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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에 계신 분들에게 진심 한 수은 꼭 담으셔서 이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시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 제자들 그리고 무려 한 120명 정도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다립니다. 정확한 날짜를 말씀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모인 자들이 적어도 생각하고 확신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임박했다. 성령이 오실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그 다락방에 모여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지난주의 말씀이죠.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기다렸다는 것이죠.
그리고 어느덧 10일이 지나갔습니다. 그들의 교회력에 따라 오순절이 되자 약속하신 성령께서 모인 자들에게 임하셨다. 할렐루야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50일이 지난 이 날을 성령 강림절로 지키게 됩니다.
여러분 먼저 오순절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여러분 오순절이 어떤 말입니까? 구약 말씀에 보면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부터 50일 되는 날이 바로 오순절이 됩니다. 이날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 열매를 거둬들인 기념을 통하여서 감사의 절기로 드렸던 날이기도 하죠.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오순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죠. 가나안 땅에서의 새로운 출발, 새로운 삶이라는 그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로 볼 때 오순절에 성령 강림 사건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출발선상 이것이 성령 강림주일 구약시대 오순절로 그들이 여겼던 가치와 동일한 가치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실제 그리스도인들 우리 성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죄 아래에서 옛사람의 삶을 살다가 결국 죽었던 우리를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적 자유와 풍성함을 누리게 된 것을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주시는 영적 자유와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라도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령 충만함이 있어서 우리 주님이 베풀어주신 영적 자유와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종에 재어 베어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의 이 고백이 어떻게 진실된 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영적 자유와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한다. 너무나 아쉽지 않으세요? 그러니 이왕 예수 믿는 것 나에게도 성령 충만 주셔서 우리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풍성하신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되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의 목적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은 어떻게 임하셨는가? 오늘 성경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첫 번째 홀연히 임했다고 이야기 홀연히 이 말은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찾아왔다는 것이죠.
뜻밖에 불쑥 찾아온 손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깜짝 놀라잖아요. 그것처럼 불쑥 찾아온 것인데 특별히 눈 깜짝할 만큼 빠른 순간이라는 의미도 내포되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성령의 역사하심을 그림으로 그려주듯이 이렇게 기록하면서 홀연히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라는 것이죠.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120문도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다락방에 모여서 있었는데요. 그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오시겠다는 약속이죠. 언제 오실지 모르는 거예요. 어떻게 오실지도 모르는 것이죠. 그러니 그들은 예측 불가예요. 시간도 방식도 단 한 가지 오시겠다는 약속만 붙잡고 모여서 기도했다는 것이죠. 이들에게 성령 강림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모여 있던 120명 성도들은 어쩔 수 없이 오신다는 약속만 붙잡고 오로지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힘쓰고 애쓰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은요. 그들에게 부지불식간에 홀연히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이 약속 재림의 때도 동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재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밖에 없어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올라가신 것을 본 그대로 오시겠다 이것 하나밖에 없잖아요. 언제 오시는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됩니다.
여러분 다락방에 모여 있던 그들이요. 조만간 성령이 오시겠다라는 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기도했을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주님 오실 날이 가까이 온 것 같지 않으세요? 끄덕이는 분도 있고 아니라는 분도 있는데 우리의 느낌이 있잖아요. 주님이 곧 오시겠다. 그러면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깨어서 기도하면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홀연히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야 된다.
여러분 이것은 365일 나의 인생을 포기하고 교회에 와서 막 기도만 하고 그렇게 기다리는 저 이단과 같은 선교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의 방향성, 우리의 소망이 주님 모시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삶의 현장에서 기도하며 분투하며 싸우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기도의 자리에 먼저 훈련되어지고 그것이 삶으로 기도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애쓰고 노력하는 성도가 되어야 된다.
