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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설교 형식의 글은 이미 오래 전에 올린 글입니다. 원어 참고는 모두가 다 글이 바뀌면서 깨졌습니다. 이 글은 현대적 바벨탑 현상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며 기술한 글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함을 심판하시며 흩어지게 하셨던 바벨탑 사건이 다시 현대에 이르러 진행되고 있습니다. 과학의 문명화가 주도되고, 지구가 많은 문제들이 포화상태를 향해서 나아가는 불안과 위기를 인간적으로 느끼면서 다시 인간 스스로 대처하고자 하는 교만함이 점차적으로 강성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지구 운동이란 현대적 바벨탑 현상이 강해지는 교만의 노선입니다. 상대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적인 요소들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 신자들은 깨어 있어서 주님 말씀 생각하며 종말의 최종 종결의 현상의 시점에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다시 올려봅니다.
성경적이지 못한 현대적 바벨탑은 무엇인가?
작성자 : 김종신 선교사
신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bc;n" 나짜브(‘자리잡다’, 다양하게 적용되어 설립하다, 세우다, 놓다, 배치하다).” In the Most High causing nations to inherit, In His separating sons of Adam -- He setteth up the borders of the peoples By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o`roqesi,a 호로데시아(‘제한된 곳’, ‘경계선’, 경계)를 한하셨으니(prota, ssw 프로탓소, ‘사전에 조정하다’, 즉 ‘미리 규정하다)” “He made also of one blood every nation of men, to dwell upon all the face of the earth having ordained times before appointed, and the bounds of their dwellings.”
욥 14:5,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qx 호크(‘재정’ 따라서 ‘지정’(시간, 공간, 양, 노동), 제정한, 한계, 몫, 정해진)을 정하여 넘어가지(rb;[ 아바르(기본어근, ‘건너가다’ 넘겨주다, ~을 넘어가다, ~을 건너다, ~을 통과하다, 간섭하다) 못하게(al 로(신 3:11), ‘아닌’ ‘아니다’ …도 아닌, 결코…아닌) 하셨사온즉”, If determined are his days, The number of his months [are] with Thee, His limit Thou hast made, And he pass not over;
우리 기독인들은 현실을 어떻게 믿음으로 규명 할 것인가? 여기에 따라 미래와 연결 될 것이다. 정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현재와 미래가 바르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믿는다 하면서 지혜라는 이름으로 표리부동의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들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현실을 도외시 한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현실과 타협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일관되게 표출하는 경우이다.
현실적으로 실존의 욕망이 강한 인간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려 하는 성향이 강하다. 현실은 거짓말이 너무 편하게 통용되는 시대이다. 더욱이 현대적 힘은 약한 문화를 길들여가는 방식을 거짓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이 세대를 적극적으로 유린해 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는 현대인들의 얼굴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리워지 진다. 현대 인간의 얼굴과 지구의 마지막과 연결고리가 있다는 차원에서 드러나는 현대적 특질이다. 인간 얼굴에서 드러나는 만상(萬狀)이 현대 지구적 통합 구조가 어떻게 일그러지게 하는지? 근원의 문제로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는 인간성 상실이 깊어진 지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더욱이 “왜, 현대인들이 웃는데 우울한가?”의 문제에서 그 방점(傍點)이 찍히고 있다. 이는 현대 인간성 상실 문제와 직결되는 물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의 보호막이 되는 근본 뿌리가 점진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지구적 변화에서 비롯되는 한이 쌓여가는 물음이다.
눌림을 당하는 인간 사회구조를 말한다. 헌데 이것이 가장 합법적인 지구적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바로 거대한 지구가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매달려서 전전긍긍하는 현대 인류의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자율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가 막혀 가는 현실 공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지구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힘에서부터 비롯되는 성질이다. 그래야 국민들이 자국 사회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가고 원망이 깊어져가는 것이다.
자국 중심의 희망의 사회가 국민들에게 기대가 되고 행복한 사회 환경이 주도하게 되면 자국중심의 에너지가 강해지는 것 아닌가? 어떻게 세계화가 확산 될 수 있겠는가? 자기 사회 중심이 되는 시민들의 얼굴이 굳어지고 결국 자기 사회 기피 환경이 강성해 지는 것이다.
본인은 이 문제를 본 주제와 연관해서 함께 기술하려고 한다. 특히 우리 기독인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본 내용을 위해서 제시되는 성경구절의 내용들은 성경 전체 여섯 곳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 주고 있는 말씀이다. 물론 그와 연결해서 말해지는 내용들은 좀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현대인들의 ‘웃는 상이 오히려 우울하다는 것’이며, 그 근원이 왜, 이 성경 구절들에게 있다는 것인가?
