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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3년 6월 14일(금)
장소 : 경기도 안성시(미리내성지. 안성맞춤유기박물관. 봉업사지. 칠장사)
반월당(07:30 출발) - (246.4km. 3시간9분) - 미리내성지(10:39 도착. 관람 1시간 10분. 11:49 출발) - (18.3km. 30분) - 안성맞춤유기박물관(12:19 도착. 관람40분. 12:59 출발) - (6.6km. 10분) - 안성시 점심(1:09도착 .점심 1시간. 2:09 출발) - (19.7km. 30분) - 봉업사지(2:39 도착. 관람 40분. 3:19 출발) - (10.4km. 25분) - 칠장사(3:44 도착. 관람 1시간 10분. 4:54 출발) - (217.4km. 2시간 50분) - 반월당(7:44 도착)
미리내성지
미리내성지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에 마련되어 있는 성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모시고 있는 천주교의 유서 깊은 성지이다. "미리내(은하수의 순 우리말)" 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지금 보아도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때 경기도와 충청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여기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주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았다.
이 성지에 "미리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밝힌 호롱 불빛이 깊은 밤중에 보면 은하수처럼 보인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리내 성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이곳에 묻힌 뒤부터이다. 김대건 신부의 왼쪽에는 김 신부에게 신품을 주셨던 페레올 고 주교님이 1853년 4월 12일 모셔졌다. 김신부의 어머니 고 우술라와 김대건 신부와 고 주교의 시신을 미리내로 모시는 일을 하였던 이민식 교우의 묘소도 있다.
이 외에도 미리내에는 이름 없는 16위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다. 1976년 용인시 내사면 대대 4리에 있던 음다라니 산기슭의 목 없는 줄 무덤에 묻혀 있던 12분, 용인군 수지면 신봉2리 지붕골 밭 기슭 돌무덤에서 4위를 모셔왔다. 용인시 이동면 묵리 산29번지 한덕골에서 모셔 왔던 시신은 뒤에 이윤일 요한 성인임이 밝혀졌고, 다시 이분이 돌아가신 대구 대교구 관덕정으로 모셨다.
미리내성지에서 성인이 묻혔던 자리만은 보존하고 있다. 성(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였다. 김대건은 1821년 충남 당진군에서 신앙심이 깊은 집안에 태어났다. 그는 1863년,15세 때 조선인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프랑스 신부 모방의 눈에 띄어 신학생으로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1844년 12월에 부제품을 받았고 이듬해 8월 상해 부근 김가항(金家港) 신학교 성당에서 한국 최초의 신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45년에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비밀리에 입국하여 서울과 지방을 순회하며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신분이 탄로 나서 체포되고, 신부가 된 지 겨우 1년이 되던 해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사학죄수"라는 죄목으로 칼을 맞고 죽었다. 김신부가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돕던 이민식(당시 17세) 소년이 관리들 몰래 죽은 성(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까지 옮겨왔다.
200여 리나 멀리 있는 이곳에 와서 1846년 10월 30일 자기의 선산인 지금 김대건 신부의 묘 자리에 시신을 모셨다. 1901년 5월 18일, 성(聖)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용산에 있는 예수성심 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혜화동 가톨릭 대학교 성당에 모셔져 있다. 1928년 9월 18일에는 김대건 신부 묘소 뒤편에 작은 경당을 세우고 이후 성 김대건 신부의 석상과 한국 천주교 103시성 기념 성당을 세우는 등 성지의 모습을 갖추어 왔다.
