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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장 17-22절. 애찬과 성찬에 대한 교훈
1.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11-14장은 예배 생활의 질서 문제에 관한 교훈이라고 말했습니다.
(1) 그 중에 지난 시간에 살펴본 11장 1-16절은 고린도 교회에서 기도를 많이 한 신령파 여성도들(spiritual women)이 교회 안에서 여성해방 운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신령파 여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예배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당시 사회의 미풍양속인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을 거부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남자보다도 뛰어난 여자들이 교회에서 남성도들을 무시하지 말고, 신령한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사랑으로써 남성도들을 도와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2) 예배의 질서에 관한 11-14장 중에서, 오늘 본문인 11장 17-22절은 ‘애찬’(愛餐: love feast)에 관한 교훈입니다.
2. 원래 초대교회 때는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을 행할 때에, 먼저 ‘애찬’ (아가페: Agape)을 행하고, 그 후에 좁은 의미의 ‘성찬’을 행했습니다. (이상근 152쪽, NIV-SB p.1749, Blomberg p.228)
이러한 ‘성찬’(주의 만찬)은 ‘세례’와 함께 주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의 ‘2대 성례’(sacraments)로서 유명합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이처럼 중요한 성찬을 그릇되게 행함으로써,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 잘못이란 두 가지였습니다.
(1) 고린도 교인들은 ‘애찬’을 행할 때에, 부유한 성도들은 먼저 와서 배불리 먹고 취해 있었으며, 가난한 성도들은 늦게 와서 배고파했다는 것입니다.
(2) 부유한 성도들은 ‘애찬’을 많이 먹어서 배부르고 취해 있었기 때문에, ‘성찬’을 모독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3) 반면에, 가난한 성도들- 주로 노예 출신 성도들-은 뒤늦게 와서, 애찬에 참여도 못하고 배고픈 가운데서 ‘성찬’에 참예하면서, 성찬이 주님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허겁지겁 떡과 포도즙을 많이 먹고 마셨습니다.
(4) 이처럼, 애찬식이 올바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성찬식’마저도 부자는 배불러서 성찬을 모독하고, 가난한 자는 배고파서 성찬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러한 신앙 문제 때문에, 바울 사도는 오늘과 다음 시간에 애찬과 성찬의 문제를 바로 잡아주는 말씀을 쓰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이 ‘애찬’의 문제는 비록 식사 문제에 국한되는 문제보다는 더 심각한 교회의 분열 문제로 비화되고 있었습니다.
즉, 성찬식 문제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사회적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에, 분열과 다툼이 발생했던 것입니다(11:18-20).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화목을 표상하는 ‘애찬’(Agape)의 의미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분열을 일으키는 그러한 애찬의 모임은 차라리 갖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17절.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로움이라.
5. 블롬버그(Blomberg)가 지적한대로(p.228), 바울은 보통 먼저 긍정적인 말이나 칭찬을 한 후에, 부정적인 말이나 책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어법(‘yes-but’ logic)입니다.
그런데, 오늘 ‘애찬’에 관한 교훈(17-22절)에서만은 칭찬하는 말이 없이 곧바로 책망으로 시작하여, 책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17절. 칭찬하지 아니 하노니 ---
22절. 칭찬하지 않노라.
6.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분열과 다툼’(18절의 σχίσματα: division, 19절의 αἱρέσεις: different opinion)을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18절의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절의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10절 이하에서는 동일한 ‘분쟁’이라는 헬라어(σχίσματα)를 사용하면서도, 사람을 중심한 분쟁은 하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올바른 신앙 사상을 위한 분쟁은 오히려 하라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19절).
그 이유는 가난한 성도들과 사회적 신분이 낮은 성도들의 항변과 주장이 정당했기 때문입니다.
7. 그러므로 본문에서 배울 교훈은 교회 생활에서 “성례나 성찬이나 애찬”과 같은 예식이나 행사도 중요하지만, 원래 그것이 제정된 정신과 취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몽테스퀴에도 ‘법의 정신’이란 책에서, 법이란 그 법이 제정된 취지가 더욱 중요하므로, 재판을 할 때, 법의 정신을 따라서 판결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애찬은 성도 간의 화목과 사랑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내용이 없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익보다는 오히려 해롭다고 했습니다.