본인이 소개하는 이 성경 구절들은 세계 안에 각국가적이고 민족적인 경계, 즉 한 국가적 울타리 배경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현대가 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세계화적 배경은 분명히 아니다. 먼저 이 점을 확실히 하고서 시작을 해야 한다.
본 성경구절들은 ‘세상과 그 안에 실존하는 모든 의미들이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규정되었으며, 지속 되는가’에 대한 해답이 제시되어 있는 성경구절들이다. 이것은 지상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규정과 관계되는 내용들이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대한 공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색적으로 이것을 역행하고자 하는 힘이 오늘시대 속에서 강성해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세계화이다. 이는 현대 지구 종결을 지향하는 시점에서 현대판 바벨탑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점이 바로 오늘 ‘현대인들이 웃지만 우울증의 증세’에 빠지게 하는 근원이다. 이 점을 유의하면서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보다 앞서서 기존의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강하게 안착되어 있는 의미를 바로 잡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본인이 예로 제시하는 성경구절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셨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여기서 “한 혈통”이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인류의 대표 아담으로부터 시작 된 인간 인격성의 통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아담으로부터 시작 된 인간은 혈통이 하나라는 차원을 나타내고자 한 표현이다.
즉, “한 혈통”이란, 인간이 동물이나 그 어떠한 물질과 결합되어 파생 된 생물 형태의 존재나 중간형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금 인류의 모습임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허지만 그 다음이 중요한 것이다. 연대를 정하시고, 경계를 정해놓으시고, 이러한 법칙을 넘지 말도록 해놓으셨다는 ‘하나님의 규정’인 것이다.
본인은 여기에 역점을 두고서 설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류와 인류 사회가 바르게 지속되고 문제가 없어지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자 최소한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서를 부정하고 인간이 제멋대로 지역들을 재설정하거나 파괴하고, 다르게 건설하고, 이론을 세우는 것 등의 이유들에 의해서 인류와 인간 사회가 복잡해가는 것이다.
본인은 여기서 연대 문제는 말하지 않겠다. 현대인들이 웃는데 왜 우울한가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다. 그것을 성경에서 지적해 놓은 ‘경계의 문제’로 풀고자 해야 할 것이다. 먼저 서두에서 소개한 세 구절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 보도록 하자!
먼저는 신명기 32:8에 제시하는 내용이다.
신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hl'WbG 게부라, ‘경계선’, ‘지역’ 지경, 경계, 장소)를 정하셨도다(bc;n" 나짜브(기본어근; ‘자리잡다’, 다양하게 적용되어 설립하다, 세우다, 놓다, 배치하다, 공고히 하다).” In the Most High causing nations to inherit, In His separating sons of Adam -- He setteth up the borders of the peoples By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이것은 이스라엘과 관계해서 민족별로 경계를 정해놓으셨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민족별 경계라 할 수 있다. 이 민족별 경계란 12지파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의 구분은 영원한 갈림이나 국가적 경계를 의미하는 구분이 아니다. 즉, 오늘 날처럼 세계화적 문화 컨셉과 같은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화라는 이름아래 전 세계의 지역 경계가 없어지고 문화경계로 세계를 통폐합하는 것은 오늘의 지구적 통합 현상이다. 그래서 문화정책이란 개념이 약 100년 전부터 등장하였고, 그 동안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에 역행하는 인간의 교만성이다.
이스라엘과 관계해서 주어진 경계의 문제는, 한 구조(부족, 나라와 같은 구조)안의 서로 존중성이 깔린 형제, 혹은 지파별 경계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지파별 경계에 의해서 국가 내의 지역들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철저히 이 지파별 경계에 의해서 사회구조가 형성되고 기구들이 설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국가나 사회형태의 기본이 바로 이 지파별 경계가 되는 것이다. 12 지파라는 단위가 국가 기반의 지역 틀로 구성 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모든 나라마다 사회의 기본 경계가 있고, 그 기본 경계에 의해서 그 사회는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든 이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그 사회가 약화되어 가다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가 점진적으로 붕괴되어가는 잘못된 과도기이고, 나라가 구조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때는 사회 혼란과 흉흉한 소문이 사회를 어지럽혔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 사회가 어떠한 형태로든 피지배적인 형국으로 들어가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율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자기 중심의 지역 경계 구도로 형성 된 국가 기반이 흔들리고 무너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이 바로 국민들의 얼굴에서 웃지만 우울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며, 홍콩 원주민들의 모습은 이를 반영해 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볼 수 있다.
