李齊賢사僧寶鑑碑銘碑石尙在)"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봐서 훼손(毁損) 하기 전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 같으나 지금은 유실(遺失)되어 완형의 비석을 대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지대석(地帶石)도 없이 다만 비석의 일부(一部)인 이수(이首)와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귀부(龜趺)의 중앙에는 비신(碑身)을 박은 장방형(長方形)의 홈이 있고 그 둘레에 구름문양(雲文)을 새겼으며 등허리에는 귀갑문(龜甲文)이 정연하다. 귀두(龜頭)의 목은 바로선(直立) 자세이고 입을 벌린 괴수(怪獸)의 형태인데 조각은 비교적 섬세하다. 이수는 원상(圓狀)의 삼각형으로 앞뒤에 두 마리씩의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형상을 하고 있어 고려시대 탑비(塔碑)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
영남루가 최초로 창건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에 그 전부터 있었던 작은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하여 개창하였다고 하며,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1844년(현종 10년)에 재건한 것으로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3대명루(名樓)로 일컬어지고 있다.영남루는 응천강(凝川江)에 임한 절벽 위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이 5칸이요, 측면이 4칸으로서 간격을 넓게 잡은 높다란 기둥을 사용하였으므로 누마루가 매우 높으며 그 규모가 웅장하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있어서 층계로 연결된 침류당(枕流堂)이 서편에 있고, 능파당(陵波堂)이 동편에 이어져 있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사이는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보며 좋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공포(공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귀면(鬼面)을 나타낸 화반(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안둘레의 높은 기둥위에 이중의 들보(樑)를 가설하고 주위의 외둘레 기둥들과는 퇴량(退樑)과 충량(衝樑)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충량은 용의몸(龍身)을 조각하고 천장은 지붕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천진궁(天眞宮.밀양시 내일동 39)
천진궁(天眞宮)은 영남루 경내의 북쪽에 있는 건물이다. 이 자리는 본래 현종 6년(1655년)에 부사(府使) 홍성구(洪聖龜)가 창건한 요선관(邀仙官)이었는데 이 건물은 본래 전패(殿牌.임금을 상징하는 ‘殿’ 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세운 나무패. 공무(公務)로 간 관리나 그 고을 원이 절을 하고 예(禮)를 표시하였다.)를 봉안한 공진관(拱辰館)의 부속 건물로서 경종 2년(1722년)경부터 공진관(拱辰館)을 대신하여 전패(殿牌)를 보관했던 객사(客舍)로 추정된다. 그 후 영조 15년(1739년)에 불타버린 것을 영조 25년(1749년)에 부사 신준(申晙)이 재건하였으며, 헌종 10년(1844년)에 부사 이인재(李寅在)가 다시 크게 보수하였는데, 이 때 일주삼문(一柱三門)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910년에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전패(殿牌)가 땅에 묻히고 객사의 기능도 해제된 채 일본(日本) 헌병(憲兵)들에 의해서 옥사(獄舍)로 강점(强占) 당하기도 했다.1952년부터 단군봉안회(檀君奉安會)가 발족되어 단군(檀君) 및 삼국의 시조왕(始祖王), 고려 태조의 위패(位牌)를 모시면서 대덕전(大德殿)이라 이름을 짓고 해마다 음력(陰曆) 3월 15일을 어천대제(御天大祭)로, 10월 3일을 개천대제(開天大祭)로 하여 춘추(春秋)로 향사(享祀)를 올려오다가, 1957년 본전(本殿)과 일주삼문(一柱三門)을 다시 수리하여 단청(丹靑)을 하고 종전 "대덕전(大德殿)"을 "천진궁(天眞宮)"으로 정문을 만덕문(萬德門)이라 고쳐 오늘에 이르렀다.천진궁(天眞宮)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출목(二出目)의 주심포식(柱心包式)으로 단층 팔작(八作)의 겹처마 집이다. 기단(基壇)은 두단으로 되어 있는데, 계단 없이 출입되는 낮은 단이다. 전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은 심벽(心壁)으로 둘러 막았다. 전면의 중앙은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양쪽 칸은 판벽(板璧) 사이에 두 여닫이문만을 달았다
무봉사(舞鳳寺. 밀양시 내일동 37번지)
강언덕에 우뚝 솟은 영남루와 밀양강과의 조화로 그림 같은 풍경을 지닌 운치있는 사찰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493호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유명합니다. 밀양의 지세가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무봉사로 이름하였다 전합니다.