17절.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무슨 행사를 행하거나, 무슨 법과 제도를 따라 일을 할 때, 먼저 그 취지를 잘 파악해서, 교회란 근본적으로 공의와 처벌보다는 용서와 사랑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8. 오늘은 ‘교회의 행사를 사랑으로 행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 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n giving this instruction, I do not praise you, because you come together not for the better but for the worse.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 하나니
Τοῦτο δὲ παραγγέλλων, οὐκ ἐπαινῶ
in this now instructing, not I praise
‘명하는’(παραγγέλλων)은 현재분사로서(instructing) 현재 교훈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뒤의 동사(ἐπαινῶ)는 현재형입니다(I praise).
이는---유익이 못 되고,
ὅτι οὐκ εἰς τὸ κρεῖσσον
because not for the better
직역하면 ‘(너희가 모이는 것이) 더 좋아지는 것을 위함이 아니고. (더 나빠지는 것을 위함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도리어 해로움이라.
ἀλλὰ εἰς τὸ ἧσσον
but for the worse,
너희의 모임이
συνέρχεσθε.
you come together
직역하면 ‘너희가 모이는 것이 더 좋은 것을 위함이 아니고 더 나빠지는 것을 위함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모이는’(συνέρχεσθε)은 현재형으로서(you come together) ‘너희가 현재 모이고 있는 것이 더 좋아지는 것을 위함이 아니고, 더 나빠지는 것을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아래와 같은 지적들로써 나는 너희를 칭찬하지 않노라. 왜냐하면 너희 모임들이 선하기보다는 더 해롭기 때문이다. (In the following directives I have no praise for you, for your meetings do more harm than good)
Berean Study Bible: 다음과 같은 지적들로써 나는 칭찬을 줄 수 없노라. 왜냐하면 너희 모임들이 선하기보다는 더 해롭기 때문이다. (In the following instructions I have no praise to offer, because your gatherings do more harm than good)
1. ‘내가 명하는 이 일’이란 주의 만찬을 시행할 때 고린도 교인들이 행해야 할 규범들을 앞으로 20절 이하에서 명령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너희의 모임’이란 교회- 당시에는 가정교회-에서 집회로 모여, 애찬을 나누고, 성찬식도 가지면서, 성경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예배형식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이 ‘애찬’은 보통 교인 각자가 한두 가지씩 음식을 많은 분량으로 가지고 와서, 뷔페 형식으로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3. 그런데, 유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 함께 식사하는 것은 ‘하나 된 언약 공동체(동맹 예식)’임을 나타내는 대단히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다 같은 피’와 ‘다 같은 살’에 참여한다는 말씀 선포와, 기도와 찬양이 곁들여 드려졌습니다.
즉, 주님 앞에서 언약(맹약)의 공동체가 된다는 종교 의식적 형태의 식사였습니다.
4. 그래서, 같은 주님(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과는 ‘식탁 교제’를 하지 않았고, 성별 되지 않은 사람, 성별 되지 않은 시간, 성별 되지 않은 장소, 성별 되지 않은 음식, 성별 되지 않은 물건을 가지고는 ‘식탁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5.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는 말은 ‘성찬’이 주 안에서 하나 되는 유익을 주지 못하고, 부자 성도에 의해서 가난한 성도들이 멸시받고, 교회가 분열되는 손해를 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즉, 주 안에서 한 몸 됨을 기념하는 ‘성찬식’이 교회의 일치보다는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18절.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n the first place, when you come together as a church, I hear that divisions exist among you; and in part I believe it.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πρῶτον μὲν γὰρ συνερχομένων ὑμῶν ἐν ἐκκλησίᾳ
first indeed for coming together you in church
직역하면 ‘왜냐하면 먼저 너희가 교회에서 모일 때--(듣고 내가 어느 정도 믿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모일 때에’(συνερχομένων)은 현재분사로서(coming together) 현재 모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ἀκούω σχίσματα ἐν ὑμῖν ὑπάρχειν,
I hear devisions among you there to be
‘있다 함을’(ὑπάρχειν)은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here to be), ‘듣고’(ἀκούω)는 현재형으로서(I hear) 현재 듣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느 정도 믿거니와
καὶ μέρος τι πιστεύω.
and in part it I believe
직역하면 ‘어느 정도 그것을 내가 믿는다’는 뜻입니다.