홍콩은 영국이 150년 동안을 조차하여 다스리면서 외형적으로 잘 발전 된 도시처럼 되었다. 상대적으로 영국인들의 통치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알려져 있다. 허지만 우리는 지배자 입장이 아니라 피지배자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이다. 영국의 신사성은 철저히 양면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겉은 홍콩을 화려한 도시, 국제도시로 만들어서 자신들을 신사들로 알리고자 조치를 취한 통치행위였다. 허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았을 때 철저하게 원주민들을 압사시킨 정책을 구사했음을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아열대 지역인 홍콩의 신선한 환경을 찾아서 가장 좋은 노란자위 땅들은 다 차지했다. 반면 원주민들은 도시 가장 자리들로 내몰았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식생활을 담당하는 여자들을 하녀들로 부리면서 쥐꼬리 만한 생활비를 주었을 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궁궐 같은 룸에서 지내면서 이들은 부엌 한 켠에 정말 죽어서나 들어가는 한 평의 방, 즉 움신의 폭도 없을 정도의 좁은 공간에서 지내도록 했고, 쪽문으로 출입을 하도록 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사라는 영국인들의 양면의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다보니 생긴 지배력의 기술이다. 자유롭게 산다는 원주민들의 집들은 7평, 9평, 11평, 13평 등 좁은 공간에서 1대, 2대, 3대가 함께 생활하는 매우 열악한 환경의 공간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150년이 흘렀던 것이다. 1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주민들의 얼굴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웃음이나 여유로운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황폐해진 초췌한 모습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산 것은 아니다. 영국 통치에 철저하게 순응한 자들은 영국인들이 제공해주는 범위 내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이다. 즉 매우 적은 소수의 사람들이고 대부분의 홍콩 주민들은 근근이 살아가며 연명하는 부류들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어떤 이들은 홍콩 지역이 좁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하고 반문 할 것이다. 게다가 아시아에서 홍콩의 발전상은 국제적으로 인정 된 것이 아닌가? 허지만 그것은 영국이 자신들의 신사성을 지키기 위해서 외형을 화려하게 한 것이지 진정으로 홍콩 주민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지배국의 고도의 전략적 행위였지 실제적으로 피지배국 백성들의 안녕을 도모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월 동안에 홍콩 본토인들의 행복은 사라져 갔고, 그 증거가 얼굴들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마음들이 굳어졌다는 사실이다. 무엇을 해도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회구조로 변모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도 처음 한 때는 웃기도 했을 것이다. 바로 그 과정이 웃지만 우울한 표정으로 굳어져 가는 과정이었지 않았겠는가?
우리의 현실도 이 같은 변화가 집중되는 과도기가 아닌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홍콩과 같이 앞서간 지역들 안에서 이러한 사회적 상황들이 음성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알아야 한다. 가장 합법적으로 허지만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이와 같이 사회적 변질을 유도해 왔다는 점이다. 홍콩의 지능적인 변화가 우리를 일깨우는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얼굴이 웃는데 우울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본이나 전통이 사라지는데서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권화 된 지역으로 5천 년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앉고 살아가는 자신의 뿌리에 충실하게 임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근본의 힘이 무너지면서 보이지 않게 사람들의 혼을 빼내는 사회적 변천 과정이 주민들의 기를 누르고 있는 환경이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에서 나타나게 되는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회의 속성이 악한 쪽으로 강해져가는 속성(屬性)말이다. 거대한 힘이 지구 종합적인 환경을 구축한다고 하는 합법적인 이유아래서 행해지는 사악한 힘이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이해 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사회 연일 불, 추돌, 낙하 등, 얼마나 많은 인명들이 연일 죽고, 다치고 잠에서 깨어 눈만 뜨면 야단법석의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샤드 도입의 문제로 한국 사회 안에서 미중이 대립하려 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포착되고 있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 지역 경계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가장 근본적인 국가 기반의 중심조차 그 경계선이 위협을 받는 현실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하루 속히 안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어떤 이유도 우리의 민족적 지역 기반을 통합한 5천 년 국가 기반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이 허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떤 역학구도에서 이 같은 우리의 근본 경계가 농락당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차라리 우리 스스로 강대국 노선으로 들어가는 기반 다지기의 정책을 구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은 사도행전(17:26)에서 말하고 있는 경계의 문제입니다.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o`roqesi,a 호로데시아(‘제한된 곳’, ‘경계선’, 경계)를 한하셨으니(prota, ssw 프로탓소, ‘사전에 조정하다’, 즉 ‘미리 규정하다)” “He made also of one blood every nation of men, to dwell upon all the face of the earth having ordained times before appointed, and the bounds of their dwellings.”
