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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구우회 회원들과 촉석루를 다녀와 기문과 시를 찾아 보았다.
진주 촉석루 기(晋州矗石樓記)
하륜(河崙)
누관(樓觀)을 경영하는 것은 정치하는 자의 여사(餘事)이긴 하나 그 흥하고 폐하는 것으로써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짐작할 수 있다. 세도는 오르내림이 있는 까닭에 인심의 슬픔과 즐거움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누관이 흥하고 폐하는 것도 그에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누관 하나가 폐하고 흥하는 것으로써 한 고을의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인심으로써 한때의 세도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여사로만 돌리고 작게 여길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 고을 촉석루를 보고 더욱 믿어진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석벽 위에 있는데, 나는 옛날 소년 시절에 여러 번 올라가 보았다. 누의 규모는 우람하고 넓어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고, 그 밑으로는 긴 강이 흐르며 여러 봉우리는 밖으로 벌여서 있다. 여염의 상마(桑麻)와 누대의 화목(花木)이 그 사이로 은은히 비치며, 푸른 바위, 붉은 벼랑, 긴 개울, 비옥한 땅이 그 곁에 이어져 있다. 인기(人氣)는 맑고 풍속은 후하며 노인들은 편안하고 젊은 자는 순종하며, 농사짓는 농부나 누에치는 아낙네는 제 임무에 부지런하고, 효성스러운 자식과 사랑스러운 손자는 제 힘을 다하여 봉양하고, 방아타령은 마을을 연하고 뱃노래는 어촌을 누비며, 온갖 새는 무성한 숲속에서 우짖고 고기떼는 그물에 걸릴 위험이 없으니, 한 구역의 물건들이 모두 제 자리를 얻은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화사한 꽃, 시원한 그늘, 맑은 바람, 밝은 달이 때 맞추어 이르고, 소장영허(消長盈虛)와 회명음청(晦明陰晴)의 변화가 서로 바뀌어 끊이지 않으니 즐거움이 또한 무궁하다.
그 누의 명칭에 대해서는 담암(淡庵) 백선생(白先生)의 기문이 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강 가운데 돌이 삐죽삐죽 나온 것이 있어서 누를 짓고 이름을 촉석(矗石)이라 했다. 김공의 손으로 시작되고 안상헌(安常軒)이 다시 지었는데 모두 장원급제한 이들이다. 그래서 겸하여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누에 대한 시(詩)의 걸작으로는 면재(勉齋) 정 선생의 배율(排律) 육운(六韻)과 상헌(常軒) 안 선생의 장구(長句) 4운(韻)이 있고, 또한 운은(耘隱) 설(偰) 선생의 육절구(六絶句)가 있으며, 그 운(韻)을 화답하여 속작(續作)한 이는 이를테면 급암(及庵) 민 선생, 우곡(愚谷) 정(鄭) 선생, 이재(彛齋) 허 선생이 있는데 모두 가작이니, 선배의 풍류와 문채를 이것으로 인하여 상상할 수 있다.
불행히도 전조의 말엽에 온갖 제도가 황폐하고 변방의 경비 역시 해이하여 바다 도적이 깊이 들어오고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지니, 누도 또한 불타버리고 말았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열어 성신(聖神)이 서로 계승하여 치교(治敎)가 밝아지고 은혜가 국내에 젖고 위엄이 해외에 떨치니, 전일에 침략하던 자들이 문을 두드리고 항복을 빌며 줄지어 보물을 바치고, 바닷가의 토지도 날로 개척되어 인구가 다시 주밀하게 되니, 홀아비와 홀어미들은 웃음을 짓고 노인들은 술을 권하며 서로 치하하여 말하기를, “요즈음 같은 태평세상을 눈으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한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에는 오히려 내 다스림이 흡족하지 못하다 여기시고, 매양 교서(敎書)를 내리어 민력(民力)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시니, 수령도 농상(農桑)이나 학교에 관계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한 가지 역사도 감히 자의로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다.
