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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에서 사랑을 떠올리다
정윤규
얼마 전 딸과 함께 일본 오사카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우메다 공중정원’이었다. 스카이빌딩 41층에 위치한 야외 전망대에선 오사카 시내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눈앞에서 마주한 석양은 참으로 장엄했다. 하루를 사위어내는 경건한 의식. 노을이 번져가는 그림 같은 정경 앞에서, 온종일 관광지를 돌아다니느라 녹초가 된 몸과 마음이 절로 평온해졌다.
노을이 사라지자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돋아났다. 빛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오사카의 야경은 낮과는 또 다른 도시의 환상적인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곳은 꽃과 수목이 아니라 일몰과 야경을 테마로 한 매혹적인 공중정원이었다.
언젠가 책에서 ‘바빌론의 공중정원’에 대한 상상화를 보면서, 아득한 전설 같은 두 사람의 사랑에 한참을 끌렸던 적이 있다. 이름이 연상시키는 기대감 때문인지, 오사카에서 만난 공중정원은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고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신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를 건설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랑하는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조성한 인공 정원이다. 왕비가 살았던 메디아 왕국은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나라였다. 자신의 고향과는 달리 메마르고 척박한 바빌론에서 왕비는 깊은 향수병에 걸린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왕은 바빌론에 아내의 고향을 닮은 푸른 정원을 만들어 주기로 한다.
메마른 사막에 층층으로 거대한 단을 쌓아 흙을 붓고 종려나무를 심었다. 유프라테스강에서 물을 끌어와 수로를 만들고, 왕비의 고향에서 가져 온 200여종의 꽃과 나무를 심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정원을 선물해 주었다. 그 모습이 작은 산을 방불케 했는데 먼 곳에서 보면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당시 바빌론에는 ‘지구라트’같이 거대한 건축물도 많았다. 공중정원을 유독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규모의 웅장함도 있지만 정교한 건축물의 구조와, 강에서 물을 끌고 와 수로를 만든 뛰어난 기술력 때문이었다.
그 신비한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위대한 역사적 유적 이전에 한 여인을 향한 사내의 지극한 사랑을 떠올렸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사철 꽃이 지지 않는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하며 그들이 나누었을 따뜻한 눈길과 밀어에 대해 상상해 보기도 했다.
평일인데도 우메다 공중정원은 유명 관광지답게 인파가 가득하다. 주위를 돌아보니 대다수가 젊은 연인들이다. 서로 어깨를 감싸고, 얼굴을 맞대고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가장 반짝이는 청춘의 한 시절. 생의 환희가 넘쳐나는 표정들이다.
아래쪽 난간에는 사랑의 자물쇠가 빼곡하게 달려 있다. 사랑의 색은 그만큼 강렬한 것인가. 황금색, 붉은색 하트모양의 자물쇠가 불빛에 반짝거린다. 문득, 저 많은 자물쇠의 주인공들이 궁금해진다. 변치 않을 사랑의 약속을 담아 단단한 징표로 묶어두었지만, 얼마나 많은 연인들이 그 사랑을 풀지 않고 있을까?
투투데이라고 해서 만난 지 22일을 기념하고, 백일 기념식을 치를 만큼 호들갑을 떠는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법을 보면 안타깝다. 서로의 감정을 늘 확인해야 불안하지 않은 사랑의 조급증이 엿보여서다. 자신들이 바라보는 도시의 야경처럼 사랑은 늘 화려하고 빛나는 것만은 아닌데... 공중정원을 통해 아내의 아픔을 이해하고 사랑을 구했던 바빌론의 연인들처럼, 이곳을 찾은 많은 청춘들도 더 깊이, 더 오래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마침 한 커플이 자물쇠를 달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스물 초반의 어린 연인들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붉은 노을을 닮았다. 그 위로 나의 사랑도 겹쳐진다. 스무 살에 만나 7년의 연애 기간, 어느 새 스물여섯 딸과 함께 여행을 다닐 만큼 그와 함께 한 세월이 길어졌다. 볼이 붉은 저 연인들처럼 푸르게 빛나던 그 시절의 내가, 그가 그리워진다.
도시의 불빛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밤이 깊어갈수록 연인들의 밀어도 내밀해진다. 그들이 꿈꾸는 영원한 사랑의 약속이 오래 변치 않기를 빌어본다. 까마득한 세월 저 편 ‘바빌론의 공중정원’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그들처럼, ‘21세기의 공중정원’에서도 사랑은 여전히 뜨겁게 진행 중이다.
