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둥실둥실배바우號 사공 시선은 '개벽세상'에
1. 배가 배바우 잔디광장에 정박하다
2박3일 헛간신축 ‘노가다 동원’을 마무리하고 토요일 점심때쯤 당진으로 향했습니다. 앞서 또 다른 동생이 머리 깎아야 한다고 나섰습니다. 이발소는 간판도 없습니다. 이발소 사장님은 막걸리 한 잔하러 배바우 안남식당에 들를 때마다 인사한 사이입니다. 그분이야 어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냥 동네 아저씨 같습니다. 이종형과 막걸리 한 주전자를 후딱 비웠습니다. 이종형은 ‘철물동생’에게 운전을 맡기고 보은으로 건축자재를 사러 떠났습니다. 이발소로 가보니 동생은 염색까지 해야 한답니다. 당진으로 떠날 시간이 더 미뤄졌습니다.
배바우는 안남면사무소 소재지며 앞에는 잔디광장과 ‘배바우’를 형상화한 배, 돌탑, 배바우 장터 등이 조성됐습니다. 이 배바우는 저에게 밥 먹고, 막걸리 마시고, 막걸리 마시러 온 낯익은 동네 사람들과 인사하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잔디광장이나 배, 돌탑, 장터 등을 그렇게 유심히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해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습니다.
마침 ‘고덕산악회’가 시산제를 준비하고 있더군요. 예산 고덕? 그렇다면 옆 동네? 물어 보니 평택이라고 합니다. 친절하게도 서울에도 고덕이 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전국에서 적어도 읍면동 이상의 행정구역에서는, 고덕이 3곳이라는 것이지요. 아하! 감사합니다. 돌아서니 잔디광장 끝에 배가 ‘정박’해 있습니다. 급한 일도 없으니 두리번두리번 느릿느릿 그리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2. 삿대는 올바르고 곧고 절도 있어야
정면에서 올려보니 배이름을 나타내는 ‘둥실둥실배바우’의 모양이 배가 둥실둥실 떠가는 형상을 띠고 있습니다. 뱃사공인 소녀의 시선은 높은 곳을 향했습니다. 소녀가 잡은 삿대는 대나무인 듯합니다. 삿대는 배를 물가에서 떼거나 물가로 댈 때, 또는 물이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배를 밀어 나갈 때에 쓰는 긴 막대기를 말합니다. 설계자 또는 예술가는 ‘대나무 삿대’에 많은 뜻을 담았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삿대는 흔히 대나무가 쓰인다는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렇듯이 이 배는 온통 상징과 은유로 뒤덮였습니다. 따라서 이 대나무는 현실적인 도구로서 대나무가 아니라, 어떻게 하더라도 배가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 아니라, 올바르게 곧게 절도 있게 전진해야마나 한다는 당위성의 표현일 것입니다.
옆으로 도니 안내판에는 다음처럼 설명이 돼 있습니다. “오랜 시간 안남의 역사와 함께 흘러 온 강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상상의 배 ‘배바우’를 형상화 하였다. 배 위의 소녀상은 자치와 협동의 지역공동체, 하나 되어 나아가는 안남이라고는 꿈을 향해 스스로 노를 저어가는 안남 주민들의 힘과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안남면의 뿌리인 12개 마을이 각각 형태가 다른 문을 통해 표현되면서도 결국 그 문은 하나 된 안남의 역사와 정신을 보여주는 방으로 연결됨을 확인할 수 있다.”
설명에 소녀는 “자치와 협동의 지역공동체, 하나 되어 나아가는 안남이라고는 꿈을 향해 스스로 노를 저어가는 안남 주민들의 힘과 의지”라고 적었습니다. 주민들의 힘과 의지는 결국 삿대를 추진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설계자 또는 예술가는 추진력을 상징하는 대나무가 그 상징처럼 올바르고 곧고 절도 있어야 한다는 외침일 것입니다.
3. 짠해지는 할머니들의 자작시
배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배 벽에는 여러 가지 문양이 돋을새김돼 있습니다. 물론 많은 상징과 은유를 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별다른 기억이 없습니다. 그중에 시 두 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짠했습니다. ‘짠하다’는 사람이나 그 마음이 어떤 일이나 행동이 후회가 되어 아프고 언짢다는 뜻입니다. 저는 여기서 ‘후회’라는 단어 때문에 짠하다고 했습니다. 농사꾼의 아들로서 과연 부모님의 농사일을 제대로 도왔는지, 도울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는지 후회되기 때문입니다.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시제는 <농사는>과 <여름>입니다.