고을의 부로(父老) 전판사(前判事) 강순(姜順)과 전사간(前司諫) 최복린(崔卜麟) 등이 여러 노인들과 같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읍을 창설하던 초기부터 땅을 살피던 곳으로, 촉석루를 설치하여 한 지방의 승경이 되었다. 옛사람이 그로써 사신과 빈객의 마음을 유쾌하게 하여 화기(和氣)를 불렀고 그 혜택이 고을 백성에게 미쳤던 것인데, 폐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능히 중수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고장 사람의 공동 책임이다.” 하였다. 이에 각각 재물을 거출하여 용두사에서 전향(典香)하고 있는 중 단영(端永)이란 자를 시켜서 그 일을 담당하게 하는 동시에, 내가 이 일들을 임금께 아뢰니 금단하지 말라는 분부가 내리게 되었다. 임진년 12월에 판목사(判牧事) 권충(權衷)공이 부임하여 판관 박시혈(朴施絜)과 같이 여러 어른들의 말을 채택해서 이듬해 봄 2월에 강의 제방을 수축하는데, 백성을 나누어 대오(隊伍)를 만들고 한 대오가 각기 한 무더기씩 쌓게 하여 논밭과 마을에 대한 여러 해의 근심을 제거하게 하니 열흘이 못 가서 끝을 냈다. 나아가서 자급(自給)을 못하는 자를 도와주고, 놀고 먹는 자 수십 명을 소집하여 부지런히 서두르게 하여 9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는데, 단정한 집이 새로 나타나니 뛰어난 경치는 예와 같았다. 지금 판목사 유담(柳淡)공과 판관 양시권(梁施權)이 후임으로 와서 단청을 하고 또 관람과 아울러 농사에 물 대줄 것을 계획하여 수차(水車)를 만들고 둑을 쌓아서 백성의 이익을 일으켜 주었다. 어른들은 그 모든 것을 갖추어 나에게 청하기를, “강의 제방을 쌓고 촉석루를 짓게 한 것은 모두 그대의 지시였고, 누대가 이루어진 날 이제 특별 유시를 받았으니, 한 고을의 영예가 지극하다. 여러 군자의 백성을 위한 염려도 또한 근실하다 이를 만하니, 기문을 만들어서 영원한 세대에 보여주도록 하지 않으려는가.”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이는 모두 어른들의 지원으로 된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으리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인심과 세도로써 기쁨을 삼고 또 어른들의 뜻에 느낀 바 있어 전후에 듣고 본 것을 삼가 적는 바이다. 또 다시 생각건대, 이 누에 오르는 자는 개울 가의 풀이 싹트는 것을 보고 천지의 물(物)을 생(生)하는 마음을 알아서 어질지 못한 참혹한 것으로써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을 해롭게 하지 말 것을 생각하며, 밭 곡식이 바야흐로 자라나는 것을 보고 천지의 물을 가꾸는 마음을 생각하여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의 농사 때를 조금이라도 빼앗지 말 것을 생각하며, 과수원의 과일이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천지의 물을 성숙하게 하는 마음을 깨달아 불의의 욕심으로써 백성의 이익을 조금도 침해하지 말 것을 생각하고, 마당에 노적이 쌓인 것을 보고 천지의 물을 기르는 마음을 알아서 법이 아닌 부세로써 백성의 재물을 털끝만큼도 약탈하지 말 것을 생각하며, 이 마음을 미루어 감히 자기만을 즐겁게 하지 말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 하면, 사람마다 세도의 화평함과 인심의 즐거움이 실로 임금의 깊고 두터우신 덕에서 근원된 것임을 알고, 모두 화봉인(華封人)의 축복을 본받고자 할 것이니, 웃어른들의 끊임없는 정성으로써 부흥(復興)을 보게 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랴. 나는 다행히 퇴직할 날이 가까웠으니, 생각으로는 필마로 고향에 돌아가서 여러 어른들과 매양 좋은 철 기쁜 날에 누에 올라 술 마시고 시 지으며, 그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남은 세월을 마치고자 하니, 웃어른들이여 기다려 주기를 바라노라.