또한 무봉사에는 무봉사 태극나비가 있습니다. 어느 날 춘삼월도 아닌 음력2월에 갑자기 한 무리의 나비가 떼를 지어 날아와 무봉산(아동산)을 뒤덮으며 몇 일 동안 날아다니더니 갑자기 흔적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괴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봉사를 감싸고 날아 다녔던 나비의 날개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이상하게 여겼고,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건국되면서 어지럽던 사회가 마침내 태평성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가끔 이 태극나비가 무봉산(아동산)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에 경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비는 조선조 5백년과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가 1945년 8월 15일 오후 3시쯤 태극나비를 한 나비가 무봉사 법당에 날아들었다고 합니다.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密陽 舞鳳寺 石造如來坐像.보물 제493호.밀양시 내일동 37번지)
신라 혜공왕 9년(733)에 법조가 영남사의 부속암자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무봉사의 대웅전에 모셔진 높이 0.97m의 불상이다. 네모진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판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으나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고 둥근 편으로 가슴이 다소 움츠러들어 보인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너무 두꺼워서 옷주름과 신체의 굴곡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2줄의 볼록한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고, 그 안에 덩쿨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광배의 바깥부분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광배의 앞면에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를 조각하였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표현은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과 같은 것으로 드문 예이다. 단정하고 양감있는 신체표현, 간략해진 옷주름, 화려하고 복잡해진 광배의 표현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아랑각(경남 밀양시 밀양시 내일동)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장미꽃보다도 더 검붉은 아랑 낭자의 정열을 연민하며 영남루 아래 죽림 속에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하는 곳입니다.
매년 밀양아리랑대축제 행사를 통하여 선발된 모범 규수들이 제관(祭官)이 되어 이곳 아랑각에서 음력 4월 16일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현재의 아랑 영정은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아랑사당에 영정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화백의 솜씨를 빌어 제작한 것을 1963년 10월 9일 직접 밀양을 방문하여 혜사(惠賜)한 것입니다.
아랑사 서편 죽림속에 석비(石碑)가 있는데 비의 전면에 아랑유지(遺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후면에는 융희사년오월일(隆熙四年五月日, 1910년) 이응덕 박상희립(李應悳 朴尙嬉立)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들 인물은 당시 공조(功曺)로서 은퇴한 고을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비를 세운 지점은 아랑의 시신이 유기된 장소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작곡가 박시춘선생 옛집
박시춘 [朴是春/1913.10.28~1996.6.30 본명 박순동(朴順東). 초기 필명 김상화(金尙和)]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색소포니스트, 기타리스트, 작사가, 작곡가.
경상남도 밀양 출생.
1929년 우라타[浦田]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의 곡들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1930년대말부터 1960년대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사의 산증인.1939년 조선악극단의 일본 공연에 참여할 때는 현경섭·송희선 등과 함께 '아리랑보이즈'라는 남성 보컬팀을 만들어 공연. 1958년에는 영화음악에서 한걸음 나아가 직접 오향영화사를 설립해 영화제작. 대한 레코드 작가협회 초대회장(1958),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1961), 예술윤리위원회 부회장(1966). 1982년에는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
[학력]
경상남도 밀양보통학교.일본 다이조 중학교. 일본 오사카 중앙음악학원
[주요 작품]
<몬테 카를로의 갓난이(연주곡)>, <어둠 속에 피는 꽃(연주곡)>, <눈물의 해협>,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전우야 잘 자거라>,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Lucky Seoul(러키 서울)>
추원재(追遠齋.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701)
부북면 제대리 한골에 있는 추원재(追遠齋)는 조선조 성리학의 초조(初祖)인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 1389-1456)가 처음 거처를 정하였고 그의 아들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 : 1431-1392)이 태어나고 자라고 별세한 집터이다. 점필재의 생가(生家)뿐 아니라 그가 만년에 제자들과 토론하고 강학하던 쌍수정(雙樹亭)도 있었고 뒷산에는 점필재의 묘소가 있는 성지(聖地)이다.여러 차례의 전란을 격고 오랜 세월의 변천으로 생가 등 유적의 원상을 지키지 못하다가 순조 10년(1810년)에 선현의 유적이 황폐한 것을 개탄하고 사림(士林)들과 후손들이 합의하여 전래하는 건물을 개조 중건(重建)하여 추원재(追遠齋)라 하고 당호(堂號)를 "전심당(傳心堂)"이라 하였다."전심(傳心)"이라 함은 동방의 성리학(性理學 : 心學)이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에게 전했으며 아들 점필재에게 전하고, 점필재는 김 한휜당(金 寒喧堂)과 정일두(鄭一두)에게 전했으니 점필재는 조선조 심학의 전수자(傳授者)라는 뜻이다.
