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레이시
Lacey Kim Solo Exhibition
Unspoken Moments 1
oil on canvas, 122x122cm, 2026
전시작가 : 김 레 이 시
전시일정 : 2026.08.11-08.16
관람시간 : Open 11:00 ~ Close 18:00
전시장소 : 갤러리 더플럭스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28 2F
T. 02-3663-7537
www.42art.com
Unspoken Moments 2
oil on canvas, 60.6x60.6cm, 2026
Unspoken Moments 3
oil on canvas, 60.6x60.6cm, 2026
Unspoken Moments 4
oil on canvas, 60.6x60.6cm, 2026
Unspoken Moments 5
oil on canvas, 60.6x60.6cm, 2026
작가 노트
시선을 잡아채는 수많은 시각적 도구들 속에서도 여전히 페인팅이라는 매체가 주는 환희 혹은 역할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페인팅을 한다. 내작업을 마주한 후 어떤 이들은 ‘감정’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느냐 묻기도 하고 자신들이 내 작업에서 즉각적으로 보이는 정보 이를테면 색이나 형태를 통해 갖게 된 ‘감정’을 많 은 경우 공유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연상되는 장면이나 형태를 찾아내려 애쓰는 경우도 있다. 추상의 작업이므로 보이는 것에서 이야기 거리를 찾아내기도 애매하 고 무엇을 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기 쉽지 않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작업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사 감정을 표현하고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는 데에 있는가? 아니면, 내작업이 보이는 구성적 유사성으로 지나간 한 시기 속 주도적으로 예술의 본질을 내면 세계로 면밀히 따져 물었던 ‘추상표현주의’라도 불러오려 는 데에 있는가? ‘행동’이라는 주도적 행위자체, 표출의 도구로써 작업을 묻는다면 완벽히 동떨어져 있다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작가의 무의식 속 불안이나 두려 움 또는 쾌감을 표현하고 작가 자신이 내던진 감정을 보는 이 역시 그 속에 침잠하는 데에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작업을 하는 이유 목적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페인팅을 통해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표현하는 것에 머무는 것을 넘어, 타자 즉 나와 다른 형태로 동시대에 함께 존재하는 이들을 향한 동반자적 일체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하리라 말하고 싶다. 변화하고 진동하는 에너지로서 서로 각기 존재하는 개체들이 내 작업을 통해 서로 작용하여 만날 가능성을 나는 꿈꾸고 싶다. 일상의 매 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마주하는 찰나의 것들은 꾸밈없이 나로부터 펼쳐져 나올 수 있을까. 깊게 잠들어 다른 공간을 떠돌다 문득 깨어 나고 나면 생각이 닿기도 전에 내가 하는 것은 내 몸의 부분들을 밀어내는 것, 뻗어내는 것이다. 그 순간 내 손이 내 팔이 죽 늘어나 축적해 두었던 힘을 밖으로 분사 시키는 행위는 내 머리속으로 생각해 일어나는 것이 아닌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나타나고야 마는 일. 그리고 이것은 그 어떤 때보다 그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존재 의 발현이다. 이 비워진 생각의 틈을 타 신체로 수행하는 즉각적인 제스쳐는 내게 일종의 행동하는 명상이자 참선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본래 있는 그대로 여지없이 나타나는 행위야말로 나에게는 그러므로 존재하는 이대로를 표현하는 가장 참신한 방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허공에 한 팔을 크게 휘저어 선을 긋고, 그 궤적을 캔버스 위로 데려온다. 선은 내 직관의 결과이자 내면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는 매체이며 존재를 증명하는 직관 의 언어가 된다. 지나간 궤적의 옅어짐이 이미 있었던 것을 의심하게 한다 해도, 행위는 지워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다. 이 단순하고 직접적인 행위는 내가 지금 이 순간 있음을 그 무엇보다 명확하게 증명한다. 선들이 결합하고 반복되어 화면 위에 층(layer)을 쌓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다워짐을 느낀다. 이는 단 순히 고정된 순간의 나열이 아니다.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이 나에게는 무수한 ‘나’들로 포개어져 요동치는 시간으로 겹으로서 나타난다 하겠다. 