위의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를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고 명시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문화적 명령’과 관계해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현대적 해석으로 맞다. 현대 인류의 문명적 관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으로 볼 때는 아니라는 점이다.
기독교의 참 된 방향에서 바라 본 의미는 아니다. 이 말씀이 제시하는 배경으로 중요한 것은 인류 역사의 발전상의 근본을 말한다. 창조의 법칙으로써 지구전체에 내포된 인류의 거주 상태를 가리킴이라 할 수 있다. 즉, 인류가 이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있는 땅을 의미한다. 이것은 처음 창조함을 받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했던 말씀대로 온 세상에 거주하는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그 땅을 딛고서 인류가 발전 할 수밖에 없는 육체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육체적으로 발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주셨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인류는 이 지구상에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배경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 인류는 자신들이 잘 나서 오늘의 발전의 시대를 이룩하였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그래서 지구를개발이란 명목아래서 마음대로 유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어떤 특정한 세력들이 함부로 아무렇게나 자신들의 일방적이고 결정적 의지로 땅을 분할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하신 말씀이다. "경계"는 ‘제한 된 곳’을 의미하는 것이고 “한하셨다”는 것은 사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지구 안에 흩어지면서 일단의 무리들로 군집되고 확장되어 가면서 각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허지만 인류가 각각의 사회를 이루는 그 지역마다 경계를 정해 놓으셨다고 하신 것이다. 각 나라마다 바운다리 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권세, 즉 주권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미리 규정해 놓으셨다는고 명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 의해서 세상이 운용되도록 하신 것이 지금까지 지구 질서로 확정되어 온 것이다. 물론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이러한 질서를 무너트리는 패권주의가 성행했지만 결국은 이 지구 근원적인 원칙으로 되돌아가곤 했던 성질이 주도했다.
왜인가? 하나님께서 이를 자연의 원칙으로 질서가 되게 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지구의 질서를 바꾸려하는 세계적 의지가 작용되고 있다. 이는 지구적 역행차원에서 이루고자 하는 성질이다. 인류의 마지막 성질로써 지구통합을 추구하는 인간의 인위적인 작용이 신의 창조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화가 추구하는 현대적 바벨탑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지난 과거 시대는 아무리 전쟁으로 이 법칙을 깨고자 했어도 다시 회복되었다. 바로 오늘의 시대가 오기까지 인류의 세계가 지속되어 온 진정한 바른 노선이었다. 오늘 현대에 이르러 이 근본이 무너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는 것은 인류의 순기능적인 지구 구축이 아니며 그러기에 인류의 진정한 발전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심판하실 그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를 향해서 나아가는 인류의 선택으로써 역행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인류가 선택하는 지구 마지막 때의 지구적 성향이 무지와 교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지구적으로 현대인들의 “웃지만 오히려 우울한 얼굴 상들이 일그러지는 이유”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으로써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다. 경계를 정해 놓으시고 서로 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음은 바로 이 같은 이유를 밝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욥기 14:5 에서 그 이유들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욥 14:5,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qx 호크(‘재정’ 따라서 ‘지정’(시간, 공간, 양, 노동), 제정한, 한계, 몫, 정해진)을 정하여 넘어가지(rb;[ 아바르(기본어근, ‘건너가다’ 넘겨주다, ~을 넘어가다, ~을 건너다, ~을 통과하다, 간섭하다) 못하게(al 로(신 3:11), ‘아닌’ ‘아니다’ …도 아닌, 결코…아닌) 하셨사온즉”, If determined are his days, The number of his months [are] with Thee, His limit Thou hast made, And he pass not over;
하나님께서 국가들로 정해 놓으신 그 규정들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경계를 서로 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각 나라의 영토권과 모든 국민의 인격과 자율성, 각 나라의 역사성을 포함하는 모든 울타리, 즉 경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당대의 인간세계가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서로 존중하지 않고 경계를 무너트리는 행위를 할 때, 인류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혼돈으로 빠질 뿐만 아니라 지구의 마지막이 될 것을 예시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현대가 바로 그와 같은 현상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가? 그러니 현대 인류의 얼굴에서 웃지만 우울한 증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현대의 일단의 무리들이 추구하는 세계화는 정말 성경에 반대되는 제도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본인은 목사로써 이러한 요소들이 매우 우려스럽고 특히 우리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현대 우리 사회가 그 출발점부터 이와 같은 국권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로 점진적으로 그 힘을 더욱 잃어감으로 인하여 민족적 경계는 물론 나라적 바운다리가 위협을 받는 지경에서 국민들의 마음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는가? 마음들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자국으로부터 무개념이나 이질되는 이반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타국가 중심으로 자국 정부와 사회를 어지럽히는 행동들을 일컬음이다. 이는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에 도달한 인류가 무지와 우매함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립하는 역행의 제도로 인하여 인간들의 반역행위가 자기 민족끼리 반대하는 힘이 강성해져 가는 현상이다. 민족이 민족을 대립하게 되리라고 성경은 미리 밝혀 주지 않았는가?
