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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 자료입니다.
프루동에 대한 평가를 몇몇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적용하고 싶기도 합니다.
K. 맑스: 「국제 노동자 협회 임시 규약」, 김태호 역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에 의하여 전취되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계급적 특권과 독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평등한 권리 및 의무와 모든 계급 지배의 폐지를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선집3,14)
노동하는 인간이 노동수단들의, 즉 생활 원천들의 독점자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 모든 형태의 노예 상태의 근저에 놓여 있다−모든 사회적 빈곤, 정신적 피폐, 정치적 종속의 근저에 놓여 있다.(선집3,14)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은 따라서 모든 정치 운동이 하나의 수단으로서 종속되어야 할 위대한 목적이다. 이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모든 노력은 지금까지 각국의 다양한 노동 부문 사이의 연대의 부족으로, 그리고 서로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계급들 사이의 형제적 유대의 부재로 실패해 왔다.(선집3,14)
노동의 해방은 국지적이거나 일국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인 문제로서, 그것은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을 포괄하는 것이며 그 해결은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의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협조에 달려 있다.(선집3,14)
유럽의 가장 산업화된 나라들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현재의 부흥은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한편, 과거의 오류들에 다시 빠져드는 것^과 관련하여 엄숙히 경고하고 있으며, 여전히 연결되어 있지 못한 운동들의 즉각적인 결합을 요청하고 있다.(선집3,14-15)
이상의 것들을 고려하여,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1864년 9월 28일에 런던의 세인트 마틴 홀에서 개최된 공개 집회의 결의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은 위원회의 아래 서명 위원들은 국제 노동자 협회를 창설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 왔다.(선집3,15)
우리는, 이 국제 협회와 그것에 가맹한 모든 단체 및 회원들이 진리와 정의와 도덕을 인종이나 신앙이나 국적에 관계 없이 서로에 대한, 그리고 모든 인간에 대한 행동의 기준으로 삼을 것을 천명한다.(선집3,15)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도,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주장한다.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으며, 권리 없이는 의무도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정신으로 우리는 아래와 같은 국제 협회의 임시 규약을 작성했다.(선집3,15)
1. 본 협회는 서로 다른 나라들에 존재하며 다음과 같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노동자 결사들 사이의 연락과 협력을 매개하는 중앙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노동자 계급의 보호와 진보와 완전한 해방.(선집3,15)
2. 결사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국제 노동자 협회.(선집3,15)
3. 1865년에 벨기에에서 일반 노동자 대회를 개최한다. 대회는 국제 협회에 가입해 있는 노동자 결사의 대표자들로 구성된다. 대회는 노동자계급의 공통된 열망을 유럽에 공표해야 하며, 국제 협회의 최종 규약을 결정해야 하며, 협회의 성공적 운영을 위해 요구되는 방책들을 심의해야 하며, 나아가 협회의 중앙 평의회를 임명해야 한다. 일반 대회는 해마다 한 번 소집된다.(선집3,15)
4. 중앙 평의회는 런던을 소재지로 하며, 국제 협회에서 대표되는 서로 다른 나라 소속의 노동자들로 구성된다. 중앙 평의회는 의장, 회계, 총서기, 각국 담당 통신 서기 등등과 같이 업무 처리에 필요한 직책들을 소속 평의원들 가운데서 선출한다.(선집3,15)
5. 연례 회의에서 일반 대회는 중앙 평의회의 연례 업무에 대해 공식보고를 받는다. 중앙 평의회는 해마다 대회에 의해 임명되며 평의원의 수를 추가할 권한을 갖는다. 긴급한 경우에, 중앙 평의회는 정규 연례 회기 이전에 일반 대회를 소집할 수 있다.(선집3,16)