여러분 재림의 때를 기다리면서 말씀과 기도 중심으로 살아갈 때에 120명 성도에게 홀연히 성령이 임하셨던 것처럼 주님 다시 오시는 날 홀연히 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끝에는요. 어떤 분들은요 심판의 자유, 어떤 분들은 구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시는 공동체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함으로 홀연히 임하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권면드립니다. 여러분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십시오. 기도의 자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제가 요즘 기도하는 것이 있어요. 우리 금요일날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우리 교회에 새벽 기도 동역자 20명을 세워주십시오. 화요일 기도회에 20명의 동역자를 보내주십시오. 수요 예배 30명의 예배자를 그래도 세워주십시오. 금요일 이 50명의 예배자를 세워주십시오. 주일 성수 100명. 우리 작년 선도 채워지게 해 주십시오. 이게 제 기도 제목이에요.
여러분 어떻게 선착순으로 모집해 볼까요? 왜 웃으세요? 만약에 여러분 돈 천만 원씩 10분에게 주신다면 10분 누가 오시겠어요? 막 앞다투어서 오실 거예요. 여기에 명품 가방 여자분들을 위해서 좋은 차 키 하나씩 놔두고 선착순으로 드립니다. 얼마나 탐나겠습니까? 여러분 그것보다 더 존귀하신 분이 주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자리가 하나님과 예배하는 자리라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이 놓치지 마시고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을 사모하는 경쟁이 불같이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그래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을 주시면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외면하지 마세요. 그거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에요. 붙잡고 나아가야 돼요. 그래야 승리의 삶, 은혜의 삶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늘로부터 임했다는 거예요. 하늘로부터 임했다는 것은 보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무엇 하셨습니까? 세례 받으셨잖아요. 갈릴리에서 요단강에 오셔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에 올라오셨을 때에 나타난 현상이 무엇입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성령의 비둘기가 임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말씀이 임했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가 기뻐하는 자로다.
즉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했고 하늘로부터 말씀이 임했다는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숨을 거두시자.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 짓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죠. 그래서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그 지성소에 그 성서에 누구도 들어갈 수 있어 모두에게 열린 길이 되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잖아요. 히브리서 10장 19절, 20절인데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십니다. 그러므로 같이 읽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여러분 은혜는요 하늘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임하셨잖아요. 그것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에도 그 모든 현상들이 하늘로부터 임한다. 재림의 때도 우리 주님 하늘로부터 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하늘에서부터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요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땅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지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야고보서 기자가요. 지혜를 이야기하면서 지혜에는 땅의 지혜가 있고 하늘의 지혜가 있다고 소개를 해줍니다. 여러분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 이 땅의 지혜를 구분했는데 이 땅의 지혜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그것은 정욕의 것이오 귀신의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두 가지 단어를 선언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따라 합시다.
시기, 다툼
이게 땅에서 오는 지혜래요 여러분 시기하고 다툼하는 거예요. 이거 땅에서 주는 지혜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것을 거절할 줄 아는 은혜가 있어야 됩니다.
반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무엇인가? 야고보서 3장 17절 18절은 이렇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지혜가 나에게 임하기를 소망하면서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그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로부터 난 지혜, 즉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선결하고 화평하고 선한 열매 가득가득 맺어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 온갖 좋은 선물을 다윗에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주신다. 그렇게 성경은 말씀해 주세요. 이 말씀을 기억하셔서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을 봐야, 하늘을 땅만 보면서 내가 뭐 하면서 살아야 되지, 어떻게 살아야 되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지 여기에만 매진하지 마시고 하늘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본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삶을 주관하시옵소서 하늘을 보는 사 저와 여러분들이 이 하늘을 바라봄으로 인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은사 온전한 선물이 풍성해지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세 번째는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임했다는 거예요. 우리 2절 말씀 오늘 본문 2절인데요.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여러분 이 구절을 한번 보십시오. 여기에서 보면 성령에 대해서 강조하는 부분인데 뭘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람입니까? 소리입니까? 바람 같은 소리니까 강조하는 게 뭐예요? 소리죠? 소리
그런데 우리는 하도 많이 바람 같은 성령이요. 바람 같은 성령이 이렇게 외쳐서 소리를 놓쳐버리지 소리가 그 집안에 가득했다. 근데 바람 같은 근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이라고 돼 있죠. 급하다는 것을 아주 거세게 몰아치는 그러한 모습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돌풍이 일어날 때 하면서 불잖아요. 그러한 돌풍이 120명이 모인 다락방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가득해서 휘몰아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그들은요. 완전히 그 바람 소리에 장악되었을 거예요. 성령께서 다락방 안에 충만하게 임하셔서 성도들을 완전히 장악해버린 상황을 우리는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120명의 성도는요. 급하고 강한 이 바람 소리 같은 성령에서 완전히 압도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막 돌풍 막 몰아칠 때 막 어떻게 할 줄 몰라 하잖아요. 예전에 제가 같이 사용했던 목사님 제주도를 가셨는데 휴가 때 그때 엄청나게 제주도에 태풍이 몰아치는 밖에 있는데 태풍이 오는데 무서워가지고 차를 몰고 가는데요. 막 나를 덮칠 것 같더라는 거예요. 물과 바람에 압도당했어요.