촉석루중(矗石樓中) 삼장사(三壯士) 기실비(記實碑) 이 비는 경남 진주시 목성동에 위치한 진주성내의 촉석루 앞 광장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세칭 “촉석루 삼장사비(矗石樓 三壯士碑)”라고 한다. 여기에서 삼장사란 임진왜란 당시 학봉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있을 때 지은 이른바 촉석루중 삼장사라는 그 시중(詩中)의 삼장사를 일컫는다. 그리고 “비변사 등록(備邊司 謄錄)” 순조(純祖) 13년(1813) 2월 25일 조에서 증판서(贈判書) 김성일, 증판서 조종도(趙宗道, 1537~1597, 號는 大笑軒), 증참의(贈參議) 이로(李魯, 1544~1598, 號는 松巖)를 세칭 촉석루 삼장사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인들은 촉석루중 삼장사의 위적(偉蹟)을 영구히 기념코져 기해년(1959)에 영남유림 325문중에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남고(南?) 최항묵(崔恒?), 동초(東樵) 이우익(李愚益), 중재(重齋) 김황(金榥), 평암(平庵) 이경(李經) 등이 중심이 되어 1700여명이 동심 합력하여 촉석루중 삼장사 추모계를 결성하고 그 일차 사업으로 익년(翌年) 경자(1960) 8월 촉석루 경내에 역사적인 촉석루 삼장사 기실비를 세웠다. 비문은 중재 김황(1896~1978)이 짓고 국사편찬위원회의 유권해석과 경상남도 지사의 허가를 얻어 1963년에 건립하였다. |
촉석루 삼장사 시 -학봉 김성일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 矗石樓中三壯士
한 잔 술로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 一杯笑指長江水
장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가니 / 長江之水流滔滔
물 마르지 않는 한 우리 넋도 안 죽으리 / 波不渴兮魂不死
진주 촉석루(晉州矗石樓) -정을보(鄭乙輔)
저 황학루가 어찌 혼자 으스대리 / 黃鶴名樓彼一時
최군이 수다스러워 우연히 시에 머물렀지 / 崔君好事偶留詩
올라보니 경치는 변함이 없는데 / 登臨景物無增損
편액의 글 품격은 성쇠가 보이누나 / 題詠風儀有盛衰
옥 술잔을 높이 드니 강달이 솟아나고 / 玉斝高飛江月出
주렴을 반쯤 걷으니 영에 구름 드리웠네 / 珠簾半捲嶺雲垂
난간서 고개 돌리매 천지가 작아 뵈니 / 倚欄回首乾坤小
알리라 우리 골 경치 특별히 기이한 줄 / 方信吾州特地奇
촉석루 시에 차운하다 촉석루는 진주성 안에 있다. 〔次矗石樓韻 樓在晉州城內〕 -백문보
올라 내려다보면서 예전 놀던 때 생각하여 / 登臨偏憶舊遊時
강산에 대한 답례로 애써 다시 시를 짓네 / 强答江山更覓詩
난세를 평정할 인재 나라에 어찌 없으리 / 國豈無賢戡世亂
술에 이리 부대끼니 나도 이제 늙었구나 / 酒能撩我感年衰
맑은 이곳에 세속 자취 얼씬하지 못하고 / 境淸易使塵蹤絶
넓은 자리에 춤추기 아주 좋네 / 席闊何妨舞手垂
붓을 들어 멋대로 쓴 건 춘초구요 / 點筆謾成春草句
잔 멈추고 노래한 건 〈죽지사〉라네 / 停杯且唱竹枝詞
자리에 가득한 기생들 바싹 앉아 즐겁고 / 妓從坐促爲歡密
사람들은 시절과 함께 더디 가려 하네 / 人與時偕欲去遲
이곳의 고상한 회포가 진정 속세 아니니 / 此地高懷眞不世
적성과 현포라도 이보다는 못하리라 / 赤城玄圃未全奇
살펴보니, 호정(浩亭) 하륜(河崙)의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이르기를 “누의 명칭에 대한 뜻은 담암 백 선생이 말하기를 ‘강 가운데 쫑긋쫑긋 나온 돌이 있으므로 촉석이라고 이름 지었다.’ 하였다. 담암공으로부터 시작되고 다시 안상헌(安常軒)이 중건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장원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장원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하였다.