노아 홍수 직후에 인류가 교만함에 빠져서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과 대립하고자 했던 그 행위를 현대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에 놓인 인류가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기류의 추종자들이 준동(蠢動)하여 드러나는 파괴의 성질이 극대화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지구적인 평화라는 미혹의 미끼로 지구를 속이는 사악한 무리들이다.
이 또한 오직 자기중심의 힘이 추구하는 지구 마지막 교활성이 작용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성질을 잘 알고서 대비를 한다면 그나마 자기를 보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아놀드 토인비'는 자신의 저서 “역사적 연구”에서 ‘창조적 소수자’들로 명명해 놓았다. 즉, 이 현대적 현실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는 진정한 영적 지도자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망하는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부류들과 악의 성질이 오늘의 현대를 주도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점차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것이다. 그 결과 일반은총의 법칙에서도 지역나라들의 파괴와 경계의 무너짐을 추구하는 구조가 점차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의 얼굴이 웃는 우울함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움직임들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세력들이 있다. 언제나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탐욕에 지배를 당하는 자들이다. 자국과 민족을 저당 잡혀서라도 자신들이 누리고자 하는 탐욕에 의해서 사악한 힘으로 지구를 어지럽히고자 하는 소수자들에게 들붙어서 자기 탐욕을 실현하고자 하는 동조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맹약한 기독인들 중에서도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고 잘못 가르침에 의해서 따르는 자들이 많아져 간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유력한 자들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성경은 종말현상으로 지구가 이러한 자들을 양성하고, 이들에게 힘을 주는 지구적 현상이 있을 것을 미리 예고해 놓으셨다. 당연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탐욕에 지배 받는 자들이 등장하는 지구는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알아야 한다. 현재 지구는 각 나라, 각 지역에 통제의 장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동조하는 세력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당연할 것이 지구적 현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 역할이 끝나면 그 때부터 제거의 대상의 위치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잘 사용을 받아 누렸던 자들이 끝남과 동시에 비참하게, 혹은 너무 이상한 죽음들을 맞이하는 현실이 되고 있는 현재가 주도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각 나라나 각 사회마다 개체나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항거자들을 잠재우기 위한 도구들로 이용코저 하는 필요에 의해서 활용하는 것이다. 그 역할들이 끝나면 바로 제거 대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또한 웃지만 우울한 현대 인류의 이유 중에 이유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직 목적으로 가진 소수의 창조자들만이 다스리는 세상의 비밀 유지라는 성질 때문이다. 결코 선한 세상의 지구적 자율이 허용 될 수 없는 혼돈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힘의 방식이다. 이것이 자신들의 본격적인 목적을 추구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이다. 그래서 더 이상 필요로 하는 현실적 이유가 없어져 버렸을 때 가차 없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제거되도록 되어 있는 사악한 인간성인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 인간의 윤리 차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허지만 철저히 통제를 지향해야 하는 세계화적 구조에서 사람 목숨은 파리보다 못한 존재들로 떨어지는 것이다. 왜인가? 이들이 추구하는 단일 지구는 넘쳐나는 인구수가 제거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류라는 인격성이 허용되는 곳이 아니다.
다만 자신들의 목적에 도달하기 까지만 외관상 지구 기존의 방식을 허용하는 것 같이 하지만 이미 장악한 구조적인 힘으로 온 갖 악을 일삼으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 지구적인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것은 기존의 지구적 법칙을 파괴하는 힘이다.