김대건 1822~1846(순조22 ~ 헌종12)
우리나라의 최초의 신부, 천주교 성인. 교명 앙드레. 본관 김해. 충청남도 내포에서 독실 한 천주교도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의 탄압을 피하여 경기도 용인의 골배 마을로 이사 와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에게서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모방한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의 마카오에 건너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서양학문과 프랑스어. 라틴어 등을 배웠다. 그 후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1839년에 필리핀의 마닐라에 가서 공부하여 6개 국어를 익히었다. 1842년(헌종 8) 프랑스 군함 제독 세실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1845년(헌종 11)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교에 힘쓰다가 페레올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 거기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페레올. 다블뤼 두 신부를 데리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서 귀국하였다. 그는 지방전도에 나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 1846년 최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체포되었는데, 서울로 끌려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9월 새남터에서 순교(당시 26세)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참수하여 군문 효수할 것인데 헌종이 편법을 써서 효수하지 않고 매장하게 하였는데 매장 40일 후에 양성면 미리내에 사는 이민식 씨에 의하여 밤으로 7일에 걸쳐 운구하여 현재 미리내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바오로 XI세로부터 복자위에 올림을 받았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나라에 와서 직접 거행한 시성식에서 카톨릭의 성인 자리에 올랐다.
안성맞춤박물관
안성시 대덕면 내리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입구에 세워진 안성맞춤 박물관은 유기를 중심으로 안성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함께 접할 수 있는 테마 박물관이다.
지상2층 지하 1층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기 전시실, 영상실, 기획 전시실, 농업역사실, 향토 사료실, 세미나실, 학예연구실, 수장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기전시실은 유기의 역사, 제작 방법별 유기분류, 유기제작과정 모형, 제기, 반상기, 무구, 불기 등 생활 속에 쓰이는 다양한 유기를 전시하고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곳곳에 영상물을 설치하였다. 특히 터치 스크린을 통해 안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농업역사실은 안성 농업의 역사와 계절에 따른 농경모습, 안성의 특산물이 전시되어 있어 과거와 현재의 안성농업을 알 수 있다.
향토 사료실에는 안성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 안성장시재현, 안성남사당, 불교 문화재 등 안성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안성봉업사지(기념물 제189호.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5)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이곳에서 봉업사지와 죽산리 사지(1개 혹은 2개)를 만날 수 있다.
봉업사터는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5층석탑과 당간지주이고 죽산리 사지에서는 3층석탑과 석불입상을 볼 수 있다.
보는 견해에 따라서는 죽산리 사지의 경우 두 개의 절터로 추정하여 석불입상과 그 옆의 (파손된)석탑을 한 개의 사지로 보고, 3층석탑에 또 하나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런 관계로 이곳 죽산리를 태평미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보고라고 까지 평한바 있다.
봉업사는 언제 창건되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어 ‘매곡리 폐사지’라 불리기도 했으나 1966년 경지정리 작업 시 출토된 유물에서 이곳이 봉업사였음을 말해주는 명문이 발견되어 비로소 봉업사지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절의 명칭이 중요한 이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말하는 ‘고려태조의 진영을 모셨던 비봉산 아래의 봉업사’가 바로 이곳임을 밝혀주는 것으로 사찰의 중요성이 증명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태조의 진영을 모셨다는 것은 이곳이 진전사원이었다는 의미인데 진전사원이란 왕실의 의지에 따라 죽은 왕의 진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사찰로 태조의 진전사원은 전국의 이름난 사찰(개성의 봉은사, 논산 개태사 등)에 두었던 것으로 보아 봉업사가 결코 만만한 사찰이 아님을 밝혀주는 것이다.(고려시대 사찰 중 앞에 奉이 붙는 사찰은 왕건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건립되었다)
이곳의 5층 석탑은 기단부의 둔중감, 1층탑신이 높은 점 등에서 고려시대 초기 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경기도내의 탑들 중에 가장 조형미가 뛰어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자료집-탑의 유래와 세부명칭) 특히 68년 복원공사때는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죽산리 사지의 석불입상인데 죽주산성아래 쓰러져 있던 것을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데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지방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몸체를 약간 뒤로 젖히고 가슴을 내밀어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매우 당당하다. (마을에서는 이 불상도 미륵이라고 부른다)
삼층석탑은 밭 한가운데 서있는데 기단 면석아래는 땅에 묻혀 완전한 모습을 알기 어렵고, 혜소국사와 연관이 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마을 사람들은 석불과 삼층석탑을 기자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듯하니 근거리의 태평미륵과 함께 곳곳이 기자신앙의 흔적인 셈이다.
