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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 법정동과 행정동
세마동주민센터
세마동(洗馬洞)
세마동은 1831년(純祖 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 의하면 문시면(시봉면+삼미면)과 산성면으로 문시면에는 모두 8동으로 명학(鳴鶴)동, 죽담점(竹潭店), 묵암(墨巖)동, 신촌(新村), 옹동(瓮洞), 평촌(坪村), 세교(細橋)리, 관음(觀音)동 등이며, 산성면에는 5동으로 서(西)리, 남(南)리, 지곶(紙串)리, 신촌리, 양산리 등이었다. 1899년(光武 3년)에도 문시면(文市面)과 산성면으로 그대로이며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 1914년 4월 1일 이후 부터는 수원군 성호면(城湖面)으로 통합되고 1941년에 다시 오산면으로, 1960년 1월1일 부터는 화성군 오산읍으로, 1989년 1월1일부터 오산시 세마동이 되었다.
외삼미동(外三美洞)
외삼미동은 바깥삼미라고 하여 삼미의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과 죽미령의 바깥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의 뜻도 있으며, 우리말로는 ‘밧삼미’로 ‘밧’은 ‘밖’의 옛말이며, 문시(文市), 뱅골, 명학을 묶어 외삼미동이 되었다.
세교동(細橋洞)
세교동은 작은 다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거의 없으며, 그래서 잔다리, 세교리 등으로 불리어졌다. 세교동이 문헌에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면 오래된 마을임에 틀림이 없다. 1789 년(正祖 13년)에 시봉면의 방리로 세교리가 등장한다. 지금은 세교 1동 2동 3동으로 구분되나, 예전에는 큰말, 건너말(越村), 오리골로 세 마을이 합쳐져 세교동이 되었으며 1989년 오산시가 승격되면서 세마동의 동사무소가 위치하게 되어 세마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동이다.
양산동(陽山洞)
양산동도 역시 오래된 마을이다. 1789년(正祖 13년)에 산성면 양산리로 불렸으며, 1914년 4월 1일 오산이 수원군 성호면으로 될 때까지 산성면으로 있었고, 다시 1941년 10월 1일 오산면 양산리였으며 1960년 1월 1일 오산읍 양산리, 1989년 오산시 승격과 함께 세마동에 편입된 마을이다. 원래는 양산봉리(洋傘峰里)라고 하여 마을 뒷산에 있는 산봉우리의 생김새가 양산(洋傘)을 펴서 엎어 놓은 것처럼 생긴데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나, 양산에 가려진 북쪽의 마을이라 음지(陰地)로서 양지(陽地)를 그리며 양산(陽山)리로 불려졌고, 양산골, 양산곡 등으로 불렸다. 현재는 한신대학교가 들어서 마을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독산과 양산봉의 밑이라 경관이 좋고 공기가 맑은 최적의 전원마을이다.
지곶동(紙串洞)
지곶동 역시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지곶동의 지명유래도 매우 복잡하다. 원래 종이(한지)를 만들던 마을이라는 한자 풀이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일설에는 예전에 이마을에 감나무가 많아서 가을이면 곶감을 많이 만들었다는 뜻에서 꿰다의 뜻이 곶(串)이라는 의미에서 지곶동이란 설도 있으며, 마을 뒤에 있는 독성산에 예전에 닥나무가 많아서 이것을 이용한 한지를 생산하는 마을이란 뜻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확실한 것은 종이와 연관이 있는 마을이며 1789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산성면 지곶리(紙串里)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이고지, 종이고지, 조꼬지, 지곶동 등으로 불린 것이 사실이다. 한국지명총람』에 따르면 ‘지곶리’는 종이를 뜨는 조지소(造紙所)가 이곳에 위치했다. 지곶동은 1789년(정조 1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산성면 지곶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을 뒤의 독성산과 더불어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서랑동(西廊洞)
서랑동은 세마동에서는 가장 뒤늦게 생겨난 마을로 생각된다. 문헌에 서랑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99년(光武 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산성면의 방리 중에 서리(西里)가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서랑리로 보인다. 그리고 1914년 4월 1일에 일제가 실시한 행정구역개편 때에 처음으로 서랑리(西廊洞)마을명이 나온다. 이런 사실로 보아 서랑동이 생겨난 것은 약 2백여년 전으로 보인다. 처음 마을이 생겼을 때는 ‘사랑(沙浪)이’라고 불렸으나, 그 후에 사랭이, 사랑리로 변하여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서랑리(西廊洞)로 불려오다 서랑동으로 되었다. 서랑동은 오산에서 최적의 전원 마을이며 교통이 조금 불편하기는 하나 예전 그대로 모습으로 인심과 풍습이 남아 있어 고향 같은 마을이다.