그래서 해체가 주도하는 지구 문화가 성립되고 있다. 포스모더니즘 시대 말이다. 이러한 합법적인 이유들은 기존 질서를 무너트리기 위한 장치들일 뿐이다. 여기에 이용당하다 끝이 되면, 그 동안 각 나라나 사회 속에서 자신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이나 보수층이라는 지대를 한 순간에 잃어버리게 되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기존 지구 해체라는 파괴를 지향하는 사악한 자들을 향해서 구걸을 하는 각 사회 지도층들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는가? 이를 위해서 보수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자신들의 민족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나라 본 경계를 무너트리고 있지 않는가? 보수라는 이름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세력들의 힘을 잘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샤드 도입은 또 다른 재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결적으로 우리의 근본이 되는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경계를 파괴하는 제공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보수 그룹의 역할들이 외부에서 들어 온 잘못 된 힘의 움직임들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유를 합당하다 할 수 있는가! 라고 감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용함이라면 좋다. 허지만 이용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잠시 동안의 자리 보전을 위해서 선택하는 어리석음이며, 이미 그러한 사고에 포로가 되어 근본적으로 자국 중심의 이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본인 또한 목사지만 보수적 기질의 사람이다. 허지만 자국을 중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연법칙이기 때문이다.
이 차원에서 자국을 중심하는 전통성을 지키고 중요시 하고자 하는 보수적 기질을 말하는 것이다. 결코 그 어떤 힘의 논리에 의해서 자국을 배반하는 것은 보수적 기질이 아니다. 헌데 우리 사회는 힘의 논리에 의해서 자국중심보다 타국가 중심의 사고를 가진 이들이 보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기준으로 내세우는 생각들을 우리에게 강요하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 순리를 따르는 국민들 그 누구도 보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불행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본인은 MBC PD 수첩 같은 언론 매체의 역할들이 사라지는 우리네 현실이 옳은 공간인가? 묻을 때, 이것이 바로 우리사회 근본 하는 기반이 무너져 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강하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기류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20-30년 후에 각 지역의 인간들을 어떠한 뇌가 되게 할 지 모른다.
더 원색적으로 질문을 하자! 왜, 비행기가 하늘 상공에서 하얀 원을 그리며 한 참 동안 하늘에 인공적인 구름을 만들어 놓고 나면 며칠이 지나면 기후 변화가 극심하게 우리 사회를 휘몰아 가는가? 왜, 선진국을 중심으로 하는 나라들이 신약 개발을 하는 것인가? 왜, 연구소에서 인간 두뇌에 관한 연구들이 진행되는 것인가?
왜, 의학은 인류의 병의 문제 해결이란 이유들로 병원마다 환자들을 힘들게 하는 이유들이 성립되는 현실이 되고 있는가? 과연 연구에 성공을 하고 났을 때, 이것들이 과연 선하게 사용 되리라 보시는가? 이러한 이유들은 이미 지구의 전쟁의 무기를 목적으로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오다가 지금에 이르러서 자연까지도 어느 정도 조절을 하는 단계로 들어 온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변화들이 지구적 화를 차조하는 것이다.
만일 좀 더 미래로 나아가게 되면 이러한 힘들은 각 나라의 민족과 울타리가 되는 주권적 경계를 무너트리고 온 지구의 인간들의 인격을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통제의 무기로 활용 될 것이다. 결코 지구 보전의 건강한 에너지로 활용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사회 현실적인 문제들을 엿볼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차원에서 제레미 리프킨의 주장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들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규정을 해 주고 있는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말했다. 특히 지구 종말이 임박할수록 인간들의 심성은 악성이 지배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다. 현대 인간성 상실이란 이유는 충분히 이를 드러내 주고 있다.
만일 우리 사회의 구조가 외부의 힘이 전적으로 주도하는 구조가 되었을 때,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미래역사학자들이 지적한대로 인간의 뇌를 조절하는 신약들이 음성적으로 투입되는 때가 있을 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합법적으로 그 같은 악을 저지르는데도 아무도 막을 힘이 없는 구조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우리는 어떠한 현실을 맞이하며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갈 우리네 땅은 과연 행복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줄 기반을 그대로 유지해 줄 것인가? 이러한 이유가 오늘 우리의 얼굴을 웃지만 우울하게 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 전 사회 구조들을 재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무너진 곳들을 보수할 필요 말이다.
무엇보다도 조속한 시일 내에 인적 청산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완구 총리의 부패척결 선언은 마땅히 필요불가결한 수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우리사회 중심하는 인적구조를 새롭게 하는 계기를 삼아 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동시에 언론 개혁 또한 이루어져 할 것이다. PD 수첩과 같은 내부 고발의 언론 기구들이 보수 되어야 한다. 종편 방송들 가운데 연합 뉴스 채널이 그나마 자국을 생각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 나머지 매체들은 오히려 자국을 어지럽히는 뉴스들로 가득차지 않았는가? 전문가들을 내세워서 고작 주장하도록 하는 논리들이 어떻게 하나 같이 자기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뉴스들로 채워가는지?
