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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갑자기 병사하자 로마 원로원은 기병대장인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군사적 재능이 출중한 인물로 기병 예비대를 더욱 강화시켜 사산 왕조 페르시아식 중장기병과 팔미라 제국식 궁기병을 도입하였다.그리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이 국경으로 넘어오자 이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약탈 후 뒤돌아가면서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총반격을 가하는 전술로 대승을 거뒀다. 이제 로마 제국의 방어전술은 국경에서 게르만족을 격퇴하는 것이 아니라 게르만족이 공격해오면 최대한 안쪽으로 끌어들인 후
해당 속주가 개별적으로 방어하는 동안 로마 황제는 기병 예비대를 이끌고 게르만족이 후퇴하는 길목을 차단하여 포위섬멸하는 종심방어전술로 변경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게르만족을 격퇴시킨 후 동쪽의 팔미라 제국을 두번째 목표로 삼았다. 팔미라 제국은 사실상 통치하던 제노비아는 뛰어난 미인이자 남성을 능가하는 여걸로서 로마 제국의 내부 혼란을 틈타 단기간에 아나톨리아반도와 이집트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AD 271년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원정을 시작하자 아나톨리아반도 발칸반도를 연결하는 비잔티움을 함락당하였고,
이어서 시리아의 에메사 전투에서도 패배한 채 제노비아의 아들이자 팔미라 제국의 통치자인 와발라트가 살해당하였다. 아나톨리아반도와 이집트 속주 로마 제국으로 다시 전향했고 제노비아가 낙타를 타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도망치려다 붙잡히고 말았다. 제노비아는 로마로 후송되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다시 반란을 일으킨 팔미라 제국을 진압하고 철저히 약탈하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하여 팔미라 제국은 AD 273년 멸망하여 다시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제노비아는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벌일 때 끌려다니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여인이었기 때문에 처형만은 면하여 로마 근교의 티볼리에서 여생을 보냈다. 팔미라 제국이 멸망하자 다음 목표인 갈리아 제국이었다. AD 274년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으로 쳐들어갔고 샬롱전투를 벌이게 되자 갈리아 제국의 테트리쿠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협상을 벌여 갈리아 제국을 넘가는 대신에 신병을 보장받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까지 통합하여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재통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테트리쿠스는 당초 약속대로 루키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위 후 단기간에 게르만족을 누르고 분열된 로마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등 뛰어난 업적을 남기면서 스스로 '레시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세계 재건자)라고 부르게 하였다. 또한 게르만족이 로마 국경 안쪽까지 침범에 대비하기 위하여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쌓았으며 자신이 '미트라교'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미트라 신전'을 세웠다. 이렇게 내정까지 정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마지막으로 로마 제국 황제가 포로로 잡혀있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였다.
AD 275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을 떠났으나 어이없게도 갑자기 암살당하고 말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사상 초유의 사건 이후 벌어진 혼란과 갈리에누스 암살로 벌어진 국가적 위기를 모두 극복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잔혹한 단점으로 측근 에로스의 농간으로 암살됐다. 로마 제국은 무려 5개월 간이나 황제 자리가 비어 공석이 된 끝에 75세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타키투스가 황제로 선택되었다.. 타키투스는 경험이 풍부한 원로원으로 군부와 소통이 가능한 원로였다.
따라서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아무도 황제 자리를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황제로 추대됐다. 타키투스는 이듬해 시리아로 향했지만 도중에 죽는다. 타키투스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타키투스의 이복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플로리아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 그러나 로마 군단은 이런 결정에 거부하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를 로마 황제로 추대하였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 생전부터 당시 황제였던 아우렐리아누스와 어깨를 나란히할 정도로 실력있는 장군이었다. 그는 넓은 제국 안에서 모든 적과 싸워 승리한 명장이었고
아우렐리아누스가 팔미라 제국을 멸망시킨 뒤 동방일대 치안 안정과 행정 재건 책임을 위해 동방 속주 통치권을 받은 상태였다.
단독 황제가 된 프로부스는 갈리아와 벨기카를 유린한 프랑크족을 격퇴해야만 했고 서방 일대를 시작으로 도나우강과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일대까지 돌아다니며 외적을 격파해야만 했다. 이때 프로부스는 민생 안정과 경제 재건을 위해 퇴역병과 현역병사들을 공사 현장에 투입시키고 밭을 일구게 했다. 또 그는 포로로 잡힌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등을 로마군에 징집하거나 그들을 황무지에 살게 하면서 로마인들의 세금 부담을 줄인다.