신장동 주민센터
신장동
신장동은 1899년(光武 3년)에는 문시면과 초평면 지역으로 있다가 1917년에는 문시 초평, 그리고 어탄면(漁灘面 현 동탄면) 지역에도 일부 포함되었던 매우 복잡한 지역이었던 곳이다. 위와 같은 기록들로 보아 신장동 마을은 3백여년의 오래된 마을이며 특히 금암동의 지석묘군(支石墓群)으로 보아 그 이전 삼국시대와 삼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87년 1월 1일 당시의 화성군 동탄면 금곡3리가 오산읍으로 편입되면서 은계리로 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자로 당시의 궐(闕)리 일부, 수청(水淸)리, 금암(錦岩)리, 내삼미(內三美)1리와 2리, 은계(銀溪)리를 통합하여 10통 70반으로 신장동이 되었다. 신장동은 궐리사(闕里詞)를 중심으로 오랜 세월동안 마을 형성에 크게 이바지한 곳이나 대형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면서 한때는 오산의 6개동 중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경기도 산림환경연구소(구 임업시험장) 와 금오산이 오랜 세월 동안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전원도시이다. 신장동은 새장터의 이름을 그대로 지은 동명이다.
궐동
궐동은 궐리사(闕里詞)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궐동의 범위는 매우 넓어 오산천변의 북쪽을 경계로 하여 남촌동으로 된 대호밭, 궁터도 궐리였다. 특히 궐동의 지명을 궐리사가 생기면서부터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궐 리사의 처음 등장(『동국궐리지』와『화성궐리지』)이 조선 정조 16년 임자(壬子)년으로 보아 1792년 이미 궐(闕)리로 명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궐동을 비롯하여 오산에 곡부(曲阜)공(孔)씨가 많이 사는 것은 궐리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수청동
수청동은 수청말이라고도 하였으며 옛날부터 맑은 물이 흐르고 늘 솟는 샘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금암동
금암동이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1899년(光武 3년)에 발간된『수원부읍지』에 문시면 묵암동(墨巖洞), 그리고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시 문시면 검암동(黔岩洞)으로 나온다. 이것은 금바위 또는 검바위로 불렸으며 바위와 연관이 많은 마을로 바위가 많고 바위가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마을 한가운데 잘생긴 바위가 있어 금바위라고 불러왔는데 이를 한문으로 쓰면서 금암(錦岩)이라고 고친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 말의 “감”의 뜻은 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이 “감”이 “검”과 “금”으로 바뀌어 쓰인 듯 하다. 금바위나 검바위도 큰바위를 뜻하는 의미에서 쓰여졌으며 한자로 표기하면서 금암리(錦岩里)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금암(錦岩)동은 1915년 1월 29일 수원군 성호면 금암리가 되었으며, 1988년 12월 2일 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금암동 지석묘군(支石墓群)이 있는 바위와는 연관이 많은 마을이다.
은계동
은계동은 은개 혹은 위개라고도 하였으며, 원래는 화성군 동탄면 금곡(金谷)리였으나 1987년 1월 1일 오산읍에 편입됨에 따라 은계리로 되었다. 은계리는 동탄면 소일 남쪽 마을로 오산천변의 마을이며 은빛처럼 맑은 계곡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내삼미동
내삼미동은 원래는 동네 주변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골, 즉 송리(松里)라고 불렸는데 조선시대 정조 임금이 아버지(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태안)으로 천봉할 때 행차하여 경기관찰사에게 마을 이름을 물으니 “문시백 송리”라고 아뢰니 임금이 화산(태안)에서 마을쪽을 바라보시며 “송산골은 금로?대송(錦老大松)이 울창하고 아름다우며, 점이골(현재의 죽미령)은 대나무골과 대량골에 대나무가 아름다우며, 문시와 오미의 오동나무가 아름답구나. 이제 이곳을 삼미(三美)라 칭하라” 하시어 삼미가 되었다고 한다. 정조 13년(1789년)까지는 삼미면 또는 삼며곡면으로 있어 삼미가 오랜 옛날에는 하나의 면(面)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에 이르러 경부선철도와 도로가 횡단됨으로써, 반월봉을 능선으로 하여 내삼미리와 외삼미리가 분리되고, 내삼미리에서 수청리가 분리되고, 또 다시 철도를 경계로 내삼미1리와 내삼미2리가 분리되었다.