아무리 자유주의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자기사회를 무너트리는 짓들을 합법적으로 자행하고 있는데 정부 기관들이 수수방관만 하기 때문에 사회가 갈수록 이상기류 현상으로 불안만 조성되지 않는가? 정부가 최대한 정부 시책을 통해서 이러한 불합리한 언론 역할들을 바로 잡아가야 한다. 언론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부정하고 거부하면 안 된다.
허지만 세계화를 위해서 세계 언론 협회가 요구하는 그것을 수용하여 자국을 어지럽히는 논리를 뉴스나 방송을 통해서 추구하는 언론 역할을 정의가 아닌 것이다. 자기 사회를 중심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언론이 되어야지 세계화를 자기 사회에 안착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근본이 되는 구조를 무너지게 하는 언론의 역할, 그러한 언론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그러므로 정부는 자국 사회를 중심으로 바른 뉴스나 방송을 하고자 하는 조직적 의지를 가진 언론 기구들을 육성하고 유도해야 할 것이다. 때론 PD 수첩에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방송을 내 보낸 부분도 있을 것이다. 허지만 그것이 자국 사회 보존을 위한 열정 중에 일어난 실수였다면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나 사회를 직접적으로 공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정도 특권들을 주어야 자국에 충성을 하고 자국을 건설하며 자국 국민들을 지키고자 하는 언로가 살아 있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오로지 우리 사회를 지키고자 했던 내부 고발을 담당한 매체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안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공공성이든 개체든 자각해야 한다. 나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작용들은 우리 사회 안에 들어와 온갖 악을 행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중심 기반들을 무너트리는데 집중하고 있다. 정치 경제는 물론 교육과 법, 그리고 종교, 이제는 국가 중심적 기반들이 집중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는가?
법조계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양심이라 할 수 있는 구조이다. 군 구조, 검경, 교육 등, 모두가 우리 순수한 사회기반의 마지막 보류들이다. 물론 그 가운데도 종교 구조는 사회의 정신 문제와 직결되어서 더욱 주요한 기반의 문제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법조계가 우리의 순수한 경계를 지키려는 의지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낙태법이 허용되고 간통죄 폐지가 웬말인가? 법조계가 무너지면 정말 우리는 철저히 우리 사회를 무너트리는 숙주의 두뇌 활동의 지렛대로 전락하는 법이 될 것이다. 이 차원에서 야당의 종북 숙주론이란 개념 정립은 우리 사회 자각 운동에 이바지를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잘 끄집어 낸 것이다.
종북 숙주론은 미일이 우리 사회를 조절하는 원천임을 자각시키는 개념을 끄집어 낸 것이다. 우리 사회에 대한 미일의 정책과 방향은 중국의 힘이 개입되는 현실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한반도 상황은 말 그대로 또 다시 구한말 상황이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지 이를 우리 사회가 단순하게 편가르기 식으로 몰아가면 안 될 것이다.
이미 경제구조는 끝났다. 군구조도, 교육계도 이미 위험 수위에 들어 있다. 경찰 구조는 오래 전에 외부 세력들을 경계하는 특수 구조들이 오히려 우리 내부를 지향하는 활동력이 되었음을 감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혼자 우방이란 의미에다 우리의 실존의 이유를 두고자 하면서 너무 순응하고자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가 외교적으로 호갱이란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
이것은 결코 그 어떠한 악을 덥자는 주장이 아니다. 과거 일제는 우리 사회의 내부고발자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를 감시하고 다스리게 하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사회 전반에 걸쳐서 내부 고발자들을 철저히 제거하는 사회 환경이 주도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왜, 미국의 식물 연구소에서 우리 한국 전 지역의 식물들을 채취하여 연구를 하는지? 미국의 독극물 한국 땅 매립 현재 어떠한 상황이 전개되며, 한국 암 발병률과는 관계가 없는 것인지?
우리사회는 '궁금해 하며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족쇄에 메달려서 우롱당하는 세월이 되어서는 안 된다. 냉철하게 보고, 실용적으로 대처하며, 안으로 고도의 전략으로 뭉쳐야 하는 시지가 지금이 아니겠는가 제언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주신 선물들, 우리의 후손들, 우리에게 교육이나 종교적으로 바른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전국가적으로 지혜를 모아 조금씩 진실이 알려지도록 해야 할 때이다. 우리만의 사회 구조라면 때론 진실들이 가려지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웃을 수 있고, 그것이 자연적인 행복이 되며, 사회 모든 구조적으로 바른 삶과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울하지 않는 참 된 웃음이 우리의 얼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지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옥으로 떨어질 바에야 차라리 그들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다. 그들에게 잠시 쓰임 받기 때문에 웃지만 진정한 웃음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큰 근심이 항상 자신을 누르게 되는 현실에 놓이게 될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삶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나날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자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유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살고, 주님의 제자로써 진실되고, 정직하며, 그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대해야 하겠지만, 그 삶이 철저히 주님 재림을 대비하는 나날의 삶이어야 한다. 구약의 다윗왕과 참 된 구약 성도들, 매 시대마다 남은 자들은 초림에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며 대비하는 나날의 삶이었다. 이처럼 신약시대의 우리는 바로 앞으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예배하는 나날의 매 순간이 되어야 한다. 할렐루야!