촉석루에서 교은의 시를 모방하다[矗石樓效郊隱]-점필재 김종직
높은 누각 밝은 달 매화꽃이 필 때에 / 高樓明月梅花時
조물주가 내 흥취 돋워 시 한 수를 내놓게 하네 / 造物撩我拚一詩
수건 물은 청조가 비단 자리에 모이니 / 銜巾靑鳥集錦筵
취흥에 번화함이 쇠한 걸 깨닫지 못하도다 / 醉興未覺繁華衰
풍광은 향초의 물가에 넘쳐 흐르는데 / 光風泛溢蘼蕪渚
물가의 수양버들엔 석양 빛이 더디구려 / 渚邊楊柳斜陽遲
난간에 기대어 구름 바다를 두루 바라보니 / 欄干倚遍望雲海
철적 소리가 은연중에 비경사를 화답하누나 / 鐵笛暗和飛瓊詞
단구의 어느 곳도 이를 수가 있는지라 / 丹丘何處擬可到
거울 속에 흰 털 드리운 게 두렵지 않다오 / 鏡中不怕霜毛垂
하늘에 전문 올리고손뼉 치며 웃으니 / 牋與天公拍手笑
옆 사람들 다투어 일단의 기이함이라 말하네 / 傍人爭道一段奇
일찍이 바닷가 제일가는 구역이라 들었더니 / 海上曾聞第一區
봄바람 속에 찾아와 중선루에 기대었네 / 春風來倚仲宣樓
속인이 청상에 어두움을 스스로 혐의하지만 / 自嫌塵土迷淸賞
어찌 강산이야 승류를 저버릴 수 있으랴 / 豈有湖山負勝流
고의고의 매화는 술을 맞아 웃는 듯하고 / 故故梅花迎酒笑
울어대는 촉옥새는 사람을 향해 뜨누나 / 關關屬玉向人浮
동으로 흰 구름 바라보니 정위가 가까워라 / 白雲東望庭闈近
한가히 시름하여 먼 고을에 지체할 것 없네 / 不用閑愁滯遠州
진주의 촉석루운에 차하다〔次晉州矗石樓韻〕-허백당 성현
연기 자욱한 높은 성 저물어가는 때에 / 煙暗高城欲暮時
고달픈 나그네 홀로 올라 시를 읊노니 / 登臨倦客獨吟詩
강산의 좋은 경치는 찾고 찾아도 끝이 없고 / 江山勝槪探無盡
문필의 고상한 담론은 늙어도 시들지 않네 / 翰墨淸談老不衰
석양 아래 옛 나루엔 사람이 멀리 가고 / 古渡日斜人去遠
구름 걷힌 긴 숲엔 새가 더디 돌아오누나 / 長林雲捲鳥歸遲
부끄러워라 조충전각이나 하는 솜씨로 / 愧將篆刻雕蟲手
〈양춘〉 〈백설〉의 문장에 우러러 화답하기가 / 仰和陽春白雪詞
당중의 수많은 이 창가와 음악은 섬세하고 / 萬指堂中歌管脆
한 쌍의 술동이 앞엔 춤추는 소매 드리우네 / 一雙樽外舞衫垂
어슴푸레 나를 선경에 앉혀놓은 듯해라 / 恍然坐我神仙境
낭원 요지만 반드시 뛰어날 것 없고말고 / 閬苑瑤池未必奇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추강 남효온
누각이 큰 강 수면 제압하니 / 樓壓大江面
기이한 경관 해동에 으뜸일세 / 奇觀甲海東
올라서 마시는 한 잔 물 / 登臨一瓢水
차갑기가 선승과 같도다 / 冷與禪僧同
촉석루(矗石樓)에서 차운하다. 간이 최립
돌은 늙고 강은 텅 빈 고즈넉한 별천지 / 石老江空悄別區
동남쪽에 만고토록 이 누대가 서 있도다 / 東南萬古有玆樓
그동안 오히려 평지에서 경승(景勝)을 독점해 왔나니 / 由來擅勝還平地
구태여 상류 향해 도원(桃源)을 찾을 게 있으리요 / 莫去尋眞向上流
맑은 날엔 노을 밖에 걷어 올리는 주렴(珠簾)이요 / 繡箔晴仍霞外捲
달 밝은 밤엔 싫도록 물에 띄우는 난주로세 / 蘭舟夜厭月中浮
한 번만 올라선다 해도 범골이 아니라 할 것인데 / 一登定自非凡骨
하물며 삼 년이나 학주를 차지했음이랴 / 何況三年占鶴州
촉석루(矗石樓)에서 차운하다.-용주 이행
여생에 다행히 명승지 저버리지 않아 / 餘生幸不負名區
영남 제일 누각이라 여기 올라왔도다 / 來倚維南第一樓