따라서 원로원과 로마 민중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로마 제국은 안정을 뒤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모든 공사 현장에 일부 투입된 병사들에게 불만이었고 페르시아 원정길 도중 고향인 시르미움 근교의 늪지대 매립공사 감독 도중 병사들이 일으킨 폭동에 암살되고 만다. 훌륭한 황제 프로부스가 어이없게 암살된 직 후 정신을 차린 로마군 병사들은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근위대장 카루스는 암살범들을 모두 사형에 처한다. 로마 복귀와 페르시아 원정 지속 여부가 논의 되는 와중 로마군은 시리미움에서 원로원 의원이자 근위대장인 카루스를 후임 황제로 추대된다.
이때 카루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하기로 하였고 자신의 즉위 사실을 원로원에게 일방 통보한다. 도나우강을 넘어온 게르만족을 격퇴한 뒤 AD 283년부터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했다. 이 원정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티그리스강의 크테시폰 마저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갑자기 벼락에 맞아 즉사한다. 공동 황제이자 카루스의 둘째 아들인 누메리아누스가 원정군을 수습하여 귀환하는 도중에 AD 284년 암살되었다. 이제 남은 카루스의 장남인 카리누스가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었지만
동방의 로마 군단은 카리누스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디오클레스를 다음 황제로 추대하였다. 황제로 추대된 디오클레스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식인 디오클레티아누스로 바꾸고 카리누스와 대결을 벌이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카리누스 역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간의 내전이 불가피해졌다. 카리누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장교가 카라누스를 암살해 버리는 바람에 내전은 싱겁게 끝났다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자 전제 군주정과 사두정치를 도입하여 로마 군단에 의해 황제가 좌지우지했던 군인 황제의 혼란을 비로소 종식시키게 된다.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디아클레티아누스는 AD 3세기 내내 지속된 로마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작업에 나선다. 우선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공화정 시대의 잔재들을 일소하고 황제 자리를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와 비슷한 형태로 바꾸웠다. 명칭부터 도미누스(Dominus,지배자)라고 변경하고 페르시아식 궁중예법을 도입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였다. 이제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만들어 낸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 아닌 본격적인 '전제군주정'(Dominatus, 도미나투스)이 시작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형식상 남아있던 로마 원로원의 권한을 모두 박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민회의 권한도 박탈되어 황제의 칙령은 시민회의 승인도 받지 않아도 곧바로 법률적인 효력을 가지게 되엇고 이를 보좌하기 위한 관료 조직도 더 세분화 되고 더 늘어나는 대신에 집정관을 비롯한 모든 관료를 시민회의 승인없어도 황제가 임명할 수 있도록 제도화 했다. 로마 원로원의 권한인 속주 총독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도 박탈하고 대신 황제가 직접 총독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속주 총독의 권한이 막강하여 반란의 온상이 돼버린 폐단을 없애기 위해 그 권한을 축소시켰다.
또한 민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민정은 전문 관료에게 맡기고 대신에 몇개의 속주를 묶어서 '관구'로 신설하고 이를 담당할 비카리우스(Vicarius, 대리인) 이라는 민정 지방관을 두었다. 군사 조직도 개편하여 몇개의 군단을 지휘하는 군사령관의 호칭이었던 '둑스'(Dux)'를 하향 조정하여 각 속주별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의 호칭으로 변경하였다. 다만 둑스를 총괄하는 코메스 둑스(Comes Dux)를 두었는데 최선임 둑스에 대한 호칭이다. 또한 로마 군단을 중앙 예비군인 코미타 텐세스(Comitatenses)와 국경 주둔병인 리미타네이(Limitanei)로 구분하여 충분한 예비 병력을 확보하였다.