천년숲에 잠긴 슬픔
정윤규
저만치 사찰로 통하는 숲길이 보인다.
비가 막 그친 저물녘의 숲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산새라도 한 마리 울어주면 좋으련만 사방엔 지독한 정적뿐이다. 숲 위로 잔뜩 내려와 있는 먹구름이, 캄캄해진 내 마음 같다. 이제는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숲이 가까워올수록 명치끝이 아파온다. 오래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이 길을 오기가 힘이 들었다.
의성, 고운사(孤雲寺) 천년숲. 상상도 못할 긴 시간의 궤적을 품고 있는 이 곳, 어느 소나무 아래 친구의 아들이 잠들어 있다. 겨우 스물한 살. 붉게 한 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그 모진 길을 왜 그리 서둘렀을까.
요 며칠, TV에선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내내 가슴을 울렸다.
지진해일로 폭격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파괴된 인도네시아의 섬마을. 패러글라이딩 선수로 대회 준비를 하던 아들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참담한 현장으로 달려간다. 무너진 호텔 앞에서 아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그녀는 수없이 죽고 깨어났을 것이다. 유일한 혈육이라던 아들은 결국 주검이 되어 엄마 품으로 돌아왔다.
“ ..... 내가 정신을 잃으면 아들이 마지막 정리를 못할 것 같아서 끈을 꽉 잡고 있습니다.”
아들의 유해를 품에 꼭 안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던 어머니. 악몽 같은 시간을 견디면서도 끝까지 쓰러질 수 없었던 것은,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빈껍데기만 남은 피폐한 육신으로 아들의 마지막을 홀로 배웅해야 하는 그녀의 고통이 너무 애절해서, 그 위로 아프게 겹쳐지는 친구의 얼굴 때문에 나는 한동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비통한 어머니의 모습은 바로 친구의 가슴 아픈 이야기이기도 했으니까.
두 해 전 늦여름, 날벼락 같은 비보를 들었다. 영정이 안치된 고향의 사찰로 달려가는 내내 그 애의 환한 미소가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반듯한 성품에 명문대까지 입학하며 늘 부모의 기쁨이 되어 주었던 별빛 같은 아이. 불과 몇 달 전, 고향에 갔다가 상경하면서 마침 집에 내려와 있던 그 애와 동행길에 나누었던 얘기들이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데... 선한 눈매가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내게도 동갑나기 아들이 있어선지 남자애같지 않게 싹싹하고 곰살맞아 정이 많이 가던 아이였다.
입대를 앞두고 친구와 떠난 태국 여행길에 당한 사고였다. 빗길의 제방을 걷다 실족사한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허위허위 달려간 낯선 나라에서도 물이 깊어서 사흘만에야 아들을 찾았다니 친구가 겪었을 절망과 비탄을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늦은 밤, 문상객들도 다 돌아간 휑한 법당 안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아들의 영정을 바라보던 친구의 텅 빈 표정. 온몸의 혼이 다 빠져버린 해쓱한 얼굴이 그녀의 참혹한 고통을 말해주었다. 허깨비 같은 친구를 안고 나는 오열했지만, 눈물도 말라버린 그녀는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채 식지 않은 아들의 유해를 품에 안고 돌아오면서 친구는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평생을 뼛속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야 할 형벌 같은 긴 시간이...
차마 숲 속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휘어지고 뒤틀린 채로 천년 세월을 겪어 낸 노송에는 범상치 않은 힘이 느껴진다. 고작 100년을 살기 힘든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적멸의 시간. 천년숲에는 풍상과 고초를 묵묵히 견디어 오면서 쌓인 위엄과 기상이 서리어 있다. 유독, 이 곳 소나무 아래 아들을 데려다 놓은 것은 친구의 그런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지 않을까. 스무 해 남짓 짧은 삶을 살고 어미보다도 서둘러 떠나버린 자식에게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의 영생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나 어딘가 꼭 살아 있을’ 불가의 윤회를 어미는 진심으로 믿고 싶었을 거다.
어느 생에서라도 다시 태어나면 천년 세월을 관통하면서도 한결같이 굳건한 저 소나무처럼, 푸르고 푸른 삶을 마음껏 펼쳐보라는 어미의 애끓는 기도일 것이다.