타지에서 좋은 이들 반가이 만났으니 / 華蓋異方眞邂逅
밤새 술자리 벌여 풍류를 한껏 누리노라 / 綺筵終夕極風流
봉우리들은 곧바로 긴 강을 에워쌌는데 / 峯巒直爲長江擁
수목 아스라이 이어진 곳 저녁놀 떴구나 / 樹木遙連暮靄浮
평소 익히 들어온 곳 지금 맘껏 보노니 / 平日飽聞今快覩
사람들 만나면 주절주절 청주를 얘기하리 / 逢人吃吃說菁州
촉석루(矗石樓)-퇴계 이황
강호에 떨어져 산 지 며칠이나 되었던고 / 落魄江湖知幾日
거닐며 시를 읊다 높은 누에 올라 보네 / 行吟時復上高樓
공중에 비끼는 비 한 때의 변화라면 / 橫空飛雨一時變
눈에 드는 긴 강은 만고의 흐름이라 / 入眼長江萬古流
지난 일 아득해라 둥우리의 학은 늙고 / 往事蒼茫巢鶴老
나그네 회포 일렁여라 들구름이 떠가네 / 羇懷搖蕩野雲浮
번화한 것 시상에 들어오지 않나니 / 繁華不屬詩人料
한 번 웃고 말없이 푸른 물을 굽어보네 / 一笑無言俯碧洲
촉석루 현판의 근체시 및 장률에 차운하다〔次矗石樓近體及長律〕-금계 황준량
조물주가 공을 다하여 한 구역을 만드시니 / 造物殫功創一區
그림 둘러진 속에 신선의 누각이 지어졌네 / 畫圖圍裏著仙樓
푸른빛 분명한 방장산은 목욕한 듯하고 / 靑分方丈鬟如沐
차갑게 흐르는 영원은 거울인 듯 흐르지 않네 / 寒瀉靈源鏡不流
옥 패물 소리는 안개 낀 물가에서 보내오고 / 瓊佩響從煙浦送
오색구름 흔적은 대숲에 떠있네 / 彩雲痕在竹林浮
동쪽으로 가면 산해의 빼어난 장관 다 볼 수 있으니 / 東行山海窮奇壯
맑은 절경은 진주 한 고을에서 으뜸이 되리 / 淸絶應先晉一州
누각 위의 바람과 안개는 저절로 사철인데 / 樓上風煙自四時
영웅들은 새처럼 날아가고 그저 시만 남았네 / 英雄鳥過只留詩
명승지의 경치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건만 / 名區物色無今古
고향 땅의 풍류는 몇 번이나 성하고 쇠했던가 / 故國風流幾盛衰
저녁에 복사꽃 뜬 물에 배 띄워 느리게 노를 젓고 / 晩泛桃花移棹緩
봄에 죽엽주 따르며 잔 놓기를 더디 하네 / 春斟竹葉放杯遲
시인들은 맑은 강을 읊은 시구에 화답할 줄 알고 / 騷人解和澄江句
노래하는 기녀들은 백설사를 잘 부르네 / 歌妓能調白雪詞
범공의 우락을 마음속에서 어찌 저버리랴 / 憂樂范公心豈負
행장한 두로처럼 귀밑털 공연히 드리워지네 / 行藏杜老鬢空垂
밤 깊으면 누가 회선의 무쇠피리를 가져와 / 夜深誰捻回仙笛
강 하늘에 한 자락 빼어난 운치를 더할까 / 添却江天一段奇
진주 촉석루의 구자 사운에 차운하여 감사 류이현에게 부치다〔次晉州矗石樓區字四韻寄柳監司 而見〕-송암 권호문
우뚝 솟은 강가 바위는 두구와 같은데 / 矗矗江巖似豆區
천년의 절경지에 신선 누각 세웠네 / 千年絶境起仙樓
용두사 남쪽 깎아지른 두 벼랑에 누각 있고 / 龍頭南展雙崖削
연미는 서쪽으로 두 물줄기를 나누었네 / 燕尾西分二水流
높이 바라보니 등산에 나막신 신을 필요 없고 / 高眺不須山屐著
높은 곳에 임하니 뗏목 띄운 바다보다 좋네 / 危臨便勝海槎浮
봄바람에 부월 잡고 난간에 기대면 / 東風杖銊憑瓊檻
응당 가슴 탁 트여 구주가 좁으리라 / 應是開襟隘九州
촉석루의 제시에 차운하다 次矗石樓韻 -농포 정문부
임진년 전쟁이 팔도를 휩쓸 때 龍歲兵焚捲八區
어앙주은 이 성루가 가장 처참했다오 魚殃最慘此城樓
바위는 굴러가지 못해 그대로 촉석이 되었지만 石非可轉仍成矗
강물은 무슨 마음으로 절로 흘러가는가 江亦何心自在流
