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읍성
간략설명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
도로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을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 수비를 명목으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을 기록한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여 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 때만 해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지속적인 박해 동안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읍성, 사적 제116호)에 있던 두 채의 큰 옥사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또한 옥사 앞에는 당시 순교자들의 손발을 묶고 나뭇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던 일명 호야나무(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을 희미하게 간직한 채 지금도 우뚝 서 있다. 그래서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옥사터 주변 땅 1,800여 평을 확보하여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이란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발한 후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그 후 오늘날까지 옥사터에 대한 교회 자체적인 성역화 사업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내포 지방에서 끌려와 옥사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의 서문 밖으로 끌어내어 교수 · 참수 · 몰매질 · 석형 · 백지사형 · 동사형 등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즉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해미 진영의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70여 평의 좁은 순교성지에 자리개질에 이용되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에 서산 성당(현 서산동문동 성당)으로 이전 · 보존되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현재 서문 밖 순교성지에 있는 자리개 돌다리는 모조품이다. 그리고 도로로 둘러싸인 순교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순교현양비는 1989년 6월 24일 세운 것이다.
1866년 병인년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수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으로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든 후, 한 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고 흙과 자갈을 덮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해미 지역의 외인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하여 ‘죄인 둠벙’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묻었다는 증거이다.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의 지도 하에 해미 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 대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때 발굴한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 성물들은 그해 4월 2일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원래 순교터로 이장되었다. 이때 순교자들의 유해 일부는 별도로 보존 처리하여 모셨다가 현재는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내의 유해참배실에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역 뒤에는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졌다.
그런데 이렇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모두가 무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순교자들 중 홍주(홍성)와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된 순교자들은 이송 사실과 이름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그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진영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해미 진영은 처형 후 문책의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만을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설립된 후 해미 순교선열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성지 확보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터 부지 약 7천 여평을 확보하였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갖고 2003년 6월 17일 무명 순교자 기념 성당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하였다. [출처 : 해미성지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30일)]
감옥터와 호야나무 높이 5미터, 길이 1,800미터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의 대지 위에 내옥 ·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갔던 감옥은 발굴 작업 및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복원 재현되었다.
그 감옥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신자들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즉 오늘도 이 호야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관아터와 장터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 또한 헐려 없어졌다가 복원되었다. 그 옆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 또한 복원되어 있고, 그 주위로 노송 여러 그루가 당시 호령 소리, 곤장 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다. 관아터로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었다. 옛 저자 길로 옛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었다.
서문 밖 순교지 저자 길을 따라 서쪽 하수로에 다다르면, ‘재앙을 떨쳐내는 문’이 비껴 있다. 재앙의 씨알머리를 서쪽에 내어 버리듯이, 사학 무리를 이 문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었다. 잡아들일 때 빼앗았던 십자가의 묵주 등을 이 문의 난간에 넣어놓고, 지나가며 밟게 하여 천주학을 버리고 목숨을 살려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임들은 성물에 머리 숙여 절을 하고, 문턱을 넘어 가서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다. 이 문의 누각에는 지성루(枳城樓)라 쓰여 있는데, 본래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해미 진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이 서문이란 그 임들이 가시밭 이 세상을 떠나가던 마지막 문이었다. 이 문을 나가면 그 임들을 밀어 넣고 돌로 찧던 하수구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하수구를 가로 질러 놓여 있던 돌다리는 그야말로 사람 도마였고,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 썩고 피가 땅에 젖어 남아 흐르는 곳이 서문 밖이었으니 여기서 죽은 목숨이 몇 천이나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어 그저 “시산혈하를 이루던 곳이었다.”라는 말만 남아 있다.
피의 제사장 자리개돌 서문 밖 순교지에서 순교자들의 목숨을 빼앗는 방법은 가지가지였다.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돌구멍에 줄을 꿰어 목에 옭아 지렛대로 조여 죽이기도 하고, 묶어서 눕혀 놓은 여러 명을 돌기둥으로 내리 눌러 죽이기로 하였으며, 얼굴에 백지를 덮고 물을 뿌려 질식시켜 죽이기도 하고, 나무에 매어 달고 몽둥이로 죽이기도 하였다.
특히 잔인하게는 돌다리 위에 연약한 순교자를 서너 명의 군졸들이 들어 올려 자리개질(태질)하여 머리와 가슴을 으스러뜨리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양촌 사람 방영창 안토니오 등 수많은 분들이 순교하였다.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지져 숨을 끊어 버렸다. 이 자리개돌은 서문 밖 순교성지 일부를 확보하여 보존하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서문 밖에는 현재 모조품을 준비해 두었다.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1년 1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