남촌동 주민센터
남촌동(南村洞)
남촌동의 마을이 문헌에 나타나는 사실을 살펴보면 1831년(純祖31년)에 발간된 『화성지(華城誌)』에 초평면 방리 중에서 현재의 남촌동 지역의 마을은 어은굴리(漁隱窟里-가장동)·궁기리(宮基里-궁터)·대화촌(大花村-대호밭)등이며, 그리고 1899년(光武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도 같은 방리가 나온다. 그리고는 1914년4월1일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에는, 1941년10월1일부터 오산면이 되었다. 남촌동도 1989년1월1일자로 동이 되었다. 당시의 오산 5리·6리(남촌)·청학리(점촌)·가수동 일부·궐리 일부(대호밭, 궁터)·가장리(구례밭,가장골)등 13통62반을 통합하여 남촌동이 되었다. 오산대학을 비롯하여 학교가 밀집해 있는 오산 교육의 중심지이고 시립도서관, 오산소방서가 있다. 오산천이 앞에 유유히 흐르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집중된 오산 미래의 중심지다.
오산동(烏山洞)
오산동은 행정담당하는 행정동이 중앙동. 대원동. 남촌동 3개동에 나누어져 있으며 오산시의 중심지역으로 오산시청.화성교육청.오산우체국.오산전화국. 등의 관공서가 밀집된 곳으로 행정의 중심지이며 오산시장을 중심으로 장터가 일찍부터 발달하고 있어 경제의 중심지라고 할수 있다. 예전에는 오매리(烏梅里), 천변동(川邊洞) 등으로 불린 것과 같이 오산천을 끼고 있는 곳이며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오산읍사무소가 있었다. 대원동 관할 오산동의 행정구역으로는 상가지역이 많은 오산동의 남쪽지역과 오산역주변을 포함하고 있다.
궐동(闕洞)
궐동은 궐리사(闕里詞)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궐동의 범위는 매우 넓어 오산천변의 북쪽을 경계로 하여 남촌동으로 된 대호밭, 궁터도 궐리였다. 특히 궐동의 지명을 궐리사가 생기면서부터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궐리사의 처음 등장(『동국궐리지』와『화성궐리지』)이 조선 정조 16년 임자(壬子)년으로 보아 1792년 이미 궐(闕)리로 명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궐동을 비롯하여 오산에 곡부(曲阜)공(孔)씨가 많이 사는 것은 궐리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청학동(靑鶴洞)
청학동은 뒷산에 푸른 소나무가 많았고 학(鶴)이 많이 날아 왔으므로 청하골, 청학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산대학, 오산중·고등학교, 오산정보고등학교가 모여있는 오산교육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마을이다. 또한 남촌동사무소, 오산소방서, 시립도서관이 함께 있는 곳이다.
가장동(佳長洞)
가장동은 가장골이라 불리던 지명을 표기하면서 가장(佳長)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뜻은 "가장자리"라는 뜻이라 하는데 무엇 혹은 어디로부터의 가장자리인지는 모른다고 하는 설과 마을이 길고 주위가 아름다워 긴 마을의 뜻인 가장(佳長)리가 되었다고 전하며 최근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자족도시로서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중앙동 주민센터
오산동(烏山洞)
오산동은 행정담당하는 행정동이 중앙동. 대원동. 남촌동 3개동에 나누어져 있으며 오산시의 중심지역으로 오산시청, 오산우체국, 오산전화국 등의 관공서가 밀집된 곳으로 행정의 중심지이며 오산시장을 중심으로 장터가 일찍부터 발달하고 있어 경제의 중심지라고 할수 있다. 예전에는 오매리(烏梅里), 천변동(川邊洞) 등으로 불린 것과 같이 오산천을 끼고 있는 곳이며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오산읍사무소가 있었다. 대원동 관할 오산동의 행정구역으로는 상가지역이 많은 오산동의 남쪽지역과 오산역주변을 포함하고 있다.