황폐한 누대 중수하려 신명은 사람과 힘을 합하니 起廢神將人共力
능허당은 하늘과 땅이 함께 떠 있어라 凌虛天與地同浮
모름지기 알아야 하니, 막부의 경영하는 솜씨는 須知幕府經營手
장려하니 다만 한 고을 다스릴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壯麗非唯鎭一州
이하는 퇴계 선생시에 차운 한 시이다
촉석루(矗石樓)에서 퇴계(退溪) 선생의 시를 차운함 -면암 최익현
진양의 삼절사는 역사에 드리웠고 / 晉陽三節垂靑史
객지의 맑은 향취는 이 누각에 있네 / 寓地淸芬有此樓
나라의 충신은 별이 북극을 향함과 같고 / 社稷貞忠星北拱
조종의 대의는 물이 동으로 흐름과 같네 / 朝宗大義水東流
높은 난간은 돌을 딛고 서늘한 기운이 움직이고 / 層欄壓石微凉動
넓은 들은 하늘에 닿아 푸른 빛이 떠 있구나 / 曠野連天積翠浮
예부터 이곳엔 군사 쓰기 어려우니 / 從古用兵多不效
긴 노래 한 곡조 꽃다운 물가를 대했구나 / 浩歌一曲對芳洲
금문원과 촉석루를 유람하고 절구 한 수를 써서 주다〔與琴聞遠遊矗石樓書贈一絶〕-약포 정탁
그대 기쁘겠네, 옥술병을 두 병 들고 / 喜君攜得玉壺雙
날마다 누에 올라 푸른 강을 굽어보니 / 日日登樓俯碧江
병 많은 장경은 하는 일 하나 없이 / 多病長卿無一事
다만 시와 글씨로 그윽한 창가에서 읊었다네 / 只將詩筆詠幽牕
촉석루에서 우연히 읊다 기유년(1609, 광해군1)〔矗石樓偶吟 己酉〕-간송 조임도
신선세계를 오래 꿈꾸다 / 夢落仙區久
명아주 지팡이 짚고 우연히 홀로 왔네 / 青藜偶獨來
깊은 강은 천 장의 물이고 / 江深千丈水
솟은 바위는 십 층의 누대이네 / 石聳十層臺
명승은 이름 길이 있으나 / 形勝名長在
흥하고 망한 건 세상 몇 번이었나 / 興亡世幾回
높은 누각 올라 먼 데 바라보는 곳에서 / 高樓登眺處
감탄하며 한 번 슬픔을 머금네 / 感歎一含哀
촉석루〔矗石樓〕 촉석루는 진주에 있다.=무명자 윤기
아찔한 촉석루 허공을 찌르는데 / 矗石危樓倚泬寥
내 마음 어이하여 이토록 쓸쓸하나 / 客懷何事劇蕭條
짙푸른 대숲은 만고에 일반이고 / 靑靑竹色橫今古
흐늑흐늑 강물은 밤낮으로 오열하네 / 决决江聲咽晝宵
절벽은 마음 있어 천 길로 치솟았고 / 絶壁有心千仞峙
뜬구름은 자취 없어 하늘만 아득하네 / 浮雲無跡一天遙
우뚝 선 기념비엔 아직 생기가 남아 / 遺碑屹立猶生氣
의기의 충혼을 불러올 것 같아라 / 義妓忠魂若可招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와 진주성이 함락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논개라는 기생이 단장을 화려하게 하고서 남강 가의 절벽 위에 앉아 있었다. 여러 왜놈들이 좋아하여 다투어 다가가려 하자, 논개가 말하였다. “너희들의 상장군이 아니 오면 나는 너희의 청을 거절하겠다.” 왜적의 상장군이 이 말을 듣고 기뻐서 냉큼 달려왔다. 곧 함께 마주 안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왜장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절벽을 뒹굴어 강에 빠져 죽었다. 상장군을 잃은 왜적이 스스로 궤멸되어 진주성이 수복될 수 있었다. 촉석루는 바로 그때의 그 장소인데, 촉석루 아래 비석을 세워 논개의 충렬과 공적을 기록하였다.
