슴베를 품다 / 이은서/ 2020년 강원문학 신인상

오래전 사람들은 사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돌멩이나 장독에게도 이름을 지어주고 심지어 신으로 모시기까지 했을 것이다. 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물들 간에도 정신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예를 들어 운동화에 묶여 있는 끈이나 빨랫줄에 매달려 있는 집게 같은 게 그렇다. 그 사물들은 비밀 없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교감 없이 관계 맺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숨겨진 비밀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라볼 때가 있는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도 아니면서, 뭘 그리 궁금한 눈으로 보시는게요?” 예전 그대로의 대장간이 남아 있는 시골에 살고 있는 내가 가끔 기웃거리면 대장간 주인이 겉모습만 보면 다 안다는 듯 말을 건다. 호미는 알아도 슴베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슴베는 호미나 칼, 괭이의 손잡이 부분에 들어박히는 뾰족한 쇠붙이를 말한다. 아직 호미나 낫이 되지 못한 채 나란히 줄이어 놓여 있는 슴베를 볼 때면 왠지 발가벗은 여인의 몸처럼 참 수줍게도 누워 있구나 싶었다. 슴베. 어째서 저런 이름이 붙었을까. 왠지 그 어감에서 아픔을 읽는다. 가슴을 베는 것.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은 그 글자의 모양새 때문이리라. 예전에 할아버지는 좋은 농기구를 구하기 위해 대장간에 직접 가셨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흔들어보고 하며 몇 시간을 보내셨다. 아무리 살림이 곤란해도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농기구를 반드시 손에 넣고 돌아오셨다. 할아버지가 장에서 돌아오면 쪼르르 달려가 할아버지의 손을 쳐다보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의 바람도 무색하게 달랑 호미 한 자루만 들고 오시기도 했다. 하다못해 뻥튀밥이나 호떡이나 엿도 아닌 고깟 호미 한 자루가 반갑지 않았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내 손에 호미를 쥐여주었다. “이것이 인간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는 물건이여.” 그 말씀이 딱 맞다고 느낀 건 내가 호미를 들고, 온 들판을 쏘다니며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치다가 자루를 부러뜨렸을 때다. 할아버지한테 처음으로 매를 맞았을 때, ‘그래, 나는 호미보다 못한 존재구나’하고 생각했다. 그깟 호미 하나 때문에 나를 때리다니 싶었다. 할아버지는 다시 호미를 고쳐놓고는 훌륭한 호미는 슴베가 좋아야 하고, 슴베를 받아들이는 나무와 궁합이 맞아야 한다고 하셨다. 홈쇼핑에 가끔 칼이 등장한다. 쇼호스트들은 모두 그 칼날이 얼마나 단단하고 예리한지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그들이 잡고 있는 손잡이 속에 들어있는 슴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무를 자르려고 칼을 깊숙이 넣었다가 빼지 못한 적이 있었다. 설마, 힘없는 무가 칼날을 깨물고 놔주지 않는다고 누가 믿을까마는 가슴을 베인 것들은 쉬이 입을 열어주지 않았다. 힘을 주자 칼자루가 떨어져 나갔다. 슴베를 잡아주지 못하고 빠져 버린 것이다. 자루가 제 역할을 잃자, 칼날 또한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슴베만 내밀고 있다. 칼자루 속은 휑하다. 그 자리에 다시 슴베를 밀어넣어 보지만 한번 빠져버린 손잡이는 더 이상 슴베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슴베가 움직일 적마다 가슴을 파였는지 슴베를 잡아주기엔 너무 헐거워져 버린 것이다. 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다. 슴베를 그대로 노출한 농기구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한방에 나란히 줄지어 누워 자는 우리 형제들 같은 모습이었다. 베거나 파거나 할 것에 직접 닿는 부분만큼이나 반대쪽으로 가늘고 길게 붙은 쇠붙이. 직접 사용되는 서린 날 쪽보다 손잡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슴베 부분이 내 눈에는 더욱 날카로운 무기처럼 보였다. 우리가 자는 머리맡에 앉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이눔아들 올망졸망 이리 똑같아 보여도, 고놈이 고놈 같아도, 그 속은 다 다를 거여. 요놈은 속 깊고, 요놈은 듬직하고, 또 요놈은 꾀가 많고…….” 아버지는 우리가 가진 하나하나의 개성을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이 긍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허약한 나는 속이 깊다고, 거친 오빠에게는 듬직하다고, 샘 많은 동생에 대해서는 꾀가 많다고 했지, 결코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봄이 오면 할아버지는 낡은 호미며 낫의 손잡이를 갈아 끼웠다. 손잡이의 재목으로 박달나무가 단단하고 힘을 오래 지탱한다고 했다. 