豫章沙門宗鏡提頌綱要序 종경觀夫空如來藏하고 碎祖師關하야 獨露眞常이 無非般若니 觀하건대 무릇 如來藏을 비우고 조사의 관문(祖師關)을 부셔서(碎) 홀로 참답고 항상한 것(眞常)을 드러내는 것은 般若아닌 것이 없다. 설의如來藏은 有空如來藏하며 有不空如來藏하니 空如來藏은 所證眞理也요 不空如來藏은 能證眞智也라 眞理를 謂之空如來藏者는 眞理絶相호미 如彼太虛하야 廓無纖翳故也요 眞智를 謂之不空如來藏者는 眞智照理호미 如彼赫日하야 當空顯現故也니라 皆謂之藏者는 藏之爲物이 中虛且實하니 中虛故로 可比於空也요 且實故로 可比於不空也니라 今所謂空如來藏者는 蓋異於空不空之空藏也니 以碎祖師關으로 爲對故也니라 物所畜而封不露曰藏이니 八識之藏이 隱覆自性如來일새 故名如來藏이니라 關者는 以不通去來로 爲義니 祖師眞機는 聖解難通이요 凡情莫透일새 故名爲關이니라 不妄曰眞이요 不變曰常이니 眞常者는 生佛平等之大本也라 空彼如來藏하고 碎彼祖師關하야 令眞常獨露가 無非般若之功也니라 如來藏에는 空如來藏과 不空如來藏이 있는데, 空如來藏은 證得할 바의 眞理이고 不空如來藏은 能히 證得한 眞智라. 眞理를 空如來藏이라 말함은 眞理가 相이 끊어진 것이 마치 큰 虛空과 같아서 탁 트여 조그만 티끌도(纖翳) 없는 까닭이고, 참 지혜(眞智)를 不空如來藏이라 하는 것은 참다운 智慧가 이치를 비추는 것이 마치 저 빛나는 太陽과 같아서 虛空에 환하게 나타나는 까닭이다. 그것을 장(藏)이라 말하는 것은 그 藏[갈무려져 있는]이 物件 됨이 속이 텅 비기도 하고 꽉 차기도 하니 속이 빈 까닭에 가히 虛空에 비유하고 또한 꽉 차있는 까닭에 불공(不空)에 비유한 것이다. 이제 空如來藏이라한 것은 대개 空이다, 不空이다 하는 공장(空藏)과는 다르니 祖師의 關門을 부수는 것으로서 대상을 삼는 연고니라. 事物을 쌓아두고 봉하여 드러나지 않음을 장(藏)이라 한다. 팔식(八識)의 藏이 自性如來를 숨겨 덮고 있는 까닭에 이름이 如來藏이라 이름함이다. 관(關)이란 去來가 通하지 않는 것으로 뜻을 삼음이니 祖師의 참된 기틀은 聖人의 知解로도 通하기 어렵고 凡夫의 뜻으로는 더욱 뚫기 어려워서 관(關)이라 이름한 것이다. 망령되지 않음이 진(眞)이요 변치 않음이 상(常)이니, 진상(眞常)이란 衆生과 부처의 평등한 大本이어서 저 如來藏을 비우고 저 祖師關을 부수어서 眞常으로 하여금 홀로 들어나게 하면 般若의 功德 아님이 없느니라. 종경三心이 不動하면 六喩全彰이라 七寶로 校功하면 四句倍勝이어니와 若迺循行數墨하면 轉益見知라 宗眼이 不明하야 非爲究竟이니라 三心이 動하지 아니하면(不動) 여섯 가지 비유(六喩)가 온통 드러난다. 七寶의 功을 比較하건대 四句의 偈頌이 倍나 殊勝하지만 만일 글줄이나 따르고 글자나 센다면 더욱 더 知見만 더해진다. 宗眼(眼目)이 밝지 못해서 究竟이 되지 않느니라. 설의三心者는 第八根本心과 第七依本心과 前六起事心이 是니 一眞이 獨露에 三心이 不動하고 三心이 不動하고 六喩斯彰이니라 六喩者는 識心이 不動하면 業障이 自除라 靑色으로 可以爲喩也니 靑色은 能除災厄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無漏功德이 自然具足이라 黃色으로 可以爲喩也니 黃色은 隨人所須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無生智火가 生焉이라 赤色으로 可以爲喩也니 赤色은 對日出火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疑濁이 自淸이라 白色으로 可以爲喩也니 白色은 能淸濁水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恒住眞空이라 空色으로 可以爲喩也니 空色은 令人으로 空中行坐故也니라 識心이 不動하면 三毒이 自消라 碧色으로 可以爲喩也니 碧色은 能消諸毒故也니라 功用之所以至於如此者는 只緣持無相經하며 悟無我理하며 行無我行故也니 雖布施七寶之功이라도 不若受持四句之爲愈也니라 布施七寶가 所以爲劣者는 七寶는 人間世之所重也라 布施에 但感有漏之果하야 終未免於輪廻일새 故로 劣也요 受持四句가 所以爲勝者는 四句는 超凡悟道之具也라 受持에 超生脫死하야 以至究竟일새 故로 勝也니라 優劣은 且置하고 只如四句를 如何受持하야사 便得超生脫死오 言言이 冥合本宗이요 句句가 廻就自己어니와 其或未然인댄 增長我人知見하야 終無解脫之期하리라 三心은 第八根本心(아뢰야식:근본마음)과 第七依本心(말라식:근본을 의지하는 마음)과 前六起事心(前六識)이다. 