각 순간 각인된 ‘ 나’들의 조합을 마주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과 다름없다. 이는 생각을 덜어내고 오롯이 깨어있는 상태로 회복하는 참선의 과정이기도 하다. 때로 말을 통한 증명을 넘어 그보다 직관적 방식으로써 존재를 확연히 드러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즉, 본질에 가까이 가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을 반드시 드러내려 애쓰지 않아도 순간의 진심들이 모였을 때 오히려 그 존재의 의미는 선명히 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하기 이전, 본래의 자리, 그 순간순간 속에서 구현되는 진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캔버스 위 선들을 그려 화면이 차근히 채워지는 작업으로 나의 페인팅은 완수된다. 나의 상상은 화면 안의 선들이 화면을 벗어나서도 그대로 연장되고 연결되며, 다시 돌아온 선들은 그대로 캔버스 위를 안착하게 되는데 각각의 선들이 만들어내는 형태는 생각을 통해 이미 상정해 놓은 지점을 찾아 만들어가는 것이라기 보다 는 직관적인 반응을 따라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선의 궤적들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존재의 파동에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나면 파 동의 당위는 번져 나가 어디엔가 어디로든 닿을 수 밖에 없을 이유를 안고야만다.
오랫동안 나는 화면 전체를 바탕색으로 덮고 그 위에 다시 선을 쌓는 방식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이제 여기에 더해 화면의 전체가 아닌 부분을 덮고 그 위에 새로운 선들을 올려 층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는 존재의 의미가 순차적으로 쌓여서 생기는 결과물이기보다, 각 순간 속에 놓인 존재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의미를 지니 지 않을까 하던 생각에 기인한다. 화면의 비우고 다시 채우는 이 반복적인 호흡은 내게 내면의 소란을 어느덧 가라앉히는 명상의 궤적을 떠오르게 할 수밖에 없다. 각각의 층위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화면은 캔버스 안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작업을 통해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삶으로 시선을 확장시킨다. 내면을 응시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나라는 존재에 매몰되지 않고, 함께 존재하는 타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와 타자는 완전히 분리된 벽에 의한 공간 속 따로 떨어진 채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만 않을 뿐 그대로 연결된 망 속에 얽혀 존재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들뢰즈가 말한 ‘리좀(Rhizome)’, 고정된 중심이 아닌 위계를 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가 끝없이 접속하는 줄기에 닿아 있다. 따라 서 내 작업 안에 ‘공존의 무게’가 놓이는 것은 결국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현시대 이 순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참담한 비극은 우리 각각을 마땅히 잇는 파동을 억지로 떼어놓은 폭력이 아닐까. 그렇다면 생각을 덜어낸 틈을 타 뿜어낸 내 작업의 선들은 낚아 채여 찢어진 타자의 파동을 이을 수단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다 시 이어 붙인 사회적 추상으로써 내 작업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는 흔히 파랑을 차가운 침묵의 색이라 정의한다. 하지만 나의 작업에서 파랑은 에너지가 절정에 달했을 때 비로소 도달하는 ‘가장 뜨거운 온도’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머리로 계산하기 전, 몸의 근육이 즉각적으로 분사해낸 선(Line)들은 캔버스 위에서 층(Layer)을 이루며 존재를 증명해 타자의 고통을 그 들만의 것으로 내 치고 외면하지 않으려는 열렬한 관용이자 뜨거운 기록이다. 차가워 보이는 화면 뒤에 숨겨진 이 적극적 신체적 궤적으로, 흔하게 대상을 다만 표면적 인상으로 판 단하려는 감각적 고정관념에 나는 우리가 질문을 던질 수 있길 원한다. 켜켜이 쌓인 물감의 층위는 내게 단순한 색의 중첩이 아니라, 매 순간 진심으로 존재하고자 했던 뜨거운 시간의 기록이 되는 동시에 이 푸른 파동 안 마침내 타자와 연결되어 같은 숨을 내쉬기를 바라는 흔적이다. 그러니 캔버스 위 직관적인 제스처로 표현된 이 기록들은 나를 나타내는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이들을 향한 존중과 연결의 몸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