그러니까 그 방 안에서 그 소리로 인해서 압도당하는 현장이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나의 인생에 어디에 압도당해서 다스림을 받느냐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으로 살아가게 되면 결국에는 사망으로 이르게 되고요. 순종의 종으로 살아가면 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 그리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내가 본다. 그러면서 고백했던 것이
오호라 나는 권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고백한 것 아니겠어요? 즉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들여다보았다는 거예요. 성령이 완전히 지배받지 못하고 내 안에서 역사하는 저 죄악된 것들이 나를 흔들고 있다. 나를 압도하려고 한다. 그 모습을 볼 때 야 비참하구나 비참하구나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소망한 게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에요. 주님이 나를 시 여러분 이 시대의 사람들을 보면 어디에 정복당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렇죠. 우리 젊은이들은 완전히 미디어에 장악되어서 살지 않고 없으면 못 삽니다. 그러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어떤 분들은요. 돈의 노예 속에서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정신 차리고 한번 내 삶, 내 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나를 지배하려고 하는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것들이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가 호시탐탐 삼킬 자를 찾으면서 웅크리고 있기 때문에 빈틈만 보이면 확 덮쳐서 자신의 종 만들려고 사단이 오늘 이 시간에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요. 그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성령으로 완전히 압도당하는 장악함을 당하는 삶이 되어야 된다.
저와 여러분들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우리의 삶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누가 나를 지배하느냐 어떤 것이 내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느냐 매우 중요한 것이죠.
네 번째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는데 그것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 그렇게 기록합니다. 3절 읽어보십니다. 3절 읽어보실까요?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여기서 또 강조하는 건 뭐예요? 불입니까? 혀입니까? 앞서서 들으셨으면 쉽게 알 수 있겠죠 불이 아닙니다. 혀입니다. 그러니까 불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에요. 불의 역사는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지금 강조하는 것은 혀라는 거예요. 혀가 불 같은 혀가 누구에게 120명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쉽게 말해서 이렇게 머리 위에 불이 보이듯이 임했다는 거예요.
여기 앉아 있는 분들에게 혀이 생긴 불, 빨간색 혀같이 생긴 불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위에 임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3절을 의역해보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각 사람에게 임했다는 즉 모든 사람에게 불같은 혀가 임한 것이죠.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혀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언어입니다. 언어 이 구절을 4절과 연결시켜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쉬울 거예요. 4절에 보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어 있죠. 여기서 다른 언어에서 언어가 3절에 기록된 혀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자 120명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불 같은 언어가 임한 것이죠. 각기 주어진 언어로 그리고 말하기 시작한 거예요.
이처럼 성령의 결과는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올해 모 계열사의 핸드폰에 통역 기능이 탑재되었다는 것을 광고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즉 미국 사람과 지금 제가 통화할 때 제가 여기에서 한국말로 여보세요 하면 저기서 일로 하면 제가 한국말로 듣고요. 저분은요. 영어로 듣는 거예요. 제가 한국말로 말하면 듣는 사람이 영어로 듣고 영어로 말하면 한국말로 들리고 좋은 세상이죠. 통역 기능 이것이 탑재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 120명의 성도들이 말할 때 분명히 자신의 언어로 말했을 거예요. 그런데 불 같은 혀가 임하자 이걸 통역 기능이라고 얘기하시면 안 돼요. 그것과 같이 마치 흡사한 나는 내 말로 이야기하는데 성령의 불이 언어를 바꾸셔서 각 나라의 언어로 선포하게 했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고린도서에 있는 성령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이때 한 번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11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11절 같이 읽습니다.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 하고,
무엇을 위해서요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서 즉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생명 있는 복음을 위해서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각 나라의 언어로 선언하게 하신 것이죠.
