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1:13-2:10절) 욥이 당한 시련
부모나 자식 혹은 부부사이에 물질적(物質的)인 여유가 있으면, 사랑의 표현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 확인되는 것은 돈이 많을 때보다는 가난할 때, 건강할 때 보다는 병 들었을 때입니다.
셰익스피어의<리어왕>에서 리어왕은 늙어서 세 딸에게 나라를 나누어 주려고 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늙은 왕은 세 딸 중에서 자기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딸에게 나라의 가장 좋은 부분을 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큰 딸에게 물어보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많이 하면서 거짓으로 사랑을 많이 표현합니다. 심지어 결혼한 남편보다는 아버지를 더 사랑한다고 해서 나라의 아주 좋은 땅을 큰 딸에게 주었습니다.
둘째 딸도 언니와 마찬가지로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자기는 언니보다 아버지를 더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주 큰 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지식한 셋째 딸은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언니들이 거짓말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 아버지를 그다지 많이 사랑하지 않으며, 오직 딸로서 의무를 다할 뿐이라고 대답해서 아버지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주려고 했던 나라도 언니들에게 모두 빼앗겨 버리고, 지참금 하나 없이 아버지에게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리어왕은 막상 나라를 두 딸들에게 물려주고 난후에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두 딸들의 사랑이 거짓말인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두 딸들은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않고, 그가 거느리기를 원하는 경호원들을 줄이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두 딸들의 사랑이 거짓말임을 깨닫고, 분노해서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리어왕은 미쳐서 왕궁을 뛰쳐나가 히드가 피어 있는 들판을 방황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잘 알게 될 때는 언제일까? 어떤 사람은 신학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많이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축복(祝福)을 통해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장 잘 알게 될 때는 우리가 고난(苦難)중에 있을 그때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신(神)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막연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고대(古代)인들에게 신(神)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존재였습니다. 즉 신(神)을 생각하면 막연히 두려워하고 공포심에 빠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것이 미신(迷信)과 점(占)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神)에 대하여 상당히 발전된 관념이 인과응보(因果應報)입니다.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하면 상당히 케케묵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고대(古代)에는 이 정도의 신앙만 가져도 얼마나 발전된 신앙인지 몰랐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의롭고 올바르게 살기만 한다면, 복(福)을 받고 잘 살게 된다는 것은 대단히 발전된 신앙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옵기에서 보는 것은 훨씬 발전된 형태의 신앙입니다. 즉 고난(苦難)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연단(鍊丹)되고, 훨씬 더 성숙된 신앙의 자리로 나가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욥기에 나타나고 있는 신앙이 얼마나 수준이 높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을 때는 고난(苦難)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그때입니다.
우리는 고난(苦難)중에서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신 것을 느낄 수 있고,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랑의 밀어(密語)로 속삭이시며, 어느 때는 내가 느낄 수 있도록 나를 만져주시고, 힘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편안한 10년의 기간보다는 고난의 1-2년 동안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고난 자체는 결코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막상 고난이 왔을 때, 좌절하거나 절망하기보다는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게 됩니다.
즉 “오늘은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은혜로 나를 놀라게 하실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I.욥의 고난의 성격
우리는 욥에게 일어난 끔찍한 비극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눈앞에 일어나는 사건 자체만 보는 것입니다. 만약 욥에게 일어났던 사건 자체만 본다면, 완전히 공포와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이 이 세상에서 아주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재난(災難)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모두 망(亡)하고, 욥만 살아나게 되었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 두려워 누가 마음 놓고 살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욥의 환란(患亂)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신앙을 테스트(test)하기 위해 사탄(詐誕)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욥의 시련(試鍊)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시험(試驗)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게 하셨다면, 결국 모든 것을 끝내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물론 욥의 고난(苦難)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처럼 쉽게 사탄(詐誕)의 충동에 넘어가시는지? 왜 하나님은 사탄(詐誕)이 욥을 불행하게 하도록 허락하시는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욥에게 시험(試驗)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재난(災難)이나, 시련(試鍊)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즉 모든 사고(事故)나 재난(災難)은 곧 하나님의 싸인(sign)이 있어야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난을 당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에 대해 설명(說明)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이겨 낼 순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놀라운 점은 닥친 어려움에 대해 신앙적 설명(說明)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설명(說明)할 수 있으면, 우리는 시련을 극복하게 됩니다.
또한 사탄(詐誕)은 단독적(單獨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해서 어려움에 빠트릴 순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사람들에게 죄(罪)를 짓도록 유도(誘導)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죄(罪)에 대하여 환상(幻像)을 가지게 만듭니다. 즉 죄(罪)를 아주 달콤하고,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어서 죄(罪)를 짓도록 충동(衝動)질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번 죄(罪)를 짓고 난후에 사탄(詐誕)은 인정사정없이 사람들의 코를 쇠사슬로 꿰어 멸망(滅亡)의 자리로 몰고 갑니다.
적어도 죄(罪)를 짓기 전에는 아주 달콤한 말로 죄를 짓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사탄(詐誕)은 죄 짓기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죄 짓게 할 순 없습니다.
죄(罪)짓는 사람들은 전부 자기가 좋아서 죄(罪)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魔鬼)를 원망(怨望)할 순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탄(詐誕)은 사람들을 서로 미워하게 합니다. 즉 오해(誤解)하게 하거나, 미워하게 해서 서로 공격해서 죄(罪)를 짓게 합니다.
사탄(詐誕)은 우리 안에 있는 분노(忿怒)나 의심(疑心)이나 미움의 감정을 충동(衝動)질해서 증폭(增幅)시킵니다. 그러면 죄(罪)를 참지 못하고, 공격해서 결국 상대방을 다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의심(疑心)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마귀(魔鬼)를 좋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詐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난(苦難)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반갑지 않은 불청객입니다.
즉 때로는 질병(疾病)이 닥쳐오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식구가 목숨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재산(財産)을 모두 날리는 바람에 알거지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련(試鍊)이 닥쳤을 경우,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자책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어려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놀랍게 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신앙이 어리고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교만(驕慢)과 거짓된 본성(本性)을 많이 치료받고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진흙을 이겨서 모앙을 만들고, 또 불에 넣어 굽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그릇들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영적(靈的)전쟁(戰爭)이 너무나도 치열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즉 재산(財産)을 잃고, 건강(健康)을 다치는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가장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마저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영적(靈的)전쟁(戰爭)에는 반드시 희생(犧牲)이 따르는 법입니다.
우리는 오직 이 세상에서 무조건 행복(幸福)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이 세상은 마귀(魔鬼)와의 전쟁(戰爭)이 아직도 있고, 신앙은 그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價値)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희생을 통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내 것이라고 욕심을 부렸던 모든 것들을 다시 내려놓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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