‘믿거니와’(πιστεύω)도 현재형으로서(I believe) 현재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New International Version: 첫째로 내가 듣기로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 너희 가운데 분열이 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 나는 그 말을 믿노라. (In the first place, I hear that when you come together as a church, there are divisions among you, and to some extent I believe it)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왜냐하면 첫째로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 내가 듣기로는 너희 가운데 분열이 있다고 하는데, 내가 부분적으로는 그 말을 믿기 때문이라. (For, in the first place, when you come together as a church, I hear that divisions exist among you; and in part I believe it.)
1. ‘듣고’(ἀκούω)라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형임을 볼 때,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 소식을 계속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아마 1장 11절에 기록된 ‘글로애의 집 사람들’-노예로서 상인들-로부터 계속 들었을 것입니다.
즉, ‘애찬 예배’로 모일 때마다, 가난한 성도들은 부유한 성도들로부터 배고픔과 멸시를 계속 당했던 것입니다(21-22절).
2. 그런데, 당시의 부유한 성도들은 이러한 차별대우를 당시 헬라 사회의 풍속에 따라 자연스럽게(당연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 내에서 부자와 빈자 사이의 골(gulf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은 깊어지고, 파벌 의식이 고착화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 계급 사이에는 사소한 문제 때문에도 감정적인 싸움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아무리 좋은 예식과 행사를 하더라도, 먼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차라리 중요한 예식이나 행사조차도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행사나 일이 중요한 것보다도 주 안에서 사랑하며 평화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서로 사랑하고 화목 하는 일을 다른 무슨 일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9절,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there must also be factions among you, so that those who are approved may become evident among you.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δεῖ γὰρ καὶ αἱρέσεις ἐν ὑμῖν εἶναι,
it behooves for also factions among you there to be
직역하면 ‘왜냐하면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기 위해서) 너희 가운데 파당이 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있어야’(εἶ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here to be), ‘마땅하다’( δεῖ)는 현재형입니다(it behooves).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ἵνα καὶ οἱ δόκιμοι,
so that also the approved,
너희 중에 ---나타나게 되리라.
φανεροὶ γένωνται ἐν ὑμῖν.
evident should become among you
‘나타나게 되리라’에서 동사(γένωνται)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should become) 확실히 나타나지게 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왜냐하면 너희 가운데 파당이 있어야만 옳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서 밝히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For there must also be factions among you, so that those who are approved may become evident among you)
New Living Translation: 그러나 물론 너희 가운데 파당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확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But, of course, there must be divisions among you so that you who have God's approval will be recognized!)
1. 본 절은 빈자의 부자에 대한 투쟁을 정당화시켜주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주님은 죄인, 병자, 빈자 등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고, 인간끼리의 화목(사랑)을 명령하셨으므로, 교회 내에서 ‘가진 자’(haves)가 ‘못 가진 자’(have-nots)를 박대할 때에는, '못 가진 자'는 당연히 항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이러한 편당과 항의는 정의를 위한 것이지, ‘공산주의자’와 같이 '무산대중'이 '유산대중'을 압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8장 13절처럼, 오직 평균케 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라.
20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refore when you meet together, it is not to eat the Lord's Supper,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Συνερχομένων οὖν ὑμῶν ἐπὶ τὸ αὐτὸ
coming together therefore of you together in one place
직역하면 ‘그러므로 너희가 한 자리에 모여서’란 뜻입니다.
‘모여서’(Συνερχομένων)는 현재분사로서(coming together) 모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οὐκ ἔστιν κυριακὸν δεῖπνον φαγεῖν·
not it is Lord’s supper to eat
‘먹을 수’(φαγεῖν)는 부정과거 부정사형으로서(to eat) 단호하게 먹는 것을 가리키고, ‘없으니’에서 동사(ἔστιν)는 현재형입니다(it is).
New Living Translation: 너희가 함께 모일 때, 너희가 실제로는 주의 만찬에는 관심이 없도다. (When you meet together, you are not really interested in the Lord's Supper.)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러므로 너희가 함께 모일 때, 그 모임은 주님의 만찬을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도다. (Therefore when you meet together, it is not to eat the Lord's Supper,)
1. ‘주의 만찬’(κυριακὸν δεῖπνον: Lord's supper)이란,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먼저 공동식사(애찬)를 하시고, ‘성찬’을 집행하시던 것을 가리킵니다(막 26장, 막 14장, 눅 22장, 요 13-17장 참조).