말씀을 마치도록 하자!
지옥가는 문제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주어지는 실제의 문제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증거는,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모습이 점차적으로 분명해져 가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 중에 결코 세상과 타협이나 거짓, 혹은 잘못 된 세력을 수용하지 않는 참 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현대는 너무나 신앙이 상대화되고 다양화되어 성경중심의 절대성과 독특성을 잃어버렸다. 교회 가운데 어떤 이들은 세계화의 전도사들이 되어서 복음을 변질되게 하고, 세상을 위해서 신앙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성도의 삶을 미혹하거나 세상에 혼합되는 신앙이 되도록 유도하지 않는가? 이것이 현대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이 매우 위험해져 있음에 대한 반증이다.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순이요 위선의 삶이다. 성도 여러분! 왜 현대인들이 우울한 것인가? 왜, 신자들이 믿음의 확신이 없는가? 이제는 보이지 않는가? 왜, 우리나라나 세계에 유명한 인사들이 어느 날 자살하거나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일들이 허다해 지는지, 더욱이 갈수록 각 나라 안의 인간 삶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변해가는 시대가 되었는가?
이러한 현상들은 이 현실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창조 된 지구 '땅의 경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즉, 각 나라만의 고유한 권한이 강한 자들의 억지, 혹은 인위적으로 해체를 당하기 때문에 그 여파로, 지진파의 여진과 같은 파장에 의해서 국민들이 현실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웃지만 우울한 이유이다.
신앙도, 나라도 잃어버리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와 사회는 상호 연관관계에 놓여 있다. 교회가 사회를 외면하고 그 사회에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사회가 악의 힘이 주도하는 구조로 전락해 가는데 교회가 독립적으로 신앙 내용들을 성경대로 따를 수 있는 현실은 결코 오지 않는다. 불의에 타협을 하게 되는데 신앙의 환경이 정직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교묘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나라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방향으로 설교를 해야 하고, 교육을 해야하는 고통이 오는 것이다. 일제시대가 이를 잘 보여 주었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합법적으로 이러한 시대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지혜롭게 말을 잘 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양심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웃지만 우울한 현대인들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증거는 바른 행동과 선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결코 눈속임이나 지혜라는 명분으로 거짓되게, 혹은 방임적 태도로 적을 수용하는 현실에 의거하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니 수심이 가득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주의나 작은 정부론의 원리는 ‘스팬서(개인주의와 사회 진화론 주창을 하였음)’나, ‘아담 스미스(국부론의 저자로 자유방임주의의 주창을 하였음)’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창조의 규정'인 '각 국가 경계'를 전면적으로 무너트리는 역할의 이론가들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육계의 ‘이반 일리취도’ 탈 사회나 탈 공교육 이론가로 자기 사회 중심을 무너트리는 세계화에 충직한 역할자들이었다. 이 사람의 영향은 우리 교육계의 일탈을 가져왔다. 전교조의 뿌리는 바로 이반 일리취로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 이론가들에 의해서 세계는 농락을 당하며 자기 사회들이 혼란의 공간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 같은 세계화의 조류가 바로 각나라 사회의 자연적 행복을 차단하고 전통적 신앙을 무너지게 하는 현실적 파괴의 힘이다. 지구 기존 법칙의 해체이고 혼돈을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를 이간하여 근본적인 갭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탄의 전략이다. 세계화라는 힘으로 등장한 현대적 파멸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교활하고 지저분한 사탄의 정책으로 종말의 최종 종결의 시간대에서 드러나는 교란(攪亂)술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올무에 빠져 허덕이지 마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존하시는 생애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한다. 깨어있는 성도들은 이러한 사탄의 전략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는 그 어떠한 그릇 된 움직임에 순수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교회도, 신앙도, 나라도 지키시는 참 된 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한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영원한 문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다. 이 땅에서는 환난을 당할지라도 강하고 담대하시기 바란다. 강하고 담대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시는 이 시대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혼란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 면전의식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면전의식"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승리의 삶이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애들이 되시기를 기원하며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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