부산동(釜山洞)
부산동은 오산시 가장 동쪽마을로 기록상으로는 가장 역사가 오랜 마을로 보인다. 『삼국사기』권 제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 5년(AD 238년 2월조)에 의하면 '왕은 부산(釜山)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이런 기록을 근대 역사학자들은 모두 진위(振威)를 부산으로 해석하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현재의 평택시는 예전에 평택부(平澤府)였고, 그 전에는 진위현(縣)이었으며, 진위현 전에는 부산현(釜山縣)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문헌으로 보아 부산동의 역사는 1700년 이상으로 볼 수 있다. 대원동 관할 부산동의 행정구역으로원4통과 경계를 이루는 산림 지역 남쪽 일부분을이 편제되어 있다.
대원동 주민센터
오산동(烏山洞)
오산동은 행정담당하는 행정동이 대원동. 대원동. 대원동 3개동에 나누어져 있으며 오산시의 중심지역으로 오산시청, 오산우체국, 오산전화국 등의 관공서가 밀집된 곳으로 행정의 중심지이며 오산시장을 중심으로 장터가 일찍부터 발달하고 있어 경제의 중심지라고 할수 있다. 예전에는 오매리(烏梅里), 천변동(川邊洞) 등으로 불린 것과 같이 오산천을 끼고 있는 곳이며 시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오산읍사무소가 있었다. 대원동 관할 오산동의 행정구역으로는 상가지역이 많은 오산동의 남쪽지역과 오산역주변을 포함하고 있다.
부산동(釜山洞)
부산동은 오산시 가장 동쪽마을로 기록상으로는 가장 역사가 오랜 마을로 보인다. 『삼국사기』권 제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 5년(AD 238년 2월조)에 의하면 '왕은 부산(釜山)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특히 이런 기록을 근대 역사학자들은 모두 진위(振威)를 부산으로 해석하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현재의 평택시는 예전에 평택부(平澤府)였고, 그 전에는 진위현(縣)이었으며, 진위현 전에는 부산현(釜山縣)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문헌으로 보아 부산동의 역사는 1700년 이상으로 볼 수 있다. 대원동 관할 부산동의 행정구역으로원4통과 경계를 이루는 산림 지역 남쪽 일부분을이 편제되어 있다.
원동(園洞)
원동이라는 명칭은 현재의 원4통 지역으로 원래 이마을이 원동이며 원동골이라고도 하였다. 예전에는 이곳 동산에 갖가지 꽃이 만발하여 보기도 좋았고 유명했다고한다. 지금의 원동은 원3통 지역을 중심으로 오산역이 생기면서 형성된 새로운 마을로 현재는 오산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대원동사무소,각종 금융기관 극장등이 밀집해 있으며 항상 젊은이들이 모여 오산의 명동이라 부르는 곳이다.
청호동(晴湖洞)
청호동은 평택군 진위면 청호리에서 1995년 4월 20일자로 오산시에 편입된 마을로 예로부터 마을이 산과 숲으로 우거진 호수(晴湖)가 있었는데 그 호수가 맑고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고현동(高峴洞)
고현동은 갈곶동, 청호동과 마찬가지로 1995년 4월20자로 평택군 진위면에서 오산시로 행정구역이 변경된 마을로 오산시의 동남쪽 맨끝 동네로 마을 뒤(남쪽)에 높은 산(고현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우천을 병합하여 고현이라 불렸다.