또한 황제의 근위대장은 비카리우스와 코메스둑스의 상위 직위로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여 오늘날의 총리와 같이 그 성격이 변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관료와 군사령관의 숫자가 증가하고 군대도 증강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세제개편도 단행하여 크게 농경지에 부과하는 토지세와 사람에게 부과하는 인두세로 구분하고 과세를 위한 평가는 5년 단위로 이루어 지도록 하였다. 모든 세금은 실질적인 소득과 무관하게 부과하였고 중앙정부가 총괄하여 징수한 덕분으로 재정지출의 안정화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3세기의 위기 빠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체제를 회복시켰다. 제국의 방위를 위하여 사두정치체제를 창안하고 여러가지 개혁으로 제국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86년 4월1일 막시미아누스를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키고 공동으로 제국을 통치한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년에 걸쳐 도나우강 방위선을 정비하고 다시 동방으로 가 288년 페르시아 국왕 바흐람 2세로부터 메소포타미아 지방 절반을 양도받고 아르메니아 왕국에도 친 로마파 티라다테스 2세를 즉위시켰다.
290년 동방으로 이동해 시리아 지방에 출몰한 사라센 도적들을 토벌하고 291년 이집트에서 나인강 상류를 습격해 오던 원주민들을 진압했고 292년에 다시 도나우 지방으로 돌아와 사르마티아족을 격퇴시켰다. 이른바 제 3세기의 위기 동안 20명이 넘는 황제가 교체되었고 제국의 통치권은 굉장히 불안했다. 하지만 이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 외부의 적을 격퇴하고 방위선을 강화함으로써 국내의 권력을 강화해 통치권을 확립했다. 293년 5월1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른바 사두정치체제 그것은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두 명의 정제(Augustus)가 맡고 각각의 정제는 부제(Caesar)를 하나씩 두어 방위분담을 하여 통치하는 방식이다. 제국 동방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제로, 부제 갈레리우스를 임명하고 제국 서방은 막시미아누스가 통치하면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부제로 정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제국 방위의 분담을 분산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두정치체제 아래에서도 각각의 황제의 위치가 모두 동동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세니모르"라고 부르면서 다른 황제들과 구별하였고 제국 전체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혼자 결정했다.
그러는사이 296년 페르시아의 니르세 1세가 대군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쳐들어가 아르메니아 왕국의 친로마파 국왕을 몰아냈다. 이에 갈레리우스가 나서 유프라테스강 근처에서 3차례에 걸친 싸움을 벌이다 큰 소득을 얻지 못한 채 패배했다. 하지만 297년 다시 반격해 도나우 방위선의 3개 군단과 고트족 기병대까지 모아 2만5천명의 정예벙으로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니르세 1세의 첩과 자식들까지 포로로 잡았다. 이후 페르시아와 휴전을 맺으면서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완전히 차지하고 동방에서의 안전을 확보했다.
그는 내정 개혁에 적극적이었다. 로마 원로원의 입법 기능를 상실시켰고 집정관을 자신이 직접 임명하도록 하고 법안을 원로원 의결이 아닌 황제의 칙령으로 바꾸면서 이를 보좌할 일종의 전문 관료제도를 도입했다. 이로써 행정업무는 전문화 되고 문관과 무관의 분리는 더욱 심해졌고 관료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황제가 4명으로 늘어나 로마 군단 병력도 증강시켰다. 이러한 개혁은 필연적으로 재정의 확대를 수반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금을 신설하여 이를 충당했고 본국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축통화인 데나리우스 은화를 폐지하고 새로운 은화와 동화를 발행했으나 제국에 만연해 있던 인플레이션은 막을 수 없어 로마 경제는 위축되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가격통제제도로 보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303년 2월 그는 기독교 탄압을 위한 칙명을 발표하고 기독교 교회의 성물 성전을 파괴하고 기독교 모임을 불허한다고 공표했다. 제국 동방과 소아시아에서 기독교인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사제들과 주교를 체포하여 감옥에 넣고 그들이 로마 신의 제의에 참석하면 풀어주었다. 이러한 기독교 박해는 대략 309년까지 지속 되었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완전히 끝났다. 305년 5월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각각 돌연 은퇴 선언을 한다. 후임으로는 부제였던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의 정제로 승격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세베루스가 부제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제 2차 사두정치가 시작됐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현재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에 거대한 황궁을 짓고 그곳으로 은퇴하였다.
은퇴 후 고립된 황궁에서 조용히 살면서 채소를 키우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313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밀라노 칙령이 발표됨에 따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실시한 기독교 정책도 폐기 되었다.