6. 중앙 평의회는 서로 다른 협력 단체들 사이에 국제적인 매개를 이루어, 한 나라 노동자들이 모든 다른 나라들에 있는 자신들 계급의 운동에 대해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한다; 유럽 각국의 사회 상태에 대한 조사가 동시에, 그리고 공동의 지도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 한 사회에서 제기된 공통의 관심사의 문제들이 모든 사회에서 의제로 올려질 수 있도록 한다; 예를 들면 국제 분쟁의 경우와 같이 즉각적인 실제적 조치가 필요할 때, 협회에 가입해 있는 결사들의 행동이 동시적이고 단일한 수 있도록 한다. 적절하다고 보일 때는 언제든지 중앙 평의회는 서로 다른 나라들이나 지역들의 결사들에 대해 안건 발의권을 갖는다.(선집3,16)
7. 각국의 노동자 운동의 성공은 단결과 결합의 힘에 의하지 않고는 확보될 수 없는 한편, 국제 중앙 평의회의 유용성은 그것이 노동자 단체들의 적은 수의 전국적인 중앙들을 상대해야 하느냐 아니면 많은 수의 작고 연결되어 있지 못한 지역 결사들을 상대해야 하느냐에 주로 달려 있기 때문에−국제 협회의 회원들을 그들 각국의 연결되어 있지 못한 노동자 결사들을 중앙의 전국적 기관에 의해 대표되는 전국적 조직체들과 연결시키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항의 적용이 각국의 특별한 법률들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는 것, 법률상의 장애를 별도로 한다면 어떠한 독립적인 지역 결사들도 런던 중앙 평의회와의 직접적인 통신을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선집3,16)
8. 제1차 대회가 개회될 때까지는 1864년 9월 28일에 선출된 위원회가 임시 중앙 평의회로서 활동하여, 서로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 단체들을 연결하며, 연합 왕국에서 회원들을 모집하며, 일반 대회의 소집을 위한 예비 조치들을 취하며, 대회에 상정될 주요 문제들을 전국적 결사들 및 지역 결사들과 토의한다.(선집3,16)
9. 국제 협회의 각 회원들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거주지를 옮길 경우 협회에 가입한 노동자들의 형제적 지원을 받는다.(선집3,16)
10. 형제적 협력의 항구적인 유대로 단결되어 있는 한, 국제 협회에 가입해 있는 노동자 결사들은 그들의 현행 조직을 온전히 보존할 것이다.(선집3,17) (1864년)
K. 맑스: 「아메리카 합중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게」, 최인호 역
우리는 당신이 대다수의 지지로 재선된 데 대해서 아메리카 인민에게 축하를 보내고자 합니다! 노예 소유자의 권력에 대한 저항이 당신의 첫 당선의 신중한 표어였다고 한다면, 노예제에 죽음을!은 당신의 재선의 의기양양한 전투구호입니다.(선집3,18)
아메리카판 티탄 족 투쟁이 터진 초기부터 유럽의 노동자들은, 자신들 계급의 운명이 성조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였습니다. 저 끔찍한 대서사시의 발단이 되었던 준주(准州) 획득 투쟁은, 광막한 처녀지를 이주민의 노동과 결혼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노예 감독의 발 아래 유린되도록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투쟁이지 않았습니까?(선집3,18)
300,000명의 노예 소유자들의 과두 지배가 세계 연대기에서 처음으로 무장 반란의 깃발에 감히 노예제라는 말을 써넣었을 때; 1세기 남짓 전에 위대한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사상이 처음으로 솟아났던 그 땅에서 최초^의 인권선언이 등장하여 18세기 유럽 혁명에 최초의 충격을 가져다주었을 때; 반혁명파가 체계적 철저함을 지닌 채 ‘구헌법 성립 시기의 지배이념’을 폐기한다면서 득의양양하여, “노예제가 유익한 제도라고−그것도 노동과 자본의 관계라는 커다란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며” 후안무치하게도 인간에 대한 소유권이 “새로운 건물의 초석”이라고 선언햇을 때; 그때 유럽의 노동자들은 남부 연합파 귀족에 대한 상류 계급의 광란적 지지에 경각심을 느끼기에 앞서, 노예 소유자들의 반란이 노동에 대한 소유의 전반적 십자군 원정에 대해 경종을 울릴 것이라는 사실과 노동하는 인간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이외에 그들이 과거에 쟁취한 것들까지 바다 저편의 이 거대한 투쟁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즉각 깨달았습니다. 그랬기에 이들 유럽 노동자들은 도처에서, 면화 공황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고통을 끈기 있게 참아 내었던 것이며, 그들 위에 있는 ‘배웠다는’ 계급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획책했던 친노예제적 간섭에 열광적으로 저항했던 것이며, 유럽의 대부분에서 이 대의를 위해 혈세를 지불하였던 거입니다.(선집3,18-19)