바람아, 산새들아, 흘러가는 구름아. 이 곳에는 꽃처럼 젊은 영혼이 깃들어 있단다.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잠시 머물러 가만가만 이야기를 들어주렴. 먼
이국의 어느 생에서라도 혹시 그 아이를 만나거든 “나 잘 지내고 있어요.” 그 한마디 엄마에게 꽃잎 한 장 떨구듯 소식 전해주고 가렴.
어둠이 내리는 사찰의 툇마루에 앉아 오래도록 숲을 바라보았다. 내려오는 길, 하늘의 먹구름도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마스터 클래스
정윤규
오랜만에 연극 한 편을 보았다. 마리아 칼라스가 말년에 줄리아드 음대에서 열었던 ‘마스터 클래스’를 극화한 연극으로 그 제목도 <마스터 클래스>였다. 위대한 프리마돈나였던 마리아 칼라스의 이야기를 배우 윤석화가 40주년 기념으로 공연을 했다. 나는 세계의 무대를 주름잡은 한 성악가의 삶과 음악도 궁금했고, 40년 내공을 쌓은 배우의 열연도 기대가 되었다.
무대 위에는 달랑 피아노 한 대, 강의용 책상과 의자만 있다. 평생을 연극무대에 선 배우의 자신감이 보이는 무대였다. 그렇지 않다면 저 넓은 무대를 어떻게 혼자서 장악할 것인가.
2시간 가까운 공연의 반 이상을 독백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 방대한 대사를 어떻게 외웠는지 경탄스럽다. 마리아 칼라스의 삶에 동화된 배우의 열연이 돋보였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푸른 조명으로 처리된 마리아 칼라스의 회상 장면이었다. 인기의 정점에서 서 있던 마리아칼라스가 오직 사랑했던 한 사람, 오나시스에게 애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장면이었다. 오나시스에겐 그녀의 예술적인 재능과 음악이 아닌 자신을 돋보이게 할 그녀의 명성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에게 언제 라이벌이 있었던가요.”
라고 묻던 전설적인 디바. 라 스칼라 무대 위에선 누구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그녀도 사랑하는 한 남자 앞에선 비련의 여자일 뿐이었다.
배우 윤석화는 때로는 거칠고 독선적인 오나시스로, 때로는 비탄에 빠진 마리아 칼라스의 모습으로 분하며 격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니, 그녀는 무대 위에선 마리아 칼라스였다. 가장 최고의 연기란 스스로 연기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때가 아닌가. 배우가 환갑을 맞고 40주년 기념 공연으로 이 작품을 고른 것은, 인생과 예술에 대한 마리아 칼라스의 고뇌와 열정이 자신의 생각과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은퇴를 생각하던 절망의 시간에 다시 무대에 서야겠다는 용기를 준 작품이라니 배우의 삶이 그대로 투영돼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마스터 클래스’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을 말한다. 마리아 칼라스가 말년에 목소리가 나빠지면서 더 이상 무대에 서지 못하던 말년에 성악가들을 대상으로 열었던 수업의 일화는 유명하다.
연극 속에서도 프리마돈나의 명성을 듣고 수업을 받으러 온 세 명의 학생이 등장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하고 직설적 화법을 감추지 않는 스승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질책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학생을 보며, “제가 뭐라고 했나요? 있는 그대로를 말한 것뿐인데...”라고 마리아 칼라스는 독백한다. 그런 마리아 칼라스의 독설을 견디며 힘든 수업을 마친 성악가들은 목소리와 창법의 단점을 찾아내고 비로소 완벽한 아리아를 노래한다.
누구에게나 삶이란 무거운 명제이지만, 그녀의 치열하고 또 쓸쓸했던 인생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때는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관객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고, 불꽃같은 사랑을 했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목소리가 나빠져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참혹한 고통을 당했고, 사랑에도 배신당한 뒤 혼자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이런 저런 일로 나도 마음이 많이 지쳐 있을 때라 그런지 굴곡진 인생을 살다간 예술가의 이야기가 오래 여운이 남았다.