농사는
조복례(81)
풀 뽑기가 일이지요
방학동안 밭에 가서
깻 밭에 가서
뽑다 지겨우면 집에오고
다음날 또
콩 밭에 가서 뽕지요
날이면 날마다
사람 못살게 하지요
밥 만 먹으면
그게 일이지요
내 모이
안 좋으니 다 싫
여름
조만순(78)
식전에 들깨밭 메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한숭자고 이숭자고
경로당에 놀러간다
마당여 꽃이 반기도
저녁나절 콩밭메고 샤워하고
밥먹는 혼자사는
외로운 인생
할머니 ‘시인들’은 모두 조씨입니다. 배바위에서 위로 가면서 좌측에 심청이, 우측에 송정과 동락징이, 또 좌측으로 올라가면 중봉 조헌 선생의 묘소와 사당인 표충사가 있습니다. 그 앞동네가 쉴이고, 쉴 앞 큰 저수지를 따라 올라가면 농막입니다. 이 농막에는 중봉 선생의 자손들이 모여 삽니다. 이 만한 연세의 어르신들은 지금까지 열거한 마을에서 이 마을로 저 마을로 시집갔을 것입니다. 중봉 선생의 본은 백천(白川)입니다. 농막에서는 ‘배천’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잘 하느냐고요? 자주 가서 그렇다고요? 송정이 외가집이 있는 마을입니다. 그리고 농막은 이모님과 이종형이 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원래 외가집은 동락징이입니다. 큰 외삼촌께서 6·25때 행방불명이 됐기 때문에 어머님은 친정에 갈 때 남동생이 사는 송정으로 일단 가셨습니다. 이모님께서는 올해 88세십니다. 그래서 자주 농막에 갑니다. 아주 꼬맹이 시절 엄마 손잡고 인포리에서 송정으로 가는 고개를 넘던 얘기, 그렇게 큰 저수지를 처음 본 이야기 등은 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미자의 <아씨>를 들으면 저수지 주변에 핀 복사꽃이 기억납니다.
배는 안남면민의 집합체입니다. 스스로 행복하다는 이도, 불행하다는 이도, 즐겁다는 이도, 슬프다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위 두 시는 삶이 불행하고, 외롭고, 지겨운, 그래서 지칠대로 지친 이들을 대변한다고 봅니다. “뽑다 지겨우면 집에오”는 것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다음날 또 콩밭에 가”야 하니까요. “샤워하고 한숭자고 이숭자고 경로당에 놀러간다 마당여 꽃이 반기도”도 하지만 이내 “저녁나절 콩밭메”야 합니다. 그러고도 “혼자사는 외로운 인생”입니다.
저는 어머님과 나이 차가 47살입니다. 제가 60년대 초반 출생이니까 그때 힘들지 않은 부모님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형제 채웠다는 막내니 부모 마을을 헤아리면 얼마나 헤아렸겠습니까. 위 두 시는 부모님의 또 다른 마음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후회돼서, 짠하다는 말입니다.
맨아래 사진은 3장으로 나눠 찍고 포토샵으로 이어붙이고 수정했습니다. 2017. 3. 4. 충북 옥천군 안남면 배바위 잔디광장.
4. “세상의 중심 民의 중심 작고 아름다운 안남”
위를 보았습니다. 상량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상의 중심 民의 중심 작고 아름다운 안남” 거창합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상량 옆에 써놓은 ‘축원’을 읽었습니다. 좀 길지만 모두 인용하겠습니다. 축원의 제목은 <세상의 중심 民의 중심 작고 아름다운 안남>이라고 제 나름대로 정했습니다.