북부의 정치 권력의 진정한 담지자들인 노동자들이, 노예제가 그들 자신의 공화국을 더럽히는 것을 허용하고 있던 한; 이들 노동자들이, 흑인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주인들의 물건으로 되고 판매되고 마는 데 비해 백인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판매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서 득의양양해 있던 한−그러한 한에 있어서, 그들은 진정한 노동의 자유를 획득할 수도 없었고 해방투쟁을 벌이고 있는 유럽의 형제들을 지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보를 가로막았던 이러한 장애물은 내전의 피바다에 의해 씻겨가 버렸습니다.(선집3,19)
유럽의 노동자들은, 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이 중간계급의 권력을 신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는 것처럼, 아메리카의 노예제 반대 전쟁이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신장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신실하고 확고한 아들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쇠사슬에 묶여 있던 종족을 구해 내기 위한, 그리고 사회 세계를 개조하기 위한 유례없는 투쟁을 통해 조국을 이끌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가올 시대의 전조로 간주하고 있습니다.(선집3,19) (1864년 11월)
K. 맑스: 「P.-J. 프루동에 관하여. J. B. v. 슈바이처에게 보내는 서한」, 최인호 역
프루동에 대한 상세한 평가를 요구하신 귀하의 편지를 어제 받았습니다. (…) 프루동의 초기 시론들을 저는 더 이상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세계어(Langue universelle)’에 관한 학교 숙제 같은 그의 저작은, 해결을 위한 가장 초보적인 예비 지식도 갖추고 있지 못한 문제들에 그가 얼마나 거리낌없이 달려들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선집3,21)
그의 최초의 저작 소유란 무엇인가?는 무조건적으로 그의 가장 우수한 저작입니다. 비록 새로운 내용은 없다 할지라도 낡은 것을 말하는 방식이 새롭고 대담하다는 점에서 이것은 획기적인 저작입니다. 그가 알고 있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및 공산주의자들의 저작에서는 당연하게도 ‘소유(propriété)’는 다양하게 비판되어 있었으며 그뿐 아니라 공상적으로 ‘폐지’되어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 저술 속에서 프루동이 생-시몽 및 푸리에와 맺고 있는 관계는 포이어바흐가 헤겔과 맺고 있는 관계와 대략 유사합니다.^ 헤겔에 비하면 포이어바흐는 극히 빈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 이후에 있어서 포이어바흐는 획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신비적 박명(薄明) 속에 내버려두었던 몇 가지 점들, 기독교적 의식에게는 불쾌한 것이겠지만 비판의 진보를 위해서는 중요한 몇 가지 점들에 강세를 두었기 때문입니다.(선집3,21-22)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프루동의 이 저작에는 아직 억센 근육적 문체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체가 이 저작의 주요한 공적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다만 낡은 것의 재생일 뿐인 지점에서조차 프루동은 독자적으로 그것을 발견합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또 새로운 것이라고 간주되고 있습니다.(선집3,22)
정치경제학 상의 ‘지성소(至聖所)’를 침범하는 도발적 반항, 부르주아적 상식을 조롱하는 데 사용되는 기지 넘치는 역설, 촌철살인의 비판, 신랄한 풍자, 현존하는 것의 추악성과 관련하여 여기저기서 엿보이는 깊고 진정한 격분의 감정, 혁명적 진지함−이러한 모든 것들에 의해 소유란 무엇인가?는 짜릿한 감동을 주었으며 처음 출판되었을 당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선집3,22)
엄밀하게 과학적인 정치경제학사에서라면 이 저술은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저술들은 소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학에 있어서도 그 나름의 역할을 합니다. 예컨대 ‘인구’에 관한 맬더스의 저술을 보십시오. 그 저술의 초판을 보자면 그것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소책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표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류에 대한 비방문은 얼마나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까!(선집3,22)
저의 수중에 프루동의 책이 있다면, 몇 개의 실례를 들어 그의 초기의 수법을 쉽사리 보여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단락들에서 그는 이율배반을 다루는 칸트의 논법−칸트는 그 당시 프루동이 번역서를 통해 알고 있던 유일한 독일 철학자입니다−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또한 칸트와 마찬가지로 이율배반의 해결을 인간 오성의 ‘피안에’ 있는 어떤 것, 즉 그 자신의 오성에게는 계속적으로 불명료한 상태로 남아 있는 어떤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선집3,22)
