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벼슬에 관한 混亂
공의 벼슬과 관련해서도 혼란이 많다. 첫째, 대동보의 면주이다. 면주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해남현감으로 참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은 아니다. 전쟁 전에 가리첨사로 재직했으나 이유미상으로 귀향해 있다가 참전했다고 봐야 한다. 둘째, 충의록이다. 정유재란 때 장흥으로 침입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해남현감과 부총제(副統制)로 승진시킬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용맹은 인정되나 관사(官事)를 다스리지 못한 능력부족을 감안, 직위는 주지 않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만 내렸다고 했다.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해남현감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전 현감 변응정의 전사 이후로 임명되고 상당한 기간 재임했는데 관사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임명되지 않았다는 것은 오류이다. 부통제란 품계는 전쟁기간 중 시행되지 않는 직제이다.
셋째, 행장이다. 이순신의 휘하에서 조전도통장(助戰都統將)을 지낸 기록이다. 하지만 당시 수군에 직책에는 조전도통장이란 없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1592년 4월 29일(양 6월 8일)에는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申浩) ▴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융균장 훈련원 봉사 나대용(羅大用) ▴우부장 보성군수 김광득(金光得)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鄭運)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金浣) ▴한후장 영군관급제 최대성(崔大晟) 참퇴장 영군관급제 배흥록(裵興祿) ▴돌격장 영군관 이언량(李彦良) 등으로 함선의 직책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웅치와 이치전투에서 권율의 선봉장으로 공을 세워 훈련첨정(訓練僉正) 승진을 논의했다는 것도 정확한 기록은 아닌듯하다.
이상의 여러 기록과 주변상황을 종합하면 위대기 장군의 관직과 작위는 ▴가리첨사 ▴해남현감 ▴가선대부 ▴ 호서수군절도사 ▴선무원종 1등훈 등이 관직과 훈작의 정설이 아닐까 사료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순신의 일기에 등장한 1594년 5월 23일 이후의 행적과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전투에 참전한 과정 등이 시원하게 정리되지 않는 점이다. 이순신은 그해 8월 장흥읍을 거쳐 회진에서 수군통제사로 취임하고 이어 한달 후 명량대첩을 벌였는데 공은 남원전투에 참여했다. 남원전투와 이순신의 장흥 방문 시기는 8월 13일과 8월 16일도 거의 비슷한 시기이다. 만일 공이 이순신과 인간적으로 절친했다면 남원전투보다는 명량대첩 쪽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로 보면 수사공과는 인간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결정적인 의문이 있다. 공이 정유재란 때 남양을 거쳐 중령산으로 덮친 왜적을 쳐부셨다는 충의록 등의 기록이다. 그는 그해 8월 12일 남원전투에 참전했다. 이순신은 3도수군통제사로 취임하기 위해 보성→회천→장흥을 거쳐 16일 회진에 도착한다. 그런데 수사공이 어느 때 중령산으로 덮친 왜적과 싸웠겠는가. 이순신의 장흥방문 전일까 후일까.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우선 공이 남원전투에서 패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었거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귀향길에 들었다하더라도 도착하기 이전이다. 또한 당시 왜적은 명량대첩을 앞두고 해남 어란진 등에 주둔하고 있었다. 왜적이 장흥읍으로 상륙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이 부분에 관한 공적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우리 문중만의 기록이 아닐까 사료된다.
한편 공의 생졸년을 추정해 보자. 그는 1559년(己未) 3월 7일 출생했다. 태생지는 장흥읍 평화(平化)이거나 행원(杏園)이다. 그러나 졸년은 기록되지 않고 있다. 대동보 면주에는 연도(年度)는 없고 8월 18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기는 해도 졸년의 추정이 가능하다. 공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전투까지 참전한 기록은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 공으로 권율이 조정에 포상을 품계(稟啓)하자 가선대부의 작위를 내렸다고 했다. 이어 호남연안이 불안하자 호서수군절도사로 제수했는데 신병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타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공의 타계 연도는 전쟁이 끝난 1598년으로 봄이 타당하다. 즉 1598년 8월 18일을 졸년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란이 끝나기도 전인 향년 만 39세 우리나이로 치면 40세에 타계했다고 추정된다.
(장흥 위씨 종보 제17호, 2008.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