표충비(表忠碑.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2)
이 송운대사비명(松雲大師碑銘), 일명 표충비(表忠碑)는 서기 1742년(영조18년) 10월에 사명대사(四溟大師)의 5대 법손(法孫)인 태허당(泰虛堂) 남붕(南鵬) 선사(禪師)가 경북 경산(慶山)에서 돌(爲石)을 가져와서 현재의 자리(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表忠碑閣)에 세운 것으로 좌대를 포함한 총높이는 380cm, 비신의 높이 275cm, 너비 98cm, 두께 56cm의 거대하고 장중한 비석이다.비석의 정면에는 "유명조선국밀양표충사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靈堂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과 "표충사사적기(表忠祠事蹟記)"를 음각(陰刻) 하였는데, 정면 비문의 내용은 사명대사 임유정(任惟政) 스님이 무안면 고나리에서 아버지 수성(守成)과 어미니 달성서씨(達成徐氏) 사이에 태어나시어 67세로 일생을 마감하시기까지 54년에 걸친 승려생활을 하신 행적과 함께, 임진, 정유왜란 때에 빛나는 구국의 충렬을 찬양한 것으로 영조때 상신(相臣)인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이 글을 짓고, 퇴어(退漁) 김진상(金鎭商)이 글씨를 썼으며, 영상(領相)을 지낸 지수제(知守齊) 유척기(兪拓基)가 전액을 썼다.이 비석은 일명 한비(汗碑 : 땀흘리는 비)라고도 하여 국가의 큰 사건이 있을때를 전후하여 비면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마치 구슬땀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염려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고 신성시하고 있다.
사명대사유적지(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일원)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일대는 학계 등 전문가들의 고증을 통해 “사명대사 유적지”로 선정되어 지난 1992년 10월 지방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은 수백년
동안 풍수사(風水師)들이 찾아와 전하기를 뒷산은 천리를 달려온 목마른 말이 엎드려 물을 먹는 형상이요, 주산은 동자형이며, 그 아래 좌청룡과 우백호가 감돌고, 맑은 연못이 있으며 삼국의 명장이 날 명산이라 하였습니다.이곳에서 사명대사의 어머니 달성 서씨는 어느날 흰 구름을 타고 누런 두건을 쓴 금인(金人)이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 머리가 허옇게 쉔 신선을 만나 예를 올리는 모습을 꿈에 본 후 대사를 잉태하였으며,1544년 갑진(甲辰) 10월 17일에 부친 임수성 공과 달성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7세 때 할아버지 효곤에게 정훈을 배우고, 13세에 황유촌 여헌선생 문하에서 맹자를 배우다가 황악산 직지사로 들어가서 신묵화상의 제자가 되어 선문(禪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성지입니다.
마을 뒷산 서쪽 기슭에 조부모와 부모의 산소가 있습니다.
총면적 49,146㎡로 사명대사유적지 및 생가지 복원사업을 2006. 4. 7 완료하였습니다. 사명대사유적지는 숙청사,분충서난문,육영당,사명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청동함은향완, 사명대사 가사장삼 등 복제품 65점과 평양성탈환 디오라마, 영상실,정보검색실 등이 사명대사 기념관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충의문, 원형광장, 사명대사 동상 등이 있습니다.
참고자료 : 문화재청 자료. 밀양시청 자료
첫댓글 아무따나님, 좋은 자료 많이 올리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올려주신 자세한 좋은 자료 감사히 보았습니다. 아무따나님 !!! ..................... 조기현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