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만의 26사단 부대 복귀 / 이원우
엄마는 앞을 제대로 못 보셨다. 평생 동안. 이승에 머무신 66년 중 당신께 가장 슬펐던 일은 아버지의 운명(殞命)이셨을 거다. 나 같은 불효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그 이별이 당신의 가슴을 저미고도 남았으리라.
막내인 내가 겨우 성년을 넘긴 터라, 당신은 내게 모든 걸 맡기셨다. 그러다가 내 나이 스물세 살에 덜컥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고스란히 3년 가까이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 엄마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실 수밖에. 화장실 출입도 제대로 못하시는 당신의 충격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한번은 집에서 관보가 왔다. 엄마 위독 급래! 전화도 통하기 힘든 때라 부랴부랴 군용 열차를 타고 귀가했더니, 오른쪽 팔을 부러뜨린 채 누워 계셨다. 절에 가다가 넘어지셔서 그랬다는 대답이었다. 세상에 일주일 동안 치마폭에 감춰서 고통을 참아내셨다는 말씀에 나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당신은 군대 생활이 어떠냐고 꼬치꼬치 캐물으셨다. 나는 물론 편하다며 얼버무렸지만, 불쌍한 엄마를 안심시켜 드리기에는, 한갓 봄꿈이나 진배없었다. 제대 후 3년만에 엄마는 아버지 곁으로 떠나셨다. 마침내 나는 혈혈단신으로 이 세상에 남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도 26사단이 항상 그리웠다. 아니 이유야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젊은 한때를 거기서 불태웠고, 그리움이 뭐라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자. 한번 가고 싶었다. 이런 품위없는 표현을 쓰기는 싫지만, 무지무지하게, 절말 무지무지게 가고 싶었다. 어쩌면 거긴 못난 아들을 애타게 기더리던 엄마의 혼이 깃들이어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심한 세월만 흐르고, 부산에서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까지는 멀기만 했다.
그러던 지난 9월 13일 새벽 잠결에 무릎을 쳤다. 그래 이참에 95년 9월 13일 육군 하사로 군복을 벗었던 26사단 사령부부를 찾아가자!! 내가 딸한테 얹혀(?) 사는 곳이 여기 용인일진대, 양주시까지 걸려봤자 승용차로 한 시간 반일 거야. 나는 부랴부랴 <<천주교 주소록>>을 뒤져 26사단 불무리 부대 성당 주소를 찾았다. 과연 가능한 일을 내가 하는가 싶어 가슴이 사뭇 떨릴 수밖에. 그런데 있는 것이다. 전화 번호까지 안내되어 있어 다이얼을 돌렸더니 군종병이 친절하게 받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오늘 2012년 10월 14일 마침내 딸아이가 모는 승용차에 몸을 싣고 아내와 함께, 손자랑 넷이서 분당을 거쳐 서울, 그리고 의정 부 도심지를 지나 양주시에 들어섰다. 나는 옷을 바로 고쳐 입고 거수 경례 연습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예비역 육군 하사 이원우, 옛날로 되돌아 가고 싶어 잠시 부대에 복귀했습니다!!
물론 상대는 사단장 ㅇㅇㅇ 소장이다. 그러나 오늘이 마침 일요일이라 사단장은 자리에 없어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승용차 안을 맴돌 뿐이었다. 이윽고 부대 밖에 자리 잡은 불무리 성당에 도착하여 장병(將兵-진짜 장병이다. 일등병에서 중령까지니까)들과 인사를 나누고 최승호 주임 신부와도 손을 맞잡았다. 미사가 끝나고 나니 신부는 나를 특별히 소개했다.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굽히고, 내친김에 '살아 계신 주'를 봉헌했다. 군에 가면 성당에 나오는 병사들은 초코파이/ 교회는 햄버거를 준다는 말이 가슴 아파서 내가 준비해간 '교회 몫과 같은 먹거리'를 나눠 줄 때의 기쁨이란---.
그리고 점심 식사를 했다. 신부와 중령 둘(셋?) 그리고 그들 군인의 부인, 어린이들과 함께 한자리에 앉아. 물론 내가 대접했고.놀라지 마시라. 그게 사목 회의를 겸한 자리였다. 부대 측의 배려에 의해 이윽고 내 발길이 그렇게 닿았었던 사령부 곳곳을 둘러봤다. 산천은 의구하다더니 각 부처는 건물만 달랐지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헌병대도, 본부 중대도, 군악대도, 통신대대도---.힘지어는 영창도 단장(?)을 화려하게 하고 우뚝 서 있다. 돈이 없어 외출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억장이 무너지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럴 땐 빨래거리를 들고 통신대대 옆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 종일 보내곤 했었지. 모두가 그대로였다.
굳게 닫힌 부관 참모부 앞에 서니 실로 만감이 어지럽게 교차하였다. 순간 출입문에 비치는 엄마의 모습. 당신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신다. 46년의 세월은 또 시공 가르고 있었다. 엄마는 땅속에 누워 계시다가 32년 만에 밀양 성당 청산 낙원으로 자리를 옮겨 영면에 드셨다.
아들을 작년에 잃지 않았으면, 26사단 복귀(?)란 꿈에서조차 힘들다. 녀석이 선종하는 바람에 우리 내외가 딸한테서 여생을 보내는데 하필이면 부대와 지척인 용인이다! 내가 믿는 주님의 이 잔인하심(?)을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그래도 좋다고 하자. 낮에 만난 대대장 (중령)이 자기 부대에 와서 한번이라도 좋으니 강연을 해달라는 게 아닌가? 그걸 핑계로 26사단을 다시 찾는 게 가능하다. 성당이든 절이든 교회든(절과 교회는 부대 안에 위치) 가리지 않고 필요로 한다면 내 발로 찾아가리라. 찬불가/ 찬송가/ 성가를 익히는 명분를 거기서 찾을지 누가 아나. 그래 오늘은 만감 중에서 기쁨만 취하자, 아멘!
2012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