얼른 보기에 하늘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것 같은 문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미 소유란 무엇인가? 속에서 모순을 보게 됩니다. 프루동이 한편으로는 프랑스 분할지 농민의(후에는 소부르주아의 petit bourgeois) 관점과 눈으로 사회를 비판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전수받은 척도를 사회에 갖다 대고 있다는 모순말입니다.(선집3,23)
이미 그 표제 자체가 이 저술의 결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아주 그릇되게 제기되었기 때문에, 올바른 해답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고대의 ‘소유관계들’은 몰락하여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 자체가 과거의 소유관계들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본래 프루동이 다루었던 것은 현존의 현대 부르주아적 소유였습니다. 현대 부르주아적 소유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정치경제학’의 비판적 분석을 통해서만 답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치경제학이라는 것은 저 소유관계들 전체를 의지관계들로서의 그것의 법률적 표현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실재적 형태에 있어서, 즉 생산관계들로서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제적 관계들 전체를 ‘소유’, 즉 ‘la propriété’라는 일반적 법률적 관념 속으로 엮어 넣었기 때문에, 프루동은 브리소가 이미 1789년 이전에 이와 유사한 한 저술에서 동일한 말로써 내놓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소유는 절도이다(La propriété c’est le vol.”(선집3,23)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기껏해야, ‘절도’에 관한 부르주아적 법률 관념들은 부르주아 자신의 ‘정직한’ 벌이에도 타당하다는 것뿐입니다. 다른 한편 소유에 대한 폭력적 침해로서의 ‘절도’는 소유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프루동은 진정한 부르주아적 소유에 관한 망상들, 자기 자신에게도 불명확한 온갖 종류의 망상들 속으로 엉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선집3,23)
제가 파리에 체재하고 있을 때인 1844년에 저는 프루동과 개인적 교제관계를 맺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이 사실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의 ‘궤변(Sophistication)’−이것은 영국인들이 거래 품목의 위조를 일컬을 때 쓰는 말입니다−에 대해 저 자신에게도 일정 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밤을 새워 가면서 진행된 긴 토론 과정에서 저는 그에게 헤겔주의를 감염시켰는데, 이것은 그에게 아주 해로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어를 몰랐던 탓에 그로서는 그것을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시작해 놓은 일은, 내가 파리에서 추방 당한 이후에 칼 그륀 씨가 계속하였습니다. 게다가 칼 그륀 씨가 독일 철학의 교사로서 저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이 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뿐입니다.(선집3,23-24)
그의 두 번째 주요 저작 빈곤의 철학, 등등이 출판되기 직전에 프루동은 아주 상세한 편지를 통해서 자신이 직접 이 책의 출판을 저에게 알려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특히 다음과 같은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엄밀한 비판을 고대합니다(J’attends votre férule critique)”.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 있어 이 엄밀한 비판이 그의 머리 위에(저의 저술 철학의 빈곤, 등등(파리, 1847년)에서) 모종의 방식으로 떨어지자 그와 저의 우정은 영원히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선집3,24)