촉석루에 쓰다〔題矗石樓〕 -번암 채제공
누각이 너무 높아 시름겨워지려는데 / 飛樓孤絶欲愁生
성 위에선 애절한 피리 소리 들려오네 / 城上哀笳氣不平
사당에는 미풍 속에 신령이 우뚝 섰고 / 遺廟泠風神鬼立
그림배엔 청명한 날 비단옷이 선명하네 / 畫船晴日綺羅明
청천 들판 연무 뒤로 새는 멀리 날아가고 / 雲煙鳥沒菁川野
절도영 주변에는 푸른 강물 굽이도네 / 天地江廻節度營
남쪽 땅의 나루 봉수 백 년 동안 고요하여 / 南紀百年津燧靜
새 급제자 타향에 와 술과 노래 즐기누나 / 異鄕歌酒卽新榮
촉석루 맞은편 언덕에 망진 봉수대(望津烽燧臺)가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촉석루에 다시 노닐며[重游矗石樓]-정약용
세번째 오른 황학루 흥취 한량 없는데 / 黃鶴三登興未窮
재차 찾은 현도관 또다시 춘풍 속이네 / 玄都再過又春風
버들에 기댄 놀잇배 푸른빛을 더하였고 / 畫船依柳新添碧
꽃 같은 가무 기생 붉은빛 약간 가셨구나 / 歌妓如花半褪紅
비단으로 싼 고인 시 벽상에 아직 있는데 / 尙有紗籠懸壁上
다시 선녀 거느리고 물결 속에 놀았으면 / 且將羅襪弄波中
절도사 부절 나눈 그곳이 어디런가 / 欲知節度分符處
바야흐로 황주의 비단 속에 계신다네 / 正在黃州錦綺叢
촉석루〔矗石樓〕 -황경원
촉석강은 예나 이제나 원한 품고 흐르는데 / 矗石江流怨古今
장군이 싸우던 곳 홀로 올라가보네 / 將軍戰處獨登臨
해 저무는 외로운 성엔 기러기 울며가고 / 孤城向暮旅鴻叫
인적 없는 먼 언덕에는 대숲만 우거졌구나 / 遙岸無人叢竹深
글씨 희미한 인장에는 부질없이 인끈만 남았으니 / 印篆依微空對紐
비장한 군악 소리에 그저 마음만 아파라 / 鐃歌悲壯秪傷心
진양의 남은 원로들 아직도 전의(戰意)에 불타니 / 晉陽遺老猶鳴劒
촉석루 위에선 때때로 출새곡이 들린다네 / 樓上時聞出塞吟
촉석루〔矗石樓〕 -소호당 김택영
진주 분위기는 새벽에도 분주한데 / 晉陽氣色曉紛紛
지세는 남쪽으로 통제영과 이어졌네 / 形勝南連統制軍
천 가구 푸른 장막 안개에 씻긴 대요 / 翠幕千家煙灑竹
세 번 꺾인 맑은 강물 증발되어 구름 되네 / 澄江三折水蒸雲
누각 높고 회포 먼데 가을 경관 서리었고 / 樓高懷遠紆秋望
병란 뒤에 비석 남고 석양은 쉽게 지네 / 兵後碑殘易夕曛
의기암 앞 강 물결은 참으로 푸른데 / 義妓巖前波正綠
서풍은 오히려 붉은 치마 날리는 듯 / 西風猶似颺紅裙
황죽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 / 黃竹蕭蕭雨
나를 재촉해 진주에 도착했네 / 催余到晉州
푸른 강물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 滄江天上落
날 듯한 누각은 거울 속에 떠 있구나 / 飛閣鏡中浮
전쟁이 괴로울 땐 구름이 땅에 깔렸고 / 戰苦雲垂地
시절이 태평할 땐 달이 배에 실렸네 / 時平月在舟
생각하는 바가 아직 차지 않았는데 / 所思方未足
찬 해는 텅 빈 모래섬에 떨어지네 / 寒日下空洲
촉석루〔矗石樓〕-암서 조긍섭
삼십 년 세월 동안 거듭해서 왔을 때엔 / 三十年間重到時
강산은 의구한데 물화는 간데없네 / 江山依舊物華非
아리땁다 의기 사당 앞에 쓰인 글자들은 / 可憐義妓祠前字
아직도 홀로 빛나 푸른 바위 비추는군 / 猶自煌煌照碧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