연극을 보면서 가끔은 인생에도 현인이 있어 마스터 클래스가 열리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인생의 정점에서 조금은 비껴 서 있는 두 여인이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또다시 생의 의미를 길어 올리듯이 내게도 그런 치열함과 열정이 또 한 번 필요한 시간이 요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부족해지는 지혜. 숱한 선택의 순간에서 언제나 따르는 후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늘 조급증에 시달렸던 나의 부박한 인내심. 생의 고비마다 현명하게 넘길 수 있는 혜안을 배울 수 있는 그런 마스터 클래스가 그립다.
정다운 추모
정윤규
눈길 닿는 곳마다 마법같은 풍광이 펼쳐진다. 알프스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투명한 호수는, 오월의 푸른 하늘과 숲을 그대로 담고 있다. 살구색, 민트색, 레몬색으로 칠해진 이국적인 건물. 발코니에 늘어진 연푸른 꽃장식과 하얀 창. 마을 가운데 있는 소박한 교회와 첨탑은, 백조가 유영하는 호숫가의 정취와 어우러져 신이 그려놓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저문 오후. 할슈타트 호수 마을은 소란하던 낮과는 달리 그제서야 평온하고 고요한 속내를 보여주었다. 호수 위로 반짝이던 햇살도 산자락 아래로 물러났다. 마을 골목을 걷다가 어느 집 앞에서 발을 멈춘다. 분홍빛 건물 외벽을 타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으며 올라간 신기한 나무가 자연의 벽화를 연상시킨다. 집마다 주인의 개성이 돋보인다. 창문가에 내어놓은 아기자기한 인형과 소품들은 집을 꾸미는 엄마와 딸의 다정한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레이스 커튼이 내려진 창문마다 하나 둘 불빛이 돋아난다. 할슈타트의 풍경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삶의 내음이 배어 있는 멋진 집들의 배경이 없었다면 이렇게 큰 감흥을 줄 수 있었을까.
젊은 날 여행길에선 아름다운 경치보다 오래된 문명이나 유적에 더 감탄했다. 지금은 자연이 주는 위대한 풍경과 사람한테 더 마음이 끌린다. 사랑하던 이와의 이별, 떠난다는 것의 두려움, 예기치 않은 생의 비애를 조금은 깨닫는 나이가 된 것이다.
언덕 위의 작은 성당에 오르자 앞마당에 있는 마을 묘지가 보인다. 제각각 한 평 남짓한 작은 묘에는 나무나 철로 만든 다양한 십자가가 작은 지붕을 이고 서 있다. 장미와 백일홍 푸른 식물로 가꾼 꽃밭 한쪽에는 빨간 초나 조그만 등을 올려놓았다. 묘지라기보다 꽃과 장식으로 빚은 멋진 정원이나 공원 같다. 고인을 기억하는 가족들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죽은 자들의 세상이라기엔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적막하지만 쓸쓸하지 않고, 슬프지만 따뜻한 공간이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회나 성당 마당에 있는 마을 묘지들을 여러 번 만났다. 고요한 안식이 주는 평온함 때문일까. 그 때마다 쉽게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리곤 했다. 인생의 순간순간 기도를 올리고 성가를 부르던 성당이나 교회 앞마당이 사후엔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된다. 마을을 걷다보면 늘 마주치는 공간. 문득 그리워져 달려가고 싶을 때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는 그 곳. 지상에 남은 이에게도 죽음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통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삶의 소중함과 엄정함을 깨달으며 생이 조금은 더 깊어지지 않을까.
반대편 묘역에 노부부가 올라와 등을 켠다. 작은 공간에 노랑과 보라색 팬지꽃이 싱싱하다. 노부부가 불을 밝힌 주황빛 등 하나가 사방에 따뜻한 온기를 풀어 놓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없지만 이렇게 등을 밝힐 때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한 듯 반가울 것이다. 따듯한 목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이 귓가를 울릴 것이다. 철마다 꽃을 가꾸는 아침이면 꽃내음이 사랑하는 이에게 닿기를 바라고, 밝힌 등불이 영혼의 외로움을 달래줄 거라 믿을 것이다. 참으로 따뜻하고 정다운 추모의 장면이다. 그들을 바라보며 두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일까. 노부인이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다.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그 곳이 떠오른다. 큰 도로를 벗어나 외길로 접어들어서도 15분 이상을 달려가야 하는 깊은 산 속.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남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장지를 둘러보았다. 가는 곳마다 머리를 흔드시던 어머니가 어렵게 마음을 정하신 곳은 사찰에서 운영하는 작은 공원 묘지였다.