이상에서 말한 것으로 미루어 당신도 알게 되었겠습니다만, 엄밀히 말해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 혹은 경제적 모순들의 체계를 통해서 비로소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한 해답이 주어졌습니다: ‘소유란 무엇인가?’ 사실상 그는 이 저술이 출판된 이후에 비로소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욕설로써가 아니라 오직 현대 ‘정치경제학’의 분석을 통해서만 마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경제학적 범주들의 체계를 변증법적으로 서술하고자 하였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칸트의 ‘이율배반’ 대신에 헤겔의 ‘모순’이 전개 수단으로 등장해야 했던 것입니다.(선집3,24)
두 권으로 된 그의 두꺼운 저작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저의 반박서를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그 반박서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하였습니다. 즉, 프루동이 과학적 변증법의 비밀에 얼마나 정통하지 못하였는가; 다른 한편 그는, 경제학적 범주들을 물질적 생산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역사적 생산관계들의 이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대신에 이러한 범주들을 선재적인 영원한 이념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얼마나 사변철학의 환상들을 공유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우회로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또다시 부르주아 경제학의 관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들을 지^적하였습니다.(선집3,24-25)
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점들, 즉 그가 비판하려고 했던 ‘정치 경제학’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던 지식은 완전히 결함투성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심지어 학생 수준에 불과하였다는 점, 또한 스스로 해방의 물질적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운동인 역사적 운동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과학의 원천으로 삼는 대신에 그는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식을 선험적으로(a priori) 고안하는 데 쓰이는 이른바 ‘과학’이라는 것을 공상주의자들과 함께 추구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전체의 기초인 교환가치에 대한 프루동의 이해가 얼마나 불명료하고 그릇되며 어설픈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더구나 그는 리카도의 가치론에 대한 공상주의적 해석을 새로운 과학의 기초라고 보고 있으며, 그 점 또한 거기에 지적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의 일반적 관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선집3,25)
“모든 경제적 관계는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프루동 씨가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점이다. 그는 좋은 측면이 경제학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것을 보고 나쁜 측면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고발되는 것을 본다. 그는 경제학자들에게서 영원한 관계들의 필연성을 빌려온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빈곤 속에서 낡은 사회를 전복할 혁명적인 파괴적 측면을 보는 대신에) 빈곤 속에서 빈곤만을 보는 환상을 빌려온다. 그는 과학의 권위에 의존하고자 하면서 양자의 견해에 다 찬성한다. 그에게 있어 과학은 보잘것없는 규모의 과학적 정식으로 환원된다; 그는 정식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이리하여 프루동 씨는 정치경제학과 공산주의를 비판했다는 것에 대해 우쭐해 한다−[그러나] 그는 양자의 아래에 서 있다. 경제학자들보다 아래에 있는 것은 그가 마법의 정식을 손안에 쥐고^ 있는 철학자로서 순수 경제학적 세목들로 파고드는 것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보다 아래에 있는 것은 비록 사변적으로나마 부르주아적 지평선을 넘어설 용기도 통찰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 그는 과학인으로서 부르주아들과 프롤레타리아들을 초월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는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정치경제학과 공산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소부르주아에 불과하다.”(선집3,25-26)