이처럼, 초대교회 당시에는 저녁에 애찬과 성찬을 거행했으나, 애찬(Agape)이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폐단을 가져오자, 2세기에는 ‘애찬’을 없애고 ‘성찬’만 아침에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성찬’은 오늘날에도 가장 중요한 예식인데, 본 절은 내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거행된 성찬은 진정한 성찬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헛된 예배, 헛된 헌금 생활, 헛된 성례, 헛된 모임을 갖고 있지 않나 스스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마 5:24)
이사야 59장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 59:1-2).
이사야 58장에는,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그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를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 4-9)고 했습니다.
3. 그래서, 본 절은 형식적인 애찬을 거행하면서 서로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 모여서 서로 분쟁하고 싸우려면 차라리 모임을 폐지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말씀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2) 그러나, 이 두 가지 말씀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려면 열심히 모이고, 오히려 모여서 싸우고 분쟁할 것 같으면 차라리 모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일을 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화목 하는 것이 교회의 모임이나 일 자체보다도 더욱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일하면서 싸우려면, 차라리 일하지 않고 평화하는 것이 더욱 주님의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싸우면서 주님의 교회에 손해 끼치는 것보다, 차라리 가만있으면, 손해는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을 하시고, 자기를 드러내고 남을 정죄하고, 싸우기 위해서 교회의 일을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형제와 화목하여 하나님께 상달되는 예배를 드리며, 가련한 이웃을 돌봄으로써 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1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n your eating each one takes his own supper first; and one is hungry and another is drunk.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ἕκαστος γὰρ τὸ ἴδιον δεῖπνον προλαμβάνει, ἐν τῷ φαγεῖν,
one for the own supper takes first, in the to eat
직역하면 ‘왜냐하면 어떤 이는 먹기 위해서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가져와서---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먹기 위해서’(φαγεῖν)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eat) 단호하게 먹는 것을 가리키고, ‘먼저 가져와서’(προλαμβάνει)는 현재형이고(takes), 원형(προλαμβάνω)은 ‘먼저’(πρό)라는 접두어와 ‘가져가다’(λαμβάνω)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어떤 이는 시장하고
καὶ ὃς μὲν πεινᾷ,
and this indeed is hungry
직역하면 ‘이 사람은 시장하고 (저 사람은 취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시장하고’(πεινᾷ)는 현재형입니다(is hungry)
어떤 이는 취함이라.
ὃς δὲ μεθύει.
that but is drunken
‘취함이라’(μεθύει)도 현재형입니다(is drunken).
New Living Translation: 왜냐하면 너희 중 일부가 자기 음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 서둘러 먹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배고프고, 어떤 사람들은 취하게 되도다. (For some of you hurry to eat your own meal without sharing with others. As a result, some go hungry while others get drunk)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왜냐하면 너희가 만찬을 먹음에 있어서 각자가 자기의 만찬을 먼저 먹음으로써, 어떤 사람은 배고프고 어떤 사람은 취하기 때문이다. (for in your eating each one takes his own supper first; and one is hungry and another is drunk.)
1. ‘자기의 만찬을 갖다 먹으므로’란 말은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비꼬는 투로) 사용되었습니다.
(1) 즉, 실제로 고린도 교인들은 당시 헬라인의 풍습대로(NIV-SB), 애찬을 거행할 때, 교인 각자가 각각 음식을 가져다가 ‘가정교회’(house church)에 와서 같이 먹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부유하고, 사회적 신분이 높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교인(자유인 성도)은 좋은 음식을 많이 가지고, 일찍 와서 배부르게 먹고 취하도록 마셨고, 가난하고,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노예 신분의 성도)은 늦게 와서 먹지 못하고 배고파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시대에는 법적으로 휴일제도가 없었으므로, 가난하고 예속된 신분을 가진 교인은 주일날 예배와 성찬에 참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토요일 밤늦게까지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조차, 사회적으로 부자 교인의 천한 교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사회관습 상 자연스럽고 당연시 여겨졌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신자는 이렇게 배고플 뿐만 아니라, 부자는 취한 상태에서 ‘성찬’에 참예함으로써, ‘성찬’(23-26절)마저도 욕되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고, ‘자기 만찬’이라는 것입니다. (not ‘the Lord's supper’, but ‘their own supper’: Blomberg. p.229).