여러분 다른 언어의 목적은요. 바로 하나님의 큰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기도해야 할 제목이 있어요. 하나님 우리 언어를 바꿔주십시오. 영어를 하고 중국어를 하고 이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가 변화되게 하십시오. 특별히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말이 세상과 다른 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분열의 말이 아닌 하나됨의 언어로, 다툼의 언어가 아닌 화해의 언어로 할렐루야 거짓의 언어가 아닌 진실의 언어로, 낙심의 언어가 아닌 소망의 언어로, 원망의 언어가 아닌 감사의 언어로, 슬픔의 언어가 아닌 기쁨의 언어로, 질투의 언어가 아닌 사랑의 언어로 죽이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로 우리의 입술에 성령의 물을 보내주셔서 찢어주시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다른 언어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요. 우리의 말로 인해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복음 전하 되어지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의 언어가 바뀔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120명의 이 사람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주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 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서 주 원인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4절이 읽습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언어를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의 충만함 따라 합시다.
충만함
충만함이 있었다라는 거예요. 여기에서 충만이라는 것을 한번 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충만 이것은요. 가득함이라는 것으로 대체할 수가 있겠죠. 여러분 가득함이라는 걸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뭐가 떠오릅니까? 이 장이 있으면 여기에도 가득함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가 있잖아요. 가득함이라는 것은 먼저 여백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따라서 성령 충만할 때 마귀 같은 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여백과 같은 틈이 있으면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 보니까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라. 그렇게 이야기 분을 내어도 그날 지나가지 말고 마귀에게 틈 주지 말아라. 그런 말씀을 하면서 마귀에게 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이왕이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성령 충만하여 마귀에게 틈 주지 않는 그러한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득함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디에서 요란한 소리가 납니까? 빈술에 그래서 옛말이 있잖아 빈수레가 요란하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따라서 내 마음에 소리가 있을 때가 있어요. 공동체 소리가 날 때가 있죠.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그 안에서 어떤 소리가 나냐 다툼의 소리가 나고요.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요. 시기와 미움의 소리가 나오고요. 원망의 소리가 고통의 소리가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곳저곳에서 요란한 소리들로 인해서 우리를 혼잡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에게 성령 충만한 은혜가 있어서 나의 마음이 평안하고 우리 교회가 평안하고 우리 가정이 평안하고 그러한 은혜의 삶이 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그대로 임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여러분 가득함이라는 것은 결국 가득 차면 어떻게 돼요? 차고 넘치죠. 그래서 다윗이 고백하잖아요. 내 잔이 차고 넘치나이다. 가득해서 넘치는 거죠. 이왕이면 저와 여러분들에게 차고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이 차고 넘치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내 안에 사단이 가득해서 사단이 차고 넘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된 일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 3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내 마음에 가득하여서 내가 성령을 속이느냐 사단이 가득하면 누구를 속인다고요? 성령을 속이는 자가 되어
또한 5장 17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 즉 사두개인의 당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마음의 시기가 있어서 뭘 했냐 하면요. 그 시기 때문에 사도들을 붙잡아서 오게 가두었다.
그렇게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은 새 친구를 향해서 누구갓네살 왕이요 풀무불을 일곱 배나 뜨겁게 해서 던져 넣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분이 가득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안에 사단이 가득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성령이 가득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할렐루야 이 성령의 열매들이 가득 차 넘쳐 세상 가운데로 흘러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나무가 요셉의 나무처럼 담장을 뛰어넘어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흘러감에 축복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가 있죠.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령 충만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성령이 아주 강하고 급한 바람의 소리처럼 압도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을 압도하셨으면 좋겠다. 이 성령이 언어로 우리 혀로 임하셔서 우리의 언어가 변화되어져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언어로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리며 더불어서 가득함을 생각하셔서 저와 여러분 가운데 무엇보다도 성령의 열매들이 세상 가운데로 흘러갑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