“ 아침마다 예불도 올리고 독경 소리도 들리면 아버지가 덜 적적할 게다.”
아버지는 말수가 없던 분이셨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큰 웃음소리, 노래 한자락, 농담 한 마디를 들은 적이 없다. 어린 나이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였는지 아버지는 늘 외로워 보였다. 그런 당신이 저 세상에서라도 쓸쓸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었을까...
아버지는 서른셋 당시로선 늦은 나이에 본 첫딸을 무척 귀여워했다. 서울에서 출산한 어머니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그 때만 해도 10시간 가까운 고된 여정이었다. 긴 시간을 한순간도 품에서 놓지 않고, 딸을 보며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고3 때는 늦은 야간 자율 수업을 마치고 올 때마다 어두운 골목 입구를 지켜 주셨다.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살이가 길어졌을 때 TV에서 비슷한 사람만 보면 “우리 딸 같네.” 하며 나를 그리워 했다던 아버지. 자라면서 속정 깊은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은퇴 이후에도 건강한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가 여든이 넘으면서 급격하게 무너져 내렸다. 비틀거리던 걸음걸이가 불안정하다 싶었는데 거리에서 쓰러지는 일들이 잦아졌다. 치매 증세도 깊어졌다. 요양병원에 계신 일 년여 동안 뼈만 앙상해지는 아버지를 뵈러 가는 일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평생 아버지 손을 제일 많이 잡아본 시간이었다. 아버지 얼굴을 애기처럼 쓰다듬어 본 적도 그 때였다.
부산 시댁에 일이 있어 내려간 날 새벽에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별다른 기미를 보이지 않아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 몰랐다. 정작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했다. 그 것이 나를 오래도록 아프게 했다. 불현듯 아버지가 그리워질 때, 꽃 한 다발 들고 불쑥 찾아가보고 싶지만 번번이 마음만 먹고 만다. 운전에 서툰 내가 쉽게 찾아갈 길이 아니어서다. 기껏해야 일 년에 서너 번 아버지를 만나고 온다. 할슈타트의 성당 마당에서 정겨운 추모의 모습을 보고 그토록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이런 저런 상념 때문이었다.
광활한 호수 위에도 사르륵 어두움이 밀려든다. 생의 혼미함을 벗고 영원한 안식을 찾아든 장소가 이렇게 다정할 수 있다면, 지상을 떠나야 하는 삶의 마지막 시간도 덜 고독하고 두렵지 않을까. 적막한 산 속에서 외롭게 계실 아버지가 떠올라 언덕을 내려오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다본다. 십자가 아래 환히 피어 있는 노란 장미 한 송이가, 그 곳에 잠들어 있는 그의 삶의 어느 찬란한 순간처럼 느껴지는 봄밤이다.
겨울이 있어 빛나는 봄을 만든다
정윤규
초록이 세상을 점령했다. 꽃불처럼 환하던 벚꽃은 봄비에 서둘러 떠나고, 어느새 조팝꽃과 라일락이 사방에 향기를 풀어놓았다. 마른 가지에 휘도는 푸른 수액의 노래, 춤추는 꽃들의 향연, 언 땅을 밀어내고 돋아나는 어린 싹들의 재잘거림이 반갑다. 바이러스에 유폐되어 일상을 도둑맞은 채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올봄은 더욱 애틋하고, 더욱 눈부시다.
얼마 전 ‘싱어게인(sing again)’이란 가요 경연 프로그램을 흥미 있게 보았다. 제목이 이야기하듯 ‘싱어게인’에는 오랜 무명 생활을 했거나, 노래는 알지만 정작 얼굴은 몰랐던 비운의 가수, 한때는 유명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가수들이 나와 치열한 경합을 펼쳤다.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은 이름 대신 11호, 20호, 63호 등 숫자로만 불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경선에서 떨어질 때야 비로소 자신의 본명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런 시도가 오히려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더 부각시켰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사연이 많았다. 실력 있는 무명의 뮤지션들이 많았지만, 특히 30호 가수에게 눈길이 갔다. 그는 십여 년 동안 솔로와 인디밴드로 활동했던 무명의 가수로 서른셋 청년이었다.