갈곶동(葛串洞)
갈곶동은 평택군에서 1995년 4월 20일자로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오산시로 편입된 마을로서,1899년에 발간된『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 의하면 청호면(晴湖面) 갈곶리로 당시 청호면의 방리중 첫 번째 마을이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삼동(청호.고현) 일부를 병합하여 평택군 진위면 갈곶리로 불렸으며, 늦은 감은 있으나 원래대로 오산시로 편입된 마을이 되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을 지명에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는 지형이 곶(串)으로 되어 있어 갈곶, 갉지라고 하였다고도 하고, 또한 일설에는 마을의 지형이 높은 산맥이 뿌리를 내리고 길게 뻗어 나간 칡넝쿨처럼 생긴데서 칡갈(葛)자를 따라 갈곡(葛谷)이라 부르다 갈곶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일설에는 예전에 한 스님이 마을의 지형을 살펴보고 마을의 서쪽에 있는 뇌머리산의 허리가 잘리거나 산의 머리쪽을 갈가 먹으면 마을이 가루(粉)가 되거나, 과부가 많이 생기거나 동네가 빈곤하게 된다는 말에서 연유하여 가루→가룻→갈곶으로 변했다고 전하기도 하며, 그리고 마을의 생김새가 삼태기 형태의 바깥쪽 모양이라 하여 재산을 모으면 마을을 떠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물이 모두 새어 나간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초평동 주민센터
초평동(楚坪洞)
초평동은 정조(正祖) 13년에 발간된 수원 부읍지(水原 府邑誌)에는 초평면(草坪面)이었으나 1831년(순조31년)에 발간된 화성지(華城地)에서는 초(楚)평으로, 재부(在府), 남거(南距) 40리로 범 14동이 있었으며,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은 화성지(華城誌)에는 궐리사가 초평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호면, 초평면, 산성면, 문시면 등 4개의 면이 성호면으로 통합되어 오늘날 오산시의 기초가 되었다. 초평동은 오산 서부의 전형적인 전원도시로 농, 공, 주거지역이 공존하는 지역적 특성이 있으며, 1989년 1월 1일 오산이 시로 승격되면서 옛지명을 되찾아 초평동이 되었다.
서동(西洞)
서동은 서촌이라 하여 오산의 가장 서쪽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으로써 1동과 2동으로 되어있으며, 예전에는 초평면의 면사무소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으며 여들이라고도 불렸다. 서1동을 서녘말(마을)이라 하고, 서2동을 가리켜 여들(마을)이라 지칭한다. 보통 외지에서는 서동 전체를 말하기도 한다.
벌음동(伐音洞)
벌음동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지형이 벌려져 있어 버르미라고 했다는 설과 마을 모퉁이에서 큰소리가 나면 마을이 시끄러워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한자로 벌음리(伐音里)라고 썼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마을의 주민들, 특히 이천 서씨 집안에서 전해오는 구전에 따르면 마을 지명 벌음(伐音)리의 벌자가 원래는 벌림벌(伐)이 아니라 떼벌(筏)이었다고 하며, 이 지명에는 음양의 의미가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여자의 성기처럼 벌려져 있어 아낙네의 바람기를 잠재우기 위하여 조상깨(마을 앞에 있던 숲 - 지금은 시의 보호수인 팽나무가 있는 곳)를 마을 앞에 만들어 막은 데서 마을의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탑동(塔洞)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타마루, 돌머루, 석우리 등의 돌과 관련있는 여러 지명으로 쓰여졌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수성 최(崔)씨,파평 윤(尹)씨, 전주 이(李시),수원 백(白)씨의 족보들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중엽부터 탑동이란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지명이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 탑은 진흙으로 빚어 만든 것이라고 하나 크기나 모형은 전혀 알 수 없고 탑이 세워졌던 자리를 탑재라고만 전한다. 그러나 1991년에 마을주민들이 뜻과 정성을 모아 탑이 있던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돌탑을 만들어 세워 탑동의 새로운 명물이 되었다.
두곡동(斗谷洞)
두곡동은 엣날부터 말여울로 쓰여졌으나, 리명 제정시 한자가 비슷한 두곡리로 되었다는 설과 마을의 지형이 말처럼 생긴데서 말여울 또는 두곡, 두골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1831년(純祖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 의하면 당시 초평면에 마유동(馬遊洞)이란 마을 지명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말과 관계가 있는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누읍동(樓邑洞)
누읍동은 눕새골이라고도 하며, 마을의 지형이 소가 누운 와우형(臥牛形)이라는 데서, 누운 소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누운소→ 누은소→ 누음소→ 누음새→ 누읍새→ 눕새로 구전되면서 누읍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에 의하면 초평면지역에 누읍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수동(佳水洞)
가수동은 예전부터 물맛이 좋고 물이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냇물이 맑고 깨끗하지는 않으나 예전에는 오산천의 물도 깨끗하고 아름다워 외지에서는 이곳을 물이 아름다운 마을 가수동이라 했다고 한다. 가 수동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798년(正祖13년)에 초평면의 방리로 가사(加士)리란 지명으로 나오고,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 시에는 샘골을 통합하여 가수(加水)동이 되어 성호면에 편입이 된다. 이런 사실로 보아 가수동의 어원적 변화는 가술(加述)→ 가숫골→ 가술리→ 가수동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자 료 : 오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