불 속에 던져진 슴베가 충분히 달구어진 다음, 손질해 둔 나무 손잡이 속으로 재빠르게 힘껏 밀어 넣은 후, 큰 돌멩이 위에서 사정없이 내리쳤다. 불에 달구어진 슴베가 손잡이 속으로 단단히 닿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손잡이가 슴베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무 속에 옹이가 숨어 있을 때가 그랬다. 상처 많은 사람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처럼 옹이가 박힌 나무는 슴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나무는 손잡이가 되지 못하고 불 속으로 던져졌다. “제아무리 좋은 쇠로 만든 슴베라 해도 손잡이가 시원찮으면 말짱 헛것이란다.”할아버지는 어린 나를 앞에 놓고, 보잘것없는 농기구 하나에도 세상 이치가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셨다. 세상 모든 것이 서로가 가진 기질을 파악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슴베는 나무를, 나무는 슴베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는 할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이 신비롭게 보였다.문득 셍떽쥐베리가 쓴 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내가 아는 사과나무는 조금도 포도나무를 경멸하지 않았으며, 종려나무도 삼나무를 추호도 경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각자 강하게 굳어지며 자신들의 뿌리를 다른 나무뿌리와 조금도 섞지 않고도 본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인정함으로 서로 공존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가. 한방에 나란히 누워 있던 내 형제들. 지금은 각각의 삶에 묻혀 오래도록 만나지 않는다. 가끔 만날 때는 서로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도 하고 원망도 한다. 쇠붙이와 나무가 분명히 다르듯, 사람들은 서로 모순된 생각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서로 찌르고 찔리기도 하지 않던가. 나를 언짢게 했던 사람들이 준 상처가 나를 피곤하게 했을 때, 어쩌면 그들이 내게 준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받은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슴베에 가슴을 깊숙이 찔리지 않고서야 나무는 손잡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처럼 무언가에 상처를 입어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언가를 싸안는 방법을 몰랐을 수도 있다. 훌륭한 손잡이가 된 나무는 슴베가 날카롭다고 화내지 않는다. 다만 그 날카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뿐이다. 그것을 감싸고 품기 위해 제 몸을 얼마나 어떻게 내주어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서로 찌르고 찔리면서도 비명 없이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은 슴베와 나무가 상대를 받아들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장날이면 가끔 대장간 앞을 서성인다. 괜히 기웃거리며 농사꾼처럼 아직 호미나 낫이 되지 못하고 간택되길 기다리며 놓여 있는 쇠붙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나를 곁눈질로 보던 대장장이가 손잡이로 쓸 수 있는 단단한 것으로는 대추나무와 박달나무 그리고 노간주나무 등이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쇠붙이의 굵기와 힘쓰는 정도에 따라 잘 골라야 한다고 했다. 너무 단단해도 너무 부드러워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링을 끼워서 고정시키기도 하지만 옛것을 고집하는 고객들은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만든 것을 원한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게 나와도 옛것보다 못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고 대장간 주인의 생각도 같았다. 끝이 날카로운 것들을 만나면 나는 슴베를 떠올린다. 그 슴베의 아귀에 딱 맞는 손잡이도 함께 따라온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슴베를 품지 못하고 불에 던져진 나무처럼 등을 보이고 돌아앉았던 때가 많았다. 옹이만 키워나갈 때도 있었다. 따로 떨어지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하나의 훌륭한 호미나 칼이 될 수 있는 것은 슴베를 알기 위한 나무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나 자신을 여물게 만들고, 얼마만큼 문을 열어 상대와 섞여야 하는지 호미를 통해 배웠다고 한다면 할아버지 말처럼 그 호미 한 자루가 인간보다 못할 게 없는 것이 맞긴 하다. <div class="autosourcing-stub-extra" style="-ms-zoom: 1; opacity: 1;">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