이 평가가 아무리 가혹하게 들린다 할지라도, 저는 지금도 이 평가의 하나하나의 말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으니, 제가 프루동의 저서를 소부르주아(petit bourgeois) 사회주의 법전이라고 선언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였을 당시 프루동은 아직 정치경제학자들에 의해 그리고 동시에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초과격 혁명가로서 이단시되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한 이런 까닭에 저는 그 후 그가 혁명을 ‘배반하였다’는 절규가 터져 나왔을 때에도 이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집3,26)
소유란 부엇인가?와 대비할 때 빈곤의 철학에서는 프루동의 서술 방식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결함들의 흉한 모습들이 금방 눈에 들어옵니다. 종종 그 문체는 프랑스인들이 과장(ampoulé)이라고 부르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갈리아적인 지성의 날카로움이 상실되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독일 철학적이고자 하는 과장된 사변적 잠꼬대가 등장합니다. 길거리의 잡상인처럼 자기 것이 최고라고 우겨대는 허풍스러운 논조, 언제 들어도 심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과학’에 관한 주절거림과 그릇된 과시 등은 듣는 이의 귀를 끝도 없이 괴롭힙니다.(선집3,26)
이 책의 어떤 구절들을 보면, 첫 저술을 관통하고 있던 진지한 열정은 불은 뿜는 열변이 체계적으로 도입됨에 따라 그때그때의 열광으로 바뀌고 맙니다. 게다가 독창적 자기 사상에 대해 자연히 생기게 마련인 자부심이 이미 꺾여 버린 후 이제 과학의 졸부가 되어 가지고서는, 자신에게 없는 속성과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능력을 뽐내야 한^다고 망상하고 있는 이 독학자의 졸렬하고 불쾌하기 그지없는 학자연한 태도, 또 그 다음으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맡은 실천적 역할로 볼 때 존경받아 마땅한 카베와 같은 인물에게는 무례하고 난복한−날카롭지도 못하고 심원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릇된−공격을 가하는 반면, 예컨대 엘베시우스가 다음과 같이 특징 짓고 있는 엄숙주의를 세 권으로 된 지루하기 그지없는 두꺼운 책 속에서 시종일관 설교해 대는 희극적 진지함이 그 의의의 전부인 뒤느와이에(물론 ‘추밀원 고문관’입니다) 같은 인물에게는 얌전한 태도를 취하는 그 소부르주아적 근성: ‘On veut que les malheureus soient parfaits(사람들은 불운한 사람들에게 완전한 인간이 되라고 요구한다)’.(선집3,26-27)
2월 혁명은 실제로 프루동으로서는 매우 거북한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몇 주일 전에 ‘혁명의 시대’는 영원히 지나갔다는 것을 반박할 여지 없이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국민의회에서의 그의 행동은, 현존의 관계들에 대한 그의 몰이해를 보여주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칭송을 들을 만한 것입니다. 6월 폭동 이후라는 시점에서 이것은 아주 용감한 행동이었습니다. 국민의회에서의 그의 행동은 또 다른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프루동의 동의에 반대하는 연설−이 연설은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을 하는 와중에, 티에르 씨는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이 정신적 지주가 서 있는 초석이란 것이 어린이용 교리 문답서 수준에 불과한 것임을 전 유럽에 증명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티에르 씨에 비해 프루동은 사실상 대홍수 이전의 거인에 필적할 만큼 자신의 키를 키우게 되었습니다.(선집3,27)
‘무상 신용(crédit gratuit)’의 발견과 이 무상 신용에 기초한 ‘인민은행(banque du peuple)’이 프루동의 최후의 경제학적 ‘업적’입니다. 저의 저술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제1분책, 베를린, 1859년)(59~64면)에서 증명되어 있다시피, 그의 견해의 이론적 기초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초보적 원리, 즉 화폐에 대한 상품의 관계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또 한편 그 실천적 상부구조는 훨씬 더 이전에 있었던 훨씬 더 훌륭한 구상들을 단순히 우려먹은 것에 불과합니다.(선집3,27)
신용제도는, 예를 들어 18세기 초^엽과 그 후 다시 19세기 초엽에 영국에서 한 계급의 수중에서 다른 계급의 수중으로 재산을 이전시키는 데 기여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일정한 경제적 및 정치적 상황하에서는 노동계급의 해방을 촉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자를 낳는 자본을 자본의 주요 형태라고 간주하는 것, 게다가 신용제도의 특수한 적용인 이른바 이자의 폐지를 사회개조의 토대로 삼고자 하는 것은 완전한 시정잡배적 환상입니다. 우리가 17세기 영국 소부르주아 층의 경제학적 대변자들에게서 실제로 이미 더 상세히 전개되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환상을 보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이자를 낳는 자본에 관한 프루동과 바스티아의 논쟁(1850년)은 빈곤의 철학보다 훨씬 저급합니다. 그는 심지어 바스티아에게까지 논파당하는 지경에 이르러, 논적에게 한 방 먹을 때마다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선집3,27-28)