그 밖에 당간지주를 볼 수 있고 이 근처에는 아직 발굴되거나 조사되어 보고되지 않은 많은 탑과 절터가 있다고 하니 이곳이야 말로 진정 불교문화의 보고라 할 것이다.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安城 奉業寺址 五層石塔.보물 제435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8-5)
지금은 주변이 경작지로 변한 봉업사(奉業寺)의 옛터에 위치하고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로 짠 두툼한 널돌 위에 올려 완성하였는데, 이때의 석재가 두툼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기단 위의 탑신은 1층 몸돌만 4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한 돌로 구성하였다. 각 층의 네 모서리에는 폭이 좁은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 남쪽 면 중앙에는 작은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만들어 놓았으나 모양만 새기는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지붕돌은 얇고 추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며 끝에서의 추켜올림도 미미하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전체적인 체감도 적당하지 못하고, 각 부의 조각도 형식에 그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석재의 조합 방식은 우수하나, 기단에 새긴 조각이 형식화 되는 점 등에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안성 죽산리당간지주(安城竹山里幢竿支株.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728)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기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일컫는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당간지주만이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 대사찰이었던 봉업사터에 안성죽산리오층석탑(보물 제435호)과 약 30m 거리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원래 이곳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하였는데, 남쪽 돌기둥은 윗부분의 4분의 1정도가 이미 깨진 상태이다. 돌기둥은 표면이 거칠고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꼭대기의 바깥쪽 모서리를 둥글려 완만하게 다듬었다. 안쪽 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파놓았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로, 안성죽산리오층석탑과 같은 시대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안성 죽산리석불입상(安城竹山里石佛立像.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산6-2)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죽산산성 아래 쓰려져 있던 것을 다시 세운 석불 입상이다. 머리와 신체가 절단되었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둥근 연꽃대좌 위에 서 있으며,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다. 부피감 있는 얼굴은 온화한 인상이며, 귀는 길어 어깨까지 닿는다. 양 어깨에 두른 옷에는 두터운 U자형 무늬가 촘촘히 새겨져 있다. 큼직한 머리와 두 손, 빈약한 신체 표현은 다소 경직되어 있다.
큰 머리묶음, U자형 옷주름 표현 등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지방 불상양식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칠장사(七長寺.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4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는 칠현산 산기슭에 바짝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철따라 바뀌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울창한 숲에 고풍스러운 칠장사가 안겨 한적한 풍광을 연출한다. 칠장사는 손때가 묻지 않아 찬찬히 살펴봐야 할 보물들이 많다. 칠장사 일주문 전방 700m 지점에 전국에 몇 개 없는 철당간이 서있고, 진흙소조로 만든 사천왕상이 찾는 이들을 압도한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 수도하고 입적한 고려 때 고승 혜소국사가 현재 비각이 있는 자리에 홍제관이라는 수행 처를 세웠고, 현종 5년(1014) 크게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칠장사는 예로부터 깊은 차령산맥이 그 줄기를 품고 있어 고려 말 왜적의 침입이 잦을 때 사서를 칠장사로 옮겨 8년간 비장해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칠장사의 묘미는 빛바랜 단청이 고색창연한 대웅전을 찬찬히 굽어보는 것이다. 새것을 덧씌우는 것만이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칠장사 대웅전이 말해준다. 오랜 풍상을 겪은 대웅전은 단청 문양을 세월에 날려 보냈지만 힘 있게 뻗은 추녀에서 힘찬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대웅전의 기풍을 눈여겨보고 있으면 칠장사의 오랜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것 같아 자연스레 칠장사에 얽힌 이야기에 귀를 열게 된다. 대웅전 오른쪽 옆에 조각솜씨가 빼어난 석불입상 한 기가 모셔져 있다. 본래 죽산리 봉업사터에 있었던 이 불상은, 절이 폐사되자 죽산중고등학교 교정에까지 흘러갔다. 자연 방치되다가 이곳 칠장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불상은 두광 아래로 발께 까지 신광이 표현되어 있고, 큼직한 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불상에 비해 대좌는 풍상의 흔적이 적은 깨끗한 화강암이다. 불상은 특히 얼굴의 눈ㆍ코 부분이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을 빚은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오른손을 들어 살포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차분히 내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을 잡고 있는데 그 자태가 일품이다. 어깨에 걸쳐 가슴을 타고 내린 얇은 법의의 선, 3기의 화불을 인 두광, 그 뒤로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대의 조각 솜씨가 그 시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화려한 조각솜씨를 미루어 보면 8세기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우수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칠장사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국보 제296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칠장리))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칠장사 괘불은 길이 6.56m, 폭 4.04m의 크기로, 구름을 이용하여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었다.