“저는 깜냥을 알아서 스타가 될 생각은 이미 버렸구요 ... 단지 제 음악을 들려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라던 그의 말이 진솔해보였다. 파격적인 선곡과 자신만의 독특한 재해석으로 다양한 곡을 변주하며, 우승은 상상도 못했다던 그는 예상과 달리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자신의 우승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듀엣 미션을 받은 어린 후배만은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정 많은 사람이었다. 무대 밖에서 여전히 이름 없는 72호로 살아갈 많은 음악인을 기억해 달라며 그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소외된 자들을 잊지 않는 그의 마음이 아름다웠다.
누구나 힘든 시절을 지나고 있지만, 요즘 20, 30대 청년들은 어느 때보다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고민을 나눌 사람도 없이 홀로 괴로워하다 고독사 하는 경우가 한 해 100여명에 이른다고 하니 너무 참담하다. 자영업이 무너지면서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취업은 전쟁이 되었다. 스물 후반의 아들을 두고 있는 나도 그들의 불안과 고민이 어느 때보다 깊다는 걸 안다.
30호 가수에서 이제 ‘이승윤’이란 이름을 찾은 그도 오랜 시간 ‘방구석 음악인’으로 외롭고 힘든 시기를 보냈다. 매달 내야 할 방세를 걱정하며, 비슷한 고뇌와 좌절을 겪었을 것이다. 그가 반짝 스타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담은 노래로 어려운 시기를 힘겹게 건너가고 있는 많은 청년들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 ‘윤며들다’란 신조어가 유행이다. ‘윤여정에게 스며들다’라는 이 말로 화제를 몰고 다니는 주인공은 배우 윤여정씨다. 영화 <미나리>에서 개성 있는 할머니 순자 역으로 한국인 최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고, 이미 30여 개의 상을 휩쓴 쾌거를 이루었다. 일흔넷의 나이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배우였지만 요즘 그녀는 누구보다 빛이 난다. 어디선가 읽은 ‘별의 순간’을 잡았다는 표현이 실감날 만큼.
그녀가 비호감의 대상에서 세계 무대의 찬사를 받기까지 걸어온 과정이 어찌 순탄하기만 했을까.
“내가 원치 않는 경험에서도 얻는 것이 있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젊은 날의 애환과 시련이 없었다면 오늘의 그녀도 없었을지 모른다.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꾸밈없는 소탈함,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와 배려, 젊은이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은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그녀는 나이 든 체하지 않는다. 재치 있고 유쾌하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큰 미덕은 멈추지 않는 도전이다. 국내에서도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오던 그녀였다. 그러나 낯선 타국, 40도가 넘는 뜨거운 열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독립 영화에 출연하는 건 노배우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게다. 나이와 명성에 안주하며 매너리즘에 빠져 산다면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며, 그녀는 분연히 떠났다. 오늘 그녀가 받는 화려한 상찬은, 변화와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의 용기가 얻어낸 귀한 선물이다.
두 사람이 지금 인생의 봄날을 누리는 것은 춥고 길었던 겨울이 있었기 때문이다. 30호 가수 이승윤은 자신의 말처럼 호(好)보다는 불호(不好)에 가까운 경계적인 음악 때문에 오랜 시간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색을 잃지 않았고, 결국 스스로 새로운 장르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음악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지독한 외로움과, 밥을 벌어야 하는 초조와 절망의 시간이 그를 단단하게 여물게 했을 것이다, 남의 아픔도 돌아볼 줄 아는 성숙함을 키웠을 것이다.
위트 있는 수상소감으로 연일 화제가 되는 윤여정씨도, 결국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얻은 새로운 언어와, 실패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이 자양분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의 영광을 누리는 게 아닐까.
일흔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오늘보다 더 값진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녀처럼, 나도 멋지게 늙어가면 좋겠다. 오래 익고 숙성되어 향기 짙은 사람도 좋지만, 나이를 훈장 삼아 가르치려 들지 않고, 삶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유쾌한 에너지로 주위를 밝힐 수 있는 그런 사람.
인생의 봄이 어찌 젊은 시절에만 찾아오겠는가. 내 삶에도 내가 모른 채 봄날은 이미 왔다가 갔을 테지만, 아직은 봄의 끝자락 즈음이라 여기며 살고 싶다. 창 안으로 흘러든 봄 햇살이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정 윤규
경북 안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2013년 <계간 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