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1. 1976년 발간된 <당신들의 천국>은 나환자 치료소가 있던 소록도를 배경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권력과 저항, 자유와 사랑의 문제를 복합적 관점과 다양한 시선으로 탐색한 한국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다. 현역 대령인 조백헌의 병원장 부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조백헌이 가지고 있던 섬을 개조시키려는 의지와 열성이 축구팀을 만들거나 섬 간척과 같은 구체적 사업을 통해 시행되고, 그러한 변화의 의지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보건과장 이상욱과 마을 원생들을 대표하는 황희백 장로 사이의 긴장과 갈등 때론 협력의 방식을 복합적으로 구성하면서 전개된다.
2. 조백헌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대한민국을 개조시키려 했던 박정희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인물이다. 그는 변화에 주저하고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원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여 변화의 필요성을 독려한다. “과거를 버리지 않으려 함은 당신들 스스로가 문둥이로 자처하고 가련한 문둥이이기를 고집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신들 뿐만 아니라, 병이라곤 앓아본 일이 없는 당신들의 아들딸까지도 그 추악스런 문둥이의 후손으로 영원히 이 섬을 떠나지 못하게 될거란 말입니다.”
3. 하지만 이상욱은 조백헌의 열정과 변화에 대한 욕망을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그것은 과거 일제시대 섬의 변화라는 명목으로 원생들을 학대하고 고통에 빠뜨렸던 끔직한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조백헌의 열정에 조금씩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또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의 실종이며 원장의 명분에 그저 종속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상욱은 원장의 신념과 명분의 독점성을 거부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게 된다.”
4. 간척 공사는 수많은 위기를 맞는다. 원생들의 폭동 때, 황희백 장로는 그들을 대표하여 나온 자리에서 조백헌에게 경고한다. “도대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분별해내는 데는 이 문둥이들보다 늘 깨우침이 늦단 말야, (.....) 더러운 문둥이 피라고 함부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하는 데서, 거기서부터 배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게란 말씀이야” 결국 간척 사업은 사업 그 자체의 어려움, 주변 마을 사람들의 반대와 물리적 공격, 상부 행정기관의 음모에 의해 좌초되고, 조백헌은 다른 곳으로 발령받으며 사건의 전개는 일차적으로 마무리된다.
5. 마지막 3부는 1부와 2부에서 전개된 사건들에 대한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조백헌은 이상욱의 편지를 받고 병원 관리직에서 퇴직한 후 섬을 다시 찾는다. 그것은 그가 시행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순수한 열정의 실천이었다. 이상욱은 조백헌이 만들려는 천국이 자칫 ‘철조망 울타리가 둘려쳐진 문둥이의 천국’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시킨다. 그것은 문둥이의 자유와 선택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필생의 천국이란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 진정한 천국이라면 전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에게 먼저 선택이 행해져야 할 것이고, 적어도 어느 때엔가는 보다 더 나은 자기 생의 실현을 위해 그 천국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6. 조백헌은 이상욱의 충고 뿐 아니라 황희백 장로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어떤 균형의 필요성을 자각한다. “이상욱 과장이란 사람, 모든 일을 그 자유로만 행하고 싶어했고, 또 오로지 자유로만 행할 줄은 알았어도, 거기서 익혀진 몹쓸 버릇들 (......)에 대해서는 미처 눈을 뜨지 못했던 거야, (.....) 믿음이 없이 자유를 하자니까 불신과 미움밖에 번지는 것이 없었던 말씀야.(...) 사랑이어야 하겠지. 자유라는 건 싸워 빼앗는 길이 되어 이긴 자와 진 자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빼앗음이 아니라 베푸는 길이어서 이긴 자와 진 자가 없이 모두 함께 이기는 길이거든.” 믿음은 결코 다른 영토에 서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상욱과 황장로는 조백헌의 선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조백헌은 진정한 섬의 변화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섬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7. 섬이 진정한 ‘우리들의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자유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고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믿음을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백헌은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힘’이다.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변화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오랜 실패와 갈등의 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은 구절일지 모른다. “이 섬은 자신의 힘을 기르면서 진실로 그의 자유와 사랑을 행하고 그들이 운명을 선택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날을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8. <당신들의 천국>은 인간의 선의가 어떤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그러한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비록 자유와 사랑 그리고 힘의 균형의 중요성을 제시하지만, 가장 핵심은 자유이다. ‘자유’가 확보되지 않는 한, 어떤 변화도 그것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건설이 필수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어려움과 외부로부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피력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공동체적 목표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말살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공동체적 ‘천국’의 필요성과 개인적 ‘자유’의 중요함이 충돌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열린 상태로 해결되지 않은 채 공동체와 개인 사이에 남아있다.
첫댓글 - 천국의 존재 가치가 살아있던 때 이야기. 나의 천국,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너의 천국, 당신들의 천국만이 떠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 누구의 천국도 아닌 혹은 공동체 이상향으로서의 샹그릴라로 회자되는 곳으로 남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