맨 윗부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과 노사나불이 좌우에 모셔진 삼신불을 묘사하고 있고, 중간은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보살들이 있어 삼세불을 표현하였으며, 맨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그려져 수미산 정상의 도솔천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3단 배치는 예배자들에게 삼신불과 삼세불의 세계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게 하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구원으로 도솔천궁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괘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채색은 녹색을 주로 하고 황색과 황토색을 대비시켜 다소 어두워 보이나, 옷 처리를 붉은색으로 하여 경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인조 6년(1628)에 법형(法浻)이 그린 것 이다. 괘불에서 보이는 단아하고 세련된 인물의 형태와 짜임새 있는 구도, 섬세한 필치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17세기 전반의 불화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보물 제488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경내 (칠장리))
혜소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였으며 17세에 융천사(融天寺)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다.
현재 비는 비 받침인 귀부(龜趺)와 비몸돌·머릿돌이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이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뛰어나다.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씨에서는 고려인다운 뛰어난 풍모가 느껴진다.
문종 14년(1060)에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安城 奉業寺址 石造如來立像.보물 제983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 (칠장리))
원래 봉업사지에 있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기고 그 뒤 다시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경기도 안성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겼다.
불상과 광배(光背)가 같은 돌로 만들어졌으며 불상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이다. 눈·코·입은 심하게 닳았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다. 옷주름은 여러 겹의 둥근 모양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치마가 양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손이 다소 큰 편이기는 하나 머리, 어깨 너비 등의 신체비례가 비교적 좋다. 불상의 뒷면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가 있는데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당당한 어깨, 발달된 신체표현, U자형의 옷주름, 그 밖의 조각기법 등으로 미루어 이 불상은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이 지방 불상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칠장사삼불회괘불탱(七長寺三佛會掛佛幀.보물 제1256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칠장리))
칠장사삼불회괘불탱은 영축산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화면 구성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하단과 노사나불과 아미타불이 있는 상단으로 구성되는데 사각형의 광배를 한 석가불의 주위를 팔대 보살과 십대제자, 사천왕 등이 에워싸고 있는 형상이다. 대좌 아래에는 사리불이 석가의 설법을 듣고 있다. 상단에는 아미타불과 보살처럼 화려한 보관을 쓴 노사나불이 사래보살에 의해 둘려 쌓여 있다. 아미타불과 노사나불 사이에는 보탑을 두어 화면을 구분하고 있다. 보탑 위로 반원형의 큰 광배 안에 9구의 보살을 중심으로 천상세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숙종 36년(171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석가불이 그려진 하단 단독으로도 영산회상도를 묘사할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주며, 상단과 합쳐서는 삼신불을 간략하게 표현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간략화한 구성 방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방법으로 이 괘불은 이런 구성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 七言詩.보물 제1627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장사(칠장리))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큰 글자로 쓴 칠언절구의 시이다. 종이바탕에 4행으로(각행 7자) 썼으며 근대에 족자로 장황되었다. 어필 아래에는 서예가 배길기(裵吉基)의 1966년 발문이 있다. 바탕은 보존이 양호한 편이며 다만 줄[行] 사이가 좀 더 밝다. 한편 어필 칠언시 28자의 점획 안에는 제월당(濟月堂)이란 스님의 발원문 29자가 작은 글자로 진하게 쓰여 있다. 칠장사는 인조가 반정으로 등극한 1623년에 인목왕후가 친정아버지와 아들(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아 중창한 사찰로 이곳에는 인목대비가 썼다는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사경>이 전래되었는데(현 동국대박물관 소장), ‘인목왕후 칠언시’와 서풍이 같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어필과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이 어필을 나무판에 모각한 것(명안공주관련유물(明安公主關聯遺物, 보물 제1220호))과 검은 비단에 금니로 모사한 것이 전하는데(국립중앙박물관, 德 2053) 모두 이 어필과 자형이 같다.