몇 년 전에 프루동은 ‘조세’에 관한 현상 논문−로잔느 정부가 공모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을 썼습니다. 여기에서 천재성은 그 마지막 흔적까지 사라지고, 가장 순수한 소부르주아(petit bourgeois tout pur) 이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선집3,28)
프루동의 정치적 및 철학적 저술들에 관해 말하자면, 경제학적 노작들 속에 나타난 것과 똑같은 모순에 가득 찬 이중적 성격이 그 모든 저술들에 나타납니다. 게다가 그 저술들은 국지적-프랑스적 가치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이 18세기의 부르주아적 볼테르주의와 19세기 독일의 무신론적 입장에 비해 종교성이라는 점에서 우월한 자신들의 상태가 그들 자신에게 걸맞은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러한 시기에, 종교나 교회 등등에 대한 프루동의 공격은 대단한 국지적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표트르 대제가 야만을 통해 러시아의 야만을 거꾸러뜨렸다고 한다면, 프루동은 공문구를 통해서 프랑스의 공문구적 습성을 타파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선집3,28)
‘쿠데타’에 관한 그의 저술은 단순히 악서일 뿐만 아니라 비열한 저술에 완전히 조응하는 것입니다. 이 저술에서, 그는 루이 보나파르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으며 실제로 보나파르트를 프랑스 노동자들이 받아들일 만^한 인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폴란드를 반대한 그의 마지막 저술도 역시 악서일 뿐만 아니라 비열한 저술인바, 이 저술에서 그는 차르의 영광을 위하여 크레틴 병적인 후안무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선집3,28-29)
사람들은 프루동을 흔히 루소와 비교해 왔습니다. 이보다 더 그릇된 생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니콜라 랭게와 유사합니다. 그렇더라도 니콜라 랭게의 민법 이론은 아주 천재적인 저서입니다.(선집3,29)
프루동은 본래부터 변증법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도한 곳은 궤변일 뿐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가 진정으로 과학적인 변증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의 소부르주아적 관점과 관계가 있습니다. 소부르주아는 역사 서술가 라우머와 마찬가지로 이런 측면과 저런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의 경제적 이해들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따라서 그의 정치, 그의 종교적, 과학적, 예술적 견해들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그의 도덕에 있어서 그러하며 또 모든 점에서 그러합니다.(선집3,29)
소부르주아는 살아 있는 모순입니다. 그런데 소부르주아가 프루동처럼 재기 있는 인간일 경우에, 그는 자기 자신의 모순들을 가지고서 노는 법을 터득하게 되며, 이 모순들을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때로는 파렴치하고 때로는 화려한 기묘하고 떠들썩한 역설로 만들어 버리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과학상의 협잡꾼적 행위와 정치상의 순응적 태도는 이와 같은 관점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아 있는 추동력은 단 하나, 주체의 허영심뿐입니다. 허영심에 차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목전의 성공과 순간의 평판뿐입니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루소 같은 인물로 하여금 외견상의 타협까지 포함한 현존 권력과의 일체의 타협을 항상 거부하게 만들었던 단순한 도덕적 절개는 필연적으로 사라지고 맙니다.(선집3,29)
아마도 후세의 사람들은 프랑스 민족의 최근의 단계를 특징지어, 루이 보나파르트는 그 단계의 나폴레옹이었고 프루동은 그 단계의 루소-볼테르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죽자마자 그 즉시 저에게 염라대왕의 역할을 맡긴 데 대해 이제 당신 자신은 전적으로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선집3,29) (1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