그러므로, 진정한 애찬이 되려면, 그 애찬의 공동식사 속에 주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것 갖다가 내가 먹는다’는 식의 몰인정한 세상 풍속대로 교회 행사를 갖지 마시고, 늘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가득한 교회 행사들을 실천해가시기 바랍니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at! Do you not have houses in which to eat and drink? Or do you despise the church of God and shame those who have nothing? What shall I say to you? Shall I praise you? In this I will not praise you.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μὴ γὰρ οἰκίας οὐκ ἔχετε εἰς τὸ ἐσθίειν καὶ πίνειν;
no indeed houses not have you in which to eat and to drink ?
직역하면 ‘실로 너희가 그 안에서 먹고 마실 집을 너희가 갖고 있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먹고’(ἐσθίει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eat), ‘마실’(ἐσθίειν)도 현재 부정사형 동사입니다.
‘가지고 있지’(ἔχετε)는 현재형입니다(have you).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ἢ τῆς ἐκκλησίας τοῦ Θεοῦ καταφρονεῖτε,
or the church of the God do you despise
‘너희가 업신여기고’(καταφρονεῖτε)는 현재형입니다(do you despise).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καὶ καταισχύνετε τοὺς μὴ ἔχοντας;
and put to shame those nothing having ?
직역하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는 뜻입니다.
‘갖고 있지’(ἔχοντας)는 현재분사로서(having) 현재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끄럽게 하느냐’(καταισχύνετε)는 현재형으로서(put to shame) 현재 부끄럽게 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τί εἴπω ὑμῖν;
what shall I say to you ?
직역하면 ‘무엇을 내가 너희에게 말하랴’는 뜻입니다.
‘말하랴’(εἴπω)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shall I say)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너희를 칭찬하랴
ἐπαινέσω ὑμᾶς;
shall I praise you ?
‘칭찬하랴’(ἐπαινέσω)도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shall I praise) 높이 칭찬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ἐν τούτῳ οὐκ ἐπαινῶ.
in this not I praise
‘칭찬하지’(ἐπαινῶ)는 현재형입니다(I prais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이게 뭐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못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냐?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랴? 내가 너희를 칭찬하랴? 이 일로는 내가 너희를 칭찬하지 않겠노라. (What! Do you not have houses in which to eat and drink? Or do you despise the church of God and shame those who have nothing? What shall I say to you? Shall I praise you? In this I will not praise you)
New Living Translation: 도대체 이게 뭐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진짜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냐? 내가 무엇을 말하겠다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내가 너희를 칭찬하기를 원하느냐? 아니라, 내가 단연코 이 일로 너희를 칭찬하지 않겠노라! (What? Don't you have your own homes for eating and drinking? Or do you really want to disgrace God's church and shame the poor? What am I supposed to say? Do you want me to praise you? Well, I certainly will not praise you for this!)
1.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너희 집에서 배부르게 먹고,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겠지만, 왜 집이 없길래, 교회에 와서 먹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가난한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히느냐?’는 뜻입니다.
2. 여기서는 부유한 성도들의 2대 죄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교회를 업신여긴 죄입니다.
여기서 부자들은 교회를 먹고 마시는 집으로 업신여겼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은 신성모독죄로서, 유대교 사회나 중세시대라면 ‘파문’ 처벌을 받는 중대한 죄라는 것입니다.
(2) 의도적으로 빈궁한 교인을 수치감 느끼게 하는 죄(trying to put to shame; Barret by Linguistic Key)입니다.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를 세상적인 신분으로 모독감을 주었으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 죄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도, ‘교회에서 가난한 형제를 부자보다 업신여김으로써,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최고한 법을 어긴 죄’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성찬이나 예배나 봉사를 행할 때, 그 행사 자체보다도 그 행사의 설립 취지에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 일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기껏 예배하고, 봉사하면서도, 서로 마음 상함으로써, 오히려 봉사하지 않는 것만 못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아무 일도 안 하고,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 먼저 교회 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그저 순수하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교회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을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하면, 반드시 말썽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일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하는 것이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나팔을 불면서 구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교회에서 봉사하되, 자기를 나타내지 말고, 오직 주님 앞에서 사랑으로 봉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그리고, 주의 일은 일 그 자체보다도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일을 크고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통해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 일은 헛수고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일이 아니라, 사람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일보다도 사람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마음이 일치가 안 되면, 기다렸다가 서로 원만한 이해가 될 때, 합심하여 일해가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먼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의 일을 아름답게 봉사하시는 성도님들과 우리 교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