하나의 진(一眞)이 홀로 드러나면 三心이 不動하고 三心이 不動하므로 여섯가지 비유(六喩)가 여기 나타난다. 六喩란 一. 識心이 不動하면 業障이 저절로 없어지는 까닭에 靑色에 비유한다. 靑色은 能히 재액(災厄)을 제거하는 까닭이다. 二. 識心이 不動하면 無漏功德이 저절로 갖추어지는 까닭에 黃色에 비유한다. 黃色은 사람이 구(求)하는 것을 따르는 까닭이다. 三. 識心이 不動하면 生滅이 없는 智慧의 불(智火)이 나므로 赤色으로 비유하니 赤色은 해(日)에 대해서 불을 내는 까닭이다. 四. 識心이 不動하면 의심과 혼탁이 저절로 맑아져서 白色으로 비유하니 白色은 能히 흐린 물을 맑히는 까닭이다. 五. 識心이 不動하면 항상 眞空에 머무르는 까닭에 空色으로서 비유하니 空色은 사람으로 하여금 空 가운데서 다니고 앉게 하는 까닭이다. 六. 識心이 不動하면 三毒이 저절로 녹는 까닭에 벽색(碧色)에 비유하니 碧色은 能히 모든 毒을 녹이는 까닭이다. 공용(功用)이 여기까지 이른 까닭은 다만 모양 없는 경(無相經)을 가져 無我의 이치를 깨닫고 無我의 行을 行하는 것을 因緣한 것이니, 비록 七寶를 布施한 功이라도 四句를 받아 가지는 것만 같지 못하다 비유한 것이다. 七寶를 布施한 것이 얕은 이유는 七寶는 인간 세상에서 重히 여기는 것이지만 布施하면 단지 有漏의 果報를 얻어서 마침내 輪廻를 면치 못하는 까닭에 얕은 것이고 四句를 받아 지니는 것이 殊勝함이 되는 것은 四句는 凡夫를 초월하여 道를 깨치는 道具가 되므로 받아 지니면 生을 超越하고 죽음을 벗어나 究竟에 이르는 까닭에 殊勝하다 한 것이다. 그러나 뛰어나고 얕은 것은 그만두고 단지 四句를 어떻게 받아 가져야 당장 生을 超越하고 죽음을 벗어날 것인가. 말과 말이 전부 근본종지(本宗)에 契合하고 구절구절을 돌이켜서 自己에게 나아가게 하거니와 혹 그렇지 못하면 더욱 我人의 知見만 길러 마침내 解脫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종경嗚呼라 微宣奧旨이 石火電光이요 密顯眞機여 銀山鐵壁이로다 瞥生異見하면 滯在中途하야 進步無門이며 退身迷路일새 聊通一線하야 俯爲初機하노니 良馬는 見鞭에 追風千里矣니라. 오호라. 은밀히 나타낸 깊은 뜻(奧旨)이여, 石火電光이요. 가만히 나타낸 참된 기(眞機)이며, 銀山鐵壁이로다. 문득 다른 見解를 내면 中途에 머물러서 나아갈 門이 없으며 뒤로 물러날 길도 잃어버리로다. 몸이 迷路에 빠질까 하여 애오라지 한 가닥의 길을 通하여 초학자(初機)를 위하여 이르나니 좋은 말이라면 채찍만 봐도 바람처럼 천리를 달리리라. 설의奧旨는 言旨之玄奧難測也요 眞機는 言機之純而無雜也라 眞機는 一似銀山鐵壁하야 堅固難透며 高逈莫攀이요 奧旨는 如石火電光하야 燦然可見이나 神速難追어든 況今佛이 宣而微宣하시며 顯而密顯하시니 那容擬議於其間哉아 若是過量漢인댄 石火電光을 一捉便捉하며 銀山鐵壁을 一透便透어니와 其或未然한댄 滯在中途하야 進退俱失일새 由是로 欲爲後學하야 開介徑路하려하야 遂於三十二分에 隨分提綱하고 隨綱著頌하노니 利根者가 把來一看하면 則一經之奧旨와 諸佛之眞機가 便見昭昭於心目矣리라 깊은 뜻(奧旨)은 뜻이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말한 것이고 眞機는 그 機가 순수해서 잡됨이 없음이라. 眞機는 銀山鐵壁과 같아서 堅固하여 뚫기 어렵고 높고 멀어 부여잡기 어렵다. 奧旨(깊은 뜻)는 石火電光과 같이 찬란하여 볼 수 있으나 아주 빨라 따르기 어렵다. 하물며 이제 부처님께서 펴시되 微妙하게 펴시고 나투시되 은밀히 나투시니 어찌 그 사이에 思量分別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만약 過量漢(대근기, 출중한 사람)이라면 石火電光을 한번에 척 휘어잡으며 銀山鐵壁을 한번에 확 뚫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면 그 도중에 머물러서 進退를 모두 잃겠기에 하나의 지름길을 열어 주고자 하여 드디어 三十二分에 각각 분(分)을 따라서 강요(綱要)를 이끌어 오고 강(綱)을 따라서 偈頌을 짓노니, 영리한 사람은 가져가 한번 보면 곧 一經의 깊은 뜻과 모든 부처님들의 참다운 기틀이 문득 마음의 눈에 환히 드러남을 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