다만 모본에서는 칠언절구 28자를 3행으로 배열하고(각행 10자) 글자 사이를 조절하였다. 조선시대 열성(列聖)의 어필이 많이 모각되었는데,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原蹟)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칠장사당간(七長寺幢竿.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801-1)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둔다.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은 ‘칠장사’에서 약 700m 앞 길가에 서 있는데, 남아있는 당간 가운데 드물게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총 높이 11.5m로 15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연결되어 있으며, 아래 부분은 화강암으로 된 좌 ·우 기둥이 버티고 있다. 흙으로 덮여 잘 드러나지 않는 바닥은 네모난 구멍을 마련하여 당간을 꽂았다. 양쪽 기둥은 조각이 없는 소박한 형태로 끝을 둥글게 처리하였다. 철당간은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줄어들고 각 이음새부분은 마치 대나무마디처럼 형성되어 있다.
원래는 원통모양의 철통이 30마디를 이루었다고 하며, 칠장사의 지형이 배(舟)모양과 같아 돛대의 역할을 하도록 이 당간지주를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칠장사 외에는 청주용두사지와 공주갑사에서만 당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매우 희귀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칠장사대웅전(七長寺大雄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칠장사는 칠장사 칠현산에 자리 잡고 있는 절로 신라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율사가 세웠으며, 고려 현종 5년(1014)에 혜소국사가 다시 지었다. 조선 숙종 20년(1694)에 절이 불에 타 숙종 30년에 석규대사가 대웅전을 옮겼다. 영조 12년(1736)에 설영대사가 고쳤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칠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양식으로 각 칸마다 2개의 공포를 설치했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되어 있고, 중앙에는 불단이 있어 그 위에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후기 소규모 절의 대웅전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칠장사소조사천왕상(七長寺塑造四天王像.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5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칠장사(七長寺) 사천왕문의 좌우에 2구씩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동서남북을 수호하는 불가의 신으로 본래는 인도의 민간신이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도량과 불법을 수호하는 일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사천왕상은 진흙으로 만든 뒤 채색한 것으로, 악귀 위에 걸터앉아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고 얼굴에는 짙은 눈썹, 부릅뜬 눈, 오뚝한 코, 수염이 있는 입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사천왕상이 그러하듯 험상궂거나 무섭기보다는 해학적이고 친근함을 준다.
각기 창·칼·비파 등을 들고 있는데,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 다리를 벌리고 앉은 모습 등은 당당하고 위엄에 찬 자세이다. 치밀한 무늬의 갑옷과 옷자락의 표현은 정교하며 원래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천왕문이 세워진 영조 2년(1726)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각 부분의 조각수법에서 조선 후기 사천왕상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성칠장사대웅전목조석가삼존불좌상(安城七長寺大雄殿木造釋迦三尊佛坐像.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
칠장사 대웅전 목조삼존불상은 발원문을 통해 제작연대와 제작자 등을 알 수 있으며, 보존상태가 좋아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 작이다.
안성 칠장사 목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일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7호.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
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등은 제작연대와 제작자 등을 추정할 수 있고, 보존상태가 우수하여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 작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안성 칠장사 범종(安城七長寺梵鐘.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8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
칠장사 범종은 명문상 1782년에 신안태, 이년성,이영선,이영준,청봉이 제작하였다고 언급되어 있음. 범종의 형태와 문양배치에서 조선후기 전형적인 범종형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안성 칠장사 대웅전영산회상도(安城七長寺大雄殿靈山會上圖.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9호. 경기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
불화의 설채법, 화면구성, 필선 등이 19세기 전반의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불화승의 계보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참고자료 : 문화재청 자료. 안성시청 자료. 미리내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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