“천지사방 각집 각성/ 열두마을 안남주민/ 정한 음식 모두어서/ 천신님께 드리오니/ 흡족히 드시옵고/ 소원발원 들으소서/ 한반도의 옥천고을/ 곱고 순한 안남주민/ 남녀노소 하나 되어/ 온갖 정성 다하여서/ 천지신명께 드리오니/ 강응강신 하옵소서
백두천지 정기 받아/ 만주벌판 휘달리던/ 기마민족 힘찬 기상/ 금강산에 뻣쳐 있고/ 일만이천 봉우리에/ 가득담긴 겨레 혼이/ 山태극 水태극/ 산과물이 어우러진/ 배산임수 명당터에/ 우르르르 떨어지고/ 그 정기가 솟구쳐서/등주봉이 되었구나
어히여루 천신님/ 천지신명께 발원이요/ 둥실둥실 둥실봉/ 登舟峯의 기운으로/ 돈과 칼이 뒤엉켜진/ 자본세상 전쟁놀이/ 가진 자만 살찌우는/ 환란세상 물리치고/ 삼라만상 조화롭게/ 생명평화 불러내어/ 서로 모시고/ 서로 살리는/ 사람세상 이루소서
한라산에 흐드러진/ 유채꽃의 핏빛원혼/ 지리산 골짝마다/ 알알이 맺힌 설움/ 경상전라 너른 들판/ 삼남 땅이 품어 안고/ 척양척왜 부국안민/ 동학농민 횃불함성/ 황토현에 맺혔구나/ 녹두꽃이 되었구나/ 미륵세상 후천개벽/ 산 넘고 강을 건너/ 바위 틈틈이/ 모래 짬짬이/ 방방골골 휘휘 돌아/ 비단물길 금강 따라/ 연지동 蓮池洞에/ 모였구나/ 질기고 질긴 民의 생명/ 배바우 舟岩가 되었구나
열두마을 안남주민/ 맘 모으고 뜻을 모아/ 둥실둥실 배바우像/ 마을 상징물 만들었네/ 가로 십미터 세로 오미터/ 소나무 옆에 터를 잡고 /연꽃받침 둘러치고/ 안으로 들어서니/ 안남주민 역사마당/ 빠진 사람 하나 없이/ 손자국 사는 흔적/ 계단을 올라서니/ 육십갑자 열린 구멍/ 휘휘돌아 둘러보니/ 유구한 엉겁시간/ 한눈에 들어오네/ 열네 살의 당찬 소녀/ 등주봉을 마주보고/ 삿대에 힘을 주니/ 금강으로 배 떠가네/ 양과 음이 조화롭고/ 생명기운 가득찼네/ 바리데기 평화나비/ 후천개벽 희망일세
더 둘러보니 발원문도 있습니다.
“어히여루 천신님/ 천지신명께 발원이요/ 밥이 하늘이다/ 사람이 하늘이다/ 좁쌀 한 알에 / 우주를 담고/ 거룩한 생명 길러내고/ 대지를 갈아엎고/ 새 생명을 씨뿌리고/ 후천개벽 미륵세상/ 생명평화/ 사람세상/ 쳐들이고 모셔오게/ 굽어굽어 살피소서
어히여루 천신님/ 천지신명께 발원이요/ 객지나간 아들딸은/ 무탈하고 운수대통/ 아이들은 총명하고/ 어른들은 만수무강/ 자급자치 협동연대/ 순환공생 사회경제/ 소원성취 만사형통/ 만복수복 광명세계/ 점지점지 하옵소서
근심걱정 우환가환/ 모조리 쓸어다가/ 금강천리 푸름물에/ 우당탕탕/ 쳐박아서/ 잡귀잡신 소멸하고/ 우리네 소원/ 이뤄주소”
달리 제가 덧붙이거나 해석할 일이 없습니다. 발원문에 이번 시시콜콜한 이야기의 마중물이 된 구절인 “좁쌀 한 알에 우주를 담고”라고 했으니 축원문의 “세상의 중심 民의 중심 작고 아름다운 안남”이란 제목도 가능했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사공은 왜 “당찬 소녀”이며 또 왜 하필 “열네 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상량식은 2016년 7월 26일에 있었습니다. 다음에 들러 ‘당찬 소녀’와 ‘열네 살’ 비밀을 알아보겠습니다.
끝으로 어떤 일을 가늠해 보아 해낼 만한 능력인 깜냥, 제 깜냥 껏 판단하면 축원문에는 옥에 티가 있습니다. “한라산에 흐드러진 유채꽃의 핏빛원혼”이라는 구절에서 ‘유채꽃’이란 단어가 턱 걸립니다. 축원문은 일종의 시입니다. 시어는 은유가 대부분입니다. 축원문 작성자의 ‘큰 뜻’을 헤아리기는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채꽃은 노랗고 핏빛은 붉습니다. 이 부분이 자연스럽게 은유로 이어짐에 걸림돌이 됩니다. 나무도감의 설명대로라면 한라산에도 진달래과인 진달래나 철쭉, 산철쭉, 참꽃나무 등이 자라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한라산에 흐드러진 진달래꽃의 핏빛원혼”이 어떨까합니다. 물론 진달래꽃을 철쭉꽃이나 산철쭉꽃도 가능하겠지요. ‘참’세상을 축원하는 글이니 유채꽃보다는 참꽃나무꽃도 무방하겠지요. 물론 이는 순전히 저의 시시콜콜한 생각임에 불과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